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책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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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오스터의 작품들은 대개 외롭고 상실감에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등장하고 예기치 못한 상황에 빠지곤 하는데 이상하게 하나도 억지스럽거나 거북스럽지 않다. 오히려 더욱 현실적인 상황이 되기도 하고 삶의 우연성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한다.

이 작품에서는 갑자기 사라진 사람에 대한 책(헥터 만에 대한 짐머의 연구서)과 죽음을 담보로 담긴 회고록(샤토브리앙)과 세상에 나타나지 못하고 불타버린 원고(엘머가 쓴 헥터 만의 자서전),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을 기록한 책(바로 이 책. 그러나 짐머가 쓴 것으로 되어 있는)이 등장한다. 이 모든 것은 허구이자 현실이며 환상이자 실체가 된다.

실존과 사라짐, 삶과 죽음에 대한 폴 오스터의 깊어진 통찰이 엿보이고 어느 한순간 눈을 뗄 수 없게 한다. 올해 이 작품으로 시작하게 되어 행복하다.

'사람들은 곤경에 맞닥뜨리기 전까지는 충실한 삶을 살지 못한다'-샤토브리앙 회고록에서 다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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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애인은 유혹에 약하다 - 위기를 맞은 커플들의 현명하고 아름다운 선택
한스 옐로우셰크 지음, 신혜원 옮김 / 열대림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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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대를 넘어서면 이십대 때와는 달리 남녀 관계, 연애가 다소 무거워지고 심심해지는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더 성숙해지는 것은, 깊어지는 것은 또 아닌 듯싶다. 여전히 관계는 '사랑'과는 별도로 어렵고 버거운 일이다.

제목이 유난히 눈에 띄었던 이 책을 서슴없이 집어들어 내용을 훑어보았을 때 가장 마음에 들었던 건 선정적이거나 지나치게 가볍게 '외도'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소재로 다양한 '인간 관계'를 말하는 있다는 점이었다. 어쩌면 이런저런 일로 힘들어하는 내 친구들에게 권할 수 있는 책으로 보였던 것이다.

이 책에는 세 가지 타입의 커플-'삼각관계'에 들어선-이 등장한다. 그들은 혼전 동거를 거친 신세대, 전통적인 부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커플들로 우리가 직간접으로 겪을 수 있는 모든 관계의 총체이다. 이들이 어떤 결혼 생활을 유지했고, 어떤 식으로 삼각 관계에 들어섰으며 어떤 식으로 고통을 받았고 어떻게 해결(?)했는지가 전개된다.

시쳇말로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 했던가. 술자리에서 안주 삼아 다른 커플들의 삼각 관계나 '바람난 사람' 이야기는 쉽게 할 수 있지만 본인들에겐 굉장한 혼란이자 어려움일 것이다. 일부일처제라는 다소 배타적인 제도 안에서 안정과 행복을 느끼는 사람도 있겠지만 또다른 사랑을 꿈꾸는 것도 다반사로 일어나는 일. 이 책은 '용감하게' 위기 상황에 뛰어든 이 세 커플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풀어놓으면서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해준다.

가장 인상 깊게 읽고 도움이 되었던 부분은 4장 '삼각 관계와 성장 스토리'였다. 마마보이와 파파걸, 사랑스러운 소년과 영웅, 공주와 유능한 여자 등 내 자신이기도 하고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간 유형을 통해 우리가 상처 받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또다른 관계에 뛰어들게 되는 배경을 분석하고 있다. 여기에 나온 내용을 토대로 자신을 돌아보고 미처 알지 못했던 잠재적인 상처를 깨우치게 한다.

이 책은 도덕적인 교훈을 주지 않는다. '순간의 잘못을 뉘우치고 안정된 가정으로 돌아가라'고도, '주체적인 사랑이 중요하다. 현재의 감정에 충실하라'고도 쉽게 말하지 않는다. 결국 선택은 자기 몫이니. 다만 자신을 제대로 알고, 자신을 사랑하고 그만큼 상대방을 사랑하여 건강한 관계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어떤 선택을 하든 후회는 금물인 것도 물론이다.

결혼 여부에 상관없이 자신의 파트너와 건강한 사랑을 나누고 싶다면, 함께 읽을 만한 책이다. 서로 생채기만 남기게 되는 관계를 미연의 방지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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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 사랑과 사회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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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 사랑'이라니, 그것을 믿지 않은지 오래다. 하지만 나 역시 가끔은 그 판타지를 인식하지 못한 채 꿈꾸기도 할 것이다.

젊은 작가의 첫 창작집을 읽었다. 대체로 스피디한 진행, 도발적이라 할 만한 소재, 신선한 문체가 쉽게 읽힌다. 물론 다소 구태의연하고 이전 선배들에서 크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면도 눈에 띄지만 이후 작품을 기대할 만하다.

