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취하지 않는다 - 강남 일급 룸살롱 대마담의 전략적 세상살이
한연주 지음 / 도서출판 다시 / 2006년 1월
평점 :
품절


경제학이 거창하거나 고매하거나 혹은 '현실'적인 주제만 좇지 않는다는 건 이제 상식이 된 듯 하다. 하지만, 한국의 점잖은 경제학은 이러한 유행에 그리 익숙하지 못하다. 아카데믹한 연구건 대중서이건 말이다. 똑똑한 분들이 정리해 해주면 좋으련만, 이준구 선생의 [열린 경제학] 시리즈도, 한순구 선생의 [또라이 경제학](이건 솔직히 Steven Levitt의 Freakonomics을 베낀 티가 너무 나지 않는가!)도 이런 기대를 무참히 짓밟았다. 현실을 교과서에 맞춰 재단하는 수준이라면 개인적으로는 크게 흥미가 동하지 않으니 말이다.

어쨌든, 그래서인지 가끔 서점가에 엉뚱하게 튀어나오는 책을 유심히 관찰할 때가 있다. 나의 레이더 망이 이렇게 걸린 책이 한연주가 지은 [나는 취하지 않는다]이다.

저자는 자신을 한국에서 룸살롱 '대마담'으로 몇 손가락에 든다고 소개한다. 뭐 룸살롱이라곤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나이니 일단 호기심이 발동했다. 그리고, 책의 추천사들은 잘하면 이 책에서 뭔가 건질 수 있겠다, 싶은 느낌을 줬다. 책은 세 부분으로 쪼개져 있다. 첫번째는 책을 읽는 독자들을 위해 룸싸롱 문화의 이모저모를 소개하고 있다. 둘째는 룸싸롱 업계에 대한 나름의 해부이다. 마지막은 저자의 인생역정을 다루고 있다. 첫번째는 '마담도 열심히 사는데 우리도 열심히 살아야 하지 않겠어',라는 평범한 교훈 정도고, 3부는 안 읽어도 좋을 만큼 '찜찔방수다'스러운 한 여자의 일대기다. 역시, 이 책에서 제일 흥미롭게 읽히는 것은 2부이다.

룸싸롱 비즈니스는 최근 경제학에서 다양하게 조명받는 개념인 '네트워크 외부성'을 정확.정교하게 적용할 수 있는 영역이다. 네트워크 외부성이란 넓게 보아 해당 비즈니스의 이용자 혹은 참여자의 숫자에 따라서 비즈니스의 운용 및 성격이 크게 달라지는 경우를 지칭한다. 그런데 직접 네트워크 외부성과 간접 네트워크 외부성을 구분할 수 있는 바, '간접'은 네트워크 외부성을 촉발하는 주체들이 서로 간접적인 연관을 맺는 경우를 일컫는다. 이때 이들 사이에 위치하여 그 거래를 성사시켜주는 기반, 즉 플랫폼을 제공하는 사람을 '플랫폼 홀더'라고 부른다. 이러한 플랫폼에 대한 투자에는 일반적으로 막대한 고정비용이 소요된다.

최고급 룸살롱의 경우 규모가 커서 일반 기업 못지않은 인력과 비용이 투입된다. 그런 업소는 보통 100억 이상이 필요하다. 강남의 고급업소의 경우 한 사람이 여러 개의 룸살롱을 운영하는 경우도 있고 주주로 형성되어 경영하는 곳도 있다(74쪽).

