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적으로 취향의 문제이긴 하지만, 나는 신경숙의 소설을 읽지 않는다. 같은 이유로 나는 공선옥과 하성란을 좋아한다. 크게 팔리지도 않는 작품 속에 튼실하게 자리한 인간과 삶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나는 그들과 공유한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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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뭇잎들은 그리운 불빛을 만든다
한겨레신문전국독자주주모임 / 민음사 / 1997년 4월
7,500원 → 6,750원(10%할인) / 마일리지 37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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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이름은 이균영. 촉망받는 사학자였는데, 교통사고로 요절했다. <어두운 기억의 저편>이라는 단편으로 이상문학상을 타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나는 그를 전혀 알지 못하지만, 나와 정서적 코드가 가장 비슷한 이라고 믿고 있다.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시선들은 때로 나의 시선이 아닐까 하고 놀라기도 한다.
옆집 여자
하성란 지음 / 창비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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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선옥이 삶과 세상을 거시적으로 바라보고 그것을 질박하게 그리고 있다면, 하성란은 마치 현미경을 들이대듯 세상을 미시적으로 바라보는 작가이다. 그러면서도 그의 작품이 드러내는 문제의식은 단지 현란한 감상이나 지적 유희에 그치지 않는다는 면에서 그는 좋은 작가라고 믿는다.
멋진 한세상
공선옥 지음 / 창비 / 2002년 8월
14,000원 → 12,600원(10%할인) / 마일리지 7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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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속 표지에 나는 이렇게 적었다. <너무 늦었다>. 내가 그의 소설집을 구입한 게 너무 늦었다는 뜻이다. <넌 그렇게 살고 있니? 그래 난 이렇게 살고 있어>라고 말하는 게 하나도 생뚱맞아 보이지도 않는 그런 작가이고, <삶이 곧 문학>이라는 명제를 작품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통해서 증명하는 작가이다.
내 안의 깊은 계단
강석경 지음 / 창비 / 1999년 10월
7,500원 → 6,750원(10%할인) / 마일리지 37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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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먹는다는 게 이런 거>라고 넌지시 알려주는 작가이다. <숲 속의 방>으로 떠오를 때만 해도 새로운 작가 하나로만 그를 이해했는데, 이 소설을 읽고 그녀가 훌륭한 작가라는 걸 깨달았다. 본질적 의미에서 사랑과 섹스를 제대로 이해하는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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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란 무엇인가. 진보는 현학적이고 사회과학적인 이론적 개념이 아니라,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이 있을 수 있고, 그것을 믿는 사람들의 세상에 대한 태도이다. 역사를 믿는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 몇 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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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군화- 한울사회문학시리즈 1
잭 런던 지음, 차미례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1989년 7월
8,000원 → 8,000원(0%할인) / 마일리지 4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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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강철군화>는 이 소설의 주인공 어니스트 에버하드가 명명한 자본주의 정치권력의 과두지배체제. 어니스트는 훗날 자신의 동지이자 아내가 되는 자본가의 딸 애비스 에버하드에게 <당신의 드레스도 (노동자의) 피로 얼룩져 있다>고 일갈하는데......
역사를 위한 변명- 숲길 3
마르크 블로크 지음, 고봉만 옮김 / 한길사 / 2000년 7월
10,000원 → 9,000원(10%할인) / 마일리지 5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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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는 고발한다- 드레퓌스사건과 에밀 졸라
니콜라스 할라즈, 황의방 / 한길사 / 1998년 4월
13,000원 → 11,700원(10%할인) / 마일리지 6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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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80년대 첫 출간때의 제목은 <드레퓌스 사건과 지식인>이었다. 무명의 프랑스 유대계 포병장고 드레퓌스를 통하여 프랑스와 유럽의 지성은 진리와 정의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넓혔다. '나는 고발한다'는 당대의 문호 '에밀 졸라'의 분노에 찬 절규.
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
이덕일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1년 5월
9,800원 → 8,820원(10%할인) / 마일리지 49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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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풍찬노숙>은 망명 독립지사들의 간난으로 점철된 삶을 이르는 표현이다. 중국으로 망명 일경에 체포되어 고문끝에 유명을 달리한 이회영의 삶이 바로 <풍찬노숙>이었으리라.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대표적 실천가이기도 한 한말 대명문거족 이회영 일가의 삶과 투쟁을 그린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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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칩이다. 겨울잠 자던 개구리가 기지개를 켜고, 겨울 삼석 달 땅속에서 웅크리고 있던 버러지도 꿈틀거린다는 절기다. 아직 교복을 갖춰 입지 않은 신입생들로 북적이는 학교도 바야흐로 옹근 경칩 절기인 듯하다. 돌아온 지 한 주가 다 되어 가건만, 지난 2월말 미몽에 취한 듯 만난 개골산(皆骨山)의 황량한 골짜기와 금강산 호텔, 고성항 횟집에서 만난 볼 붉은 처녀들의 모습은 기억 한켠에서 여전히 새록새록 살아 있다.


