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당 서정주 평전
이경철 지음 / 은행나무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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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실 서정주의 시가 왜 좋은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이다. 여기서 좋은 시라고 하면 지극히 주관적인 감상의 차원을 말하는 것으로, '좋은 시'의 객관적인 조건들과는 무관하다. 서정주의 시를 '좋은 시'라고 하는 글을 읽으며 '아, 그래서 서정주 시가 좋은 시구나'라고 어느 정도 공감이 가는 부분도 있지만, 여전히 서정주의 시를 읽으며 감동을 하는 편은 아니었다.

 

이번에 서정주의 평전을 읽으면서도 초반부터 너무 서정주가 얼마나 위대한 시인인지를 강조해서 거부감이 없지 않았다. 김수영과 김춘수의 양대 산맥 이전에 서정주가 있었다는 평가는 과연 타당할까. 서정주의 삶을 돌아보면서도 한국 현대사와 시사, 그리고 시인의 생애가 얼마나 난맥상으로 얽혀있으며 또한 그에 따라 기존의 평가들이 다소 도식적으로 위에 말한 세 가지 맥락의 역사들을 구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서정주의 시는 '전통' 서정시라고 분류되지만 사실 그의 초기시부터를 '전통 서정시'의 계보 속에 넣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화사집>에 나오는 그 징글징글한 이미지들에서는 원시주의의 이미지를 발견할 수 있는데, 이것은 당시 모더니즘 시인이나 비평가였던 김기림으로부터 서정주의 시가 극찬을 받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서정주와 함께 생명파로 분류되는 오장환의 시만 해도 야수파적인 색채가 짙다. 이런 시를 썼던 서정주가 어째서 이후에는 '전통 서정시'라고 명명되는 시를 창작하기 시작했는가. 이것이 문제적인 것이 아닌가.

 

이와 관련해서 서정주, 하면 늘상 이야기되곤 하는 친일 부역 문제와 전두환에 대한 지지발언 등 '무뇌아적' 정치행보라고 일컬어지는 그의 행동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 지를 생각해볼 수 있다. 이 문제만 나오면 문학과 정치는 분리해야 한다거나 분리할 수 없다거나 항상 반복되는 이분법적 논의가 나오는데, 사실 이 문제는 분리될 수 없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렇다고 서정주는 친일 문학자니 그의 시는 가치가 없다고 폄하될 수 있는 간단한 문제도 아니다(특히 서정주처럼 위대한 시인은 이러한 문제로부터 면죄부를 받을 수 있다는 식의, 그러니까 위대한 시인이 아니면 문제삼아도 된다는 식의 논리는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오히려 이러한 정치적 성향과 그의 문학적 성향이 어떻게 맞물리고 있는지가 중요하면 이는 최현식 선생님의 연구(서정주 시의 근대와 반근대)를 비롯해 최근의 국문학 연구들이 지향하는 방향이기도 하다. 다만 여기서 덧붙여서 드는 생각은 그렇다고 문학 텍스트에서 친일의 내적 논리를 발견하는 방식, 즉 서정주의 전통 서정시로의 회귀, 샤머니즘 지향 등을 바로 파시즘적인 것으로 해석할 때의 문제가 아닐까. 이런 논리로는 서정주의 시를 '좋다고' 하는 이들의 관점과 완전히 양립하게 된다. 한쪽에서는 위대한 시인이라고 하고, 한쪽에서는 그것이 파시즘의 가능성을 배태하고 있다고 한다.

 

여기서 나는 내가 왜 서정주의 시에 그다지 매력을 느끼지 않는 걸까, 라는 의문으로 돌아왔다. 이는 다분히 감수성의 문제일 가능성이 높지만, '전통' 서정시의 게보에 있으며 샤머니즘의 영향 아래 설명할 수 있는 김소월의 시를 읽을 때와 서정주의 시를 읽을 때의 느낌이 (나로서는) 전혀 다르다는 것은 이때의 감수성이 어떠한 것인지가 궁금해졌다. 이런 점에서 여전히 국문학계 내에서도 '샤머니즘'을 어떻게 설명할 지에 대해 논의가 정리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김현만 해도 문지를 창간할 때 샤머니즘을 철저히 배격해야 한다고 했다가 말년에 가면 전통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이에 대한 태도를 전환하는 것 같다. 시 연구에서는 샤머니즘이 일종의 만능키처럼 쓰일 때가 많은데, 그러다가도 파시즘에 경도되었던 친일 문학자에 대한 연구에서 샤머니즘은 함께 매도당하기 일쑤다.

 

서정주 평전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삼천포로 새 버렸다. 최근에 고은이 쓴 이중섭 평전을 비롯해서 평전들을 읽으며 해당 인물들의 생애뿐 아니라 당시의 시대상까지 읽어보려고 하고 있는데 재밌는 내용이 많다. 고은이 쓴 평전이 특유의 입담과 생생한 증언들이 인상적이었다면, 이경철의 서정주 평전의 경우 기자 출신이자 현직 시인답게 풍부한 자료와 특유의 문학적 감식안을 만날 수 있다. 논문과 관련해서도 서정주가 쓴 시 <꽃>이 그의 시 세계에 있어서 획기적 전환점을 가져왔다는 부분을 새롭게 알게 되어서 굉장히 감사했다. 앞서 이야기한 시인의 생애와 시 세계의 변화를 연결시켜 보았을 때 이때의 전환점은 결코 작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이것이 1943년, 그러니까 서정주가 문학소년의 열정과 패기를 단념하고 매문에 들어서면서 일종의 '세속화'의 과정을 거치던 시기였음을 생각해보면, 이러한 전환점은 복잡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니까 단순히 긍정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는 지점이 있다. 논문에서는 이 부분을 파고들어볼 생각이다.

 

서정주는 이중섭이 그러했듯, 전쟁을 거치면서 정신줄을 놓아 버린다. 헛소리를 듣기 시작하고 의처증이 생겨서 아내와 아들을 때리기도 하였으며, 말이 나오지 않는 지경에 이르러 괴로운 시절을 보냈다. 이승만 평전을 허락 없이 발간했다가 그가 겪었던 공포의 시간을 떠올려보면 그가 얼마나 심약한 인간인지를 알 수 있다. 험난한 시기에 시인은 그 자신을 지키기조차 벅찬 것이다. 그러면서도 생활을 이어가기 위해 관청에 취직하기도 지인들에게 부탁해 교사로 지내기도 하면서 살아간다. 과연 그에게 산다는 건 무엇이었고, 시란 무엇이었을까.

 

서정주 시는, 또한 그의 삶은 그래서 나에게 고민을 던져준다. 이념에 빠져서 문학을, 인간을 단죄하는 데 그 누가 찬성하겠는가. 그렇다고 윤리적인 고뇌가 느껴지지 않는 문학 역시 마냥 긍정할 수 있을까. 다만 서정주가 자신의 시에 담아내려 했던, 그 떠돌이의 '에스프리'라는 것이 무엇일지에 대해서는 조금 더 알아보고 싶다. 이제 다시 서정주의 시를 읽을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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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셀로나에서 시민들이 참여하는 마라톤 대회가 열리는 것을 보고 어쩐지 이거다 싶었다.

지난 2월에 중국 시안에 갔을 때 성벽에서 마라톤 대회가 열린다는 얘기를 듣고 마라톤을 하는 사람들은 어디를 가든 뛰어보고 싶은 생각이 드나보다, 라고 별종으로 여겼었는데 낯선 도시의 공기를 가르고 땅을 밟고 거친 호흡을 내뱉으면 뛴다는 것이 갑자기 꽤나 매력적이라고 생각되었다.

 

아마 하루키나 김연수의 수필들을 읽으며 나도 한번 뛰어볼까 하는 생각이 없었던 것도 아니기 때문에 마라톤을 준비해보자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박사논문을 준비하면서 박사논문 이외의 것에 정신을 집중하면서 스트레스를 풀어야 겠다는 생각도 작용했고, 또 내년이면 여러가지 개인적인 사정으로 더더욱 '마라톤'이라는 긴 준비과정이 필요한 도전을 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기 때문이리라.

