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도 나이를 먹는다

 

 ▲ 케테 콜비츠 조각/ 피에타: 죽은 아들과 어머니 Pietä: Mutter mit totem Sohn 1937-1938

 "마음도 나이를 먹는다." 써 놓고 보니 꼼짝없는 신파다. '인간은 서서 걷는다.'는 진술과 다를 바 없는 맹꽁이 같은 수작이다. 물리적인 시간의 변화가 생물학적으로 인간의 몸뚱이와 그 기관의 노화를 가져온다는 점에서 '몸이 늙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그것은 명확한 자각 증상의 형태로 다가오기 때문에 매우 구체적이고 객관적이다.

산 따위를 오르다가 적당한 높이의 내리막을 내려가 보라. 혹은 쉽지 않은 틈새의 개울 같은 허방을 뛰어넘어 보라. 대체로 젊은 축들은 서슴없이 뛰어내려 버린다. 대상을 보는 순간, 그 높이와 자신이 발을 디딜 위치와 착지할 때의 충격 따위가 한꺼번에, 별도의 셈이 필요없이 머릿속에서 정리되는 까닭이다. 허방도 마찬가지다. 건너편을 흘겨보면서 건너기를 결심하는 순간, 이미 의지와 몸의 관절과 근골격 등은 이미 공조의 준비를 마치는 것이다.


뛸까 말까가 망설여진다면 아직은 괜찮다. 바로 다른 경로가 없는가를 주변을 눈여겨 살피고 있다면 이미 그는 '젊지 않다.' 대상을 보는 순간, 이미 자신의 '거푸집'이 먼저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지 없을지를 일찌감치 깨우치고 있다는 명백한 증좌인 것이다. 훌쩍 뛰어 내리는 대신 이 신중한 '중늙은이'는 엉덩이를 땅바닥에 붙이고 아주 조신하게 자신의 거푸집을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한여름에도 뜨거운 물로 샤워하는 게 싫지 않게 느껴진다면, 어느 날부터 텔레비전의 볼륨을 저도 몰래 자꾸 키우고 있다는 걸 눈치챈다면, 아이들의 이야기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 거푸 되묻다가 종내는 이제야 알아들었다는 듯(사실은 여전히 알아듣지 못한 채) 바보처럼 고개를 주억거려 본 경험이 있다면, 그에게서 노화는 이미 매끈하게 진행되고 있는 중이라고 믿는 게 옳다.


마음의 노화는 다분히 심리적이고, 주관적이다. 몸의 노화가 전해주는 직접적이고 객관적인 징표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지만, 어느 날 그는 너무나도 구체적인 증거 앞에서, 옅은 비애와 상실감으로 그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때부터 노화의 속도는 몸의 그것을 앞지르기 시작할 수도 있다.


이제 쉰고개를 겨우 넘긴 형편에 이런 얘기를 하는 건 청승맞을뿐더러 다분히 외람되고 민망한 일이긴 하다. 그러나 몸의 정직한 반응만큼 이 흔들리는 마음의 풍경 앞에서도 우리는 솔직해져야 한다고 믿는다. '나이 먹은 마음'의 모습을 그려 내는 가장 소박한 표현을 나는 '너그러움'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관용'이라기보다는 '살아 있는 것들에 대한 어버이로서의 바라봄'이다.


어버이는 피와 살로 자식과 생명을 나눈다. '혈육(血肉)'이라는 낱말이 생긴 까닭이다. 짐승에게도 제 피붙이에 대한 애정은 본능적이다. 그러나 인간은 뭇 짐승과 달리 그 관계의 의미를 확충하여 이해한다. 말하자면 '세상의 모든 자식들'을 자기 혈육에 대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나이를 먹는 마음이란, '살아 있는 생명체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그에 대한 외경(畏敬)'이라고 말해도 좋겠다. 나이듦은 결국 '어버이 되기'의 과정이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생명에 대한 인식과 이해를 넓히게 되는 것이다. 새 봄을, 그리고 망울을 터뜨리며 피어나는 꽃을 경이로 바라보게 되는 것도 이때쯤이다.

 

▲ 케테 콜비츠의 조각 / 부모 Die Eltern 1932, 벨기에 블라슬로 군인묘지

 

단순히 생물학적으로 어버이가 된다고 해서 세상의 모든 딸과 아들들을 내 아이처럼 바라보게 되지는 않는 듯하다. 그것은 단지 앞서 말한 '너그러움'을 위한 필요조건일 따름이다. 아이들에 대한 어버이의 사랑이 단순히 '내 아들, 내 딸'이라는, 관계에 대한 이해로 이루어진 의례적 성격에서 '내가 지은 생명'이라는 새로운 의미로 심화되기 위해서는 '내 살을 베어서라도……' 식의 피 흘리는 맹목(盲目)의 사랑에 대한 깨우침이 필요하다. 내가 지은 생명의 가치, 그 절대성에 대한 자각이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새롭게 하며 그 보편성을 획득하는 과정으로 발전해 가는 것이다.


어머니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보다 훨씬 더 큰 울림을 갖는 이유는 출산의 고통을 통해 어머니는 이미 자기 사랑의 의미를 새롭게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그들을 내 아이처럼 바라보게 된 것은 내 사랑의 성격을 새롭게 이해하기 시작하고서부터이다. 처녀 적에는 아이들에게 쉽게 매질을 했는데, 아이를 낳고서부터 그게 참 힘이 들기 시작했다는 후배 여교사의 고백도 같은 과정에 있겠다.


아비와 어미의 자리를 넘어 할미와 할아비의 자리에 오르면서 더 이상 그들은 아이들에게 모질어질 수 없는 까닭도 거기 있다. 가끔씩 부모는 분노로 아이들에게 매를 들지만, 조부모가 되면 그게 불가능해진다. 분노보다 생명에 대한 사랑과 연민이 더 큰 까닭이다. 아파트 주변에서 가끔씩 만나는 살빛 맑은 아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나는 그들의 모습에서 내 아이들이 낳을 아이의 숨결 같은 걸 아주 진하게 느끼곤 한다.