정부가 비용을 부담하는 관광성 연수와는 통 인연이 없었던지라, 연수 연락을 받고도 나는 "그런가, 금강산엘 간다고?" 하고 심드렁하기만 했다. 금강산 관광이 시작된 지 7년, 이미 휴전선 월경(越境)은 관광 호사가들에게는 일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따라서 이 땅의 분단 모순 그 질곡과 금단의 현장을 방문한다는 설렘이나 떨림은 전혀 없었다. 솔직히 그런 건조한 감정을 확인하면서 다소 쓸쓸한 기분이 들었을 뿐이다.


남북 양측의 출입국사무소를 넘을 때야 비로소 자신이 '북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여권이 필요하지 않고, 형식적이긴 해도 거쳐야 했던 출국과 입국신고 같은 절차가 다른 체제,다른 땅으로 옮아가고 있다는 점을 명료하게 환기해 주었던 것이다. 북방 한계선을 넘으면서부터 관광전용도로를 따라 붉은 깃발을 들고 띄엄띄엄 서 있던 키 작은 인민군 병사들, 그들의 검게 탄 깡마른 얼굴과 의도적 무표정을 바라보면서 나는 이 민족 내부 교류가 단순한 '기쁨'이 아니라, 복합적인 '불편함'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던 것 같다.


그 땅과 거기 사는 사람들과는 무관하게 뻗어 있는 전용도로는 주변의 마을과 도로들과 완벽하게 격리되어 있었다. 그리고 도로를 둘러싼 펜스의 아련한 연둣빛은 연도의 잿빛 겨울 풍경과는 너무 이질적이어서 무슨 동화 속의 풍경 같아 보였다. 그래서인지 60년대의 낡은 흑백사진에서 튀어나온 듯한 연변의 낡고 오래된, 마치 창고처럼 보이는 기와집으로 이루어진 마을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일행들은 관광조장의 익살스런 안내에 가끔씩 미소를 지었지만, 아무도 주변의 풍광에 대한 감흥을 쉽사리 드러내지 않았고 말을 아꼈던 듯하다. 이미 충분히 짐작하고, 이해하고 있었던 일이긴 했지만, 마치 무례한 틈입자처럼 찾아온 관광객의 모습으로 겨레의 남루한 삶을 목도하고 있다는 자각은 결코 개운한 느낌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금강산 호텔에 여장을 풀고 금강산 온천을 향해 출발하던 셔틀 버스 안에서였다. 호텔 주변을 아늑하게 둘러싼 곧고 키 큰 금강소나무 숲으로 난 도로를 가로질러 낯익은 북녘의 글씨체로 '우리 식대로 살아가자!'는 구호가 적힌 펼침막이 높다랗게 걸려 있었다. 차 뒤편에서 누군가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래, 한번 살아보라구."


상팔담

물론 나는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비무장지대를 넘을 때부터 아슬아슬하게 목구멍을 간질이던 불유쾌함의 정체가 조금씩 그 의뭉스런 모습을 드러내는 듯해 나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리고 이튿날 구룡폭포와 상팔담(上八潭) 산행을 다녀올 때까지 나는 등산로 곳곳에서 만난 남녀 '안내원 동무'들과 어떤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나는 멀찌감치 그들을 바라보기만 했다. 우리 지역의 사람 좋은 교사들은 그들에게 '안동 간고등어'를 설명하기 위해 거의 거품을 물기까지 했다고 한다. 나는 대체로 그들을 향한 이남 사람들의 선의는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진부한 비유겠지만, 수십 년 만에 만난 부자 형과 가난뱅이 아우의 상봉에서 형의 슬픔과 안타까움, 안쓰러움은 충분히 이유 있고, 그만큼 살뜰할 터이다.