이렇게 룸살롱이라는 플랫폼이 마련되면 이 플랫폼을 매개로 두 주요 참여자가 네트워크 효과를 발생시킨다. 다름 아니라, 손님과 룸살롱의 접대부(이 용어가 전혀 만족스럽지 않다. 저자는 책에서 '아가씨'라는 용어를 쓰고 있으나 이 말은 지나치게 스스로 중립화되고 미화된 느낌을 준다. 보다 중립적인 단어를 찾고 싶었는데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언어의 빈곤?)다. 그런데, 접대부의 경우 이를 플랫폼 홀더가 직접 관리하는 데에는 여러가지 비효율성이 따른다. 여기서 등장하는 존재가 바로 관리자로서의 마담이다. 마담은 룸살롱이라는 플랫폼에 참여하는 접대부들의 품질을 관리하여 네트워크 효과가 잘 작용하는 촉매제의 역할을 수행한다.

내 단골들은 나를 보고 온다. 내가 제공하는 서비스를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1인 기업이며 모든 것이다.(57쪽)

위의 인용문은 플랫폼에 참여하는 독립된 서드파티의 대표자로서 마담이 지니는 위치를 잘 보여준다.

그렇다면, 수익의 분배 및 계약 관계는 어떻게 될까?

자세한 사항은 나오지 않았지만, 주대의 30-40% 가량이 마담의 몫이라고 저자는 적고 있다. 이런 저런 경상 및 부대 비용이 20%라고 잡는다면, 대략 플랫폼 홀더의 이익률이 50-40%에 이른다고 볼 수 있는 셈이다. 또한, 이는 위험기피적인 행위자들 사이에서 이러한 고정률의 수익의 분배가 효율적일 수 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플랫폼 제공자의 경우 여러명의 마담을 두기 때문에 막대한 투자에서 나오는 수익의 규모 역시 막대한데, 룸살롱의 경우에도 이러한 형태가 그대로 실현될 것으로 쉽게 추측할 수 있다.

또한, 플랫폼홀더와 마담과의 계약은 다소 독특한 측면을 지니고 있다.

마담을 스카우트 할 때는 그 마담의 능력에 대한 선투자가 이루어진다고 보면 된다. 나 같은 경우 삼억에서 오억 정도의 스카우트 비용이 드는데 그것은 아가씨 선불금과 홍보비를 선 지급하는 명목이다. 홍보비는 매출의 13%로 계산하는데 처음 마담이 올 때 사장과 계약서를 쓴다. 즉, 6개월 동안 얼마의 매출을 책임지겠다는 약속이다. 그래서 만일 그 금액을 달성하면 계약 금액의 13%의 홍보비는 자연소멸된다. 그러나 달성하지 못하면 홍보비는 다시 뱉어내야 한다(95쪽).

플랫폼홀더가 플랫폼 참여자 중 일부에 대해 품질에 따른 선별을 시도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진입 비용을 요구하는 형태로 시행되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도 같은 행태가 관찰되는 그 양상이 독특하다. 즉, 플랫폼홀더가 먼저 참여자에게 선대를 지급하고 목표가 달성되지 않는 경우 이를 회수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방식은 사후적인 약속 불이행이라는 문제를 낳을 수 있다. 하지만, 플랫폼홀더들 간의 정보 공유가 빠르고 약속을 불이행한 참여자에 대한 제재가 효과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면 매우 효과적인 계약 형태가 될 수 있다.

한편, '1인 기업'인 마담과 접대부들 사이의 계약은 한층 더 극단적인 형태의 유동성을 지니고 있다. 이유는 접대부들이 한 업소에 머무르는 시간이 비즈니스의 생리상 길 수 없기 때문이다. 한 업소에 드나드는 손님이 비교적 제한적이라고 본다면, 한계 가치의 하락 폭이 매우 클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익히 알려져 있듯이, 이들의 수입은 전적으로 이른바 '봉사료'에 의존하게 된다.

흥미로운 대목은 마담이 접대부에게 지급하는 선불금이다. 선불금은 두가지 역할을 한다. 우선, 선불금은 마담이 사전에 평가한 이들에 대한 가치다. 즉, 한꺼풀 뒤집어보면, 마담은 접대부들에게 고정가격을 제시하고 이들을 구매한 셈이며 이에 따른 위험은 자신이 지고 있는 셈이다. 이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에서 흔히 나타나는 퍼브리셔와 제작자와의 관계와 정확히 일치한다.

