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수염의 첫번째 아내
하성란 지음 / 창비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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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푸른수염>은 프랑스 작가 페로Perrault의 작품이다. 나는 어렸을 때 양장본으로 된 '세계문학전집' 중 <페로 동화>를 아주 재미있게 읽었고 물론 그중엔 <파란 수염 사나이> 이 비슷한 제목의 작품도 있었다.

페로의 또다른 작품으로는 <빨간 모자>나 <장화 신은 고양이> 등이 있는데 - 물론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권의 구전 동화를 채집해서 각색한 것일 테지만 - 지금 생각해보면 이들 작품은 묘한 매력과 해석의 여지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언젠가 완역본을 구해서 읽어봐야 할 것 같다.

하성란은 사실 그의 작품을 다 읽지 않았는데 나에게는 괜히 점수를 더 집어주고 싶은 작가다. 특별히 이유 없이 말이다. 소설집 <옆집 여자>는 읽었지만 기억나는 작품은 없고 장편 <삿뽀로 여인숙>이나 <내 영화의 주인공>은 읽을 때는 재미있었지만 뒷심이 달리는 듯해 허전해졌다.

하지만 이번 신작 소설집 <푸른수염의 첫 번째 아내>는 얼른 사서 읽고 싶게 끌렸는데 그 이유 중의 큰 것은 아마 '푸른 수염'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한참 빠져 읽을 정도로 만족스러운 느낌이다.

전체적으로 이 책의 작품은 묘하게 편안하고 친근하다. 특별히 요란한 문체나 튀는 묘사, 자극적인 주제가 없는데도 꽉 차 있는 듯하다. 모두 열한 작품이 실려 있는데 불균형하지 않고 전체적으로 고르다. 그러면서 다양한 주제와 소재가 빛난다.

쭉 읽다 보니 재미있게도 작가는 유달리 '집'의 의미에 천착하는 듯하다. <푸른수염...>의 '하얀 페인트칠 된 목조 주택', <와이셔츠>의 아파트, <저 푸른 초원 위에>의 '마당 있는 집', <고요한 밤>의 또다른 아파트 등은 결코 '저 푸른 초원 위의 그림 같은 집'이 아니라 떠나가야 할, 안주하고 싶어도 등을 떠밀릴 불안한 공간이다.

또 유달리 후각에 대한 묘사가 많이 나온다. 지린내, 군내, 조미료 냄새, 휘발유 냄새, 시큼한 냄새.... 후각은 어쩐지 시각이나 청각보다 더 일상적이고 더 생생하다.

몇 년 전 씨랜드 화재 사건을 소재로 한 <별 모양의 얼룩>이나 장애 아이를 둔 부부의 이야기 <저 푸른 초원 위에> 같은 작품은 아마 작가가 아이를 둔 엄마여서일까 더 실감나고 진지했다.

이밖에 나 외에는 모두 한통속인 유폐된 공간의 공포를 그린 <파리>와 밀렵꾼들에 의해 죽음으로 내몰린 한 남자의 뒤를 쫓는 <밤의 밀렵>은 아주 새롭지는 않지만 작가의 새로운 시도를 보는 듯했고 아마도 자전적 소설일 <오, 아버지>도 그런대로 재미있었다. 하지만 죽은 아이의 시점으로 전개되는 <개망초>는 어쩐지 신경숙의 <작별인사>와 비슷해서 조금은 의아했다.

이 작품집에서 나에게 가장 좋은 작품은 역시 표제작과 <기쁘다 구주오셨네>, <별 모양의 얼룩>이다. 평범한 사람들의 예상치 못한 불행과 공포는 역설적으로 매력적인 주제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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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와 백합의 사막
윤대녕 지음, 조선희 사진 / 봄출판사(봄미디어)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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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윤대녕의 단편들 중 <상춘곡>과 함께 개인적으로 첫손가락에 꼽는 것은 <피아노와 백합의 사막>이다. 제목만 들어도 그려지는 그 알 수 없는 풍경. 존재와 진실과 추억을 찾아 실크로드라는 깊이를 알 수 없는 구멍 속으로 발을 내딛는 주인공의 여로와 마음의 행방을 쫓아 가는 길은 당연히도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모래알처럼 까끌거리며 허무한 것이었다.