그러나 동기간의 정보다는 현실은 훨씬 무거운 법이다. 의심 없이 '한 살림 뚝 떼어줄' 형편이 아닌 다음에야 그 해법은 만만치 않다. 한바탕 눈물바람 다음에 형제가 맞닥뜨리는 것은 서로가 가진 부와 가난 때문에 더욱 도드라져 보일 자신의 가난과 부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물질적 결핍'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들이 살아온 '삶의 모습'인 것이다. 게다가 그 삶의 변수가 '이데올로기'라는 점까지 감안하면 문제는 점점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 도움을 준다고 하지만, 주는 쪽이나 받는 쪽이나 껄끄럽긴 매일반이다.더구나 주는 쪽의 다른 가족들의 간섭과 눈초리가 예사롭지 않다면 오가는 보따리에 자존심이 걸리기 마련인 것이다.

곳곳에 '신성하게' 서 있는 '수령님 교시와 흔적'을 뜨악하게 바라보면서, 충분한 방한이 되지 못할 것 같은 초라한 입성의 안내원들의 안내를 건성으로 흘려들으며 산을 오르내린 남쪽 관광객들은 새삼 깨달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들의 구질구질한 가난이 자신의 여유와 부를 오히려 입증하고 있다는 만족감과 섣부른 우월감 따위를 말이다. 나는 산을 오르내리며 만난 남녀 안내원 동무들에게 나와 동료들이 두메산골에 기어든 '양복쟁이'의 모습으로 비추어지지 않기를 바랐다. 자본주의에 대한 그들의 적의와 경멸이 온당하지 않은 것처럼, 그들의 사회주의를 바라보는 우리의 동정과 연민도 그리 온당하지 않다고 나는 생각했던 것이다.

옥류관에서 평양냉면을 먹으면서 나는 조금씩 풀어졌다. 제복을 입고 재바르게 움직이는 '접대원 동무'들의 모습을 줄곧 좇아 다니면서 나는 내내 미소를 깨물고 있었을 것이다. 밝은 빨간색 유니폼과 살구색 스타킹을 입고 신은 날씬한 처녀들은 곱게 화장한 모습이었다. 대체로 볼연지를 강조하는 등 붉은 색조가 강해서 세련되었다기보다는 촌스러웠는데도 불구하고 처녀들은 매우 신선한 느낌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냉면 맛은 남쪽과 썩 다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수줍은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공연히 이것저것 묻고 싶어하는 이방의 손님들을 주의 깊게 응대하는 그네들의 모습은 아름답고 우아했다. 이남의 습관대로 냉면을 잘라 달라는 요구에 "평양 냉면은 그냥 드셔야 합네다."라고 대답하는 처녀 앞에서 우리는 유쾌하게 소리내어 웃었다. 그녀들은 무엇보다 진지했고 당당했다. 옥류관 입구에서 발목을 드러내는 짧은 개량 한복에 하이힐을 신은 키 큰 접대원 동무는 점심 맛나게 드셨냐고 물었고, 나는 그렇다고, 그러나 음식 맛보다 사람들이 더 아름다웠다고 말했다. 그녀는 말없이 미소했다.

 

 


  ▲ 모란봉 교예단. 그들의 나긋한 손놀림과 초인적 기예는 내게는 투명한 슬픔으로 다가왔다.



오후에 문화회관에서 모란봉 교예단의 공연이 있었다. 1시간 30분이 언제 흘렀는지 꿈결 같은 시간이었다. 나는 공연을 보는 내내 울음을 삼켜야 했다. 너무 격하게 목이 메어 와서, 나는 마치 마법에 걸린 듯했다. 무엇 때문에 이리 눈물이 나는지, 기쁨과 감동으로 탄식하면서도 왜 그리 눈물이 나는지……. 우아하게 왼팔을 치켜들고 무대에 나와 관객들에게 답례하던 자그마한 몸집의 단원들, 그들이 짓던 미소, 그들이 보여준 인간의 육체가 표현할 수 있는 극한의 조형미들, 초인적 기예 앞에 환호하며, 손뼉을 쳐대는 관객들 속에서 나는 내내 소리죽여 울었다.


나는 지금도 내 눈물을, 내 오열을 설명할 수 없다. 누구는 그들의 초인적 기예 뒤에 숨은 인고의 시간과 그 고통을 떠올리고, 누구는 개인의 삶을 규정해 내는 체제의 억압을 떠올렸다고 하지만, 그것은 지극히 편벽한 자본주의적 관점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나는 오히려 그들의 놀라운 기예와 자랑, 말없는 긍지와 자부가 그들의 고단하고 남루한 삶을 뛰어 넘으려는 눈물겨운 자존으로 이해되고 존중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나는 배부른 이남의 관광객들에게 재주를 팔면서도 잃지 않는 그들의 당당함이, 그들의 재주 앞에 과장된 찬사를 바치면서도 시혜자의 연민과 동정을 벗지 못하는 남쪽 사람들의 근시가 가슴 아팠다.

