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화씨님께서 2003-09-17일에 작성하신 "2003. 9. 4. - 모처럼 맑다, 산수유나무 주변 풀 베 주기 작업, 바지에 온통 풀물 들다."이라는 제목의 글입니다.

며칠째 비가 나리시더니 오늘은 날이 맑다. 마을에서는 오래전에 심어 놓았던 산수유나무 근처의 풀을 베어 주기로 했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밀짚모자를 챙겼다. 주섬주섬 낫을 챙겨 숫돌에 가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장감을 끼고 밀짚모자를 쓰고 낫을 든 폼이 아직은 어색했지만 오랜만의 노동에 거는 기대감으로 기분이 좋다. 정기석 씨와 정기남 씨가 함께였다. 도로가에는 두어 차례 풀을 베어 제법 단정하지만 산 밑에 심은 것은 풀이 너무 웃자라 풀밭인지 산수유 밭인지 구분이 되질 않는다. 우선 다듬어야 할 장소로 차를 타고 이동했다. 박천창 씨는 군청에 들어 갈 일이 있다며 가면서 기남 씨의 동행을 원했다. 앞으로 군청에 들어 갈 일이 있다면 정기남 씨를 보내고 싶어서 일게다. 차가 떠나고 기석 씨와 둘이 풀을 베기 시작 했다. 오랜만에 휘두르는 낫질이 서툴렀지만 베어진 상처마다 풀 향기를 내 뿜는 싱그러운 풀잎에 묻혀 일을 한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다. 10분도 채 안되어서 이마에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눈썹을 타고 넘는 땀 때문에 얼굴을 흔들며 풀을 베어가기 시작했다.

반팔을 입고 온 탓을 해야 할지... 환삼덩굴이 팔뚝을 감고 돌았다. 덩굴이 만지고 지나간 자리마다 붉은 길이 생겼다. 얼마 되지 않아 팔뚝은 온통 채찍을 맞은 것처럼 호피 문양의 붉은 줄이 가득했다. 땀이 흐르자 풀에 벤 곳이 따끔거렸다. 오랫만의 낫질이 조금 익숙해질 무렵엔 온몸이 땀으로 흥건했다. 갈증이 밀려 왔다. “조금 쉬었다 합시다” 기석 씨를 불러 그늘을 찾았다. 있으리라던 수도는 있었지만 물이 나오지 않았다. 다행히 골을 이루는 물가에 샘이 하나 졸졸 흐르고 있었다. 바닥의 모래를 살살 거두고 입술을 대었다. 혀끝에 감기는 물맛이 달다. 이런 것이 시골에서 사는 맛이리라. 작은 물가에는 이미 기석 씨가 발을 벗고 앉아 있다. 원래 열이 많은 사람이라 이 더위와 노동을 감당하기가 쉽지 않을 듯 하다. 얼굴이 벌개져서 앉아 있는 모습이 조금 안쓰럽기 까지 하다.

땀을 식히고 다시 일을 시작했다. 그늘이 있는 곳을 골라 일을 시작했지만 여전히 땀이 많이 흘렀다. 모처럼 묵은 땀을 흘려 기분은 좋지만 팔목에 힘이 부치기 시작했다. 그래도 능길에서의 첫 일이라 대충 넘어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내 개인의 일이 아니라 우리 전체의 이미지를 만드는 일이기도 했다. 한사람의 노역이, 말씨가 전체의 이미지를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었다. 악착같이 낫질을 하다보니 한 구간의 일이 끝났다. 한숨 돌릴 겸 그늘을 다시 찾았다. 담배도 한대 물었다. 노동 후의 휴식이야말로 진정한 휴식이다. 담배 연기가 달콤하기까지 하다.

숨을 돌리고 시계를 보니 벌써 12시가 다 되었다. 돌을 주워서 구부러진 낫을 펴고 다른 연장을 챙겼다. 천천히 걸으면 점심시간을 맞출 수 있을 듯 하다. 학교로 돌아오는 길에 다리를 건너면서 개울을 내려다보았다. 물고기가 있는가를 확인하기 위해서이다. 뒷짐을 지고 내려다 본 개울에는 다행히도! 물고기가 보였다. 오늘 일을 끝내면 투망질이라도 해야겠다. 몸은 피곤 하지만 저녁에 동료들과 함께 천렵을 할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다. 천천히 도착한 학교에는 매미 소리만 그득하다.

점심을 먹고 잠시 세를 내놓은 집엘 갔다. 모두 다 어슬렁거리는 발걸음으로 학교 뒤쪽의 집을 방문했다. 시골집치고는 깨끗하다. 마당도 있고 방 두개와 주방이 갖추어진 집이다. 청소만 깨끗이 하면 당장이라도 들어가 살 수 있을 듯 하다. 추석 명정이 끝나면 일부인원이 들어와 살기로 결정을 하고 돌아 왔다.