 매주 일요일에 방영되는, 해외 입양아와 그 생모의 만남을 다룬 한 공중파 방송의 프로그램을 즐겨 보는 편이다. 순발력 뛰어나고 말솜씨가 좋은, 젊은 개그맨과 매주 초대되는 예쁘장한 여자 연예인이 진행하는 이 프로그램은 애당초의 목표대로 시종일관 시청자들이 눈물바람을 하게 만든다. 20년이나 30년 만의 만남이 주는 극적 성격도 흥미롭거니와 주인공들이 가감없이 드러내 보이는 슬픔과 고통의 결을 함께 따라가면서 아내와 나는 서로를 의식하지 않고, 눈물을 흘리고 혀를 차는 등 분노와 연민의 감정을 쉽게 감추지 못한다.


지난 연말에는 미국에 입양된 한 자매와 그 생모의 만남을 방송했는데, 늘 그랬듯이 딸들보다 어머니의 눈물과 통곡이 눈물겨웠다. 그건 전적으로 사랑의 무게와 부피를 이해하는 방식의 차이일 터이다. 어머니의 통곡 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수천 수만 겹의 한을 그 아이들이 얼마나 이해할까. 양부모를 만나기 위해 들른 집에서 카메라에 잡힌, 계단을 내려오던 양어머니의 표정을 나는 잊을 수 없다. 자신이 기른 딸과 그 딸의 생모를 일별하면서 그 여인이 지은 슬픔과 연민이 오롯이 담긴 그 표정은 마치 어버이의 사랑이 갖는 '동질성'과 '절대성'의 한 미니어처(miniature; 세밀화) 같았다. 그 여자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와 딸의 생모를 껴안고 흐느껴 울었다. 인종도, 나라도, 문화도 달랐지만, 그 백인 여성이 보여 준 어머니의 눈물은 사랑의 보편성을 뜨겁게 증거해 주는 것이었다.


어버이로서의 사랑은 한편으로 다시 자식으로서의 어버이 사랑을 되살피게 함으로써 균형을 유지한다. 나이를 먹으며 아이들에 대한 사랑을 새롭게 일구어 가는 한편, 우리는 못다한 '치사랑'을 후회하고 그 회한으로 목이 멘다. 일상에서 만나는 노인들의 굽은 등, 힘겨운 걸음걸이, 굵게 팬 주름살, 가녀린 한숨소리 들은 모두 우리의 어버이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굽은 어깨에 실린 고독, 비낀 하늘에 잠시 머물다 가는 외로운 눈길들, 우리는 고통의 눈금 하나, 마음속 상채기로 그들을 기억하지만, 이미 그분들은 세상에 없다. 그것이 '어버이로 세상 살아가기'의 우울한 공식이다. 그렇다. 마음도 새록새록 나이를 먹는 것이다.


< 2006. 1. 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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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icare 2006-01-14 1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큼직한 글씨가 반가운 걸 보니 영락없이 저도 노화되고 있군요. 어릴 때는 오히려 교과서의 큰 글씨가 눈에 안 들어와서 애먹었었는데. 그러나 마음은 어릴 때도 늙고도 어렸었고 지금도 그래요. 다만 그 마음을 담는 주머니가 점점 닳아서 아무래도 둔각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생명이 겪는 고통을 보면 점점 더 보아넘기기가 힘들어집니다.

낮달 2006-01-14 2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지요? 나이 들수록 <연민>의 감정을 가누기가 힘들어집니다. 연민이 <동정>과 다른 점은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밖이 아니라 <안>이라는 점이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타인이 겪는 고통과 슬픔을 <자기화>하는 웅숭깊은 시선,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게 세월이고 노화가 아닐는지...
주말인데도 이렇듯 발걸음 해 주시니 훨씬 더 반갑네요.

2006-01-24 14: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낮달 2006-01-25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andcat님. 공연히 신경을 끓이신 것 같군요. 무슨 문제가 있는지. 더바디샵에 관련된 정보는 대부분 한겨레의 기사에서 가져왔고, 인터넷의 검색을 통해서 다른 정보들을 가져왔을 뿐입니다. 소비와 관련된 정치, 윤리적 선택 문제는 누구나 쓸 수 있는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막상 이런 전언을 받는 기분은 괜찮군요. 아마 제가 그 기사를 볼 가능성은 없겠지만, 만약 무심코 그 기사를 읽게 된다면, 다소 헛헛한 기분이 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언뜻 했을 뿐입니다.
아, 환경 운동에선 이렇게 문제를 바라볼 수도 있겠구나, 하고 감탄하기도 했지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2006-01-25 17: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굶주리는 세계 - 식량에 관한 열두 가지 신화
프랜씨스 무어 라페 외 지음, 허남혁 옮김 / 창비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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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책감과 공포를 넘어서

 

 

'세상에서 가장 비싼 책'은 '사서 읽지 않고 서가에 모셔 놓은 책'이라 한다. 그런 뜻에서라면 지난 연말에야  마저 읽게 된 책, "굶주리는 세계"의 값은 꽤나 나가는 셈이다. 책을 사면 속표지의 여백에다 구입한 날짜와 서명을 해 두는 것은 오래된 습관인데, 거기엔 '040127'이라 적혀 있으니, 이 책을 다 읽는 데는 한 달이 모자라는 2년이 걸렸다.


'식량에 관한 열두 가지 신화'라는 부제를 단 이 책의 저자는 '미국과 전세계의 굶주림과 빈곤의 원인을 탐구하고 이 문제를 대중과 정책결정자에게 교육하는 일을 하고 있는, 푸드퍼스트(Food First)로 잘 알려진 비영리 연구·교육기관'인 식량과 발전정책 연구소(Institute for Food and Development Policy)와 이 기관 소속이거나 관련 연구를 하고 있는 학자들이다.


'죄책감과 공포를 넘어서'라는 제목을 단 서장에서 현재 거의 8억에 가까운 사람들이 고통 받고 있는 '굶주림'을 '불가능한 선택이 주는 고통'으로 정의하면서 그것은 '굴욕적인 삶'이며, '공포'를 강요한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풍요로운 세계에 굶주리는 사람이 존재하는 이유'를 찾아왔지만, '가장 기본적인 문제, 즉 누구나 살아가는 데 필요한 먹을 것을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는 우리 스스로를 완전한 인간으로 간주할 수 없다'고 역설한다. 적어도 굶주림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서 인간은 그 윤리에 대해서 말할 자격이 없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미국을 비롯, 전세계에 만연하고 있는 빈곤과 굶주림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분석한다.

"분명 먹을 것이 모자라서는 아니다. 지금 세계는 먹을 것으로 가득하다. 자연재해 탓도 아니다. 굶주림의 원인의 식량과 토지의 부족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부족이다."

