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이 고인다
김애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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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생이다.

어린 작가라고?

 

작가의 물리적인 나이가 뭐 중요하겠냐만은

- 황석역 작가는 약관도 전에 등단했는걸 -

그래도 80년대생 이 작가가 한국일보문학상 최연소 수상작가로 등장하면서

뭔가 파문과 기대감을 던져준 건 맞나보다.

(내가 동경하는 60년대생 '젊은' 작가님들도 여전하시지만)

 

나 역시 괜히 <달려라, 아비>를

조마조마해 가며 또 괜히 시기해 가며 읽었는데

새로우면서도 백 퍼센트 순도는 아니라는 느낌이기는 했다.

그러면서도 어서 두 번째 책 나오기를 기다렸고,

<침이 고인다>는 역시, 싶다.

 

내가 마음에 드는 건, 무엇보다도,

그가 강북, 아니 변두리 정서를 가지고 있다는 점.

후줄그레한 피아노 학원, 만두가게, 국수집을,

서울을 빙 돌고 돌아 제자리로 오는 2호선, 소음과 냄새가 심한 국철을,

회기역과 신림역, 개봉역을 보여주니까.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운 옥탑방 그리고 물이 차고 곰팡이 피던 반지하방 역시.

(옥탑방과 반지하를 오가던 답십리가 갑자기 생각났다.

그런 다세대 주택들이야 답십리든 신림이든 다 똑같겠지)

 

옹색한 창문이 있는 방 한 칸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담백하게 그렸고

그들을 함부로 하지 않으며

배부르게도 하고 종종걸음을 걷게 하고 있어서

이 책의 작품들이 좋았다.

 

특히

"어머니는 좋은 어미다. 어머니는 좋은 여자다. 어머니는 좋은 칼이다. 어머니는 좋은 말[言]이다"

라고 하는 <칼자국>을 읽으며

엄마를 겹쳐보고 먹먹해졌다.

우리 엄마에게 해드리고 싶은 말.

 

'다시, 김애란이다'라고 말해진 두 번째 책이니

세 번째 책에는 몇 배의 기대감을 얹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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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바다 건너기
조너선 캐럴 지음, 최내현 옮김 / 북스피어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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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조너선 캐럴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아마 알라딘이나 이글루스 같은 곳에서 귀동냥을 한 거겠지.

딱 그런 성향.

어쨌거나 <웃음의 나라> <벌집에 키스하기> 모두 아주 흥미진진하게 읽고

더불어 북스피어라는 출판사에도 호감을 가지고 있던 터다.

 

얼마 전 아는 분께 캐럴 이 작품 어서 나오길 기다린다고 말했더니

그걸 기억하시고 한 권 보내주셨다.

아무튼 '나무바다'라는 제목도 그림도 희한하고 인상 깊어서

얼른 손에는 잡았지만 결국 완독하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다.

 

'크레인스뷰 3부작' 중 <벌집에 키스하기> 다음으로 두번째 나온 작품인데,

아무 생각 없이 <벌집>을 읽던 기분대로 덤볐다가

어어, 이게 뭐야, 책장을 넘겨야 했다.

 

말하자면, SF라고 할까, 미스터리 SF 혼합 변종 장르이니

굳이 장르를 정의하는 것은 캐럴 양반도 원하지는 않을 테고

뭐라고 하더라도 이 책을 읽어내는 데는 도움이 안 된다.

어쨌거나 스포일러가 되는 것을 감수하고 말하자면

외계인도 나오고 시간 여행도 나오고 적당한 호러적인 요소도 있고 액션도 있으니

맞아맞아, 타란티노의 <황혼에서 새벽까지>를 보았을 때의 그런 기분인가 보다.

(그렇다고 '좀비'가 나오지는 않는다.)

 

아픈 몸으로 침대에 비비적대며 후반부를 읽다가 자다가 깨다가를 반복했는데

몸이 아파서인지, 내 앞에 열다섯 살의 '나'나 스무 살의 '나'가 나타난다면,

아니면 마흔다섯 살의 '나'가 나온다면 어쩔까 싶으면서

조금 슬퍼졌다.

어린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생각해 보니 참 할 말도 없고

마흔다섯 살의 '나'에게는 무지하게 혼나고 원망 들을 것도 같다.

정말 슬프다.