 


▲ 금강산호텔의 승강기 안내원 함혜영 동무

마지막 밤, 장단항의 고성항 횟집에서 광어회와 함께 마신 진로소주와 '안동은 창원 지나 있냐?'고 묻던 볼 붉은 접대원 동무들, 그 처녀들의 엉뚱한 질문도 잊히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금강산 호텔의 승강기 안내원, 함혜영 동무를 잊을 수 없다. 호텔 로비에 있는 술집에서 생맥주를 마시다가 나는 스물한 살의 그녀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누고 그녀의 사진 몇 장을 찍었다.


나는 반쯤은 취해서 이렇게 말했다. "혜영씨, 남쪽에도 예쁜 여자들은 많아. 그러나 그들은 달라. 그들에게는 당신들에게 있는 건강함과 순수가 없어. 인간을 바라보는 따뜻한 마음이 느껴지지 않아." 그녀의 대답은 나를 간단히 재워 놓았다. "선생님, 좋은 말씀은 다 골라 하시누만요." 내가 그녀와 수작하고 있는 동안, 주변을 지나던 사람들마다 그녀와 격의 없이 어울리는 걸 본 내가 반쯤은 시샘하는 기분으로 "원, 사람들을 경계할 줄도 모르고……."라고 했더니, 그 여자는 기가 막힌다는 듯 이렇게 반문했다. "사람이 왜 사람을 경계합네까? 선생님."


이튿날, 만물상을 오르는 대신 나는 해금강과 삼일포를 둘러보는 것으로 금강산 구경을 마감했다. 첫 날, 나는 일찌감치 마음속에 꿈꾸어 온 금강산을 지워 버렸다. 겨울이라 그야말로 산은 개골(皆骨), 모두 뼈만 앙상해 황량했고, 중첩된 깊은 골짜기와 빛 때문에 풍경을 사진기에 담는 것도 마땅하지 않았던 것이다. 영상으로만 그렸던 금강의 풍광은 훗날 좋은 계절에 다시 만나자고 나는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곧 다시 오게 될 거야. 나는 우정 스스로를 위로했다.


짐을 꾸려 호텔을 나서면서 나는 함혜영과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선생님 또 오시라요. 혜영씨 잘 있어요. 내 곧 다시 오지. 이남과 다를 바 없는 복장의 도어맨들의 배웅을 받으며 우리는 호텔을 떠났고 오후 세 시께 다시 군사 분계선을 넘었다. 땅만 이북일 뿐, 금강산 단지를 구성하는 것은 '현대'거나 모습을 감춘 '자본주의'였다. 그러나 그것이 반 세기만의 왕래를 가능케 한 힘이었음도 부정할 수 없다.


금강산에서의 2박 3일. 나를 포함한 640여 명의 교사들이 만난 것은 한갓진 겨울 명산이 아니라, 거기 살고 있는 사람들의 온기와 체취였다. 함혜영 같은 접대원뿐만 아니라, 삼일포를 함께 걸었던 구조대 청년의 수줍던 미소를, 거칠고 공격적인 억양의 말씨 속에 숨어 있는 따뜻한 동포애를 아무도 놓치지 않았다.


그들을 바라보는 내 눈길이 공정하다기보다 치우치고 있다는 점을 나는 인정한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의도된 '과잉 친절'과 한 겨레라는 핏줄에 기대는 '과장된 감동'이 오히려 다른 체제와 삶에 대한 총체적 이해를 방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분단 60년의 세월이 이 땅에, 겨레들의 가슴에 남긴 증오와 저주의 흉터와 상채기들을 아물게 하고 지우기 위해서는 아직도 얼마든지 더 치우쳐도 좋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정치적 통일'에 앞서 저마다의 핏줄을 관류하는 피의 기억을 되살리는 조그마한 해원(解寃)의 씻김굿이라고 보아도 좋을 터이다.


< 2006. 3. 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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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 - 네루다 시집
파블로 네루다 지음, 정현종 옮김 / 민음사 / 1989년 1월
평점 :
절판


 

라틴 아메리카의 희망, 파블로 네루다

 

그러니까 그 나이였어……시가

나를 찾아왔어. 몰라, 그게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어, 겨울에서인지 강에서인지.

