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서서했고, 가만했다. 그 속도가 나는 편안했다.

그 세계에서의 첫 느낌이다.

내가 만나고 있는 그들은 대개가 1930년대 생이다. 


딸기 칠하세요 하고 빨간색 색연필을 쥐어 드리면 딸기를 칠하시고, 

잎을 칠해보세요 하고 초록 색연필을 쥐어 드리면 잎사귀를 칠하신다.

다음엔 빨간 자두를 칠할 차례, 다시 빨간 색연필을 쥐어 드리자

자두 대신 딸기의 완성도를 높인 후 자두로 색연필을 옮기신다.

너무 빨리 색연필을 교체해 드렸던 것. 

시간이 1초간 멈췄다.

(내가 뭘 했던거지?)


칫솔질을  간단하게 하시는구나 했다.

다음 날, 칫솔질을 다시 도우면서 알았다. 

칫솔질 전에 입 안을 헹구기를 원하셨었음을.

자신이 원하는 방식을 요구하는 대신 그저 칫솔질이 짧아졌다.


처음엔 그들의 순응을 긍정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조금씩 알아간다. 

돕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의 자의적 판단하에서 도움이 행사될 수 있음을.


그들은 주어진대로, "할수 있음" 을 해내며, 그 유순해 보이는 방식으로  살아 낸다.
그들의 고요는  완전한 긍정이 아니었다. 

거부하는데 에너지를 쓰지 않을 뿐이다.

일방적 도움이 수차례 반복된 후에야 

난 나의 오류들을 은밀히  알아챈다.

점자를 읽듯 더듬더듬.

채점 결과 없는 시험을 치른다.


주간보호센터 봉사 중  서**   어르신의 딸기 색칠 관찰   24.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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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안 84. 그의 완주를 지켜 봤다.

무너지는 몸뚱이의 하중과 무릎, 발목의 고통을 알 것 같았다.

주저 앉기를 여러번 과연 뛸 수 있을까. 있을까.

이미 완주했다는 결과는 보도를 통해 알고 있었음에도 

그가 주저앉을 때마다 달리기 중단이 명백타당해보일만큼 그의 고통은 진지했다.

지금껏 한번도 경험하지 못했을 그 무시무시한 통증을 그는 담담히 인정하고 여러번 다시 일어 섰다.

하나, 둘, 셋.  일어설 힘만 있다면 그 세 발자국은 달리기를 지속할 수 있는 마중물이 되는데...

오로지 자신의 발 앞을 주시한 채, 주위의 응원에 눈길 주지 않고 

본인의 레이스에 그 특유의 냉정한 집중력을 보이던 그가 

고개를 돌려 누군가를 바라본 장면이 있었다.

끈을 잡고 뛰고 있는 두 남성. 기안 앞에서 뛰고 있던 시각 장애인 참가자와 도우미였다.

그들을 추월하며 기안은 몸을 돌려 그들을  보더라.

이해하기 힘들다는 것인지 신기하다는 것인지  기안의 표정을 정확히 읽을 수 없었으나  

편안한 눈길은 아니었다.

기안은 어떤 생각을 했는지 모르지만,  시각 장애인 참가자의 레이스에 난 눈물을 찍어냈다.

그의 한계 극복을 보면서 내가 현재 숨막혀하는 곤란이 순식간에 객관화되었다.

스스로가 부끄러웠고 즉시 나만의 사로잡힘에서 빠져나왔고 괴로움은 사라졌다.


기안은 포기없이 완주 했다.

어쩌면 도전 자체로 충분한 완주의 의미가 있었으리라.

결승점 앞에서 기안의 미소는 갓난 아이의 것처럼 보드랍고 순했다.

그의 달리기는 일등이 아닌 러너들, 

그 절대 다수인 이들의  도달과 성취와 집념과 통증과 인내를 거칠지만 정직하게  담아냈다.

결승점에 집중되어 묻혀있던 그 진가를, 달리기의 감각적 서사를 목격할 수 있는 참으로 드문 경험이었다.