오후 풀베기에는 지혜 씨가 낫을 들고 나섰다. 무슨 일이건 열심히 하려고 나서는 마음이 예쁘다. 함께 살아가기에 많은 연습을 한 사람인 듯 하다. 힘들테니 사무실에 있으라고 해도 굳이 나선다. 지혜 씨를 생각해서 쉬운 곳부터 일을 시작하기로 했다. 마을 건너편 논가에는 산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심어 놓은 산수유가 있었다. 낫질을 시작하려는데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논가에는 좁은 사육 틀에 덩치 큰 개 한 마리가 들어 있었다. 사냥개의 잡종쯤 되어 보이는 개 한 마리가 연신 목청을 높여대고 있다. 무슨 목적으로 그곳에 개를 놓아두었는지 알 수 없었다. 논을 지키거나 달리 목적이 없어 보이는 채로 산 밑에 개 한 마리를 그렇게 키우는 사람의 심사를 헤아리기가 어려웠다. 저 개가 얼마나 외로울까? 인적 없는 논가에서 독방 신세를 지고 있는 개의 처지가 안쓰럽다. 밥이나 제대로 가져다줄런지... 그곳에서 풀을 베는 내내 개가 짖었다. 편치 않은 마음을 달래가며 서둘러 그곳의 일을 마무리 했다.

쉬운 곳으로부터 어려운 곳으로 일을 거꾸로 치고 갔다. 지혜 씨도 부지런히 일을 했다. 일에 누를 끼치지 않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여름동안 민건협 사람들이 지어 놓은 원두막에서 땀을 식혔다. 이제는 마지막으로 어려운 구간만 남았다. 마지막 구간이라고 생각하니 힘이 났다. 하지만 잡목이 많고 경사진 땅에서 일을 하자니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반대편으로부터 일을 해오는 기석 씨의 얼굴이 보이고 낫질 하는 소리가 가까워질 무렵 박천창 씨와 기남 씨가 도착했다. 일을 거의 끝낸 것을 보고 기남 씨가 미안해하는 표정이다. 거의 다 끝났다고 하자 마을 입구의 일까지 해서 오늘 다 마무리 하잔다. 기남 씨를 마을 입구로 태우고 간 사이 일을 마치고 쉬었다. 봉고차로 우리를 태우러온 박천창 씨를 따라 마을 입구로 갔다. 차안에는 맥주 몇 병과 얼음과자가 있었다. 땀을 흘리고 일한 우리에 대한 배려다. 자상하게 사람들의 마음을 챙기는 그이의 이런 모습이 오늘날의 능길마을을 만들었으리라는 짐작을 어렵지 않게 한다.

나머지 일을 마치고 시계를 보니 오후 5시 30분, 우리는 천렵을 감행하기로 했다. 투망을 들고 냇가로 나갔다. 하루의 노역에 지친 탓인지, 투망이 너무 큰 탓인지 투망질이 잘 되지 않았다. 물고기 몇 마리를 잡고 나니 힘이 빠진다. 그물을 기남 씨에게 넘기고 물속에 뛰어들었다. 윗옷을 벗어 던지고 고개만 남긴 채 몸을 담궜다. 물에서는 가벼운 농약 냄새가 났다. 아쉬운 마음이 들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 마을을 빨리 유기농을 전환시키는 것도 우리가 해야 할 일 중의 하나다. 잠시 그런 여유를 즐기는 동안 날이 어두워졌다.

그동안 능길에서 사무장 일을 하던 전성호 씨가 내일이면 집으로 돌아간다. 특별히 그 일을 위해서 저녁에는 삼겹살 파티가 벌어질 모양이다. 식사 당번이 한 끼 손을 덜게 되었다. 학교 식당에 모여 저녁을 먹은 우리는 밖에 차려진 상 주변에 모였다. 저녁을 먹은 탓인지, 일에 지친 탓인지 술자리에 흥이 나지 않았다. 다른 몇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탓이지만 어찌 되었건 자리는 흥겹지 않았다. 억지로 분위기를 올려 보려고 성호 씨에게 노래를 부르게 해도 마찬가지였다. 분위기를 포기하고 술잔만 돌리다가 자리를 파했다. 늦은 회의를 제안하고 나산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집 문제며 미지급 급여에 대한 건으로 한차례 소란스런 분위기가 지나갔다. 언젠가는 볼가질 문제이기는 했지만 이렇게 빨리 나올 줄은 몰랐다. 다들 여유가 없고 내일 모래가 명절이기 때문이다. 아무런 대책도 성의도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원망하고 나서는데야 도리가 없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을 수도 있다는 말이 절감된다. 마음이 가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사람들은 그런 눈치 하나는 정말 빨라서 한사람을 속이는 것은 쉬워도 여려 사람을 속일 수는 없다. 이달 안으로 우리를 대하는 태도를 보고 우리의 거취를 결정하자는 결론을 내리고 회의를 마쳤다. 정말 어려운 일이다.

내일을 또 어떤 일이 생길까? 기대 반 두려움 반으로 잠을 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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