 

어쨌든 10월 중순이나 11월 초순에 열리는 마라톤 대회 중 하프 마라톤에 도전해볼 생각인데, 몸 상태 등으로 봐서 어떤 대회가 될 지 결정될 것 같다.

 

마라톤 준비를 하면서 참고한 책은 '마라톤 풀코스 16주 완주 프로그램'이라는 책이다. 절판 되어서 학교 전자도서관에서 대충 책을 훑어봤다. 여기서 제시하고 있는 것은 대회 16주 전부터 하루에 4일씩 정해진 거리를 뛰는 것인데, 16주 이전에 예비훈련으로 11주 정도 해야 할 목록을 제시하고 있다.

 

일단 오늘부터 일주일 간 3일은 30분동안 보통속도로 걷기(1km 10~12.5분)으로 제시되어 있었다. 집 근처 공원이 약 400m 정도 되어서 8바퀴 정도를 걷거나 뛰기로 했다. 걷기만 하기에는 영 심심해서 뛰면서 시작했는데, 8바퀴에 20분정도 걸린 것 같다. 허벅지가 약간 뻐근한 것이 내일 근육통이 생길 것 같은 확실한 예감이 들지만 뛰고 나니 기분은 엄청 상쾌하다. 이렇게 앞으로 이틀간 더 걷거나 뛰고 다음주에는 훈련일을 하루 늘려 4일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다음주에는 빠른속도로 걷기(1km 8~10분) 3일, 그 다음주에는 4일 이런 식으로 일단 계획되어 있다. 시간도 4주차부터는 30분에서 40분으로 늘어난다. 이런 식으로 한 주 한주 해나가다보면 정말 하프 마라톤을 완주할 수 있게 될지. 목표를 정해놓고 이뤄나갈 생각을 하면 어쩐지 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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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성의 종말 경성대문화총서 1
지안니 바티모 지음, 박상진 옮김 / 경성대학교출판부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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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근대성의 종말>을 다 읽었다. 교정을 제대로 보지 않아서일까. 너무 많은 오타가 눈에 띈다. 어떤 부분은 문장이 이어지지조차 않아서 당혹스러웠다. 그럼에도 니체와 하이데거의 허무주의를 다루는 관점에 있어서 흥미로운 책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이 책의 저자 바티모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여타 포스트 모더니즘 이론가들에 비해 낯선 이름인 것이 사실이다. 이 책 역시 몇몇 흥미로운 관점들을 접할 수 있었던 반면에 심도 깊은 논의가 이뤄지지 않는 점은 아쉬웠다.

가령 허무주의를 '숙명(fate)'가 아니라 '운명(destination)'이라고 한 대목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내가 논문에서 다루려고 하는 관점과 일치해서 그렇겠지만. 여기서 '운명'이라는 것은 그것이 정해진 순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도달해야 하는 종착지(destination)의 의미를 지닌다는 것으로 읽을 수 있겠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비롯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근대에 대해 지니는 위치를 나름 명쾌하게 설명하는 점도 재밌다(진정성의 파토스!). 들뢰즈를 니체의 관점을 오독했다고 비판하는 부분 역시(<차이와 반복>에서 들뢰즈가 시뮬라크르에 영광을 돌리는 것은 니체가 쳐놓은 올가미에 걸린 것이라는). 

 

책 내용을 따라 읽어보면, 우선 역자 서문에서 지적하듯, 바티모는 <존재는 자신의 위치를 부동의 것으로 보지 않는 "약한" 입장을 고수함으로써, 자신의 자리의 변화에 따라 끝없이 변화로운 시각을 가질 수 있게 된다.>(14)고 본다. 여기서 '약한' 입장이라는 것이 허무주의적인 태도를 가리키는 것이다. 신이라고 하는 절대적인 가치가 무너진 이후 인간은 각자 '약한'입장에 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는데, 그것이 주는 장점을 받아들여 허무주의를 일종의 운명으로 보자는 것이다. 이것을 하이데거의 용어로 설명하면 세계에 대한 '열림'의 태도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즉, 허무주의의 계획은 모든 이성체계가 설득의 체계라는 것을 폭로하고 형이상학적 합리적 사고의 기반이 되는 논리가 일종의 수사임을 보이는 것이다. 이런 데서 장식으로서의 예술을 옹호하는 관점이 출현하는데, 이는 또한 데리다의 입장을 상기시킨다. 또한 프루스트의 소설을 떠올리게 만든다(자질구레한 것들에 대한 프루스트의 그 많은 수다들에 진리가 있다). 

 

그렇지만 바티모가 '심화적 극복'이라는 개념을 고수하는 것은 다 나름의 이유가 있다. 그가 한국어판 서문에서 밝히듯이, 로티와 데리다는 형이상학적 보편주의를 아무 위기도 없었다는 듯이 계속 추구하거나 그 보편주의를 죽은 말처럼 취급하기 때문이다. 이들과 달리 바티모는 <약하고 세속화된 어떤 것을 빌어><합리적 보편성의 개념을 재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세속화라는 개념이다. <신성한 지평에서 떨어져 나간다고 해서 종교에서 손을 뗀다는 말은 아니다. 그보다 오히려 성스러움의 진리를 더욱 정통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기독교의 정신이 민주주의와 평등, 그리고 사회적, 정치적 권리의 근대적 발명에서 어라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왔던가를 생각하면>(60)서 바티모는 <우리의 선택은 무제한적이지 않으며, 우리 선택의 기준은 어떤 영원하거나 초역사적인 진리를 추정한다든지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운명 자체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찾아야 한다>(62)고 말한다. 아름다운 문장이 아닐 수 없다. 

 

이에 따라 우리가 세계의 경험에서 만나는 것은 해석에 불과하게 된다. 세계의 사물은 우리의 주관적 가치에 의거해 해석된다. 역자의 설명처럼 이는 데리다, 들뢰즈, 푸코, 리오타르의 철학과 연결된다. 이런 점에서 근대는, 혹은 허무주의, 혹은 세속화, 역사의 종말 등은 극복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심화적 극복'(이것은 하이데거가 사용한 개념이다)의 대상이 된다. 도그마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를 니체의 '성취된 허무주의'와 하이데거가 존재가 교환가치로 변형된다는 하이데거의 주장과 연결되는데, 이와 같이 존재를 가치로 소비한다는 것을 긍정한다는 점과 그리고 더불어 인문주의의 위기를 주체성의 위기로 보면서도 그것을 부정하지 않고(슈펭글러나 블로흐와 달리) 이를 통해 오히려 기존의 형이상학 전통을 심화시키면서 극복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쳐나간다는 것이 재밌는 지점이다.

 

물론 하이데거가 바티모의 주장대로 인간이 가치로 소비된다는 것을 어느 정도라도 긍정하고 있는지(이것은 기존에 내가 알던 하이데거와는 완전히 다르다, 그러니까 하이데거가 반인문주의자라는 바티모의 지적은 타당한가?) 또 그가 말하는 심화적 극복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가 여전히 모호해서 이 부분을 논박해볼 필요는 있을 것 같다. 특히 하이데거와 관련해서는 그의 예술론에 등장하는 '대지'의 개념이 아주 중요하게 다뤄질 수 있겠다.

<대지는 그 자체로서의 실존이며, 언제나 새롭게 주의를 그는 어떤 것으로 표명되는 구체적인 나타남이다.>(148)

<대지는 예술작품의 지금 여기이며, 모든 새로운 해석은 언제나 그리로 돌아가고 언제나 새로운 읽기로 나아가며 따라서 새로운 가능한 세계로 이끄는 것이다.>(149)

하이데거의 '대지' 개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 '보여줌(Zeigen)'의 의미이다. 여기서 바티모는 하이데거의 말을 직접 인용한다.