그의 달리기를 떠올리며 난 평소보다 더 힘을 내 13K씩 뛰고 있다.

내 나름 매일의 성취에 기안의 달리기는 동력이, 동행이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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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영역이다. 

더 이상 내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우주적 거리가 한 치도 좁혀질 여지 없이

견고하게 자리했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오랜 시간 보살폈기에 여전히 팔팔한 돌봄의 관성과 

노쇠해지는 자식에대한 내 영향력 사이의 간극이

지금 이 혼란의 크기다. 

5년 전 한 차례 큰 아이를 겪으며 열린 줄로만 알있던 그 경계는 엄연했고

지금 날카롭게 나를 할퀴는 것 같다.

허나 내가 그 경계를 세운 당사자다.


갱년기, 노화로인한 신체적, 심리적 위태로움이

이 자연스런 흐름에 공허라는 이름을 짓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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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산골에 살던 아낙이 어느 하루, 외지인의 방문을 받았다.

집 주인은 먹거리를 내 놓았는데, 방문한 이가 너무 맛있어 하며 돈 드릴테니 좀 파시라고 청했다.

아낙은 무심한 듯 단호하게 말했다.


" 못 팔아, 그런데 그냥 줄 수는 있어. 너무 귀해서 돈 받고는 팔 순 없지 "


순박함으로 위장한 이 심오함이 긴 세월 띄엄띄엄 나를 붙드는 이유일까.

누구나 추종하고,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주류 가치를 전복시키고

강펀치를 날린 집주인의 줏대에 나의 시공간은 일시정지 됐다.

값을 매길 수 없는 귀한 것이기에, 값을 매겨 그것의 가치를 제약하지 않겠다는 배짱.

값이 싸서 무료가 아니라 값을 정할 수 없어서 무료다. 

마음의 고요, 사람을 움직이는 힘 등 정작 중요한 것들은 절대 돈으로 접근할 수가 없고, 가격표나 바코드가 없다.

그래서 누구나 가질 수 있지만, 그러나 아무나 가질 수도 없다.

물건의 필요보다 물건에 붙은 가격을 다룰 수 있다는 그  순간에 도취된 소비가 과시되고 광적으로 추앙받는 지금 이 시대.

TV 채널을 돌리다 잠깐 스친 이 장면이 해법이 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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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를 하며 라디오를 듣는다.
박하선의 씨네타운 오프닝으로 소개된 영화.

엄마의 화장대에서 뜯지도 않는 편지를 발견한다.
딸이 어릴 적, 엄마에게 쓴 편지.

' 저를 회초리로 때려줄 순 없으세요? 
 손에 잡히는 대로 때리시니 마음이 너무 힘들어요.
 제발 저를 규칙을 갖고 대해주세요. '

마음이 미어지는 편지죠. 
세상에 당연한 모성과 부성은 없습니다.
그래서 절대 부모가 돼서는 안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선택이라는 생각이 없었다.
남들이 다 하는 결혼, 출산. 그저 관습대로 그 길을 걸었다.
꼬물꼬물 예쁜 아이를 얻어 내 멋대로 키우는 행복을 당연시 했다.
본인의 의지와 상관 없이 이 세상에 놓여지는 아이의 입장 따위는 안중에 없었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에 대한 대답은 '누가 낳아 달랬어 ? ' 다.
한 생명을 낳아 키우는 데 따르는 책임, 나를 갈아 넣는 인내 없이 
창의와 돌발의 결정체인 아이를 수학 공식 취급한 결과는 참담했다.
아이는 기승전결이 아닌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스펙터클한 블럭버스터였다.
내가 쏜 화살을 정통으로 맞으며, 배우지 못하고 건너뛴 것들과 마주쳐 지금도 안절부절 한다.


 


 하지만 인생에서 해결하지 못하고 건너뛴
 본질적인 것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담요에 싸서 버리고 떠난 핏덩이처럼
 건너뛴 시간만큼 장성하여 돌아와
 어느날 내 앞에 무서운 얼굴로 선다


 
 <건너 뛴 삶>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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