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의 시간, 쥐의 시간
제44호
 
2004년 1월29일
 
  지난 세밑에 가벼운 책 한 권을 만났습니다.
  책명은 『천천히 읽기를 권함』(야마무라 오사무, 샨티刊)이었습니다.
  가볍지만 좋은 내용이 많이 담겨 있었습니다.
  대충 요약하자면, '책을 천천히 읽어라'입니다. 누가 뭐라하든, 그렇게 하면 행복해진다입니다. 말하자면, 속독파에 비해, 지독파(遲讀派)가 되자는 이야기지요.
  일본에는 문예평론가 후쿠다 가즈야(1960~ )라는 골 때리는 친구가 있는데, 이 친구는 『한달에 100권 읽고 300매 쓰는 나의 방법』이라는 책을 펴낸 모양입니다. 대표적인 속독파이지요. 은근히 이 속독파를 비난하면서 끝에 가서는 "그는 그대로 이해도 된다", 하고 있습니다. 병상에서도 후쿠다 가즈야가 그 약속을 지키느라 애쓰는 데 감동받은 듯합니다.
  하지만 오사무씨의 지론은 천천히 읽기입니다.
  "나한테는 그런 읽기 방식이야말로 '시간만 잡아먹는 일' 즉 시간낭비다. 단순한 낭비가 아니라 인생의 낭비이다. ..." - 오사무
  오사무씨는 책을 향락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에밀 파게의 『독서술』을 인용합니다.

  읽은 것을 배우기 위해서는 우선 아주 천천히 읽어야 한다. 그리고 다음으로도 아주 느릿느릿 읽어야 한다. ..책을 향락하기 위해서도, 스스로 배우기 위해서도 또 그것을 비평하기 위해서도 마찬가지로 천천히 읽어야 한다. ..-에밀 파게

  오사무씨가 인용하는 헨리 밀러의 말은 더 귀기울일 만합니다.

  억누르기 힘든 충동에 쫓겨 하나의 공짜 충고를 독자들에게 바친다. 이런 것이다.-될수록 많이가 아니라 될수록 적게 읽어라...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엄밀하게 자신의 행복에 득이 되는 것, 보람 있는 일만을 하는 기술을 배우는 일이다.-헨리 밀러

  생각해보라, 하고 오사무씨가 말하면서, "지금까지 책에서 얼마간의 감동을 느꼈을 때는, 그렇지 않아도 천천히 읽는 내가 더욱 천천히 읽고 있었을 때였다"고 합니다.
  코끼리의 시간과 생쥐의 시간은 좀 길지만, 한번 인용할 만한 가치가 있어 옮깁니다.

  예전에 NHK 교육 텔레비전의 프로그램에서 《코끼리의 시간, 쥐의 시간》을 쓴 생물학자 모토카와 다쓰오가 나와서 자신이 메밀국수를 먹는 장면을 촬영한 비디오를, 빨리 돌려 보여주기도 하고 천천히 돌려 보여주기도 하면서 동물들이 '살아가는 리듬'을 설명한 적이 있다.
  코끼리와 생쥐를 비교하면 심장 박동이건 혈액 순환 사이클이건 코끼리가 생쥐보다 열여덟 배나 긴 리듬으로 살고 있다. 그것을 설명하면서 생물학자 다쓰오는 메밀국수를 먹는 장면을 찍은 비디오테이프를 사용했다. 우선 19배 빨리 돌리기로 재생한 움직임이 코끼리가 본 생쥐의 움직임과 같다고 한다. 젓가락을 대자마자 메밀국수는 뱃속에 들어가 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다음으로 18배 천천히 재생해 본움직임이 생쥐가 본 코끼리의 움직임이라고 한다. 젓가락으로 메밀국수를 집은 채 거의 멈춰 있는 것 같다.

  살아가는 리듬이 다르면 세계관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다. 맞는 말이지요.
  책을 왜 많이 읽어야 하는가? 그런 법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도 맞는 말이지요.
  책(독서)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야 하는 게 많은 책을 읽는 일보다 중요하다는 이야기지요. 역시 맞는 말이지요.
  남독의 폐해, 신문잡지에만 충혈된 흐리멍텅한 눈... 은 우리가 원하는 바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영혼을 태울 정도로 절실하고 또 따끔따끔하기도 한 독서 자체의 기쁨, 그게 중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그딴 것은 없을지도 모릅니다. 행복의 예감이 있을 뿐이지요.

  미국에서 태어나 런던에서 살았다는 시인 스미스라는 이가 쓴 산문에 나오는 내용이 소개되기도 합니다.

  어느 날, 스미스는 의욕을 잃고 축 처진 기분으로 지하철을 타고 있었다. 인간의 생활에 주어져야 할 다양한 기쁨을 생각하고 그 안에서 위로를 찾아보았다. 술이라는 기쁨, 영광이라는 기쁨, 우정이라는 기쁨, 음식물이라는 기쁨, 그러나 어느 것 하나 관심을 기울일 만한 것으로 생각되지 않는다.(아래는 스미스의 말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 엘리베이터에 마지막 까지 남아서, 그것들에 비해 더 진부하지 않은 무엇 하나 제공해 줄 것 같지 않은 세계로 다시 올라갈 가치가 대체 있기나 한 것일까?
  그런데 돌연 나는 독서를 생각했다. 독서가 가져다주는 저 미묘하고 섬세한 행복을...그것으로 충분했다. 세월이 흘러도 둔해지지 않는 기쁨, 저 세련되고 벌받지 않는 악덕, 자기 중심적이고 청징한, 게다가 영속하는 저 도취가 있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풀꽃평화목소리 독자 여러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으시되, 누가 뭐라하건 혼자 천천히 즐기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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