<"언어는 보여줌이다. 그러나 사물을 보여주기 위한 도구라는 말은 아니다. 보여줌은 특히 모든 사물이 사각형의 거울 게임에서 비추어지도록 만든다는 의미에서 "나타나게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 말이 파괴되는 영역인 보여줌은 사물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을 그 사물이 속하는 세계의 지역들의 틀 내에서 또는 거기에 가깝게 위치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필멸의 존재이기 때문에 그 사각형에 속한다.>(157)

<사물 자체로 나아간는 것은 그 사물을 대상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현존재가 무엇보다도 스스로의 죽음을 경험하는 언어의 표류게임에서 그 사물을 만나는 것을 의미한다.>(161)

 

하이데거에게 시가 중요한 것은 <언어가 부서지는 것, 또는 파괴되고 부서지는 것으로 떠오르는 곳은 다른 어떤 곳보다도 바로 시에서이기 때문이다>(162) 하이데거는 "'이다'는 말이 부서지는 곳에서 떠오른다'고 <예술작품의 근원>에서 말한 바 있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의 역설을 견뎌야만 시가 된다. <파괴는 곧 기념비와 공식의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말의 완전성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약화와 죽음의 모습에 순응하는 것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그리스 신전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자연스러운 사물"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공식과 기념비가 되는 것에서는 시적인 말의 파괴의 두번째 의미가 예고된다. 만일 기념비가 되면서 시적인 말이 죽음의 모습 안에서만 지속하는 것으로 준비되면서 파괴된다면, 기념비성은 또한 드러냄과 감춤의 이중적인 요소들로 명백하게 특징지워지는 진리의 일어남의 양상을 시사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하이데거가 말한 세계와 대지의 대립 속에서 실행되는 "진리의 작동"으로서의 예술작품의 정의에 다름 아니다.

 

한편 예술작품에서 진리가 작동한다고 보는 니체와 하이데거의 관점은 바디우의 예술론을 상기시킨다(아마도 이는 바티모가 8장에서 비판하는 가다머와 마찬가지로 바디우가 예술의 윤리성을 중시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나 이렇게 되면 진리의 허무주의적 성격을 말하기 어렵다), . 바디우는 예술을 다시 철학보다 하위적인 항목으로 강등시킨 감이 있는데 하이데거나 니체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 <진리는 사건이기 때문에 기념비이면서 언어의 파괴의 모습으로 일어날 수 있다. 시의 경험에서 우리는 형이상학적 진리를 회상할 수 있지만, 그 진리는 오직 그 이전의 거드름을 상실한 어떤 것으로 다가오며, 모든 흔적처럼, 신화와 기억처럼, 필멸의 특징을 지닌다. 따라서 시가 기초하는 의미의 세계는 토대를 결여한 세계다.>(32) 역자의 설명이다. 형이상학이 죽음을 맞이하였으므로, 철학의 역할은 그 죽음을 확인시켜주는 것일 뿐일까. 사회학, 인류학, 정신과학 등 새로운 학문 분과의 출현은 형이상학의 죽음과 무관치 않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예술이다. 예술은 근대성의 논리에서 벗어나 역사와 시간을 경험하게 하는 비연속적 역사성의 미적 모델이다. 여기서 <탈근대의 미적 의식은 우리에게 허무주의적이라 불리는 진리의 약한 경험을 제공한다>(36).

 

9장 문화인류학에 대한 로티와 바티모의 견해차를 보면 '심화적 극복'의 개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로티는 문화인류학이 타자의 문화를 해석하려는 해석학적 소명을 지니기 때문에 중요하다고 하는데 반해, 바티모는 그것이 순진한 환상일 수 있음을 지적한다. 하이데거가 <타자의 문화와의 대화가능성은 지구와 인류의 완벽한 유럽화에 의해 위협당한다>라고 지적한 것을 들면서 말이다. 가령 인류학자들이 지구촌 어딘가의 원시부족집단의 평화로운 삶을 보여주면서 그것을 근대의 폭력성에 대한 치유로 발견할 때, 그러한 시선 역시 근대적인 시선이라는 점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 '심화적 극복'의 의미가 아닐까 싶다. 맞다. 이는 역시 데리다의 '해체'를 생각나게 한다. 역자도 이렇게 정리한다. <탈근대의 경험은 서구문화에서 해체와 함께 처음으로 가능하게 되었다.>(40) 이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저자가 데리다의 해체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을 함께 참고할 수 있다. <해체는 완전무결하게 보이는 그럴싸한 겉치레가 차연의 틈에 의해 전면적으로 균열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54)

 

특히 8,, 9, 10장을 정리하는 다음 부분은 이 책의 내용을 잘 정리하고 있다. <존재의 경험은 시간의 폐허를 가로질러 오는 전달의 수신이자 응답의 경험이다. 그래서 존재론은 해석학이 된다. 해석학적 존재론의 입장에서 볼 때 존재 자체로 남는 것은 없고 오직 파편과 흔적, 잔여물만 남는다. 그래서 존재는 약하다. 이런 식으로 존재의 경험에 접근할 때 우리는 심화적 극복의 개념에 의거하여 전통에서 전달된 것을 다시 모으고 해석하고, 따라서 언제나 비틀고자 한다.>(역자의 말, 41)

 

마지막으로 역자는 바티모가 서구의 입장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점을 다소 비판적으로 보는 것 같은데, 이는 바티모의 관점에서 보면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푸코가 그러했듯 자신이 알지 못하는 현실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는 것은 너무나도 윤리적인 태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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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 여행의 팁


1. 바가지를 두려워말자. 물가가 싼 나라더라도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바가지는 어쩔 수없다. 그것때문에 지갑을 닫고 있다가 갑자기 싸다는 생각때문에 충동 구매 하다가는 더 큰 뒤통수를 맞을수도.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걸 합리적인 가격에 사는 게 필요.


2. 여행준비를 미리 해두자. 바르셀로나에 오기전에 조지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를 읽는다든가 카탈로니아 박물관에 가기전에 로마네스크 양식에 대해 공부한다든가 이탈리아에 가기전에 단테의 신곡을 읽는다든가, 괴테의 이탈리아 여행기를 본다든가, 프라하에 가기 전에 <카프카의 편지>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고, 터키에 가기 전에 오르한 파묵의 소설들을 읽는다든가. 여행책자로는 얻을 수 없는 무언가를 얻을 수 있다. 책에서 보았던 바로 거기에 자신이 있다는 그 느낌. 이건 책뿐만 아니라 영화로도 가능하다. 모로코 카사블랑카에 가기전에 영화 <카사블랑카>를 본다든가.


3. 사진도 좋지만 눈으로 많이 감상할 것. 사진을 찍느라 놓치는 풍경과 자기만의 느낌을 누릴 여유를 잃어버릴 수 있다. 단순히 그 장소에 다녀왔다는 기념이 아니라 그 장소에서 자기가 느꼈던 기분을 기억할 수 있도록 그림이나 글을 쓰는 것도 한 방법.


4. 자기만의 여행 루트를 정하기. 여행책자에서 추천하는 것은 참고만하고 되도록 자기만의 여행루트를 짜보는 것이 좋다. 여행자마다 여행경비도, 루트도, 여행에서 얻고자 하는것도 다르다. 그런데 남들과 똑같이 다니려고 아등바등 할 필요는 없다. 최우선순위를 정하고 무리하지 말것.

 

5. 여유가 된다면 한 곳에 오래 머물자. 꼭 가봐야 한다는 어딘가를 찍으면서 이동하는 것도 물론 의미 있는 일이지만 여행에서 가장 좋았던 때는 별 걸 안하더라도 한 곳에 오래 머물때가 아닐까 싶다. 그 도시가 조금씩 익숙해지면서 지도를 보지 않아도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바쁘게 여행을 할 때는 얻을 수 없는 여유와 행복을 느낄 수 있다. 낯설지만 더 이상 낯설지만은 않은 어떤 기분을 느껴볼 것.