언제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어,

아냐, 그건 목소리도 아니었고, 말도

아니었으며, 침묵도 아니었어,

하여간 어떤 길거리에서 나를 부르더군,

밤의 가지에서,

갑자기 다른 것들로부터,

격렬한 불 속에서 불렀어,

또는 혼자 돌아오는데 말야

그렇게 얼굴 없이 있는 나를

그건 건드리더군.


<시 "시" 중에서>


요즘, 네루다 시집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를 읽고 있다. 아마 1989년께 같은 시집을 읽었던 기억이 있는데, 최근에 산 이 민음사판은 2000년에 발행한 초판의 11쇄다. 내 기억이 엉터리인가 하여 알라딘에서 검색해 보았더니 역시 그렇다. 1989년에 같은 출판사에서 이 시집을 냈다. 이 책은 아마 새로운 편집본인 모양이다. 한심하게도 지금 생각나는 것은 단지 '읽었다는 기억'과 아주 폼나는 '제목'뿐이다.


파블로 네루다는 내게 있어서 '시인'으로보다는 '칠레'와 '빅토르 하라', 그리고 '살바도르 아옌데'와 같은 라틴아메리카의 어두운 현대사와 같은 열쇳말로 기억되는 이다. "운동보다도 운동가를/술보다도 술 마시는 분위기를 더 좋아했다"(서른, 잔치는 끝났다)는 시인 최영미처럼 '혁명보다 혁명의 분위기'를 더 좋아해서인지 모르겠다. 그를 잘 알지 못하는 이들은 "알 포스티노"와 같은 영화로 그를 기억하겠지만, 내 기억 속에서 그는 노벨문학상 수상(1971) 시인이 아니라, 칠레의 민중과 함께 칠레의 변혁을 위해 살다 간 민중시인으로 존재한다.

 

▲ 빅토르 하라의 아내인 무용가 조안 하라가 쓴 책이다. 88년에 읽었으니, 정작 네루다보다 그를 먼저 안 셈이다.

1973년 9월 11일, 3년 전 네루다 등의 지지로 당선된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의, 선거로 선출된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정부는 미국의 지원을 받은 칠레 군부와 경찰의 쿠데타로 무너졌다. 아옌데는 쿠데타군에 점령당하지 않은 국영방송 라디오와 전화를 연결, 마지막 대국민 성명을 발표했다.


"이것이 내가 국민 여러분에게 연설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 것입니다. ……나는 사임하지 않겠습니다. (……) 나는 국민의 충성에 대하여 내 목숨으로 보답하려고 합니다. (……) 나는 여러분께 단언합니다. 우리가 수천 수만 명의 칠레인들의 양심 속에 뿌린 씨앗들은 결코 완전히 뿌리뽑힐 수 없을 것입니다. (……) 어떤 범죄행위나 강권도 사회적인 변화와 진보를 가로막을 정도로 강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역사는 우리의 편입니다. 역사란 민중이 만들어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칠레 만세! 민중 만세! 노동자 만세!"


방송 직후 아옌데는 피노체트의 망명 제의를 일축하고 두 딸을 포함한 여성들을 궁밖으로 내보냈다. 정오가 되자, 쿠데타군의 공군 전폭기에서 대통령궁으로 폭탄이 투하되었고 탱크를 앞세운 지상군이  진격하였다. 아옌데는 최후의 순간까지 기관단총을 들고 싸우다 죽었다. (이 쿠데타를 그린 극영화가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 (1976, It Is Raining On Santiago / Il Pleut Sur Santiago>이다.)

 이후 쿠데타군에 의해 단 일 주일 동안 무려 3만여 명이 죽었다. 그 3만 속에는 칠레의 전설적 민요가수이자 민중 문화운동가 빅토르 하라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군부에 끌려가 모진 고문 끝에 기관총으로 사살 당했다. 기타를 만지던 손가락이 짓뭉개지고 두 손목까지 부러진 그의 시체는 문화운동과 민중운동의 기수였던 그의 노래에 대한 군부의 증오를 드러내 주는 것이었다.