 

어쨌든 나무바다든 스폰지바다든 솜뭉치바다든

그것을 건너는 방법은 수백 수만 가지일 테고

그 앞에서 떠올릴 생각에는 정답은 없을 것이다.

 

프래니처럼 비틀스 멤버들을(레넌도 매카트니도) 마트에 다 모아놓고

나만을 위한 음악을 연주하라고 시키는 것도 그 한 방법.

그때의 내 신청곡은

I Want To Hold Your Hand나 Lucy in the Sky with Diamo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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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cid Fall (루시드 폴) - The Light Of Songs (노래의 불빛) - Live
루시드 폴 (Lucid Fall) 노래 / 엔티움 (구 만월당)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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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을 보러 갔던 선운사에서,

바람에 다 진 동백꽃잎을 줏어 들며,

절 한구석에 피어난 수선화를 보며,

내내 루시드폴의 <들꽃을 보라>를 들었다.

 

가을이면, 울컥 하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루시드폴의 <바람, 어디에서 부는지>를 듣는다.

그리고 이 노래를 듣고 싶어지면, 아 가을이 왔나 보구나, 싶어진다.

봄, 가을, 겨울 내내 그의 음악는 내 BGM이다.

 

백암아트홀에서 열렸던 그의 콘서트에 갔을 때

기타 하나를 들고 어두운 무대에 앉아

여리고 부드러운 음색으로 서너 곡을 쉬지 않고 부르는 그를 보며

차마 박수조차 치지 못하고 숨도 크게 쉬지 못했던 기억,

몇개월 전 충무아트홀에서의 공연도 그랬다.

둥글게 그를 감싸고 앉아 괜히 눈물이 흐를 것 같은 감정을 추스리느라 애썼다.

 

이번에 나온 그의 베스트, 라이브 음반은,

그 공연에서의 침묵, 조용한 숨소리가 다 담겨 있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갈증을 해소해 주고 채우기에 부족함이 없다.

물론 직접 그의 앞에서 듣는 기타, 노랫소리만은 못하겠지만.

곧 신보가 나오기를, 그리고 좀더 자주 직접 공연장에서 만날 수 있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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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90일만 더 살아볼까
닉 혼비 지음, 이나경 옮김 / 문학사상사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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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제 A long way down를 우리말로 어떻게 옮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딱 90일만 더 살아볼까>는 확실히 별로인 제목이다.

하지만 정말 악 소리가 나는 표지 디자이너로 악명을 떨치고 있는

문학사상사에서 웬일로 마음 먹고 '세련된' 디자인을 보인 점은 놀랍다.

 

나로서는 닉 혼비를 뒤늦게 알았다.

알라딘의 몇몇 열혈 리뷰어들의 글을 읽고

<진짜 좋은 게 뭐지>(정말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는 제목과 표지에도 불구하고)를 읽고

멋져멋져를 연발한 게 작년 여름쯤이었으니까.

닉 혼비의 전작주의자가 되는 길을 거꾸로 밟고 있는 셈이다.

 

12월 31일, 한 고층 아파트 옥상에서

'자살 반상회'를 갖게 된 네 사람의 이야기.

나이, 국적, 직업, 성격, 남들은 흥청망청 새해맞이 파티를 즐기고 있는 순간에

몸을 던지려고 옥상에 올라온 이유 등 모든 것이 다른 사람들이다.

런던 피카딜리에서 어깨를 부딪치며 스쳤을 수는 있지만

자기 의지로는 그다지 만날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어찌어찌하여 같은 목적으로 모인 이들은 당연히(주인공이니까) 투신하지 않고

어찌어찌한 이유로 자살을 발렌타인데이까지(세밑만큼 불행한 날이니 자살하기에는 '적당한')

그리고 다시 석 달 뒤로 연기하면서

함께 소풍도 가고 파티도 하고 티타임도 가지며

(재미없게 표현하자면) 삶에 대한 의미를 다시 되새긴다.

덧붙이자면 이들은 서로를 아끼거나 격려하거나 따뜻하게 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너 땜에 내가 못 죽어, 하는 식으로 상처를 주기도 하고

끊임없이 사건사고를 일으킨다. 표나지 않게 서로에게 조금씩 변화를 주는 것은 피할 수 없지만.