그러면서 굶주림의 원인과 현상을 기술하는 데 있어서 '몇몇은 편파적이고 사실이 아니'며 '현실적 해법을 찾는 데 장애가 된'다고 보면서 이러한 '잘못된 원리'를 '신화'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 신화는 대체로 열두 가지로 압축되는데(1986년 초판에서는 '열 가지 신화') 그것을 거칠게 정리하면 아래와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 번째 신화  식량이 충분치 않다

식량을 생산할 수 있는 가용자원이 한계에 달해 충분한 식량을 공급할 수 없다는 주장인 바, 오늘날 세계는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하루에 3,500칼로리를 공급할 수 있을 만큼의 곡물을 생산한다. 개발도상국에서 영양실조에 걸린 5세 이하 어린이들 중 78%가 식량이 남아도는 나라에 살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 미국에는 3천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건강한 식사를 감당할 힘이 없다. 미국 어린이 중 8.5%가 실제로 굶주리고 있으며, 20.1%는 굶주림의 위협에 처해 있다.

두 번째 신화  자연 탓이다

가뭄, 홍수 등 인간의 통제력을 벗어난 자연재해들이 기근을 발생시킨다는 주장이다. '감자 대기근'으로 1백만 명의 희생자를 낸 아일랜드는 그 당시 식량수출국이었다. 자연에 대한 통제력을 늘여나간 현재에 오히려 그 전 시대보다 재해의 취약성이 더 커지고 있다. 자연재해가 원인이 아니라, 다만 그것은 굶주린 사람들에게 최후의 일격을 날릴 뿐이다.

 

                                ▲ Food First의 홈페이지 

 

세 번째 신화  인구가 너무 많다

멜서스 이래 많은 학자들이 '인구폭발'로 인한 재앙을 경고했지만, 현실은 역설적으로 진행되었다. 실제 굶주림이 상존하는 제3세계를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도 '급속한 인구 증가가 굶주림을 발생시킨다'는 어떠한 증거도 찾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굶주림과 마찬가지로 다수 빈곤층, 특히 아이를 적게 낳겠다는 선택에 필요한 안정과 경제적 기회를 여성에게서 빼앗아가는 사회적 불평등의 결과이다. 높은 출생률은 강요된 빈곤에 대한 방어적 대응이다.

네 번째 신화  식량이나 환경이냐

굶주리는 사람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토양침식이 우려되는 한계토지에서까지 농작물과 가축을 생산하고 열대우림을 파괴하며, 농약으로 환경을 파괴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왜 농민들이 생산성이 좋은 농지를 두고 경작되어서는 안 될 땅과 열대우림으로 옮겨가는가, 농약은 누구에 의해 확산되는가에 대한 질문은 생략되어 있다. 정답은 거대 사업자들. 필리핀과 니카라과를 비극의 땅으로 만든 건 다국적 기업 돌(Dole)과 미국 농장주들이었다.

다섯 번째 신화  녹색혁명이 해결책이다

생산증대에만 협소하게 초점을 맞추면 토지에 대한 접근성과 구매력에 관한 집중구조를 바꾸지 못하기 때문에 굶주림을 줄일 수 없다. 기술의 혜택을 어떻게 배분할 것인가 하는 사회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새로운 농업기술을 도입하는 것은 불평등만 심화될 뿐이다. 식량을 생산할 토지나 구입할 돈이 없는 사람에게는 굶주림은 해결될 수 없는 것이다.

여섯 번째 신화  정의냐 생산이냐

토지개혁은 대규모 생산자들의 식량 수확을 줄어들게 할 것이며, 결국은 굶주린 사람들을 더욱 어렵게 만들 것이라는 논리다. 그러나 '정의'와 '생산'은 서로 경쟁하는 목표가 아니라 상호보완적이다. 주장과 달리 '소농들이 대농들보다 더 집약적으로 작업하기 때문에 생산성이 더 높다.' 전통적인 영농체계는 생산에 소비된 칼로리당 5~15배의 칼로리를 생산하는 반면에, 미국 같은 자본집약적 체계에서는 10칼로리를 써서 1칼로리만을 생산해 낸다. 브라질의 무토지 농민운동(MST)은 아래로부터 시작된 토지개혁에 대한 요구운동이다.

 

▲ 브라질 무토지 농민운동 MST(Movimento dos Trabalhadores Rurais Sem Terra)의 깃발

 일곱 번째 신화  자유시장이 굶주림을 끝낼 수 있다

그러나 내버려 두면 시장은 단지 부와 소득의 불평등을 반영할 따름이다. 시장은 개인의 필요에 반응하는 게 아니라 돈에 반응하고, 생산에 드는 사회적 비용과 자원비용에 대해 무관심하다. 시장은 먹을 것을 가장 절실히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전달하지 않는 것이다.

여덟 번째 신화  자유무역이 해답이다

수출로 번 돈으로 빈곤을 줄일 수 있는 물건을 수입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수출이 굶주림을 끝내지는 않는다. 수출에서 이윤을 얻는 사람들은 가난하지 않고, 가난한 이들을 위해 자신의 이익을 쓰지 않으며, 수출 농업이 식량 작물을 대체하면서 식량작물을 재배하는 소농들을 몰아내 버리기 때문이다. 미국 소비자가 온두라스의 멜론에 지출하는 1달러 가운데 9센트가 온두라스에 돌아오는데 그 중 농민들의 손에 들어가는 것은 2센트도 안 된다. 가장 큰 이익은 보는 것은 미국에 근거를 둔 중개업자, 도소매업자들인 것이다.

아홉 번째 신화  너무 굶주려서 저항할 힘도 없다

빈민들은 자신을 억압하는 현실에 무지하고 수동적인 상태에 놓여 있어 변화를 일으킬 수 없다는 논리다. 그러나 빈민들은 '경제체제의 작동에 대하여 알고 있으며 착취가 일어나는 과정(임금 착취, 정치차금 공여, 뇌물, 가격 차별)을 상세히 설명할 수 있다.' 그들은 수동적이고 무력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자신들보다는 덜 가난하지만 역시 불공평하고 비민주적인 경제정책으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손을 뻗치고 이들을 변혁의 대열에 동참시키고 있다.' 멕시코의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의 활동이나 브라질의 무토지 농민운동은 그 본보기다.

