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의 차가운 손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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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손가락이 긴 나에게 그 사실을 지적해 주는 사람이 많다. '손이 예쁘네요'라는 말은 이미 인사치레이기 때문에 의미는 없지만 아무튼 그런 말을 많이 듣다 보면 나 역시 다른 사람의 손에 유난히 눈길을 주게 된다. 어쩌면 백이면 백 손의 모양은 그다지 다른지. 하긴 우리 엄마는 TV를 보면서 사람들의 귀를 유심히 보고 품평하시는 편이기도 하다. 귀 모양은 사람마다 모두 다르다고, 참 잘생긴 귀도 있지만 박복하게 생긴 귀도 있다고.

하지만 사람의 신체 부분 중 손만큼 표정이 풍부하고 다양한 곳이 있을까. 조소 작품 중 유난히 손 부분만을 표현한 것이 많은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손은 손만의 언어와 감정을 가지고 있다. 손에 대한 자세하고 미학적인 성찰은 조각가 안규철 선생의 <그 남자의 가방>도 탁월하다.

이 작품도 한 조각가의 이야기다. 라이프캐스팅이라는, 석고로 인체의 부분을 뜨는 작업에 열중하는 조각가 장운형과 그가 만났던 두 여자 L과 E의 이야기. 장운형의 작업은 소재적인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이야기를 매혹적으로 만들어 나가는 일조를 하는 중요한 모티브다. 살아 있는 육체를 박제화시키는 것, 그리고 껍데기를 만들어 그 텅 빈 안을 보게 하는 작업.

몸에 석고를 뒤집어 쓰고 있으면 움직여서도 안 되는데 점점 열기가 느껴진다고 한다. 그 열은 살갗을 데게 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 답답함과 구속력이란 꽤 큰 인내심을 요하는 것일 것. 그렇게 자신에게 석고를 씌우고 자신의 껍데기가 만들어지길 기다리는 사람들. 그리고 떼어낸 석고에 붙어 있는 몸의 주름살, 구멍의 흔적, 힘없이 빠진 터럭 몇 가닥.

자세하게 묘사되고 반복되는 이 작업의 풍경은 고고한 예술을 위한 고된 노동이라기보다는 지리하고 남루한 일상과 존재를 눈앞에서 확인시켜 주는 잔인한 작업과도 같다. 표정이 풍부한 손을 찾아다니던 장운형은, 그래서 그런 손을 만났던가. 그리고 그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었던가. 아무리 그랬다 하더라도 남은 것은 차가운 석고 덩어리일 뿐이었다. 그나마 쉽게 가루로 부서지고 마는.

이 소설을 읽으며 내내 내 손을, 그리고 내가 잡고 싶은 손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손들을 뜨거운 석고 덩이에서 빼어내 차가운 박제로 만들고 싶다는 욕망. 못본 체 지나치고 싶은 주름과 비어 있는 공간과 미세한 상처들도 객관화시켜 확인하고 싶다는 헛된 욕망.

등장인물들은 전작들에서도 그랬듯이 건조하고 상처가 많은, 약한 '사슴' 같은 사람들이다. 드러내놓고 상처를 주거나 해치지는 않지만 결코 쉽게 옆자리를 내어주지 않는. 가만가만 있는 듯 없는 듯 살아가고 있는. 라이프캐스팅 작업이나 여대생 L의 거식증, 폭식증으로 이어지는 심리 묘사 등은 매우 탁월해서 많은 준비 끝에 나온 작품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전작들에서도 그랬듯이 인물들이 전형화되어 있고 각기 따로 노는 듯한 느낌도 지우기 어렵다.

한강의 작품들은 깔끔하고 차분하지만 그만큼 인물들이나 상황이 생기가 어렵고 작위적인 것 같다. 슬픔의 정서가 지나친 건 아닌지. <검은 사슴>도 그랬지만 장편들이 대체로 쉽게 읽히지 않는다. 이것은 곱씹을 것이 많을 때는 찬사지만 그렇지 않다면 치명적인 단점일 수도 있을 것이다. 최근에 그가 발표했다는 '어른들을 위한 동화'는 어떨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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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 화두, 혹은 코드 우리 시대의 인물읽기 1
장정일 외 지음 / 행복한책읽기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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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나온 <장정일, 화두 혹은 코드>에는 그의 단상, 자작 시나리오, 예전의 대표시 들이 수록되어 있어 아주 반가웠다. 그리고 그다지 몇몇 평론가들의 '작가론'도.

사실 작가론과 '인간 장정일'에 묶인 글들은 그다지 건질 만한 것이 없었다. 특히 장정일의 작품을 토대로 만들어진 영화와 그의 원작을 비교했다는 영화평론가 전찬일의 글은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알 수 없는 함량 미달의 글이다.