 

6. 여행에 필요한 정보를 가능한 많이 수집할 것. 한인 숙발업소를 이용하거나 게스트하우스의 다른 여행객들에게 많이 물어보거나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는 이미 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이 올린 블로그를 뒤지면서 많은 정보를 얻는 것이 좋다. 어느 여행지를 가나 자신은 유아 수준의 지식밖에 가지고 있지 못하다. 단순히 여행경비를 절감하고 안전한 여행을 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알아야 하는 정보들을 미리 알아두는 것은 필수적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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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포르투갈에서는 첫날부터 신나서 돌아다녔다. 제로니무스 수도원을 시작으로 벨렘탑, 에그타르트(계피가루 날리며 뿌려먹음, 친절한 할머니가 트램 안에서 손닦으라고 휴지주심ㅠ). 그리고 토요일이어서 안토니오 성당에서 미사 드리는 것도 봤다. 찬송하는 거 녹음했으니 들으면서 당시 기분을 떠올릴 수도 있을듯.  성당도 화려했고 경건하게 미사드리는 신자들도 좋았고. 그래서 나도 빌었다. 여행 잘 마칠 수 있게 해달라고. 그치만 저녁은 꽝. 포트와인 마셔본건 좋았지만 음식이ㅜㅠ 가스파초인데 포르투갈에서 유명한 문어가 들었다고해서 먹었는데 무슨 종이짝처럼 얇은 문어에다가 바게뜨 올려서 먹는게 12유로인가 했다.
저녁에 실망하고 유명한 28번트램을 타고 어두운 골목을 누볐다. 트램에는 집시처럼 보이는 이들이 관광객들과 타고 있었다. 가난하고 지쳐보이는 여인들. 나도 모르게 소지품을 쥐었다. 포르투갈은 가난한 도시였다. 낡은 건물들. 밤이 되면 조금만 으슥한 곳으로 가도 위험해보인다. 무너진 건물이 그대로 방치돼 있는 곳도 꽤 많았다. 28번트램종점에서 내려서 야경을 보러 산타주스타 엘리베이터 타러 갔다. 조금 기다렸다 올라가서 야경을 보는데 생각보다 멋졌다. 뒤쪽으로 하얀 건물이 있었는데 그게 성당이라든가. 그 건물이 멋졌다. 리스본 지진 때도 버틴 건물 뼈대가 그 뒤쪽에 있다는걸 나중에 알았다. 으슥한게 무서워서 안간게 조금 후회되지만. 포르투갈은 좀 무섭다. 사람들은 친절한거 같은데 뭔가 도시분위기가 어수선한 거 같다. 그래서 마음껏 돌아다니지는 못했다. 게스트하우스 분위기도 적응이 잘안됐는데 바깥과는 달리 너무 활기찬 느낌이랄까. 그치만 여기 시설이랑 조식은 다른 호스텔에 비하면 꽤 괜찮은 편이었다.

 

3.6
둘쨋날은 신트라에 갔다. 날씨가 전날보다 추웠다. 우선 로카곶에 가서 간단하게 바다구경하고 다시 역으로 돌아와 페나성에 갔다. 이상하게 속이 안좋아져서 점심은 먹지 않았다. 페나성은 뭔가 깜찍하고 이뻤다. 카페에서 커피랑 돼지고기 든 샌드위치 먹었는데  이때 일일승차권을 영수증이랑 같이 버린듯. 시련이 시작됐다. 페나성에선 바람이 씽씽. 다행히 실내에 들어오니 비바람이 시작됐다. 무어성을 바라보며 실내 구경.
성 내부도 나름 화려했다. 다소 음침한 분위기도 느껴졌는데 날씨 탓이려나. 전화기나 각종 도자기류를 비롯한 사치품들이 많았다. 식탁도 엄청 화려. 안에 볼게 많아서 비싼 입장료가 그나마 덜 아까웠다. 식당에서 먹은 대구요리도 맛있었다~그치만 나오는 길에 일일승차권 잃어버린걸 알고 급 좌절. 원래 다른 성도 가보려다가 역으로 돌아가기 시작. 약수터가서 주민들과 물도 뜨고 기념품가게 거리에서 이쁜 도자기 닭도 샀다. 길을 잃어버려서 좀 돌았는데 고즈넉한 거리여서 나쁘지 않았다. 문제는 정말 코앞에서 기차를 놓쳐서 한시간이나 추운역에서 기다린것. 하도 기차가 안와서 그게 막차인가 싶어서 식겁하기도. 기차시간 보는건 어렵다. 야간버스 타야되서 게스트하우스에서 가방 찾고 스타벅스 화장실 이용 후 버스터미널로 갔다. 그저 버스 탄것만 해도 감사. 야간버스는 고통스러웠다. 불도 안꺼주고(안대 낌) 운전수 아저씨가 음악틀고(귀마개 함) 누가 옆에 앉아서 불편하게 자야했다. 7시간쯤 달려서 새벽 5시반쯤 세비야 도착. 허리가 아팠다.
트램 안다니는 거 같아서 기다리다 6시 넘어서 나가서 트램 타고 숙소로 갔다.

 

3.7
숙소 라운지에서 8시 정도까지 좀더 잤다. 그리고 아침먹고(생각해보니 친절한 숙소네. 체크인 전인데도 밥도 주고) 짐맡기고 시내 구경 나섰다. 대성당이 12시부터 문연다고 해서 알카사르 궁전부터 갔다. 알카사르가 이슬람 세력이 세운 요새라는 의미라는데. 비 오고 추워서 구경할 여력이 안됐다. 숙소 카운터 보던 여자애는 여기가 대성당보다 이쁘댔는데 글쎄...잘 모르겠다. 내부에도 구경할 것도 별로 없고. 그저 007에 나왔다는 사자의 문이랑 정원 정도가 기억에 남는다. 나와서 보데가 어쩌구하는 타파스 집에 가서 하몽치즈바게뜨 먹었는데 그저 그랬다. 타파스를 시켰어야하는데ㅠ  먹고 바로 대성당으로 가서 히랄다탑에 올랐다. 히랄다탑은 세비야의 상징이라 할만하다! 거기서 보는 풍경이 정말 멋졌다. 세비야 너무 좋아~ 내부는 추워서 오래 있기가 힘들었는데도 성가대와 방처럼 꾸며진 수많은 방들 구경하느라 나오기가 힘들었다. 거대하면서도 정교하게 배치된 건물이었다. 정말 어마어마하다고밖에. 계속 위를 올려다보게 된다. 우와, 를 연발하면서. 겨우 성당을 나와서 다시 숙소로 와서 씻고 쉬었다.

그러다 4시쯤엔가 투우장을 거쳐서(투어비가 비싸서 안에는 못들어가고)  강을 따라 발견의 탑 지나 세비야대학(카르멘의 무대인 담배공장으로 쓰였던 건물이란다)과 스페인 광장 보러갔다. 세비야대학 앞에서 먹물빠에야 먹었는데 아무래도 빠에야는 내 타입은 아닌듯. 관광지라서 그런것도 있겠지만 덜익은 듯하면서 녹말 맛나는게 별로다. 여튼 그래도 밥먹으니 든든했다. 스페인 광장에서 해지는 거 봤는데 우왕~진짜 오길 잘했다 싶었다. 야경만 봐도 된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랬으면 그 이쁜 돌색깔을 보지 못했을 거다. 플라맹고 공연 때문에 발걸음을 돌려야했지만 해질때 풍경은 잊지 못할듯.
7시반에 예약한 엘 아레날에 갔다. 샹그리아 시켜서 먹었는데 과일맛은 거의 안나고 알콜맛만 났다. 실망. 세비야플라멩코는 나무바닥 공연장이어서 탭댄스같은 느낌이 난다. 남자, 여자 무용수가 번갈아 나왔는데 이 춤은 예상과는 달리 남자무용수를 위한 거였다. 엄청 정열적이어서 완전 빠져들었다. 플라멩코는 춤과 함께 노래(칸테플라멩코)와 기타(토케플라맹코)가 어우러져야 한단다. 나는 두명의 기타리스트 중 한명에게 꽂혀서 그 사람의 연주와 환호와 발구르는 걸 유심히 봤다. 영화배우 스티븐 시걸 닮았는데 엄청 프로페셔널해보였다. 박자가 중요한 춤이라서 박수 치면 안되고 뭐라고 공연이 끝났을 때만 올레, 라고 외쳐야 된다는데 그냥 좋아서 막 소리지르고 그런듯. 샹그리아 먹었더니 더 업돼서~ 아 너무 좋았다. 기분이 좋아서 허리 아픈데도 스페인 광장 야경 보러갔다. 야경이야뭐..오히려 대성당 야경이 더 멋지더라.