 

 

                                  ▲ 브라질 무토지 농민운동

 열 번째 신화  미국의 원조가 굶주림 해결에 도움이 된다

그러나 미국 대외원조의 목표는 '공산주의의 위협에 맞서 자유를 수호하는 것'이었고, 나중에는 '자유시장과 자유무역의 증진'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미국의 식량 원조는 굶주림의 해결을 목표로 하지 않으며, 90년대 총원조의 5%만이 긴급구호용이었다. 원조는 실제 농업발전을 저해하기도 했다. 보조금을 등에 업은 값싼, 혹은 공짜 미국 곡물은 지역에서 생산된 식량 가격을 떨어뜨림으로써 지역 농민들을 농토에서 도시로 내모는 역할을 한다. 한국에 대한 미국의 원조는 한국을 세계 제 3위의 미국농산물 수입국이 되게 하고, 밀에 대한 수요를 창출해 한국인들의 식습관을 급격하게 바꾸어 놓았다.

열한 번째 신화  그들이 굶주리면 우리가 이득을 본다

굶주린 사람들이 저임금 노동에 종사해야 우리가 커피, 바나나에서 배터리와 컴퓨터에 이르는 모든 물건을 헐값에 살 수 있다는 논리이다. 그러나 실제는 정반대이다. 우리의 복지를 위협하는 것은 굶주림을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굶주린 사람들이 계속 궁핍한 상태에 있는 것이다.

 

▲ 멕시코 사파티스타의 노전사

   열두 번째 신화  식량이냐 자유냐

굶주림의 종식을 위해서는 사회에 급진적 변화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데, 그럴 경우 사람들의 자유가 줄어들 것이라는 논리이다. 그러나 시민적 자유가 보호되는 사회에서 더 쉽게 굶주림을 끝낼 수 있다. 여기서 자유란 '다른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을 말하고 함께 뭉치고, 억압과 착취, 부당한 차별에서 벗어나고 굶주림에서 해방되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 사회가 생계권을 보호하지 못한다는 것은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빈곤과 굶주림으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의 지적 발전, 정신적 통찰, 음악적 재능, 육체적 성취를 박탈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결론적으로 '자본주의와 국가주의라는 거대 이념의 경제적 독단'을 캐묻는다. 그리하여 "두 이념은 독단이 되어 우리가 간직하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인간적 가치들을 타락시킨다. 도처에 널린 굶주림은 이러한 타락을 보여주는 가장 비극적인 증거 "라고 일갈한다. 그리고 "자유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존엄하게 사는 데 필요한 자원에 대한 권리를 확립하고 나아가 자유를 더 확산시키기"를 우리의 책임으로 이해한다.


근 2년에 걸쳐 찔끔찔끔 읽다가 간신히 완독한 책이지만, 책을 덮으면서 이 책이 가진 문제의식과 그에 대한 집요한 천착, 그리고 결론을 이끌어내는 도덕적, 윤리적 논리 앞에서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정말 놀라운 책이야, 그런데 왜 난 이걸 붙들고 2년이나 씨름을 한 거지?


모두 384쪽의 만만찮은 두께 탓은 아니었던 듯하다. 아마 처음 이 책을 펴면서 나는 그것을 관념과 이론의 문제로만 바라보지 않았던가 싶다. 사회과학 서적을 펼 때마다 가슴을 짓누르는 압박감 탓도 있었으리라. 모든 모순은 그것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한 시대와 사회의 존재 방식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씁쓸하다.


이 책의 미덕은 각 장마다 별지로 우리의 농업 현실과 과제들을 자료 등의 방식으로 삽입하고 있다는 점에도 있다. 재생지로 만들어서 아주 가볍다는 것도 미덕이다. 중요한 대목마다 푸른색 펜으로 밑줄을 그을 때 펜이 잘 미끄러지지 않는 점은 별로지만 안방에 큰 대 자로 누워 읽어도 팔이 아프지 않는 점은 그걸 상쇄하고도 남는다.

 

▲ 경찰의 폭력에 의해 희생된 두 농민. 인터넷에서 가져온 사진이다.

 이 책의 한국어판 서문은 "한국의 농민들과 고 이경해 씨에게 바친다."로 시작되고, '그의 정신은 굶주림을 종식시키려는 전세계의 투쟁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며, "우리는 이 한국어판 서문을 이 투쟁에 삼가 바치고자 한다."로 끝난다. 고 이경해 씨는 2003년 멕시코 칸쿤에서 신자유주의와 무역자유화 정책에 항의하면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농민운동가이다.

그리고 2005년 한국에서는 농민들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쌀 관세화 유예협상 비준동의안'이 국회를 통과했고 이에 항의, 시위를 벌이던 두 농민이 경찰의 폭력에 희생되었다. 그에 대한 여론의 질타 앞에 경찰청장이 사퇴했는데, 이를 두고 한 논객은 "한 인간의 존엄이나 생명의 가치는 대한민국 모든 고위공직자의 자리를 합해놓은 것보다 훨씬 무겁다."고 말했다.

세계 십몇 위의 경제력을 자랑한다고 하지만, 오늘의 우리 농업과 농촌 문제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고 그 앞에 우리는 한없이 왜소해지기만 하고 있다.


< 2006. 1.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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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6-01-05 0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고 갑니다.
그런데 안방에 대자로 누워 읽어도 팔이 아프지 않을 정도로
가벼운 책이라는 대목에서 웃음이 나오네요.^^

열린사회의적 2006-01-07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서관에서 보고서는 읽어야겠다는 생각만 가지고 있었는데, 님의 리뷰를 보고 나니 꼭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리뷰 잘 보았습니다.

낮달 2006-01-08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그 길은 늘 열려 있고 항상 어딘가로 가고 있는가 봅니다. 정작 저는 잘 드나들지 않는 이 서재의 존재를 가끔씩 환기해 주시는 님의 발길은 고맙기 그지없습니다.
제가 열고 있는 블로그의 이름이 <길 위에서>인데, 과연 님의 길과 내 길은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른지 궁금해집니다.

낮달 2006-01-08 1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적들님, 님의 이름이 썩 마음에 듭니다. 저는 칼 포퍼는 읽지 못했지만 김소진은 읽었고, 그의 요절은 우리 소설사의 손실임을 안타까워하는 사람입니다. 곧 서재로 찾아뵙지요.

로드무비 2006-01-10 1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낮달님의 '길 위에서'라는 블로그에 가보고 싶은데요.
주소 좀 가르쳐 주시면 안될까요?^^
(저도 그 길이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른지 궁금해서요.)
 