9월 23일, 산티아고에서 칠레 민중의 희망이었다는 시인 파블로 네루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가 살고 있던 발파라이소와 산티아고의 집이 샅샅이 파헤쳐지고 파괴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세계는 깊은 충격을 받았다. 남부 국경지방에서 철도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서, 그 유명한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편의 절망의 노래>를 출간했을 때, 네루다는 열아홉 살이었다. 스물네 살에 극동 지역의 영사로 활동(남미에서는 젊은 시인들에게 영사 자리를 줌으로써 그들을 격려하는 전통이 있다.)했고, 마흔 살에 광산노동자의 요청으로 상원의원이 되었다. 우익 독재자의 집권으로 비밀경찰에 쫓겨 지하로 숨었을 때 네루다를 구해 준 이는 광부와 노동자들이었다.


그의 장례식은 쿠데타 이후 최초의 군중 집회가 되었다. 누군가 앞장서 <인터내셔널>가를 불렀고, 처음의 작은 합창은 커다란 메아리가 되어서 울려 퍼졌다고 전한다. 그는 민요가수 빅토르 하라와 함께 민중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던 시인이다. 칠레의 상인들은 저잣거리에서 그의 시를 줄줄 왼다고 한다. 장사치가!

 

 "서구의 언어로 씌어진 가장 위대한 초현실주의 시라는 평가를 받은 <지상에서 살기>"를 펴냈고 "프랑스 초현실주의자들의 꿈을 유감없이 실현한 시인"으로 평가되듯, 미국 시인 로버트 블라이의 지적대로 프랑스 시인들의 시는 네루다의 그것보다 '생기 없고 찍찍거리는 것'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폴 엘뤼아르도 네루다와 교류했는데, 엘뤼아르 시의 이미지들이 다소 박제된 느낌을 주는 것이라면 네루다의 그것은 훨씬 싱싱하게 살아 꿈틀거리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이러한 문학적 경향에도 불구하고 그의 정치적 지향은 분명하다. 그는 로버트 블라이와의 대담(시집 게재 자료)에서 "정치적으로 칠레의 모든 작가들은 좌익"이며, "내가 보는 가난, 나는 그걸 외면할 수가 없다."고 말한다. 그는 또 어느 단편집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내 나날의 삶 속에서, 나는 평온한 사람이었고, 법률과 지도자들과 제도(관습)의 적이었다. 나는 중산층이 싫었고, 예술가든 범죄자들이든지 간에 불안정하고 불만에 찬 사람들의 삶을 좋아했다."

이러한 그의 지향이 필경은 "아메리카여, 나는 희망 없이 네 이름을 부를 수 없다" 같은 시를 쓰게 했으리라.


아메리카여, 나는 희망 없이 네 이름을 부를 수 없다.

내가 가슴 앞에 칼을 쥐고 있을 때,

내가 영혼 속에 불완전한 집을 지니고 살 때,

그대의 새로운 날들 중 어떤 날이

창문으로 들어와 나를 관통할 때,

나는 나를 낳은 빛 속에 있고 또 그 속에 서 있으며,

나를 이렇게 만든 어둠 속에서 나는 살고,

그대의 긴요한 해돋이 속에서 자고 깬다:

포도처럼 순하게, 또 지독하게

설탕과  매의 운반자,

그대의 종(種)의 정액에 젖어,

그대가 물려주는 피로 양육되어.


   <시 "아메리카여, 나는 희망 없이 네 이름을 부를 수 없다" 전문>


"이미지들의 강의 범람"(로버트 블라이)이라는 시를 쓰고 초현실주의 시인으로 평가 받기는 하지만, 그는 공소한 관념과 허무적 이론이 아니라 조국과 삶에 대한 적극적 실천을 잊지 않았다. 그는 공허한 관념의 표지로서 '책'을 바라보면서 다음과 같이 썼던 것이다.


내가 책을 덮을 때

나는 삶을 연다.

(……)

나는 삶 자체에서

삶을 배웠고,

단 한 번의 키스에서 사랑을 배웠으며

사람들과 함께 싸우고

그들의 말을 내 노래 속에서 말하며

그들과 더불어 산 거 말고는

누구한테 어떤 것도 가르칠 수 없었다.


      <시 "책에 부치는 노래Ⅰ"중에서>


칠레는 피노체트의 17년 철권통치를 끝내고 1990년 민정에 복귀했다. 그러나 학살자 피노체트는 여전히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최근 그는 아옌데 정부의 경호원 살해사건으로 면책 특권이 박탈되었고 스위스 연방 법무부가 그의 은행 계좌를 조사하기 위한 칠레 정부의 사법 공조 요구를 수용했다고 한다. "역사는 우리 편"이 되기 위해선 아직도 시간이 더 필요한 모양이다.