중언부언. 들쑥날쑥. '소위 명문대학교에서 석사 학위까지 취득한 독문학도였'(본문 161쪽)던 이 평론가의 글은 사적인 감상도 아닌, 날카로운 평론도 아닌, 완성되지 않은 문장으로 이루어진 지루한 글이라서 읽는 동안 나는 괜히 화를 냈다. 도대체 장정일의 작품이 어떻다는 것인지, 그것이 영화화되면서 뭐가 어떻게 바뀌고 어떻게 표현되었다는 것인지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에 비해서 장정일 사건에서 그의 변호를 맡았던 강금실 변호사의 글은 표현의 자유가 왜 보장되어야 하는지, 왜 우리 사회가 몸과 성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금기시하는지에 대한 간결한 통찰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 특히 이런 대목은 아주 멋있었다.

'나는 모든 사물과 사람을 그의 이름으로 부르고 - 우리 사회 호칭의 복잡한 권위적 구조, 性器를 공개적으로 그 이름으로 부르지 못하는 은폐성을 생각해 보라 -, 가능한 한 육체가 자연스럽게 그 자리에 놓여 원하고 충족하고 사랑하며, 서로가 타인의 육체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그런 사회에서 살고 싶다. 아마도 이것은 나만의 꿈이 아니며, 삶에 지친 몸을 달래는 모든 사람이 밤마다 혼자 잠들면서 꿈꾸는 사회일 것이다. 앞선 사람인 작가로서 그와 같은 꿈에 도전한 장정일을 위하여, 이 사회의 모든 장정일을 위하여 나는 변론하고 싶다.'(본문 198쪽)

사실상 나는 장정일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 그가 문학적으로 과연 제대로 평가받고 있는지, 혹 이슈화된 것에 비해서 과대평가된 것은 아닌지 조금은 의심스럽다. 하지만 그만큼 자기 색깔과 의도를 가지고 남들과는 다른 주제의식을 표현하는 작가가 또 있을까.

그의 엄청난 독서량, 작가로서의 자의식(모든 작가는 매문을 할 수밖에 없다, 또는 나는 살기 위해 쓴다는 외침 등)에서 앞으로 더 많은 작품이 나오길 바랄 뿐이다. 게다가 어느 바운더리에도 속해 있지 않은 독립군으로서의 외로움이 그의 문학적 자양분이지 않을까. 한 가지 더. 언제나 '소년'일 거라고 생각했던 그가 어느새 마흔이다. 괜히 놀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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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만을 듣는 새벽에 - 김갑수의 음악과 사랑 이야기
김갑수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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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언가에, 또는 누군가에 집착하거나 목숨 걸어본 적이 없다. 몇 가지 조금씩 건드렸다가 눈길을 주었다가 금세 제자리로 돌아온 적은 많지만 그뿐이다. 더 나아가지는 않는다.

그래서인지 매니아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경외심을 느낀다. 사진, 미술, 음악, 문학, 와인 등의 보편적인 카테고리뿐만 아니라 아주 특이한 것들, 남들은 모르는 것들에 대해서 정통한 사람들, 물론 그것을 사랑하는 사람들.

이 책의 저자는 시인인데 난 그의 시를 접한 적이 없다. 다만 지금은 아닐 텐데, SBS 라디오에서 '책하고 놀자'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한 적이 있었음을 직업적인 이유로 알고 있었는데 그나마도 들어본 적은 없다. 그의 클래식 편력기라 할 수 있는 이 책을 읽게 된 이유는 어디까지나 애호가 마니아의 자세(?)란 어떤 것일까가 괜시리 궁금해졌기 때문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사실 이 책에서 언급되는 음악가의 이름은 반의 반도 모르며 그들의 음악도 거의 들어본 적은 없다. 그래서 음악적인 이야기는 대체로 패스. 그보다는 저자가 음악을 어떤 마음으로 듣는지 왜 듣는지에 더 주목했다.

저자는 자신이 음악, 그것도 클래식이라는 장르를 듣게 된 건 어떤 운명적인 것으로 본다. 고교 시절 선배에게 이끌려 음악감상실에 갔고 거기서 어떤 음악을 들었고 그것이 너무 좋았다는 것. 그럼 나는 아직 운명적으로 좋아할 만한 무언가를 만나지 못했나 보다.

이 책의 장점이자 단점은 저자가 음악만큼 사랑했지만 이루어지지 못했던 옛사랑에 대한 기억을 필요 이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음악과 오디오 기기에 그랬던 것처럼 역시나 집착했던 사랑의 기억은 본인에겐 두고두고 - 어쩌면 한참 지났기 때문에 - 떠올릴 만한 것이겠지만 독자 입장으로서는 안타까울 뿐이다.

이 책의 저자가 그렇듯이 대체로 매니아들은 폐쇄적이고 단선적이다. 그래서 밥을 굶어가며 새로운 오디오 기기를 사들이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자랑하고, 차비가 없어 걸어가더라도 찍어두었던 LP판을 사고야 만다. 나로서는 절대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집착과 노력을 마음껏 펼치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도 사랑할 수 있는 것일까. 모르겠다.