윤대녕의 작품집에서 이 작품을 읽으며 나는 내내 '사막, 사막'이라고 중얼거렸던 것 같다. 어쩌면 내 일생에서 한번도 가보지 못할 곳, 하지만 늘 동경하게 될 곳. 이번에 조선희 사진을 곁들여(아니 사진에 소설을 곁들여?) 한 권의 책으로 이 작품을 만났다. 신문에서 짧은 기사를 보자마자 사게 된 책. 이미 읽은 작품을 뭐 또다시 읽는다구?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다. 아주 다른 버전으로, 아주 다른 느낌으로 마치 신작인 양 아껴 읽으며 뿌듯했으니까.

포토그래퍼 조선희는 문외한인 내가 이름을 알 정도로 몇몇 잡지 화보와 광고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사진을 보여주었던 사람이다. 뭐라고 그 특징을 꼭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이야기가 있다고 할까, 인물을 찍으면 당장이라도 뭐라 말을 걸어올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그런 사진들 말이다.

이 책에서도 사진들은 사진 그 이상이었던 것 같다. 그냥 적당하게 끼워 맞춘, 이쁘고 보기에 멋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온전히 이 작품만을 위한 사진들. 아니 작가와는 또다른 각도에서 <피아노와 백합의 사막>이라는 작품을 써내려간 사진들. 윤대녕만큼 조선희도 사막을, 존재를, 진실을 그리워했나 보다.

무엇보다 이 책은 사진과 텍스트가 따로 놀거나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을 지배하는 느낌이 없이 그럴싸하게 어울려 있어 몇 배의 효과를 내고 있다. 윤대녕의 사막과 조선희의 사막은 매우 다르면서도 같아 묘한 흥분을 주기도 한다. 주기 없이 찾아오는 편두통처럼.

그래서 난 이 책을 사무실 책꽂이에 두고서 한번은 텍스트만을, 한번은 사진만을, 그리고 다음에는 함께 읽었다. 아니 읽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나도 작가나 포토그래퍼와는 또다르게 나만의 <피아노와 백합의 사막>을 써봐야지, 내 마음으로, 내 마음에, 이렇게 다짐하고 있다.

'사막 끝에서 누가 손을 들어 나를 부른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을 때, 그리고 '무모하게도 열심히 달려가'지만 '사막의 한가운데'에서 '역시 사막은 비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난 아마 이 책을 다시 펼쳐 보게 될 것이다. 부디 그런 시간이 너무 잦지 않기를 바라지만.

좀 다른 이야기지만 윤대녕의 작품들은, 그 문학적인 평가와는 별개로, 대체로 영상 세대들에게 잘 맞는, 감각적인 언어와 쿨한(?) 사랑 이야기, 적절한 배경이 어우러져 있는데 왜 그의 작품이 영화화되지는 않는 건지 늘 궁금하다.

직접 들리지는 않지만 작가가 적재적소에 배치한 음악들은 또 얼마나 기가 막힌가. 그 자체로 배경음악이 될 수 있을 듯하다. 나는 윤대녕의 작품을 읽으며 빌리 홀리데이를 듣게 되었고 김광석을 새삼 찾았다. 마치 무라카미 하루키를 통해 비틀스나 재즈를 듣게 되는 것처럼. <피아노와 백합의 사막>이 특히 그렇다. 그 제목만으로 그려지는 영상과 들릴 것 같은 음악. 그래서일까. 이 작품이 사진과 함께 새롭게 태어난 것도. 아무튼 반가운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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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차가운 손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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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손가락이 긴 나에게 그 사실을 지적해 주는 사람이 많다. '손이 예쁘네요'라는 말은 이미 인사치레이기 때문에 의미는 없지만 아무튼 그런 말을 많이 듣다 보면 나 역시 다른 사람의 손에 유난히 눈길을 주게 된다. 어쩌면 백이면 백 손의 모양은 그다지 다른지. 하긴 우리 엄마는 TV를 보면서 사람들의 귀를 유심히 보고 품평하시는 편이기도 하다. 귀 모양은 사람마다 모두 다르다고, 참 잘생긴 귀도 있지만 박복하게 생긴 귀도 있다고.

하지만 사람의 신체 부분 중 손만큼 표정이 풍부하고 다양한 곳이 있을까. 조소 작품 중 유난히 손 부분만을 표현한 것이 많은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손은 손만의 언어와 감정을 가지고 있다. 손에 대한 자세하고 미학적인 성찰은 조각가 안규철 선생의 <그 남자의 가방>도 탁월하다.

