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으로, 세상으로 날아가는 풀씨처럼
생태공동체 일구는 진안 능길마을 풀씨네
남신희 기자  

▲ 능길산골학교 운동장에 선 나무씨 불씨 홀씨 짚씨 올리브씨 피씨 사과씨 홍화씨 겨자씨
(사진 왼쪽 위로부터 시계방향으로).
ⓒ 전라도닷컴

“처음엔 ‘대학생들 왔다’고 생각한 마을 분들이 많았어요.”
농촌에서 지금 보기 귀한 것은 젊은 사람들이니만큼 ‘젊은 사람들=농활 온 대학생’으로 여긴 것일 수도 있겠고 ‘살러 온’ 사람들인데, 잠깐 ‘왔다 가는’ 사람들로 지레짐작한 것일 수도 있겠다.
진안군 동향면 능금리 능길마을에 새 식구 아홉 명이 늘었다.
자신들을 ‘마을에 온 아홉 난장이, 혹은 패거리’라고 말하는 풀씨네. 이곳에서 호적 이름자로 불리는 사람은 없다. 홍화씨 겨자씨 짚씨 피씨 올리브씨 사과씨 홀씨 불씨 나무씨 등등 모두 무엇인가를 싹틔울 ‘씨’로 산다. 씨들의 나이는 20대부터 40대까지.

어떤 인연으로 한데 뭉쳤을까. 당사자들은 “뭐, 악연이죠”라고 웃지만 같은 뜻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들은 그렇게 만나게 돼 있나 보다. (주)이장에서 함께 일했던 동료들이다. (주)이장은 생태마을가꾸기, 생태건축, 생태관광, 유기농산물유통, 지역축제나 테마마을 기획 등의 일을 하는 곳. 단순히 직장동료이기 이전에 ‘생태공동체 일구기’라는 공동의 지향성을 가지고 일했던 만큼 자연스레 자신들이 직접 겪고 살아 보는 ‘생태공동체’로 이어졌다.
홍화씨는 “공동체라 해서 거창하고 어렵게만 생각할 것은 아닌 것 같다. 들여다보면 우리 몸뚱어리도 하나의 공동체이지 않은가. 몸뚱어리가 각자 제 할 일 하며 서로를 도와 지탱하고 굴러가게 하듯 그런 공동체를 자연스럽게 회복해 가고자 한다”고 말한다.
먼저 내려온 사람은 불씨였다. 능길마을에 생태마을만들기 컨설팅을 하러 와서 석 달 정도를 살았다. “그 기간의 경험을 통해 능길마을에는 ‘사람들’이, 또 우리 아홉 명의 풀씨들에겐  뜻하는 삶을 담을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마을과 우리가 서로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9월초에 풀씨네는 능길마을에 이사왔다. 깊은 우물과 녹슨 가마솥, 흙벽 뒷간이 있고 뒷산이 바짝 붙어 있는 집이 당분간 풀씨네의 집이다. 혼자 허물어져 가던 이 빈집은 사람 온기와 손길이 보태져 이제 비로소 ‘집’답다. 그것도 식구수가 아홉이나 되는 집이다. 홀씨 말하길 ‘정말 삶의 터를 옮겨왔구나’하는 실감이 드는 순간은 “분명히 퇴근하고 귀가했는데, 아까 사무실에서 봤던 사람들이 내 집에서, 내 방에서 어슬렁거릴 때. 밥도 한 상에서 같이 먹고, 잠도 한 방에서 같이 잘 때”라고 말한다.
함께 하는 생활이라지만 공동의 규율 같은 것을 명시하거나 강제하지는 않는다.
“완고한 틀을 만들고 싶지는 않다. 이전에 2년 정도 몇 가구가 함께 귀농생활을 한 적이 있다. 그 공동생활을 통해 틀이 완고할수록 사람들이 마음 다치거나 어긋나는 경우도 많다는 걸 느꼈다. 틀은 만들어 강제하기보다 살아가면서 자연스레 체득될 것이다”는 게 홍화씨의 말이다.
저녁7시 하루반성과 앞으로 할 일을 점검하는 ‘마음나누기’ 시간 외에는 ‘좀더 자유롭게’ 서로를 놓아 두려는 이유이기도 하다. 저마다의 살아 있는 개성 그대로가 어우러지는 공동체. 굳이 틀이 있다면, 직장을 정리하고 이 곳 진안 농촌의 삶을 택하게 된 동기처럼 “몸으로 살자”는 것.
마을 사람들하고도 친해지고 싶지만, 조급하게 욕심내지 않는다. 살려고 내려온 만큼 무엇이든 억지로가 아니라 긴 호흡으로 일궈 내려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답은 ‘살다 보면’이다. “일년 열두 달 서로 ‘함께 겪는’ 일이 늘다 보면 마음도 그만큼 가까워져 있지 않겠는가.”