3.8
넷쨋날 일정이 엄청 빡셌기 때문에 일찍 잤다. 버스타고 타리파로 가서 1시에 배타는 거였는데. 타리파가 종점도 아니어서 자지도 못하고 버텼다. 근데 중간 정류장에서 오래 머물다가 버스가 25분이 아니라 35분 넘어서 타리파에 도착했다. 마음은 급하고 택시는 안보여서 구글맵 보고 뛰다시피 걸었다. 더워서 땀나고 장난아니었는데 구글맵도 삥 돌아가는 길 잘못 알려줘서 서둘렀는데도 도착하니 50분. 게다가 표가 없댄다? 예약안됐다고?
회사가 두갠데 4시 배인 회사거로 예약됐다고. 1시배는 떠나고 카톡으로 여행사 직원과 삽질 시작. 결국 4시까지 기다리다 정아라는 동행인을 만나게 됐다. 같이 버스타고 온 친구였는데 항구에서 다시 만난거다. 그렇게 그 친구랑 4시 배타고 지브롤터해협 건너서 탕헤르로 갔다. 한시간 정도 걸린듯. 무함마드라는 기사가 픽업하러 기다리고 있었다. 정아씨는 마라가주가서 사하라투어 한다는데 일단 내가 가는 쉐프하우엔도 구경하기로 해서 같이 차를 탔다. 중간에 휴게소 같은데서 식사하고 무함마드가 운전하면서 이것저것 설명했다. 염소젖으로 치즈만들어 파는 베르베르 여인들. 터키 풍경을 연상시키는 큰 산들. 해가 어두워져서 호텔에 도착했고 짐을 놓고 구경에 나섰다. 상점들이 다 닫았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정아씨는 질라바라는 모로코 전통의상에 꽂혀서 구경하는데 좋은건 무려 500디하람이나 했다. 아마 이때 내 가격측정 능력이 마비된듯. 모로코 물가가 생각보다 비싸군, 이라고 생각하면서 500보다 낮으면 싸다고 생각한거다. 어마어마한 착각. 구불구불한 골목들 다니는 게 재밌었다. 듣던대로 이곳 사람들을 순박하고 여유가 있었다. 이날도 피곤해서 일찍 씻고 잤다.

 

3.9

다음날 6시반에 일어나서 구경에 나섰다. 다소 쌀쌀했지만 다닐만했다. 마을을 둘러싼 성벽. 등교하는 아이들의 호기심 어린 표정들.  노새똥을 피해가며 걷는 골목. 재밌는 경험이었다. 나에게는 아프리카의 산토리니라는 이 마을의 파란 벽들보다 사람들의 모습들이 더 기억에 남을듯하다. 그치만 정아씨가 해준 말처럼 이 마을에 36일인가 머무른 사람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 사람은 이 한적한 마을에서 뭘 하면서 지냈던 건지?
우리는 조식을 먹고 곧 나와서 버스터미널로 갔다. 10시 반 버스였나. 일찍 나온탔어 한참을 기다리다 버스를 탔다. 일본인들이 많았다. 모로코 여행이 유행인지? 목적지는 페즈. 삐끼가 심한거로 유명한 도시여서 무척 긴장이 되었다. 그치만 숙소 안내해주는 사람들은 친절했다. 숙소가 생각보다 멀고 외져서 가는 길이 좀 무섭긴했다. 큰 캐리어를 끌고 가는 정아씨도 신경쓰이고. 짐 놓고 기차역 가서 정아씨 야간버스표 끊고 메디나로 갔다. 블루게이트 지나 곧 나의 쇼핑충동이 발동. 이상한 가방에 꽂혀서 200디하람이나 주고 사버렸다ㅠ (바보×2) 그리고나서는 조금 정신을 차려서 괜찮은 신발을 사고 정아씨도 드디어 질라바 사고 스카프랑 신발도 샀다.
그리고 같이 저녁먹고 헤어졌다. 저녁도 관광객 바가지 쓴듯했지만 모로칸 민트티와 고기든 파이같은 거는 맛있었다.  쿠스쿠스도 괜찮았는데 배불러서 다못먹었다. 감자 삶은거를 으깨고 사프란으로 노란색 낸듯. 나는 숙소로 와서 인터넷하고 무서워서 티비 켜고잤다. 페스는 그렇게 외지인을 긴장하게 하는 도시였다. 그리고 추웠다. 쉐프샤우엔 숙소와는 달리 난방이 안됐다. 떨다가 새벽에 계속 깼다.

 

3.10

조식먹고 나가는데 비가왔다. 가죽 염색장(태너리 슈아라)가 공사중이라고 들었지만 혹시나해서 카운터에 물어보고 가봤다. 어제 간 메디나와 다른 방향의 길로 갔는데 음, 좋았다. 비가 와서 그런지 도시가 달라보였다. 나무로 된 지붕들, 도시 안에 있는 수로와 다리. 고즈넉하고 옛스러운 느낌. 그냥 혼자 다녔어도 좋았을걸. 쩝. 처음에 길 가르쳐주시던 아주머니가 가이드에게 나른 넘겼고 가이드 압둘은 나를 슈아라로 데리고 갔다. 공사중이어서 일주일 뒤에나 작업하는 걸 볼 수 있다고는 했지만 빈 작업장이나마 볼수있어서 나쁘지 않았다. 여기서 가죽제품을 보기 시작했는데 짐챙기랴 제품 구경하랴 예산고려하랴 정신이 없었다. 혼자 여행다니면 이게 안좋구만. 상의할 사람이 없다. 낙타, 염소, 양, 소가죽제품들을 차례로 봤다. 천연가죽이라 불을 대도 멀쩡하다며 라이터로 지지는데 오, 진짜 타지도 않고 냄새도 안나고. 없는 돈으로 뭐라도 사겠다고 보다가 낙타벨트 200디하람에 샀다. 이제 디하람은 끝. 점심 먹을 돈도 없었다.

근데 압둘이 또 나를 스카프 파는 데로 끌고가는게 아닌가. 이때 나는 완전 정신줄을 놨다. 한번 뭘 사기 시작하면 고삐를 놓아버리는 인간이었다. 좀더 깎았어야하는데. 하나만 사든가. 두개를 34유로나 줬다. 선인장 실크라고 아가사라고 하든가. 좋은거라니까 뭐. 모르겠다 잘쓰면 되지. 근데 수공예로 짠거다보니까 실이 한올한올 되어있어서 뭐에 걸리면 끝장이다. 실제로 나는 스카프 벗다가 옷에 걸려서 스카프 올 나가게 했다. 멍청멍청. 그 이후로 더욱 우울해졌다는.

그럼에도 압둘과 헤어져서 혼자 메디나에서 블루게이트로 나오는 아침길은 너무 좋았다. 삐끼들과 소매치기걱정과 무거운 가방 때매 긴장의 연속이었음에도 아침의 시장이란 참으로 매력적인 곳이다. 활기찬 분위기와 막 문을 여는 사람들의 부지런함도 기분좋게 만든다. 돈이 없어서 점심용으로 오렌지를 사갖고 택시타고 기차역으로 왔다. 할일이 없어서 전날 산 딸기랑 오렌지를 먹었다. 난쟁이 집시 할머니 옆자리 벤치에 앉았는데 자꾸 불어로 말걸어서 난감.
카사블랑카 가는 기차는 칸으로 된 자리였다. 6명이 들어가는 게 한칸인데 마주보고 한열에 세명씩 앉게 되어있다. 카사블랑카가 종착역이 아니라 쇼핑한 물건을 그리기도 하고 리스본 호스텔에서 가져온 책으로 바르셀로나 예습을 하면서 기차를 탔다. 그리고 카사블랑카. 모로코에 대한 인상을 안좋게 만든 도시. 어쩐지 파리 뒷골목을 연상시키는 분위기랄까. 오줌냄새. 어수선한 분위기. 자동차 소음. 정신이 없고 한마디로 비호감이었다. 숙소도 여행사에서 지도 표시한거랑 달라서 애먹고 숙소에 도착하니 예약자에 없다고해서 엄청 당황하고 짜증났다. 바우처 없어도 된다더니 이게 뭐람.
단하나 좋았던건 조르바라는 식당을 발견해서 소고기 타진을 50디하람에 먹은것. 구운 바게뜨도 맛있었다. 근데 약간 흙이 씹히는 느낌;;  밥먹고 돌아다니기 무서워서 아무데도 안가고 바로 들어왔다. 욕조가 있어서 뜨거운 물에 몸을 담갔더니 잠이 밀려왔다. 계속 제대로 못잔 탓이려니. 그치만 이 숙소도 추워서 몇번이나 깼다. 도대체 이런 추위는 어찌해야되지;;