기나긴 군부독재와 피노체트, 그리고 자유무역협정(FTA)으로 알려진 고단한 나라이긴 하지만 나는 네루다라는, 민중이 사랑한 위대한 시인을 가진 나라, 칠레를 폄하할 수 없다. 하긴 박정희의 18년 독재도 만만치 않다. 피노체트가 가장 존경한 인물이 박정희였다는 만화 같은 이야기는 독재와 억압의 시대의 버려야 할 유산이어야 할 터이다.


< 2006. 2. 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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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6-02-12 1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기없고 찍찍거리는 시들이 대부분이지 않나요?
산티아고에 비는 내린다, 끝나지 않은 노래 등을 이 리뷰 속에서 만나네요.^^

낮달 2006-02-12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비님은 늘 길을 다니시죠.
아마 저는 늘 길 위에 서성대는 스타일인 모양입니다. 무비님의 순발력과 도저한 주유(周遊)는 부럽기 짝이 없소이다그려. 어이하면 저 디위(경지)를 알 거이고.^^
 
푸른 혼
김원일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5년 2월
평점 :
절판


김원일의 소설을 처음 만난 건 고교 졸업 후, 장편 "어둠의 축제"와 어느 문고판 단편집을 통해서다. 그 무렵에는 아직 어렸던지라 '분단'을 다루고 있던 그의 장편보다 "파라암"과 같은, 매우 정교한 묘사와 탁월한 완성도의 단편들에 매료되었던 듯하다. 한 여인의 파란 많은 삶을 묘사한, '썩어가면서 더욱 부드러워지는 살의 마비'라는 표현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1990년도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마음의 감옥"을 읽으면서 나는 처음으로 '삶과 그 진정성'을 성찰하고 있는 작가의 시선에 감동과 전율을 동시에 느꼈다. 이 소설은 빈민을 위해 살다간 아우의 순교자적 죽음을 계기로 핍박받는 사람들의 정당한 요구에 동참하게 되는, 방관자적 중산층 형의 인식 전환을 다루고 있는 중편이다.


마음의 감옥을 읽으면서 나는 여러 차례 눈물을 흘렸는데, 그것은 서사 구조의 극적 성격 때문이 아니라, 작가가 그려내는 이야기 속에 곡진하게 숨어 있는 '삶의 진정성' 탓이었다. '마음의 감옥'이란, 한갓된 가족애가 아니라,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연대와 도덕적 책무'의 다른 이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알다시피 그는 운동권도 아니고, 이른바 '민중 작가' 계열에 드는 이도 아니다. 그는 해방 공간에서 좌익 활동에 참여한 부친을 둔 '원죄'를 갖고 태어난 작가 중의 한 사람이다.


냉전 이데올로기와 '레드 콤플렉스'가 개인과 일가의 삶을 갈가리 찢어 놓아 버린 세월이 우리 현대사였을진대, '빨갱이 자식'으로 세상살이를 배웠던 이들 작가의 성장사는 그것 자체로도 끔찍한 비극이었리라. 그러나 그런 현실에 대한 그들의 대응 방식은 같지 않은 듯하다. 작가 이문열이 자신의 부친과 그 세대의 사상적 방황과 선택, 시대적 이념을 일관되게 부정하고 적대시하면서 스스로의 스탠스를 압도적 다수인 강자의 자리에 두었다면, 김원일을 비롯한 김주영, 이문구, 김성종 같은 이들이 선 자리는 그 반대편에 있거나 최소한 멀찌감치 그것과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문열이 아버지 세대의 삶과 시대를 부정하면서 반 세기 이후에도 여전히 극우 냉전 이데올로기를 신봉하는 어정쩡한 이데올로그임을 자처하는 것은 그의 사상적 이념적 선택일 터이지만, 그것은 한 시대를 살아가는 작가의 태도로 그리 아름다워 보이지는 않는다. 물론 나는 그러한 선택을 가능하게 한, 그의 멘털리티와 그가 필시 겪어 왔을 고통과 번민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가 분단시대의 작가로서 우리 시대와 사회가 안고 있는 숱한 모순과 과제에 대해 고통스러운 자기 성찰을 할 기회를 거부하고 냉전 이데올로기의 단순 반복 재생산에 나선 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씁쓸하기 짝이 없다.