 

물론 이 이야기는 3월 31일까지만 다루고 있으므로

그 이후, 6개월쯤 후 바캉스 기간에

그들이 다시 모여 '자살파티'를 할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생일쯤인 4월에 자살에 '성공'했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래도 분명한 것은, "움직이고 있지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은 누구도 아닌 자신의 몫이라는 사실이겠지.

 

신랄하고 때로는 잔혹한, 수다스럽지만 시끄럽지 않은

네 사람의 이야기가 교대로 쉴 새없이 이어진다.

스타벅스 지하에서 네 사람이 모여 생뚱맞은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며

몸서리치는 광경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조니 뎁이 영화 판권을 샀다니, 얼른 개봉하기를 기대.

 

 

누구네 집 파출부처럼 생긴 중년 부인과 소리를 질러대는 실성한 10대, 얼굴이 벌건 토크쇼 호스트... 이건 말이 되지 않았다. 자살이란 이런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건 버지니아 울프나 천재가수 닉 드레이크 같은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나를 위해서도, 자살이란 이지적인 것이어야 했다.

: 피자 배달 하다 말고 자살하려고 옥상에 올라온, 미국의 언더그라운드 뮤지션 제이제이.

 

"일관성은 상상력 없는 자들의 마지막 피난처예요."

: 역시 제이제이의 이야기. 상당히 많이 찔렸다.

 

혹시 이 책을 읽는 당신이 닉 드레이크를 들어본 적이 없다면... 그건 마치 그가 온 세상의 멜랑콜리, 모든 상처와 깨져버린 꿈을 다 끓여서 졸인 다음, 그 정수를 아주 작은 병에다 붓고 나서 마개를 닫은 것과 같다. 그리고 그가 연주와 노래를 하는 것은 그 병의 마개를 여는 것과 같아서, 우리는 그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것이다. 그의 연주를 들으면 마치 소음의 벽에 에워싸이는 것처럼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는데, 그건 소음이 아니다.

: 역시 제이제이. 당장 닉 드레이크를 들어보고 싶어지게 만든다. 엘리엇 스미스 같은 느낌일까?

 

뻔뻔한 마틴, 궁상맞은 모린, 징징대는 제이제이, 통제불능 제스 중

아무래도 제이제이가 내 마음에 제일 들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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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를 기르다
윤대녕 지음 / 창비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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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윤대녕을 편애하는 이유는 잘 모르겠다.

어두운 찻집이나 도서관 구석 자리를 찾아다니던 때 만났던

그의 작품들 <은어낚시통신>이나 <남쪽 계단을 보라> 등 이후

절절하게 열광하지는 않지만, 늘 끌리어 책을 찾게 된다.

 

이십대 초반, 난 윤대녕 작품의 낭만성이랄까,

독특한 패배의식, 어둡고 건조한 기운을 좋아했고

내심 그것을 '어른들의 세계'와 동일시하며 동경했나 보다.

 

하지만 독자인 나도 나이가 먹어서

이제 그 작품 속 주인공들과 동년배가 되었다.

물론 이제 와서 느끼는 건,

그것이 '어른들의 세계'가 아니고

윤대녕 사람들의 세계, 은어들의 세계라고 생각하지만.

 

함께 나이 먹는 작가에게 느끼는 감정이란 애틋한 면도 있는 것 같다.

10년 넘게 작품을 통해 만나온 윤대녕에게도 역시.

 

이번 작품집 <제비를 기르다>가 출간된 후

- 창비에서 펴냈다는 것도 살짝 놀라움이었는데 -

여러 신문기사들이 공통적으로

"윤대녕의 안정감" "완성" "성숙함" "긍정성"을 이야기했다.

생물학적 나이와 연륜을 무시할 수 없는 분위기 탓이었을까.

 

여전히 그의 작품 속 남자들은

느끼할 망정 폭력적이지 않고 낭만적이고 부드럽다(까칠함이 덜하다, 가 맞을지도).

다소 수동적이고 신비롭게만 느껴졌던 여자들이

좀더 앞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도 달라진 점 아닐까.

 

제비를 기르고 강화와 제주와 일산에 살고

집에 집착하고 혈육의 끈끈함에 끌리는 사람들을

조용하게, 한층 담백해진 어투로 그려낸 이 작품들을 읽으며

새삼 아름답다, 그립다는 느낌을

거부감 없이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여전히, 그의 작품들은

여행에 대한 동경을 부추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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