 

3.11
최악은 다음날 카사블랑카 공항이었다. 일찍 출발한다고 나왔는데 기차역에서 공항가는데 짐검사하느라 밀리고 출입국 심사할때는 무슨 문제인지 계속 기다리게 해서 엄청 짜증났다. 게다가 게이트 가기 직전에 또 짐 검사하는데 비행기 시간은 가까워오고. 못타는줄 알았다고! 후진국의 비효율성에 경악. 여권 검사하는데 들락날락하면서 기다리게 하더니 뭐가 문제인지 설명도 안해주고. 불친절하고 사람 무시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무척 불쾌했다
다시 생각해도 모로코는 끔찍하다. 무엇보다 치안 걱정과 사기 당할까 걱정하느라, 또 계속되는 이동 때문에 긴장해서 도시 분위기가 너무 횡횡해서 무섭고 지쳤다. 순진하고 여유있는 사람들이 있지만 도시의 삭막하고 위협적인 느낌이 안좋은 인상으로 덮어버리는 것 같다. 무엇보다 내 여행일정 자체가 지나치게 여유가 없는 것인 탓도 크겠지만 모로코를 다시 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 건 사실이다.
그러다가 바르셀로나 공항에 오니 이곳은 천국이 아닌가. 날씨부터가 화창했고 공항 통과, 시내로의 이동 모든게 순조로웠다. 대도시란 이렇게나 좋은 거구나. 무엇보다 사람들이 나를 사기 치는 대상, 놀리고 괴롭힐 수 있는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 주는 안도감. 페즈 터미널과 카사블랑카 역에서 경험한 불쾌함을 겪지 않아도 된다는 게 너무 좋았다.
게다가 숙소에 짐을 놓고 나와서 점심을 먹었는데 내가 원하는 그런 식사가 나왔다. 치즈 듬뿍 든 라비올리, 전갱이 인듯핫 생선튀김과 구운야채, 그리고 초콜렛 뿌린 코코넛 아이스크림에다가 화이트와인까지 먹었는데도 11유로 정도. 다 너무 맛있었다. 이렇게 나오는걸 메뉴 델 디아 라고 한다는데 다시 또 못 먹어본게 너무 아쉽다. 이날 먹어본 음식으로 스페인 음식에 대한 인상이 달라진듯.
그리고는 분수쇼 보러 카탈루랴 미술관을 가게 됐는데 여기도 너무 좋았다. 기대했던 분수쇼보다도 좋았다. 특히 사람들이 소개한 대로 로마네스크관을 최고! 고딕이나 르네상스보다 훨씬 현대적인 느낌이다. 시간이 없어서 현대관을 못봤는데 표 하나로 이틀연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해서 다음날 다시 방문했다. 6시에 미술관 문닫는다고해서 나와서 분수쇼를 보기 위해 기다리기 시작했다. 동절기에는 7시부터 시작한다고해서 1시간정도 인터넷 하면서 기다린듯. 미술관이 명당이라 들었는데 음악소리가 안들려서 별로인듯. 실제로 나랑 같이 앉아있던 사람들이 막상 분수쇼 시작하니까 우르르 분수 앞으로 가버렸다. 그래도 분수쇼의 전체적 윤곽과 바르셀로나 야경을 볼 수 있기 때문에 뒤에서 보다가 앞으로 나왔다. 한시간쯤 보다가 숙소로 왔다. 세계 3대분수쇼라는데 뭐 그냥 그랬음. 광장에 나와 노래를 따라부르고 다정해보이는 연인들과 여유로운 분위기를 즐길 수 있는 게 더 좋았다. 돌아오는 길에 하몽 크로와상이랑 바르셀로나 맥주 모리츠를 사다가 코스타커피가서 카푸치노랑 먹었다. 얘네는 카푸치노에 계피말고 초코가루 뿌려주더라.

 

3.12
바르셀로나 둘쨋날 토요일엔 어제 못본 미술관을 다시 보러 갔다. 역시나 좋았다. 바르셀로나 전경을 볼 수 있는 것도, 건물의 압도적 규모와 잘 구성된 전시실. 현대미술 쪽도 재밌었다. 르네상스보다 인상파 쪽이 재밌는 거 같다. 모더니즘, 아방가르드 소개하며 바르셀로나 모더니즘의 특징같은걸 알 수 있는 것도 매력적. 세계대전 등을 거치면서 오히려 보수적인 분위기가 강화됐다는 것도 재밌었다. 그러면서 고전적인 그리스미술을 모방한 형태들이 출현한다. 1시 정도까지 3시간 정도 미술관을 보고나와서 캄프 누로 향했다. 슬슬 걸어가면서 점심 먹을 곳을 물색했다. 전날과 같은 레스토랑을 원했지만 그건 어려웠고 대신 괜찮아보이는 레스토랑에 들어가 감바스 알 아히요라는 마늘 새우요리를 먹었다. 추천을 받을거였는데 철판에 들어서그런지 엄청 뜨끈뜨끈한게 오래갔다. 양이 적어서  실망했는데 빵이랑 국물적셔서 같이 먹다보니 든든했다. 스카프 바가지로 우울했던 생각을 달래고.
캄프누에는 입장권때문에 걱정한거랑 달리 금세 들어갔다. 경기가 네시 시작. 나는 세시에 입장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자리는 비어있었다. 안유명한 팀이라그런가. 게다가 주전급이 부상으로 많이 빠졌다든데. 라고 생각했는데 네시 되니 경기장이 꽉찼다. 나와 같은 외국인들은 싼 티켓을 현장구매해서 들어오는듯했다. 프랑스인들이 많았다. 역시 나라가 가까우니깐. 시간이 금세 흘러갔다. 축구보면서 그렇게 시간이 금방 흘러간건 처음이었다. 워낙 골을 연달아 넣은 탓도 있으려나. 바르샤는 6골이나 넣었다. 메시의 패스야 말할것도 없고 네이마르도 정말 잘하더라. 피케는 네이마르에게 태클 건 선수에게 격하게 항의하기도. 경기 종료 십분전쯤에 나왔다. 이미 나오고 있는 관중이 많았다. 승부가 결정됐으니 뭐. 아스날과의 경기가 16일엔가 또 열린다니 그날도 지켜봐야지. 숙적 마드리드와의 경기는 엘 클라시코라고 한다는데 티켓 가격이 최소500유로란다. 그건 4월초에 예정. 지하철 타고 고딕지구 쪽으로 가서 츄레리아 가려다 못찾은 줄 알고 그 직전에 있는 카페 들어갔는데 거기도 유명한 집이었다. 초콜라떼 시켜서 찍어먹는데 경기장에 있느라 얼었던 몸이 녹는 느낌. 그치만 역시 내가 좋아하는 유의 음식은 아닌듯.