다만, 그런 건 많이 부러웠다. 음악을 듣기 위해서 쓸데없는 저녁 약속을 줄이고, 음악과 대화를 하고 생활과 생각을 단순하게 하는 것. 나에게도 필요한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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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 1
김형경 지음 / 문이당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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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김형경의 작품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자전적인 소설 <세월>을 읽다가 거의 짜증을 내면서 던져버린 게 다인데 다른 작품들에도 여하간 손이 안 갔다. 궁합이 안 맞는 걸까. 그런데 '그래 봤자 5%야'라는 말에 끌려, 그리고 오랜 외유 끝에 나온 작품에 대한 기대에, 그리고 오랜만에 나온 여성주의 소설이라는 점에 끌려 읽었다. 며칠 간 잠들기 전 오직 침대에 누워서.

작품의 대부분은 주인공 세진이 심리 치료를 받는 내용이며 또 나머지는 어쩌면 형제였을지도 모를, 그리고 한 인간의 서로 다른 분신일 세진과 인혜의 교차이고 그리고도 나머지는 인혜의 사랑 찾기이다.
전체적으로 폭발적인 흡인력도 없고 밋밋하며 많은 부분 상투적이었고 구태의연했다. 게다가 이 작품의 핵심이라 할 세진의 심리 치료 장면들은 흥미있었지만 지루해서 대강 넘어가야 했다.

그렇다고 이 작품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아무리 덮고 덮어도 가려지지 않은 여성의 상처는 지나치기엔 너무나 큰 것이다. 그것은, 역시 구태의연하고 상투적으로 이야기하면, 유무형의 폭력에서 온 것이고 그 폭력을 예방하기엔 우린 너무 무방비 상태에 있기 때문이며 그것을 이겨내기엔 너무나 약하다는 사실의 확인이다.

세진과 인혜의 아픔과 고통에 몰입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것이 작가의 의도였겠지만. 나는 아프고 싶지 않다. 정말로. 그것이 나의 모습이었고 현재의 모습이며 앞으로 가게 될 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정말로 바보 같은 말이지만.

전문가 여성 집단 '오여사'는 일면 참신했지만 그것의 한계는 너무 명확해서 좀 우습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 작품 중에서 살아 있고 매력 있는 캐릭터는 세진의 상담인이었다. 이상적인 인간상을 만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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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리 요리를 먹는 여자 - 개정판 생각의나무 우리소설 7
송혜근 지음 / 생각의나무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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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에 가면 항상 먹던 것만을 시켜 먹게 된다. 게다가 고급스러운 레스토랑 등에는 가본 적도 없고 별로 가고 싶지도 않으며, 맛있는 집을 열심히 찾아다니는 미식가도 아닌 것은 예민하지 않은 둔하고 펑퍼짐한 내 성격 탓일 것이다. 식욕이란, 그리고 혀도 느끼는 감각이란 인간이 누리는 하나의 특혜와도 같을 것이다. 경박하게 말하면 '배가 부르니' 미각을 통한 욕망의 분출도 찾게 되는 것이겠지만 어쨌든 한편으로는 신비롭고 풍부한 감각인 것도 분명하다.

<이태리 요리를 먹는 여자>를 읽게 된 건 우선 서점에서 특이하고 세련된 장정에 끌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다지 꼭 읽어야겠다고 끌렸던 건 아니다. '엑조티즘'과 '댄디' 같은 정말 낯선 특징을 나타내는 카피도 그랬고 등단한 지 10여 년만에 처음 소설집을 묶어내는 작가의 약력도 그랬고, 괜히-나쁘게 말하면- 겉멋이 든, 상류층 취향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벨벳'의 느낌 그대로.

작품들은 내내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 어울리지 않게 초대되어 안 맞는 옷을 입고 낯선 이들과 발음도 어려운 음식을 먹는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체할 것 같은 거북스러움이라기보다는 아, 이런 것도 있구나, 하는 소녀의 경이로움.

호수 옆의 예쁜 집, 그 안에서 벌어지는 나른하고 위태로운 사건들, 향기로운 차가 놓인 탁자 앞에 앉아 정원을 내다보는 중년 여인의 권태로운 눈빛들... 이런 것들이 구차하진 않지만 끔찍스럽게, 비현실적이지만 아름답지도 않게 그려지고 있다.

'앤틱'의 물건들을 좋아하는 주인공(또는 작가)의 취향은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도피하지도 못하는 몇몇(결코 다수의 보편적인 상황은 아니다) 여인들의 과거지향적인 굴레를 보여주는 것 같다. 어느 작품인가와 비슷한 표제작도 그런 대로 좋았고, <거울이 놓인 방>이나 <먼 옛날부터 당신을 기다렸다>도 괜찮았다.

그래도 점수를 많이 주지 못하겠는 건, 다분히 자기도취적이고 유아적으로 보이는 '작가의 말'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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