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모, 수첩, 화장지 그리고 <오빠가 돌아왔다>,
이것들을 보조가방에 넣고 서울로 향했다.

오후 4시 20분, 고속버스 안의 나는
그저 풀씨네 사람들과의 모임에 설레이고만 있었다.
맨 앞 오른쪽 좌석은 다리도 편이 뻣을 수 있고
시야도 확트여 갑갑하지도 않아 책을 읽기엔 제격이라서
내가 선호하는 자리이다.

<오빠는 돌아왔다>를 얼마나 읽었을까,
운전기사가 라디오를 켠다. 조금은 시끄러운, 귀에 거슬린다.
생김새에 걸맞게 다른 차들을 보고 욕을 해댄다.

어느 순간인가 나는,
<전유성, 최유라의 라디오시대>에 귀를 귀울이고 있다.
탄핵 가결......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개새끼들, 저지르고야 마는구나.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한다.
전화 인터뷰에 응한 어느 변호사가 최유라의 심정이 어떠냐는 질문에

" 주위에서 낮술하자고 난리네요."

고속도로 상황 알리는 여성 리포터의 첫 말,

" 기분도 심난한데 고속도로까지 막힙니다."

후후, 쓴웃음이 난다.
이후 여러 사람과의 인터뷰에서도 누구 하나 잘했다고 칭찬하는 이는 없다.
다 안다, 누구라도 안다, 귀가 멀고 눈이 멀고 마음이 멀어진 사람도 안다.
그 놈들은 왜 입만 열면 국민 운운하는 꼴을 비치는 걸까.
정말로 그 주둥이를 믿는 어리석은 국민이 있다고 믿는 걸까.
지금이 군부독재의 시절인 양 착각이라도 하는 걸까.
분명 이 시간, 현명한 국민들은 촛불 하나씩을 챙기고 저 마다의 아들과 딸의 손을 잡고
여의도로 광화문으로 향하고 있을 것을......

책이 읽히질 않는다.
왜이리 길은 막히는 걸까, 차선을 세어보니 5차선이나 된다.
다른 나라도 퇴근시간이면 저렇게 막힐까.
작년에 전국으로 출장을 다니면서 그런 생각을 했더랬다.
거미줄처럼 뚫고 뚫고 뚫어도 도대체 체증이 풀리지 않는 이유가 무얼까, 했었다.
서울에선 지리를 모르는터라 주로 전철을 이용하다가
부장의 옆좌석에 타고 오랜 시간을 서울을 배회한 적이 있었다.
이곳이 사람이 살 곳이란 말인가,
보도를 빼곡히 메운 사람들, 서로의 어깨를 툭툭 치며 사과의 말도 없는 사람들,
그렇게 살아 보지 못한 난 그저 아찔한 어지럼증을 느낄뿐.

보통때면 한시간이면 갈 길을 두 시간이나 걸려 도착했다.
발걸음이 무겁다.
바쁜 걸음들, 분주한 사람들.
전철 속에 나, 좀 앉고 싶건만 빈 자리를 찾을 수 없다.
한칸에 있는 사람 중 반은 휴대폰을 걸거나, 받거나, 문자를 보내거나 확인하거나 게임을 한다.
그래도 책을 읽는 사람들은 이뻐보인다.
TV에선 영화 관련 채널을 보여주고 있다.
일부러 그러는 것일까. 뉴스를 보고 싶은데......

전철은 땅 속을 달리다가 땅 위를 달리다가를 몇번 반복하고 있다.
스피커에선 10년 전에도 똑같던 여자가 역이름과 열리는 문의 방향을 말한다.
땅 위에서의 차창으론
밖으로 시끄런 음악이 새어나오는 이어폰을 낀 남자와
핸드폰으로 게임을 하는 두 남자가 있고,
그 너머로 한강이 보이고, 그 저편으로 산을 깍아 포개져 있는 집들이 서 있고,
그 풍경을 저녁노을을 만들고 있는 햇살이 비추인다.

이 하루는 이렇게 아무 일 없는 듯 저물고 있다.
입안에선 오랫토록 쓰지 않았던 무거운 욕설들이 맴돌고만 있다.

종로3가 6번출구,
지상으로 가는 길이 멀다.
책을 할인하는 좌판대를 지나고, 옷 파는 상점을 지나고,
또 수백명의 남자와 여자가 스친다.

18시 30분, 약속시간보다 30분이나 일찍 왔다.
먼저 온 사람은 없다.
이리저리 둘러본 후 몇 걸음을 걸어 구멍가게에서 500원짜리 생수 하나를 들고 나왔다.
6번출구의 호프집 앞에서 생수 뚜껑을 따려는데 열리질 않는다.
가로수에 처보기도 하고 볼펜으로 찔러봐도 소용이 없다.
왠지 더 목이 마르다. 젠장 포기해야 하는 건가.

사람들이 다 모이자, 예약해두었다는 생선집으로 향했다.
오두막처럼 생긴 곳에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다.
한평이나 될까, 그 방에 8명이 앉으니 옆 사람 무릎이 닿는다.
탄핵 얘기를 시작으로 여러 번의 술잔이 마추치고,
여러 번의 소주 주문과 깔려 있던 맛나게 구워진 고등어, 꽁치, 조기가 모두 발라진 후에야
다음 장소로의 이동에 동의한다.

맥주집 벽에 걸린 TV에선 특집뉴스가 쏟아진다.
고개를 ㄱ자로 젖히고 뛰는 가슴을 애써 진정하는 동안
사람들의 욕설이 여기저기서 터지고 있다.
긴 술자리가 될 듯한 예감.

온몸의 뼈와 살들이 뻐근한 상태로 눈을 뜬다.
싸구려 모텔의 냄새, 옆에는 홍화씨가 산송장처럼 누워있고 옷가지들이 널부러져 있다.
거울 속에서 꾕한 눈으로 기억을 더듬는다.

........

죽일 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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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3-14 08: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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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3-16 20:0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