먹고 대성당을 찾아가는데 이 길이 대박. 고딕보른 지구쪽이었는데 야경이 너무 예뻤다. 흔히 여행다니딘 갑자가 뭐이런데가 다 있지? 꿈만같다 싶은 순간들이 있을텐데 나에게는 이때가 그랬다. 구불거리는 골목길을 따라 올라가는데 딱봐도 엄청 오래돼 보이는 가게들이 노란등 아래 옹기종기 자리잡고 있었다. 내 앞에는 여행객으로 보이는 부부가 쇼윈도를 보며 그 분위기를 즐기고 있었고 그들에게 길을 안내해주러 나온 구식 레코드 가게 아주머니마저 행복한 표정으로 나와있었다. 모든게 완벽한 순간이었고 그때 더이상 그 골목에서 나가고싶지 않았다. 거기에서 나와 대성당을 발견했을때 거기에는 또 믿기지 않는 풍경이 펼쳐졌는데 사람들이 손을 잡고 강강술래를 하듯 대성당 앞 광장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전통춤인듯 했는데 참 웃긴 풍경이다 싶었다. 이런 대도시에서 이런 식의 풍경도 만날 수 있구나. 아마 토요일이라서 그런 행사를 하는 모양이다. 나는 곧 대성당으로 들어갔다. 포르투갈에서 미사를 보았던게 인상깊어서 토요일을 택해 간 거였는데 워낙 큰 성당이라 포르투갈에서 느꼈던 분위기는 없었다.
나는 대신 작은 예배실에 들어가 앉아있다 나왔다. 주교님인가 유해가 안치된 곳이었는데 구글맵 보는 나에게 경비아저씨가 자꾸 사진은 안된다고 말했다. 사진 찍을 생각은 조금도 없었는데. 쉬다가 나와서 이번엔 카탈루냐음악당 보러갔다. 공연을 볼 수 있으면 더 좋았겠지만 너무 무리일거 같아서 포기한게 아쉽다. 내부가 너무 예뻤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플라맹코 공연도 한다니 나중에는 여기서 공연을 봐도 좋겠다싶었다. 오페라 카르멘도 50유로 정도면 볼 수 있다. 음악당까지 보고 나와서 저녁은 숙소 근처에서 팟타이를 먹었다. 면이 맛이 없었다. 팟타이 누들이 아니라 야끼소바면 같은 느낌. 아니 그냥 야끼소바였다. 양은 엄청 많아서 다 먹지 못했다. 숙소 와서 금방 자버린듯.

 

3.13
그래서인지 다음날 컨디션이 좋았다. 가우디 집중투어 신청한 게 8시반에 폰타나역에서 모이는 거였는데 8시에 숙소에서 나와 걸어갔다. 근데 일정이 다시 구시가지로 오는 거였다는;;;;; 구시가지에서 가우디초기작들을 봤다. 까시 비센스와 구엘저택, 레알광장의 가로등. 특히 구엘저택 설명이 기억에 남는다. 할아버지, 아버지가 대장장이여서 철의 특성을잘알았던 가우디가 엿가락처럼 철근을 구부려만든 대문. 대문의 불사조와 마차를 위한 두 개의 문. 그리고 프랑코 독재시절 고문시설로 쓰였다는 과거사까지. 초기라서 아직 가우디 건축의 특징이라할 곡선은 드러나지 않은 상태. 구엘저택을 보고나서 신시가지로 이동해서 까사 밀라와 까사 비요트를 봤다. 아침에 오늘 길에 낯익다 했던 건물이 까사 밀라였다. 입장료 불포함이라 내부를 보지 못하는 건 아쉬웠지만 입장료가 20유로에 달하니 뭐. 곡선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지금 써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내부 구조도 훌륭하단다. 까사 바뜨요가 난 좋았다. 디자인이 독특한것도 있고 뭔가 동심어린것이 호기심을 자극하는 건물이었다. 하지만 바깥에서만 건물을 구경한다는 건 역시 조금 아쉽기도. 오전 일정은 끝나고 각자 점심을 해결하고 모이기로 했는데 점심먹으러 간 이태리 부페에서 아이스크림 먹으려다 봉변 당했다. 음식도 그저그랬다.
오후 일정은 구엘공원과 대망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구엘공원은 가우디의 여러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장소다. 듀오백을 상기시키는 벤치. 정수기를 떠올리게 하는 기둥, 태양을 피해 산책할 수 있게 한 동굴 형태의 산책로 등 삶과 예술이 결합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가우디가 건축에서 중요시했다는 자연과 신은 인간의 삶을 고양시키는 중요한 요소라는 생각이 든다. 자연속에서 신과의 일치감을 느끼며 사는 것. 다음으로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에 갔다. 성 가족 성당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서 가족은 물론 마리아와 요한과 예수 되시겠다. 가우디가 지은건 왼쪽 구조물, 오른쪽과 정문은 공사중인데 가우디 사후 100주년인 2026년 완공목표라고. 완공되고나서 다시 와도 좋을듯. 뭔가 흘러내리는 모습을 하고 있는건 예수가 태어났을 때가 겨울이어서 눈 녹는 걸 형상화 한 거라고. 오른쪽은 가우디에 이어 다른 조각가가 짓게 되는데 그 조각도 멋지다. 음각으로 조각된 예수의 얼굴이 어디에 있던지 그와 시선을 맞출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가이드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내부로 들어갔다. 내부가 압도적이었다. 무엇보다 스테인드글라스로 들어오늘 햇살이 너무 신비로웠다. 그치만 성당 같다는 느낌은 그다지 들지 않았다. 그동안 봐온 세비야, 바르셀로나 대성당에 비해 너무 현대적인 느낌이 강해서 그런듯. 완성된 작품이 아닌것도 한몫했겠지.
그래도 야경을 보고 싶어서 성당에서 쉬다가 너무 추워서 스타벅스에서 커피마시며 해가 지길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메일도 쓰고 여행기도 좀 쓰고. 그리고 드디어 해가 졌다. 가우디가 지은 건물쪽으로 향했는데 낮에 보았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나도 모르게 또 감탄. 정말 혼자 보긴 아깝구나, 하는 생각. 그래도 다시 씩씩하게 저녁을 먹으러가는데 중간에 엔리케 토마스라고 하몽 전문가가 낸 가게가 있어서 들어가서 까바와 네모진 하몽, 그리고 맥주를 마시고 나왔다. 배부르게 먹었는데도 10유로. 하몽을 싸게 먹기에 좋은 가게인듯. 까바도 맛있었다. 차게 해서 먹어야 되기 때문에 얼음통에 집어넣고 주문이 들어오면 따서 준다. 적당히 취해서 들어와서 씻고 잤다.

 

3.14
여행 막바지. 가우디 투어에 이어 몬세랏 와이너리 투어에 가는 날이었다(아침에 산츠역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지하철역을 잘못 들어가서 엄청 헤맸다;). 가격은 가우디가 5만 5천원 몬세랏이 6만원이었는데 몬세랏은 정말 강추다! 가우디 투어가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면서 주요 가우디 작품을 하루에 돌아보는 것이 강점이라면 몬세랏은 오전의 수도원일정, 오후 와이너리가 모두 가볼만해서 엄청 알차게 볼 수 있다. 특히 이번에 만난 가이드분이 엄청 친절하고 재밌게 설명을 해주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인원이 적으면 각자 차표를 끊어서 가야하는데 이날 인원이 꽤 모여서 29유로내고 대여한 버스를 탔다. 나는 잘모르지만 지금 백승호, 이승우 선수가 유소년 시절 타던 셔틀버스였다고 한다. 백승호 선수는 기사 아주머니에게 아직도 연락한다고.