더바디샵과 아니타 로딕, 그리고 삼성

 

 

▲더바디샵이 광고모델로 써 온 인형 '루비'

 몇 해 전 일이다. 롯데호텔에서 농성중이던 노동조합에 대한 경찰의 진압작전이 정도를 넘었다. 경찰은 10여명의 임신부를 구타하는 등 무차별 폭력진압을 자행했고, 당연히 여론이 들끓었다. 여직원에 대한 상습적 성희롱 사건까지 불거지면서 민주노조 진영에서 이끄는 롯데제품 불매운동이 벌어졌다. 어느 날, 한 후배 교사가 아이스크림을 사러 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왔다. 그는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롯데 물건밖에 없어서요……."


나는 빙그레 웃었고,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부도덕한 기업을 응징하기 위해 불매운동을 벌이자면, 아마 우리가 아무 고민 없이 살 수 있는 상품이 얼마나 있을까?" 나는 그때 아마 좀 니글니글한 표정이었지 않나 싶다. 그러나 나는 그 친구의 소박한 실천이 무의미하다고 생각지 않으며, 그것이 그 대상 기업의 매출에 털끝만한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실천의 진정성은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어느 날 서가에 꽂힌 전여옥이나 조갑제의 책을 찢어 폐지함에 넣거나 이문열의 책을 꾸려서 반납운동에 동참하는 행위는 저명 정치인이나 언론인, 작가의 명성에 타격을 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치적이든 문화적이든, '권력'을 갖지 못한 시민과 독자로서 '권력'을 가진 대상의 발언이나 표현에 대한 명시적이고 적극적인 반대와 비판의 의사 표시로 이해되는 게 마땅하다. 따라서 그것을 단순한 정치적 프로파간다로 폄하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그것은 정치적·문화적 소수자일 수밖에 없는 시민과 독자의 주체적 판단과 비판의식을 능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업 또는 대기업의 부도덕성은 이 땅만이 아니라 전지구적 현상이라 해도 무방할 듯하다. 이른바 국적을 초월하는 자본의 공세는 지구화와 자유무역의 이름으로 제3세계와 가난한 나라를 초토화하고 있다. 이 땅의 대기업들 역시 자본의 이해를 관철하기 위해 지극히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노동과 노동자들을, 나아가서는 그들의 삶까지도 제어한다.


기업이 이윤 동기에 따라 움직이고 기능한다는 데 시비를 걸 생각은 없다. 그러나 그 방식은 최소한의 법적·도덕적 정당성을 가져야 한다. 노동조합이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주요한 기둥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노조를 금기시하고 있는 삼성의 경우는 현대와 전근대가 뒤섞여 있는 이 땅의 천민자본주의의 모습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다.


삼성의 '노무관리‘는 정평이 나 있다. 그 방식은 철저하게 전근대적이고, 철저하게 비인간적이고 철저하게 목적관철적이다. 그들은 그들 회사 안에 '노동'이나 '노동자'나 '노동조합' 따위의 형식이나 내용이 존재하지 않게 하는 데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인다. 불온(?)한 노동자 감시를 위해 휴대폰 불법복제와 위치 추적 같은 탈법 행위를 기꺼이 감행(재벌과 그 돈의 힘은 너끈히 그것을 조장하고 보호한다)하는 그들 기업의 '글로벌 스탠더드'는 의심할 나위 없이 '무노조 경영'인 것이다.


휴대폰 위치 추적을 통해 노조설립 노동자를 감시했다며 삼성 관계자들을 검찰에 고소한 삼성 일반노조 위원장은 지금 감옥에 있다. 검찰이 삼성관계자를 증거 불충분으로 무혐의 처분한 6일 후, 법원이 김 위원장에게 명예훼손죄로 실형 10개월을 선고한 까닭이다. 이는 어쩌면 '휴먼테크'(!) 삼성전자의 노무관리 방식을 압축적으로 보여줄 뿐 아니라, 한편으로는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상식으로 통용되는 21세기 한국판 민주주의의 미니어처일지도 모른다. '승자독식'은 '신자유주의와 경쟁'이 유일한 시장의 원리로 추앙받는 한국 사회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된지 오래인 듯하다.

 

  더바디샵의  창업자  아니타  로딕

 

노동자로서의 계급적 각성에 이른 한 무력한 노동자 개인의 삶과 생활을 송두리째 뿌리 뽑아 버리려는 집요한 그들의 노무관리 방식은 글로벌 스탠더드와는 무관하게 '야만적'일 뿐이다. 자신의 삶을 옥죄어 온 추적과 미행과 감시의 거미줄 앞에 맨몸으로 선 그 노동자들의 얼굴에 드러난 절망과 공포의 표정을 지켜보면서 나는 더 이상 삼성의 상품을 사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부도덕한 기업의 제품을 사지 않는다는 것은 단순히 경제적 행위가 아니라, 훨씬 더 정치적인 행위다. 그것은 소비자로서의 자기 소비에 대한 윤리적 선택일 뿐 아니라, 나아가서는 실질적으로 엄청난 힘을 소유한 생산자에게 저항하는 정치적 발언인 것이다. 그런 행위가 그 거대 공룡에게 털끝만한 상처조차 입히지 못한다 하더라도 말이다.


특정 기업의 제품을 사는 대신 경쟁적 기업의 제품을 삼으로써 우리의 윤리적 선택은 완성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숱한 경쟁 기업, 경쟁 제품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단지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이유'만으로 어떤 상품만을 구매할 수 있다면, 그것은 즐겁고 유쾌한 일일 터이다. 그것은 숱한 이성들 가운데서 나의 사람을 선택하는 행위나 여러 명의 후보자 가운데서 특정한 한 사람을 선택하는 총선이나 대선에서의 선택과 동질적인 행위인 까닭이다.


"정치적 실천은 지구에 사는 사람들의 의무다."

"우리는 산성비, 재활용, 시골의 몰락, 녹색 소비자와 인종청소에 대해 발언해 왔다."

이건 정치인이나 시민운동가의 발언이 아니다. 이윤을 목표로 기업을 운영하는 영국의 한 화장품 기업 더바디샵(The Body Shop) 창업자 아니타 로딕((Anita Roddick)의 주장이다.(독일의 토마스 바이덴바흐 감독은 이 히피 출신의 여성 기업인의 헌신적 인생을 조명한 다큐멘터리 '아니타 로딕-바디샵 아줌마'를 서울환경영화제에 출품하기도 했다.) 그녀는 소비자들에게 '자사의 제품을 사는 것은 윤리적인 선택'이라는 이미지를 굳히는 데 성공한 기업인이다.


