역사용어 바로쓰기
박명림, 서중석 외 지음 / 역사비평사 / 200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가 어떤 일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단어는 결코 아무런 의미 없이 사용되는 것이 아니다. 그 일을 바라보는 관찰자의 시각을 그가 사용하는 단어가 단적으로 드러내 주기 때문이다. 특히나 역사적인 사건을 가리키는 단어의 경우, 역사를 바라보는 관찰자의 시각은 물론 역사를 기억하고 재구성하려는 의지까지도 함께 내포한다. 따라서 올바른 역사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역사를 올바르게 파악하고, 그 역사가 영향을 미치는 현재에 바른 판단을 내리기 위해 필수적인 선결과제가 된다. 이런 의미를 가진 '역사용어 바로쓰기'를 위해 각 분야의 역사학자가 글을 쓰고 그 글이 한권의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는 것은 굉장히 반가운 일이다. 물론 현재 쓰이고 있는 역사용어 중에 극히 일부분만을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은 아쉬운 일이지만, 이 책을 시작으로 역사용어에 대한 전반적인 비판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

역사용어를 바로 쓴다는 것은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지만, 역사용어를 사용하는 학문의 정확성을 높힌다는데 일차적인 의의를 지닌다. 학문을 어떤 것에 대해서 개념을 잡고, 그러한 개념을 바탕으로 논리적으로 사유를 전개하는 것으로 파악한다면, 용어를 바로 쓰는 것은 학문의 가장 기초적인 작업이 될 수밖에 없다. 민족문학, 민족주의 문학이라는 거의 비슷해 보이는 개념의 차이를 자세하게 설명한 하정일의 논문, '순수문학'이라는 순수해 보이는 단어의 숨은 뜻을 파헤친 한수영의 글을 이러한 목적을 달성한다. 그들의 글을 통해 학문적으로 자주 쓰이는 용어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고, 그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어떠한 글을 쓰거나 읽을 때 더욱 정확한 용어 사용이 가능할 것이다.

특정한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이미 그 용어를 사용하고자 하는 사람의 이해관계를 받아들인 것이다. '광주 민주화 운동'이라는 단어는 광주에서 일어난 민주화 운동의 성과를 긍정적으로 파악하려는 사람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진 결과이다. '광주 민주화 운동'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폭동'으로 불려졌다. 그렇다면 사실 같은 사건을 가리키는 다른 단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정치적인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다. '친일'이라는 단어와 '협력'이라는 단어를 설명하고 개인적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친일'보다 제국주의라는 구조적인 문제를 파악하는 '협력'을 사용하자고 주장하는 이기훈의 글은 단순히 역사용어를 다시 쓰자는 학문적인 주장이 아니라 '친일파'의 문제가 정치적 이슈가 되는 시점에 '친일파'의 정의를 다시 생각해보자는 정치적인 주장을 담은 글로 읽힌다. 해방 공간의 대립문제가 현재까지 첨예한 정치적 이슈가 되는 상황 하에 이 시대의 문제를 다룬 글도 필연적으로 정치적인 의미를 지닌다. 반탁을 했던 우익과 찬탁을 했던 좌익이라는 도식을 허구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박태균의 글은 좌우파의 첨예한 대립을 다시 보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6.25'라는 단어를 버리고 '한국전쟁'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것을 주장하는 박명림의 글은 '한국전쟁'에 대한 전반적인 시각을 교정할 것을 주문한다. 전쟁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갖는다는 것은 비단 역사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의 한반도 평화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그의 글은 한반도 평화를 기원하는 가장 적극적인 정치적 의미를 가진다. '자유민주주의'라는 단어의 역사와 현재 왜곡되어 사용되고 있는 실상을 논한 임대식의 글은 직접적으로 '자유민주주의'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현재의 극우세력들에게 비판을 가한다.

역사를 가리키는 단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강제로라도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현재 사용되고 있는 역사용어는 역사를 기억하는 사회의 시각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위안부', '정신대', '공창', '성노예'라는 단어의 사용을 비교 분석한 강정숙의 글을 '위안부'문제를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시각을 보여준다. 외국 국가명의 사용을 분석한 김희교의 글은 외국을 바라보는 우리의 이중적인 잣대를 비판한다.

역사용어를 올바르게 사용한다는 것의 의미를 몇 가지로 나누어 보았지만 사실 책이 담고 있는 모든 글은 학문적, 정치적, 사회적 의미 등을 함께 가지고 있다. 한수영의 글이 지적하고 있듯이 결코 '순수'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없다. 정치적 의미를 아무리 부인하더라도 역사의 영역에서 결코 비정치적인 것은 존재할 수 없으며, 완벽하게 정치적인 의미만을 갖는다고 말하더라도 그것이 엄밀한 학문적 검증을 받지 않는다면 허울뿐인 레토릭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또한 아무리 학문, 정치적으로 활발하게 사용된다고 하더라도 사회 구성원들에게 의미 있는 용어로 사용되지 않는다면 죽은 용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역사용어 바로쓰기>는 우리가 별생각 없이 사용하는 역사용어가 사실은 엄청나게 다양한 이해관계를 수반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누구나 한번쯤 읽어보아야 할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산그늘 2006-10-01 0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대로 읽으셨군요. 전 아직 띄엄띄엄 보고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