이 작품도 한 조각가의 이야기다. 라이프캐스팅이라는, 석고로 인체의 부분을 뜨는 작업에 열중하는 조각가 장운형과 그가 만났던 두 여자 L과 E의 이야기. 장운형의 작업은 소재적인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이야기를 매혹적으로 만들어 나가는 일조를 하는 중요한 모티브다. 살아 있는 육체를 박제화시키는 것, 그리고 껍데기를 만들어 그 텅 빈 안을 보게 하는 작업.

몸에 석고를 뒤집어 쓰고 있으면 움직여서도 안 되는데 점점 열기가 느껴진다고 한다. 그 열은 살갗을 데게 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 답답함과 구속력이란 꽤 큰 인내심을 요하는 것일 것. 그렇게 자신에게 석고를 씌우고 자신의 껍데기가 만들어지길 기다리는 사람들. 그리고 떼어낸 석고에 붙어 있는 몸의 주름살, 구멍의 흔적, 힘없이 빠진 터럭 몇 가닥.

자세하게 묘사되고 반복되는 이 작업의 풍경은 고고한 예술을 위한 고된 노동이라기보다는 지리하고 남루한 일상과 존재를 눈앞에서 확인시켜 주는 잔인한 작업과도 같다. 표정이 풍부한 손을 찾아다니던 장운형은, 그래서 그런 손을 만났던가. 그리고 그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었던가. 아무리 그랬다 하더라도 남은 것은 차가운 석고 덩어리일 뿐이었다. 그나마 쉽게 가루로 부서지고 마는.

이 소설을 읽으며 내내 내 손을, 그리고 내가 잡고 싶은 손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손들을 뜨거운 석고 덩이에서 빼어내 차가운 박제로 만들고 싶다는 욕망. 못본 체 지나치고 싶은 주름과 비어 있는 공간과 미세한 상처들도 객관화시켜 확인하고 싶다는 헛된 욕망.

등장인물들은 전작들에서도 그랬듯이 건조하고 상처가 많은, 약한 '사슴' 같은 사람들이다. 드러내놓고 상처를 주거나 해치지는 않지만 결코 쉽게 옆자리를 내어주지 않는. 가만가만 있는 듯 없는 듯 살아가고 있는. 라이프캐스팅 작업이나 여대생 L의 거식증, 폭식증으로 이어지는 심리 묘사 등은 매우 탁월해서 많은 준비 끝에 나온 작품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전작들에서도 그랬듯이 인물들이 전형화되어 있고 각기 따로 노는 듯한 느낌도 지우기 어렵다.

한강의 작품들은 깔끔하고 차분하지만 그만큼 인물들이나 상황이 생기가 어렵고 작위적인 것 같다. 슬픔의 정서가 지나친 건 아닌지. <검은 사슴>도 그랬지만 장편들이 대체로 쉽게 읽히지 않는다. 이것은 곱씹을 것이 많을 때는 찬사지만 그렇지 않다면 치명적인 단점일 수도 있을 것이다. 최근에 그가 발표했다는 '어른들을 위한 동화'는 어떨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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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 화두, 혹은 코드 우리 시대의 인물읽기 1
장정일 외 지음 / 행복한책읽기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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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나온 <장정일, 화두 혹은 코드>에는 그의 단상, 자작 시나리오, 예전의 대표시 들이 수록되어 있어 아주 반가웠다. 그리고 그다지 몇몇 평론가들의 '작가론'도.

사실 작가론과 '인간 장정일'에 묶인 글들은 그다지 건질 만한 것이 없었다. 특히 장정일의 작품을 토대로 만들어진 영화와 그의 원작을 비교했다는 영화평론가 전찬일의 글은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알 수 없는 함량 미달의 글이다.

중언부언. 들쑥날쑥. '소위 명문대학교에서 석사 학위까지 취득한 독문학도였'(본문 161쪽)던 이 평론가의 글은 사적인 감상도 아닌, 날카로운 평론도 아닌, 완성되지 않은 문장으로 이루어진 지루한 글이라서 읽는 동안 나는 괜히 화를 냈다. 도대체 장정일의 작품이 어떻다는 것인지, 그것이 영화화되면서 뭐가 어떻게 바뀌고 어떻게 표현되었다는 것인지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에 비해서 장정일 사건에서 그의 변호를 맡았던 강금실 변호사의 글은 표현의 자유가 왜 보장되어야 하는지, 왜 우리 사회가 몸과 성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금기시하는지에 대한 간결한 통찰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 특히 이런 대목은 아주 멋있었다.