"여성들이 몸에 불만을 갖도록 하는 것은 비윤리적이다."

"여성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가장 아름답다."

다이어트나 여성미를 강조하는 광고에 대한 여성운동가의 발언이 아니다. 화장품을 만드는 기업인 더바디샵은 이러한 인식 아래, '당신의 몸을 긍정하고 사랑하라'는 이념을 실현해 왔다. 그녀의 이러한 인식은 굵직한 허리에 배가 볼록 나온 '평균 체형'의 여성 인형 '루비'를 자사의 홍보 모델로 삼고, 소비자를 오도하는 '뷰티'라는 단어는 아예 쓰지 않으며, 직원 중 여성의 비율을 80% 안팎으로 유지하고, 탁월한 보육시설이나 복지제도 등 여성적 경영 방식을 취하면서, '동물 실험 반대', '용기 재활용' 등 적극적 환경 보호에 참여하고, '자유무역과 세계화 반대'로 이어진다.

 

 

 

더바디샵코리아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기업 이념

 

반전운동, 인권운동, 환경운동 등을 전개해 온 아니타 로딕은 "우리는 화장품 회사가 아니라 커뮤니케이션 기업으로 기억되고 싶다."며, 직원의 3분에 1에 달하는 거대한 홍보조직을 통해 각종 정치적·사회적 사안들에 대한 포스터를 만들고 집회 등 캠페인을 조직하곤 한다. 그녀는 "광고보다 정치·사회적 실천에 대한 우리의 홍보방식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이탈리아계 이민 가정에서 태어난 로딕은 2차 세계대전 중 어머니를 통해 근검절약의 정신을 배웠고, 지역거래·재활용·재사용·리필링과 같은 '바디샵'의 환경보호 운동을 탄생시켰다. 오늘날 더바디샵의 사회 활동은 방대하다. 인도에서는 바디샵의 코끼리가 몸통에 에이즈 예방법을 광고하며 걸어다니고, 영국에서는 버스 12대가 반전 포스터 등을 붙이고 운행한다고 한다. 기업 활동을 정치적·사회적 발언과 실천의 일부로 만들어 가고 있는 더바디샵은, 아니타 로딕은 행복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디샵은 전세계 1,800개 매장에서 24개 국어로 운영되며, 8,400만의 고객을 가지고 있는 국제적인 기업으로 성장했다.


한겨레에 실린 더바디샵의 이야기를 읽은 딸애는 자신이 쓰던 바디샵 제품을 보여주면서 들뜨고 즐거워했다. 자신의 단순 소비행위가 윤리적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즐거운 일임에 틀림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교통사고로 숨진 조각가의 배상을 두고 예술인 경력을 인정하지 않고 도시 일용직 노임과 60살 정년을 기준으로 보상하겠다는 삼성 계열 보험사의 결정과 이어진 소송 소식을 바라보는 기분은 씁쓸하기만 하다. ('호암아트홀'이나 '삼성 리움'은 삼성이 운영하는 공연장, 미술관이다. 아마 그들은 자신들의 문화 투자와 지원이 이 땅의 문화를 한 단계 높이고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윤리적 도덕적 기업 운영의 본보기를 따로 들지 못하는 것은 그 방면에 과문한 탓이라 여기고 싶다. '기업 이윤의 사회 환원'을 모범적으로 실천해 온 유한양행이나 노사상생을 위한 경영전략으로서 뉴패러다임 모델 운영의 귀감이 된 유한킴벌리는 해마다 존경 받는 기업과 기업인의 으뜸으로 꼽히는 삼성전자와 이건희의 그늘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삼성이나 그 총수가 쌓아올린 거대한 성이 드리운 그림자는 꼼짝없이 우리 경제의 취약점이며 전근대성의 표지라는 것을 사람들은 너무 자주 잊어 버리는 듯하다.


더바디샵이 행복하고, 아니타 로딕이 행복하겠다고 말했지만, 나는 정말 행복한 것은 여러 개의 동종의 상품 중에 꼬집어 한 제품을 고르면서, 자신의 선택이 갖는 윤리적 의미를 즐거워하고 자랑스러워하는 선량한 소비자일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 2005. 12. 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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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5-12-19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전 바디샵 핸드크림을 선물 받은 적 있는데 친환경제품인가보다
생각만 했죠. 수수한 연두색의 용기 보고......
이렇게 근사한 기업이 있었군요.
정말 멋집니다.

그런데 이 글 제 방에 퍼가도 될까요?
제 방을 즐겨 찾는 몇 분과 나눠 읽고 싶네요.^^

urblue 2005-12-19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

낮달 2005-12-19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든지 퍼 가십시오. 윤리적 기업에 관한 아주 단순 명쾌한 얘기를 쓸데없이 중언부언해 놓은 글인데, 취할 점이 있다면 다행한 일이겠지요...
 
나뭇잎들은 그리운 불빛을 만든다
한겨레신문전국독자주주모임 / 민음사 / 1997년 4월
평점 :
품절


어차피 삶은 '신파'다

-이슬비처럼 가만가만 다가오는 중얼댐

 

문학적 취향이란 것은 쉽게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물론 설명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어떤 작가가 좋다거나 어떤 작품이 마음에 든다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작가의 세계관이나 가치관, 작품의 지향점을 중심으로 한 판단이어야겠지만, 실제로 사람들의 특정 작가나 작품에 대한 호오(好惡)는 그와는 다른 변수에 의한 경우도 흔하다. (우리 딸애는 단지 특정 정당의 선거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만으로도 특정배우를 경멸하곤 한다. 이 경우, 그 호오는 정당성이나 합리성과는 무관한 '정서적' 선택일 뿐이다.)


제목도 잘 기억되지 않는 단편 한 편을 읽고 나서 나는 그의 '정서적 지향'(요즘 쓰는 말로 하자면 '코드'가 되겠다.)이 나와 매우 가깝다고 느꼈고, 그의 다른 작품들을 읽게 되면서 그것을 거듭 확인하였다. 이 정서적 지향을 몇 줄로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영화 '바람난 가족'을 보고 임상수 감독의 코드가 나와 비슷하다고 느낀 바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코드'란 '사물을 바라보거나 이해하는 방식'이 아닐까 싶다.