김원일은 부친이 살았던 시대와 이념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임으로써, 그것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한 시대의 보편적 과제로 확대 상승시켜 낸 작가이다. 그는 한국전쟁과 남북분단으로 이어지는 한국의 근·현대사의 고통과 상처를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이데올로기를 넘어선 인간 자체에 대한 사랑과 이해로 그 상처를 치유하고 대립을 넘어서고자 한 작가'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런 그가 국가의 사법살인이라 일컬어지는 '인혁당 사건'을 다룬 연작소설집 "푸른 혼"을 상재한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인혁당 사건은 박정희의 유신정권이, 민청학련의 유신 반대투쟁을 조종하고 북한의 사주를 받아 정부 전복활동을 했다며, 대구·경북지역의 혁신계 인사 8명을 대법원 상고기각 결정이 내려진 지 20여 시간 만에  전격 처형한 사건이다. 이후, 제네바의 국제법학자협회는 사형이 집행된 1975년 4월 9일을 '사법사상 치욕의 날'로 선포하는 등, 국내는 물론 국제 여론도 들끓었다.


작가의 말에서 작가는 '니 애비의 행실을 보더라도 정치 같은 데는 일체 한눈팔지 말라'는 어머니의 말씀을 귀따갑게 들으며 성장했다고 밝히면서도 "'민청학년사건'으로 내가 발 딛고 있는 현실을 객관적으로 직시하게 되었고 한국의 엄혹한 정치적 상황을 비판적인 관점에서 관망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 사건을 직면하자 그 동안 몇 편 써 온 소설이 집안 가족사 일부를 상상력과 결합시킨 시대에 주눅들린 겉치장임을 부끄럽게 돌아보았고, 당면한 현실과 정면으로 마주서야  한다는 데 각성하게 되었다" 고 고백한다.


그는 분단 시대를 살아가는 작가로서 자신의 소명을 의식했던 듯하다. 2002년부터 자료를 모으기 시작하고 2003년부터 이태에 걸쳐 쓴 중편 여섯 편을 묶은 이 소설집의 내용은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으리라. 그는 "처형당한 실제 인물에서 빌려왔고, 사건의 발단부터 종결까지 재판기록과 증언을 참고하여 사실에 근거하다 보니 동어반복을 피하는 방편으로 각 편마다 사건 자체와는 거리를 두어 착점과 형식을 조금씩 달리했고, 작가가 임의로 내용을 재구성하여 창작된 부분이 많아 주인공들을 실제 이름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아직도 구천에서 원혼의 넋으로 떠돌고 있을 서도원, 도예종, 송상진, 우홍선, 하재완, 이수병, 김용원, 여정남, 여덟 분의 영전에 이승을 뜬지 30주기를 맞아 이 책자를 바친다."는 헌사를 잊지 않았다.


'팔공산', '두 동무', '여의남 평전', '청맹과니', '투명한 푸른 얼굴', '임을 위한 진혼곡' 등 모두 여섯 편의 중편 중에서 '임을 위한 진혼곡'은 하재완의 부인을 서술자로 한 작품이다. 유족들이 '간첩'이거나 '빨갱이'로 손가락질 받으며 살아야 했던 통한의 세월, 죽은 남편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 등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전개되고 있다. 작품의 행간마다 흥건히 고인 피눈물을 어찌 몇 줄로 줄일 수 있으랴. 이들에게 '나라'는, 그리고 '역사'는 대체 무엇이었던가. 타오르는 분노를 가눌 길 없다. 


마지막 재판이 벌어진 법정에서 이루어진 시노트 신부의 절규는 진실이다. "신성한 법정이라구? 여긴 그저 오물이 쌓여 있는 곳이라구!" 한 독재자의 장기집권을 위해서 역사와 진실과 정의가 유린되던 시대, 그게 불과 30여 년 전의 일일 뿐이다. 세월이 헛되지 않았는가. 2002년 9월 의문사 진상규명 위원회는 "인혁당 사건은 중앙정보부 조작사건"이라고 결정했고, 이에 근거해 그 해 12월에는 재심청구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지난 해 12월 27일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재심"을 개시하기로 결정하였다.


소설집으로는 드물게 각 작품의 제목을 단 지면마다 케테 콜비츠의 조각과 판화를 싣고 있다. '프롤레타리아 예술의 어머니','미술사의 로자 룩셈부르크', '역사의 수레바퀴 아래 깔려 신음하는 민중의 증언자', '죽음을 영접하는 여인' 등으로 불린 이 예술가가 절규한 진실과 20세기 한반도의 남쪽 반을 꿰뚫고 간 역사는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 것인지.


< 2006. 2.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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