'나는 모든 사물과 사람을 그의 이름으로 부르고 - 우리 사회 호칭의 복잡한 권위적 구조, 性器를 공개적으로 그 이름으로 부르지 못하는 은폐성을 생각해 보라 -, 가능한 한 육체가 자연스럽게 그 자리에 놓여 원하고 충족하고 사랑하며, 서로가 타인의 육체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그런 사회에서 살고 싶다. 아마도 이것은 나만의 꿈이 아니며, 삶에 지친 몸을 달래는 모든 사람이 밤마다 혼자 잠들면서 꿈꾸는 사회일 것이다. 앞선 사람인 작가로서 그와 같은 꿈에 도전한 장정일을 위하여, 이 사회의 모든 장정일을 위하여 나는 변론하고 싶다.'(본문 198쪽)

사실상 나는 장정일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 그가 문학적으로 과연 제대로 평가받고 있는지, 혹 이슈화된 것에 비해서 과대평가된 것은 아닌지 조금은 의심스럽다. 하지만 그만큼 자기 색깔과 의도를 가지고 남들과는 다른 주제의식을 표현하는 작가가 또 있을까.

그의 엄청난 독서량, 작가로서의 자의식(모든 작가는 매문을 할 수밖에 없다, 또는 나는 살기 위해 쓴다는 외침 등)에서 앞으로 더 많은 작품이 나오길 바랄 뿐이다. 게다가 어느 바운더리에도 속해 있지 않은 독립군으로서의 외로움이 그의 문학적 자양분이지 않을까. 한 가지 더. 언제나 '소년'일 거라고 생각했던 그가 어느새 마흔이다. 괜히 놀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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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만을 듣는 새벽에 - 김갑수의 음악과 사랑 이야기
김갑수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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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언가에, 또는 누군가에 집착하거나 목숨 걸어본 적이 없다. 몇 가지 조금씩 건드렸다가 눈길을 주었다가 금세 제자리로 돌아온 적은 많지만 그뿐이다. 더 나아가지는 않는다.

그래서인지 매니아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경외심을 느낀다. 사진, 미술, 음악, 문학, 와인 등의 보편적인 카테고리뿐만 아니라 아주 특이한 것들, 남들은 모르는 것들에 대해서 정통한 사람들, 물론 그것을 사랑하는 사람들.

이 책의 저자는 시인인데 난 그의 시를 접한 적이 없다. 다만 지금은 아닐 텐데, SBS 라디오에서 '책하고 놀자'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한 적이 있었음을 직업적인 이유로 알고 있었는데 그나마도 들어본 적은 없다. 그의 클래식 편력기라 할 수 있는 이 책을 읽게 된 이유는 어디까지나 애호가 마니아의 자세(?)란 어떤 것일까가 괜시리 궁금해졌기 때문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사실 이 책에서 언급되는 음악가의 이름은 반의 반도 모르며 그들의 음악도 거의 들어본 적은 없다. 그래서 음악적인 이야기는 대체로 패스. 그보다는 저자가 음악을 어떤 마음으로 듣는지 왜 듣는지에 더 주목했다.

저자는 자신이 음악, 그것도 클래식이라는 장르를 듣게 된 건 어떤 운명적인 것으로 본다. 고교 시절 선배에게 이끌려 음악감상실에 갔고 거기서 어떤 음악을 들었고 그것이 너무 좋았다는 것. 그럼 나는 아직 운명적으로 좋아할 만한 무언가를 만나지 못했나 보다.

이 책의 장점이자 단점은 저자가 음악만큼 사랑했지만 이루어지지 못했던 옛사랑에 대한 기억을 필요 이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음악과 오디오 기기에 그랬던 것처럼 역시나 집착했던 사랑의 기억은 본인에겐 두고두고 - 어쩌면 한참 지났기 때문에 - 떠올릴 만한 것이겠지만 독자 입장으로서는 안타까울 뿐이다.

이 책의 저자가 그렇듯이 대체로 매니아들은 폐쇄적이고 단선적이다. 그래서 밥을 굶어가며 새로운 오디오 기기를 사들이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자랑하고, 차비가 없어 걸어가더라도 찍어두었던 LP판을 사고야 만다. 나로서는 절대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집착과 노력을 마음껏 펼치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도 사랑할 수 있는 것일까. 모르겠다.

다만, 그런 건 많이 부러웠다. 음악을 듣기 위해서 쓸데없는 저녁 약속을 줄이고, 음악과 대화를 하고 생활과 생각을 단순하게 하는 것. 나에게도 필요한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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