작가 이균영은 "어두운 기억의 저편"으로 이상문학상을 받았고, '신간회 연구'라는 논문으로 단재학술상을 탄 진보 역사학자였다. 그러나 그는 1996년, 45세의 나이에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작가 김소진이 세상을 떠난 것은 이듬해인 1997년이다. 젊은 작가들의 이른 죽음은 그 자신과 가족뿐 아니라, 이 나라 문단에도 불운한 일이다.

 

                    ▲ 1984년 이상문학상 수상 연설 중인 작가


"나뭇잎들은 그리운 불빛을 만든다"는 31년 7개월 동안 92만 킬로미터를 운행한 노기관사 박석우의 기구한 사랑과 운명을 다룬 이야기이다. 그의 고독한 삶을 아로새긴 건 두 사람의 여인이다. 가난했던 젊은 시절의 첫사랑 송옥순, 그녀는 계층 상승과 새로운 세계를 향해 질주하는 욕망의 화신으로 박석우의 삶을 끊임없이 왜곡하면서 아들 하나를 남기고 상류사회로 떠난다. 탄광촌의 작부 출신으로 딸 인혜를 낳고 옥순이 낳은 성호를 데려다 키우는 착하고 헌신적인 여인 조아진, 그러나 그녀는 가족의 일원으로 인정받지 못한 채 7년 만에 숨을 거두고 죽어서야 가족으로 받아들여진다.


석우는 그녀를 영동선이 지나가는 고향 솔티재 언덕에 묻는다. 죽어서야 집에 들어선 그녀의 관을 향해 시어머니는 말한다. "아가!나하고는 연분이 맞지 않았지만 잘 살았다. 고맙구나 불쌍쿠나 훌훌 털고 가거라." 그것이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받아들이는 화해의 방식이었다.


철길은 대체 무엇인가. 송옥순에게 그것은 새로운 '욕망'과 '세상'에 이어지는 통로이지만, 반생을 철길에서 보낸 박석우에게는 그것은 미혹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는 어디에도 없으며, 삶은 시간 속에서 빛나는 무엇일 뿐이다.


무수한 사람들이 그를 스쳐 지나고 만나고 헤어졌지만 그들은 그곳에 있고 박석우 씨는 여기에 있을 뿐이었다. 사람들이 그렇고 시간이 그렇다. 흐르는 것은 시간이었다. 멀고 가까운 불빛들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그는 지나간다. 그 자리에서 빛나는 것……. 별, 어린 시절의 고향, 청춘, 아내……. 가난과 고통스럽던 사랑마저 아름다워라. (20쪽)


어느 알간지 문학 담당 기자의 평가대로 '이 소설은 신파에 가깝다.' 옥순과의 회한으로 남은 사랑, 아진의 헌신적 사랑과 죽음, 그의 고독한 생애. 갓난아이의 울음소리로 깨어난 그의 하루가 집 나간 아들 성호가 낳은 갓난 손자의 귀가로 마무리되는 구조는 '센티멘탈'하거나 '멜랑콜리'하다.

 

 

▲ 시골역으로는 너무 많이 알려져 버린 정동진역이다. 올 1월 초순에 학생들을 데리고 갔다가 찍은 것이다. 철길은 언제나 그 소실점을 통해 '여기 있음'과 '떠남'의 정서를 환기해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시치미를 떼는 객관적 기술보다 이슬비처럼 가만가만 다가와 중얼대는 진술들, 이를테면 "삶은 쓸쓸하다."거나 어둠 속의 불빛을 향한 독백, "그래, 안녕하신가? 나는 그저 그렇다. 별일 없다. 우리 인생의 일상이 그렇지." 따위에 서려 있는 '정직'과 '진정성'에 매료된다.

인생은 기실, 신파극보다 훨씬 더 신파적일지 모른다. 다만 그런 신파 같은 삶을 소설이 다루지 않을 뿐이다. 삶과 인간, 그 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복잡다기한 얼개에 합목적성이나 합리성, 논리적 일관성 따위는 어차피 존재하지 않는다. 삶은 모순과 모순의 변증법적 재현일지도 모른다.

 선로에서 불빛이 희게 부서지고 있다. 어둠 속에 서 있는 나무들이 어두운 하늘의 높이를 짐작하게 하였다. 나뭇잎들 사이에서 불빛이 잘게 부서져 빛을 내고 있다. 하나의 잎이 하나의 불빛을 부수고, 하나의 불빛은 수십 불빛을 이루고, 다섯 개의 나뭇잎에 다섯 개의 불빛을 부수고, 다섯 불빛은 수백 불빛을 이루고……. 나뭇잎들은 그리운 불빛을 만든다. (40쪽)


  < 2005. 12. 8 >

 

*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모르겠다. 공연히 철 지난 책들을 꺼내 듬성듬성 되풀이해 읽었고, 그러다 보니 "강철군화"에서 "나뭇잎……"까지 모두 세 편의 글을 괴발개발 썼다. 흥겨워서가 아니라, 무슨 숙제처럼, 오래 묵은 책을 읽고, 성급하게 써 내려간 글을 읽는데 공연히 가슴이 저려왔다. 10년 전의, 또는 5년 전의 감동도 분노도 없는, 이 개 같은 일상, 그 일상에 짓눌린 스스로의 모습을 타인처럼 바라보면서.

작가 조세희의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200쇄를 찍었다 한다. 그는 시위 중 경찰의 폭력에 희생된 농민 전용철 씨와 관련한 민족문학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회의 기자회견에서  "'난쏘공'은 이대로 가면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쓴 거고, 그 못된 상상에 우리가 도착해 있다"고 말했다.

이른바 엑스파일을 취재 보도한 MBC의 이상호 기자가 피의자 신분으로 소환되면서 말한다. "다시 익숙한 절망과 조우합니다." 그 방송의 전문 탐사보도 프로그램 'PD수첩'은 '애국'시민들의 몰매에 깃발을 내리고, 인혁당 사건의 진상마저 'MBC 물타기', '노빠의 불끄기'라고 재단하는 네티즌들을 바라보며 이 기자는 다시 묻는다. '상식적인 질문도 허용하지 않는 사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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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5-12-15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대 국문과에 재직중일 때 가서 원고를 받아온 적이 있어요.
깨알같은 글씨의 초고 노트가 정말 인상적이었는데.
얼굴엔 '선비'라고 써 있고요.
돌아올 때 가슴이 설레었던 기억이 납니다.
잘 읽었습니다.
낮달님의 글, 저랑 정서적 취향이 잘 맞는 것 같은데요?
안녕하세요? 처음 인사 드립니다. 로드무비예요.^^

낮달 2005-12-15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갑습니다. 정서적 취향이 비슷한 사람을 만나기는 쉽지 않은 일인데... 한 반 년쯤 다음에서 블로그를 꾸려오면서 느낀 점입니다.
무비님, 나는 '로드'도 좋아하고 '무비'도 좋아한답니다.
반갑습니다. 곧 서재를 찾아뵙지요.
 