가는 길은 한시간이 안걸렸는데 가는 도중 몬세랏이 어째서 카탈루냐 사람들의 성지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종교적인 의미에서도 그렇지만 정치적으로도 의미있는 곳이었다. 만주처럼 프랑코와 싸우던 시절 독립운동의 근거지였다나. 마지막까지 험준한 몬세랏 산지에서 싸웠던 이들이 있었고 또 프랑코가  승리한후 카탈루냐어를 금지하며 탄압에 들어갔을때도 몬세랏 성당에서만큼은 저항하며 카탈루냐어로 예배를 계속드렸다고한다. 독재가 끝난지 얼마 안되었기 때문에 나이드신 분들은 여전히 이곳에 와서 죽은 친구나 가족을 기리며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고. 바르셀로나에 있는 여러 표지판에는 그래서 스페인어가 아닌 카탈루냐어가 제일 먼저 나온단다. 이어서 스페인어 그다음이 프랑스어.
그런 얘기를 들으며 몬세랏 수도원에 가니 레지스탕스들의 모습이 눈에 그려지는 것 같았다. 실제로 국제여단의 군인들 등 그들을 그리는 동상이나 조각들이 광장에 있다. 산의 모양자체도 몹시 독특하다. 생강 같기도 동충하초같기도. 이 산세를 보고 가우디가 까사 밀라에 대한 영감을 얻었단다. 광장을 둘라보고 근처 카페로 가서 우리가 볼 수도원과 성당에 대한 설명을 마저 들었다. 이 수도원에서 가장 유명한 건 검은 성모마리아상이다. 이 수도원은 특히 예수회의 성지로 현재 교황은 최초의 예수회 출신이기도 하다. 여튼 이 성모마리아상이 유명한 건 그 조각상을 만지면서 소원을 빌면 이뤄진다는 속설 때문이다. 또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성모마리아가 검은 피부를 하고 있다는 것도 관심을 끄는 모양이다. 초에 그을려서라거나 아프리까 선교를 위해 현지인으로 묘사한 거라거나 여러 가설들이 있다는데 확실하지 않단다.
우리 일정은 우선 바실리카에서 성모마리아 상을 보고 성당으로가서 1시에 에스꼴라니아 의 노래를 듣는 거였다. 에스꼴라니아는 "소년 성가대"라는 의미이다. 빈소년 합창단의역사가 500년이라면 에스꼴라니아는 700년의 역사라고.
여튼 바실리카 들어가는데 날씨가 추워져서 벌벌 떨었다. 그리고 성모마리아를 보러가는 길이 생각보다 짧고 소원을 미리 생각하지도 못해서 엄청 얼떨결에 빌고 나왔다. 볼수록 관음보살과 닮았다는 생각이 드는 마리아상이었다. 그리고 그날 특별공개한다는 홀에 가서 마리아상의 뒷모습을 보았다. 홀 내부도 굉장히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정제되어 있다기보단 압도적인 느낌을 주는 것 같다. 그리곤 바로 점심 먹으러 카페테리아로. 간단히 소세지 먹고 십자가상이 있는 언덕길을 올랐다. 넉넉히 한 시간 빨리 가면 왕복 삼십분 코스. 여기서 보는 경치도 일품이다. 몬세랏은 바다였던 지형이 융기한 거여서 산들이 물결모양을 하고 있는데 그게 꽤 특이한 고원지형을 형성한다. 구름 그림자가 비치고 드문드문 햇빛이 비치는데 그림 같았다. 시야가 좋은 날엔 바르셀로나와 수평선도 보인단다. 그리고 프랑스와의 경계인 피레네 산맥도 보인다.

몬세랏은 스페인 3대 성지로 한국에서도 많이 가는 산티아고 순례길이 지나는 곳이기도 하다. 조가비 표시가 순례길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800킬로라고 하는데 1킬로마다 1유로를 쓴다는 속설도 있단다. 프랑스 이탈리아에 이어 해외 순례자 가운데는 3번째로 그 수가 많단다. 가이드분도 순례길 걸었던 경험을 얘기하면서 끝에 다다르면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난다고 했다. 한번쯤 가볼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후 일정을 프레이셔넷이라는 스페인에서 제일 크고 유명한 까사 회사에 방문했다. 한국어로 된 동영상이 있을 정도로 해외 홍보에도 적극적인 회사였다. 동영상은 어떻게 그 회사가 만들어지고 또 지금의 성공을 거둘 수 있었는지를  보여줬고 이어서 박물관에 가서 어떤 공정을 거쳐 발포주인 까사를 만드는지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포도품종도 중요하고 날씨도 중요하며 토양도 중요한 와인농사에서 카탈루냐지방은 청포도를 기르기에 적합한 기후와 이전에 바닷가인데서 토양이 염분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포도간 간격을 넓게해서 품질을 유지하는 노력을 기울인단다. 공장은 구공장과 신공장을 연결하는데 지하 4 층 규모, 25미터 정도 높이의 와인 저장소를 모두 둘러봤다. 제일 압권은 지하 4층까지 내려갔다가 코끼리 열차 같은것을 타고 지상으로 올라오는 코스였다. 투어에 참여한 사람들 모두 즐거워했다. 마지막으로 시음하는 곳으로 올라와 2010년 빈티지 "메리뚬"이라는 까사를 마셨다. 조금 드라이한 정도로 어제 먹었던 것보다 드라이했다. 2010년은 태양이 정말 좋았던 해라고 해서 원래 까사에는 붙지 않는 빈티지를 붙인 거라고. 그랑 나뚜레라고 25개월 숙성한 거라고 했다.
한잔으로는 아쉬워서 5유로짜리 제일 비싼 와인을 시음했다. 까사 살바 브룻 나투레  그랑 레저브. 2006년 빈티지. 더 드라이했다. 이 와인을 마신 다른 사람들도 너무 드라이해서 못마시겠다고 할 젓도. 음. 좀더 단걸 마셔볼걸 그랬다.   다시 산츠역으로 돌아와 마지막으로 야경을 보기 위해 포트벨에 가보기로 했다.    해가 지기전에 항구에 도착했는데 바다와 몬주익언덕으로 향하는 케이블카까지 한눈에 들어왔다. 잠시 벤치에 앉아 해가 지는 것을 봤다. 포트벨에서 365일 연다는 쇼핑몰을 잠시 보고 야경을 감상하며 저녁을 먹으러 람블라스거리를 따라 걸었다. 어느새 도시가 익숙해진 느낌이 들었다. 구글맵을 보지 않아도 어디가 어딘지 알거 같았다. 우연히 들어갔던 고딕보른 지구를 좀더 둘러보기로 하고 정처없이 헤매다가 허기가 져서 밥을 먹으러 엘라발 지구로 향했다. 블로그에서 본 바르셀로나에서 제일 맛있다는 케밥집에서 늦은저녁을 먹었다. 아랍사람들로 북적이는 식당 분위기는 또 색달랐다. 유명하다는 닭꼬치를 시켰는데 미트볼도 맛있어보였다. 4유로 정도에 밥이나 난까지 나오는데 엄청 푸짐하다.

3.15

5시 비행기여서 오전에는 보케니아 시장에 가보기로 했다. 이미 바르셀로나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시장을 들어가본 적이 있어서 큰 감흥은 없었다. 또 여기가 워낙 외국인들만 많은 시장이어서 물가가 다른 시장보다 비싸다는 얘기도 들은 터라 뭘 사야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돌아보는 데 십분정도 걸린 것 같다. 생각보다 규모도 크지 않았던 듯. 남은 시간에 근처에 있는, 가보려다가 다섯 발을 앞두고 못간 츄레리아를 가보기로 했다. 앉아서 먹을 수는 없지만 워낙 맛있다고 정평이 난 곳이라. 아침 시간이라 손님이 없어서 바로 주문한 것을 받았다. 오리지널 츄러스가 1.2, 초코가 씌워진 것이 1.4유로였는데. 아 초코 츄러스는 정말 정말 맛있었다ㅠㅠㅠ 음식은 가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진리..츄러스 사고 다시 게스트하우스로 와서 체크아웃하고(11시 체크아웃!) 카탈루냐 광장 근처에 있는 백화점 지하매장에 가서 지인들에게 줄 과자를 좀 샀다. 그래도 돈이 좀 남길래 공항에서 먹을 맥주와 햄이랑 치즈 든 안주거리를 사서 공항으로 갔다. 공항에서 간단히 요기를 하고 인터넷도 하고 여행기도 쓰면서 시간을 보냈다.

이렇게 여행이 끝나는구나, 실감도 나고 혼자하는 여행이 힘들긴 하지만 다음에 하면 더 잘할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도 들고.. 모든 것이 그러하듯 시작이 가장 힘들고 차차 나아지며 힘든 것을 지나보내고 나면 그만큼의 성취감이 든다는 것. 무엇보다 여행을 하고 나면 자기 일상에서 중요하지 않은 일들에 전보다 감정적 소모를 하지 않게 되고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에 감사하게 되며, 더불어서 새로운 것을 시도해보는 데 덜 머뭇거리게 된다는 것. 여행을 하고 돌아와서 나는 마라톤을 해보겠다고 다짐하게 되었는데 그렇게 뭔가를 시작한다는 것이 얼마나 두근거리고 신나는 일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어째서 삶을 여행을 다니듯이 살아야 한다고 하는지를 그 어느때보다 절실히 깨닫게 해준 여행이었다. 그래서 나는 혼자가는 여행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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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jifs 2016-03-20 2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페인 좋습니다ㅎㅎ

꽃나무 2016-03-21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너무 좋았습니다. 다음에 갈 때는 기회가 된다면 한 도시에 좀더 오래 머물러 보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