▲ 폐교된 능길초등학교에 새롭게 문을 연 '능길산골학교'.
아이들이 흙만지고 뛰놀며 자연을 체험할 수 있는 학교로 꾸려진다.
ⓒ 전라도닷컴
지금 풀씨네가 제일 먼저 하려는 일은 능길마을 대표 박천창씨 등과 함께 산골학교를 꾸리는 일이다. 35년의 역사를 뒤로하고 폐교된 능길초등학교가 그 터다. 11월1일 개교한  ‘능길산골학교’는 오는 12월부터 내년1월까지 다섯 차례 각 3박4일 일정으로 꾸려진다. 시골밥상 염색교실(황토) 전통교실(두부만들기, 짚꼬기, 새끼줄넘기, 연날리기, 썰매지치기 등) 풍물교실 무예교실 작문교실 탐구교실(동굴탐사, 별자리관찰) 등으로 꾸려진다. ‘산골’의 자연 속에서 뛰고 놀고 배우고 체험하는 생태학교인 것.
“우리는 놀이를 통해 크고 자연 속에서 컸는데 요즘 도시아이들에겐 ‘놀’ 기회가 없다. 지금의 도시교육 입시교육은 삶의 지평을 넓혀 주고 경험을 다채롭게 해 주는 것이 아니라 지평을 오히려 좁히고 시선을 한 곳으로 고정시킨다. 공부 외에 다른 일은 모두 ‘딴 짓’이 되는 상황이다. 아이들에게 이곳 생활이 마음그릇을 크게 하는 경험으로 이어졌으면 한다.”
“흙을 밟고 조물거리고 그냥 재미있게 놀다만 가도 아이들에겐 좋은 시간일 것”이라는 게 겨자씨의 말이다. 여름·겨울 방학동안의 캠프 말고도 평상시에도 도-농학교, 대안학교 교류 등을 해 나갈 계획이다.

세상과의 단절이나 고립이 아니라 ‘또 다른 관계맺음’ 혹은 ‘삶의 확장’. 풀씨네가 이곳에 들어온 이유이기도 하다.
“이 곳 자체가 우리들의 학교이기도 하다. 다시 걸음마를 배우듯 농사를 비롯 기본적 의식주를 스스로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살림’을 시작하는 학교인 것이다.”
농사만 지으려는 것은 아니다. 출판 디자인 웹 염색 마을계획 등등 각각의 전문 분야를 살려나갈 생각이다. ‘PC 전문가’여서도 ‘피씨’로 이름붙여진 피씨의 경우처럼 각각의 자질과 장점이 이 곳 생활에도 이어질 것이다.

“시골에 들어간다는 것은 흔히 ‘농사짓는다’와 동의어가 된다. 그러나 의사 목수 대장장이 할 것 없이 다양한 역할의 사람들이 있어야 한 마을이 제대로 굴러가듯이 여러 분야의 능력과 소질이 어우러질 때 온전한 지역공동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내년이면 할 일이 많다. 결혼한 풀씨들의 경우, 가족들도 이곳으로 내려오므로 우선 집을 지어야 한다. “서두르지는 않을 것이다. 욕심내지도 않을 것이다. 직접 우리 힘으로 짓는 것이니만큼 초막이나 원두막처럼 좀더 쉬운 것부터 시작해서 차근차근 해나갈 것이다.”
집이 집답게 본연의 의미를 찾기를 바라는 마음도 그 집짓기에 스며들 것이다.
“집은 평당 얼마짜리의 부동산이 아니라 사람의 삶이 담기는 그릇이다. 하지만 시장 위주의 사고방식은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하며 가치를 교란한다. 집이든 먹을거리든 우리 삶의 모든 것들이 본연의 가치를 찾을 수 있도록 살고 싶다”는 게 홍화씨의 말이다.
풀씨네라는 이름으로 제대로 된 먹을거리 하나 만들어 냈으면 하는 꿈도 갖고 있다.
사과씨는 농촌계획이란 전공을 이 터에서 펼쳐 내고 싶다고 말한다. “도시계획이란 말은 익숙해도 농촌계획은 낯설어 하는 사람들이 많다. 도시에만 계획이 있는 게 아니다. 지속가능하며 마을의 공동체성을 살리는 터로서의 농촌을 맘에 그리고 있다.”

마음 부풀 일도 많지만 그 한켠에 우린들 왜 먹고사는 문제며 미래에 대한 불안이 없겠는가고 말하는 풀씨네.
“과연 이 일, 생태공동체 마을모델 만들기가 남은 삶 동안 내가 사심 없이 아무 미련이나 후회 없이 헌신할 수 있는, 진정으로 진심으로 하고 싶은, 최고의 가치를 지닌 일인가. 이 일밖에 없는가. 심지어 남들에게, 세상에 잘난 체 할 수 있는, 더 폼 나는 일은 없는가를 자문할 때가 가장 힘든 때”라고 말하는 홀씨. 그럴 때마다, 잔머리로 생각하는 걸 멈추고, 다른 풀씨 동지들과 몸으로 노동하면서, 또는 아예 그냥 놀면서 정신차려 일어서곤 한단다. 이런 주문을 읊조리면서. “용기있는 지혜는 나쁜 것을 인정하지 않고, 악한 것을 통쾌히 분석하는 것이며, 어려운 것을 즐기는 것이며, 고통스러운 것을 감사히 생각하는 것이다.”
싹을 틔우기 위해 들판으로, 세상으로 날아가는 풀씨. 작은 산골 능길마을 풀씨네의 꿈도 이제 막 그렇게 세상을 향해 날아가고 있는 중이다.

기사출력  2003-11-03 11:04:16  
ⓒ 전라도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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