 

초간정(草澗亭)의 가을

 

 

  출근길에 교정에 핏빛으로 물든 단풍나무 앞에서 잠깐 서 있어야 했다. 무심하구나, 잠깐 마음속에 파문이 밀려왔다. 그러고 보면 11월, 알지 못하는 새에 가을이 깊어 있었던 것이다. 공연히 마음이 싸아해 왔다. 어디론가 성큼 깊어진 가을을 만나고 싶었다.

단풍을 만나려면 굳이 초간정을 찾을 일은 없다. 인근의 산과 들은 이미 단풍으로 자욱한 것이다. 그런데 굳이 예천으로 방향을 잡은 것은 지난 해였던가, 불문의 선배들과 함께 무심코 들렀던 초간정의 가을빛이 너무 강렬했던 탓이고 예천은 아주 친근한 곳이어서였다. 복직하고 두 학교를 거치면서 거기서 근무한 게 7년, 그 중 반쯤은 읍내의 오래되고 낡은 국민주택에서 살았다. 그러다 보니 예천은 마치 이웃집처럼 익숙하다.

 예천 들머리에서 제가 다녔던 중학교를 지날 때, 딸애는 목을 빼고 밖을 내다보았고, 가끔씩 옛 기억들을 하나씩 들추어내곤 하였다. 그렇다. 누구나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현재의 삶의 모습을 확인하는 것이다. 삶은 그 같은 차례 없는 숱한 기억들의 누적이기도 하다.

용문으로 가는 길은 여전히 좁고 꼬불꼬불했다. 풍경이 바뀔 때마다 아내와 딸애는 나지막하게 탄성을 질러댔다. 한적한 신작로에도 가을이 깊숙이 진주해 있었다. 산 능선과 들판과 길가의 가로수 사이에서 가을은, 옷깃을 세우고 화사하게, 그러면서도 조금은 쓸쓸한 모습으로 우두커니 서 있는 듯했다.

 

 초간정 입구로 들어서자, 새롭게 탄성이 터져 나왔다. 초간정 아래를 돌아 흐르는 시내 주위로 여러 그루의 은행나무가 노랗게 은행잎을 흩날리며 서 있었고, 이미 선연한 핏빛을 잃어 버린 단풍나무, 소나무와 여러 종류의 고목들이 연출하는 주변 풍경은 11월의 첫 주말의 불청객들을 압도해 버린 것이다.

초간정은 초간(草澗) 권문해 선생이 1582년에 초옥(草屋)으로 건립하였으나, 임란 때 없어진 것을 1612년에 중건하였고 병자호란 때 다시 무너진 것을 1870년에 다시 세운 정자다. 앞에 시내가 돌아 흐르는 경관 좋은 암반 위에 자리잡은 팔작집이다. 사진을 찍는다고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다가 파인더 안에 들어온 정자를 바라보면서 대체로 이 정도의 규모를 가진 우리 고건축이 갖는 아름다움은 '단아(端雅)함'이라고 뭉뚱거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초간정의 아름다움은 그 오래된 정자와 주변 풍광에 있지, 호사와 풍류를 누린 한 지역의 권문세가를 기리는 데 있지 않다. 그러나 초간 권문해가 편찬한  우리 나라의 역사·지리·문학·철학·예술·풍속·인물·성씨·초목·조수(鳥獸)를 다룬 일종의 백과사전인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은 따로 기억할 만하다. 비록 그것이 원나라 음시부가 지은 '운부군옥'을 본떠 지은 것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용문사(龍門寺)는 신라 때, 두운 선사가 창건한 절이다. 전설에 따르면 고려 태조가 삼한통합의 큰 뜻을 품고 두운선사를 방문하고자 동구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바위 위에서 쌍룡이 나타나 길을 인도했다고 하여 태조가 산과 절 이름을 각각 용문산, 용문사라 붙였다고 한다.

 1984년 초파일 다음 날, 5동의 건물을 태워 버린 화마에도 살아 남았다는 대장전(大藏殿)을 빼면 이 절집은 여러 차례의 불사로 날아갈 듯한 법당 여러 채로 그 모습을 이미 일신해 버린 듯했다. 대장전 안에는 국내 일천여 사찰 가운데 용문사에만 있는 윤장대(輪藏臺)가 있다. 내부에 불경을 넣고 손잡이를 돌리면서 극락정토를 기원하는 의례를 행할 때 쓰던 도구로 경전을 장대 안에 넣어두고 돌려가며 읽는 까닭에 윤장대다.

 절집 안마당까지는 오르지 않고, 여러 명의 아마추어 사진가들이 삼각대와 큼지막한 사진기를 들고 오르내리는 경내 길을 한 바퀴 돌았다. 처연한 자태로 벋어나간 고목들과 발길에 차이는 노란 은행잎, 완만한 기울기의 언덕길 주변에 수북이 쌓인 낙엽, 여전히 오묘한 눈록빛을 잃지 않고 있는 키 큰 나무들이 연출하는 산사의 풍경은 이미 아름다움을 넘었다. 어머니의 손을 잡고 뒤뚱거리며 걷는 어린 아이의 모습이나 팔짱을 끼고 그 길에 묻혀 버린 모녀의 모습은 이미 그 풍경의 일부 같아 보였다.

 

 

 바쁜 일도 없이 서두르는 건 버릴 수 없는 병폐다. 서둘러 절집을 빠져 나와 내려오는 길가, 무리지어 핀 백일홍이 지저분하게 시들어가고 있었다. 아름답기야 꽃을 따를까 보냐만, 시들어 지는 모습은 나무가 훨씬 의젓하고 실해 보이니 세상에 뿌리박아 남기고 끼침이 다른 탓이겠다는 생각을 뜬금없이 하다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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