무엇보다 이 작품집에서 그려지는 여성들이 매력적이다. 그들은 남성적이고 사회적인 시선으로 보자면 '되바라지고 순결하지 못하고 나쁜' 여자들이지만, 충분히 위협적이고 위험한, 그래서 '바람직하다'.

역시 표제작이자 등단작인 [낭만적 사랑과 사회]가 제일 좋았다. [순수]나 [무궁화]는 좀 식상하다 싶었고 [소녀 시대] 등은 그저 그랬지만 [신식 키친]이나 [이십세기 모단 걸] [홈 드라마]는 신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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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스키야키 식당
배수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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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몇 년 전 인터넷 사이트에서 읽은 부분은 이 작품의 딱 첫 부분뿐이었나 보다. 그때 거기까지만 읽고 말았는데 당연히 마(馬)와 돈경숙이 주인공인 줄 알았고 독특한 식당(일요일 스키야키 식당)에서 뭔가 사건이 벌어지는 줄 알았다. 책을 사들고, 뒤의 '작가의 말'을 먼저 읽었어야 했다. 작가의 경고(또는 사과의 말)를 미리 접수했더라면 뒤로 갈수록 당혹감(나쁜 의미가 아니다)을 느끼지는 않았을 텐데.

나는 배수아의 <나는 이제 니가 지겨워>가 매우 훌륭하고 유용한 페미니즘 참고서이자 현대 라이프 스타일의 보고서라고 생각했다. 이번의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은 또다른 의미에서 매우 독특하고 의미 있는 사회학 보고서-'빈곤의 사회학'-일 것이다. 작가는 아예 작정하고 한 장(章)을 '예비적 서문 - 슬픈 빈곤의 사회'라고 하지 않았는가.

가난, 빈곤, 결핍이란 우리가 외면하고 극복하고자 하는 것들이다. 우리는 늘 가난을 이겨낸 사람들을 추앙하고 본받으려고 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이 책을 읽다보면 도대체 가난이란 무엇인가, 하는 원초적이고 어려운 질문에 사로잡히지만, 작중 인물의 한 사람처럼 결코 '끝나지 않는 것'이라는 추상적인 답만이 남는 것 같다.

괜히 어려운 소설처럼 느껴지는데, 어렵다기보다는 독특하고 새로운 소설임에는 틀림 없다. 배수아의 전작들을 좋아했느냐에 상관없이 이 작품에 대한 반응을 엇갈리지 않을까.

<붉은 손 클럽>쯤에서 작품의 성격이나 느낌이 바뀌었다고 생각되는데 이 작품은 그 정점에 있는 것 같다. 우선 초기작들에서 배수아의 개성이자 특성으로 주로 언급되었던 '도회적'인 이미지는 거의 찾아볼 수 없고 늘 모호하곤 했던 묘사가 웬일인가 싶도록 치밀하다.

물론 여전히 가족은 파탄나 있고 빈곤에 대한 모티프는 <철수> 등에서도 이미 본 적 있지만 더욱 적나라하다. 어쨌든 나로서는 좋은 손을 든다. 작가의 오랜 고민과 시각이 잘 나타나므로. 이 책에는 '철수'가 나오지 않고,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을 읽고 싶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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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커 에번스 Walker Evans 열화당 사진문고 6
룩 상트 지음, 김우룡 옮김, 워커 에번스 사진 / 열화당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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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아무나 찍을 수 있지만, 또한 아무나 찍을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이 책 64페이지에도 그렇게 씌어 있다.'누구든 이 장면을 찍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에번스만이 그렇게 했다.'어찌 보면 평범하고 별것 아닌 풍경도 그의 눈-카메라-을 거치면 또다른 풍경이 된다. 그것은 결코 화려하고 특이한 장면이어서가 아니라 에번스에게 또하나의 눈이 있었기 때문이리라.독특한 구도와 배치, 순간의 포착, 과연 그가 '역사상 가장 훌륭한 다큐멘터리 사진가'인지는 과문한 나로서는 알 수 없으나, 한밤중, 촉수 낮은 불빛에서 한장 한장 넘겨본 그의 사진은 과연 훌륭했다. 의도인듯 우연인듯 먼듯 가까운듯 볼수록 많은 이야기가 터져 나올 것 같은 그런 사진들.무엇보다 이 책이 빛난 건, 사진에 덧붙여진 해설과 머릿글 덕분이다. 혹시나 사진을 내 맘대로 보는 것에 방해될까 싶어 처음 읽을 때는 오른쪽 페이지 사진만 넘겨보고 나중에야 왼쪽 페이지의 글을 읽었다. 룩 상트의 애정 어린, 그리고 정확하고 멋진 설명 덕분에 워커 에번스 사진에 만세를 부르고 싶었다.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을 '발견'하는 능력, 그러한 눈. 범상한 나도 갖고 싶다면 지나친 욕심일까. 이제 워커 에번스의 다른 작품들도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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