선불금을 얼마나 받느냐에 따라 아가씨들의 등급을 나눌 수도 있다. 선불금이란 결국 자신들의 수입을 필요에 의해 땡겨쓰는 것이다(78쪽).

이 둘 사이에 발생할 수 있는 사후적인 모럴 해저드의 문제는 두가지 메커니즘을 통해서 억제된다. 첫째는, 이 선불금이 고스란히 '빚'으로 잡힌다는 것이다. 즉, 접대부는 어떻게 해서든 이 빚을 갚아야 한다. 제공하는 서비스에 대한 고정 보수가 아니라 빚의 형태를 띤다는 사실이 중요한 계약 강제의 수단이다. 다음 기제는 노동력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이다. 이러한 면모는 3층짜리 집을 빌려 아가씨들과 함께 지냈다는 저자의 짤막한 서술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룸살롱 비즈니스라는 것이 조직폭력과의 연관성 등을 비롯해 세간에 퍼진 여러 신화적인 언술을 제외하고 봐도 충분히 그 산업조직 자체로서 흥미롭게 다가온다. 아마도, 플랫폼홀더(룸살롱)가 퍼브리셔(마담)까지 겸하는 사례도 있을테인데, 이러한 퍼스트파티 중심의 영업 방식이 서드 파티 중심의 방식과 그 경제적 성과에 있어서 차이가 있는가 따위의 질문은 데이터만 확보할 수 있다면 경제학적으로 꽤나 흥미로운 질문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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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2006-09-02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괴짜 경제학의 제대로 된 한국적 버전이 나오겠군요. 게임 개발사와 퍼블리셔, 노동 가치(접대부)가 급격히 소멸되는 측면, 서비스에 대한 차별성과 투자자원 등 여러가지를 종합해서 보면 좋겠네요.

30over 2009-03-26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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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콜드 블러드 시공사 장르문학 시리즈
트루먼 카포티 지음, 박현주 옮김 / 시공사 / 2006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원래는 내가 흠모하는 필립 시무어 호프만의 [카포티Capote] 때문이었다. 못생겼지만 연기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그의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수상작인 [카포티]가 동명 작가에 대한 영화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지인은 그가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원작소설을 썼으며, [앵무새 죽이기]로 유명한 하퍼 리(본명은 넬 하퍼 리)와 친분으로도 유명하다고 귀뜀해 주었다. 마침, 알라딘 대문은 카포티의 걸작이라고 회자되는 [인 콜드 블러드]가 출간되었음을 나에게 알려주고(혹은 요즘말로 뽐뿌질해주고) 있었다. 이때부터 책에 대한 강렬한 호기심이 발동했다.

연쇄살인, 잔혹살해는 최근 개인적으로 대중문화 섭렵의 중요한 코드/기준의 하나가 되었다. TV 시리즈건 영화건 소설이건 이런 내용이면 꼭 챙겨본다. 과학수사와는 분명하게 구별되는 프로파일링의 세계는 레슬러의 [살인자들과의 인터뷰]를 본 후 나의 한 구석을 강하게 사로 잡았다. 물론, 프로파일링은 호기심의 단계일 뿐 그것을 넘어서는 지식이나 식견이 나에게는 없다. 레슬러의 책, 그리고 프로파일러들의 삶을 과장해 보여주는 [크리미널 마인드]만 봐도 그 세계는 감히 ‘범인凡人’이 넘기 두려운 뭔가를 지니고 있다. 그렇지만, 넘을 수 없는 선 너머에 있는 그 무엇은 항상 나를 유혹한다.

트루먼 카포트의 [인 콜드 블러드]는 1959년에 미국에서 발생한 일가족 살해사건에 대한 총체적인 기록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지만, 화자를 거의 배제한 서술과 빠른 호흡으로 연결되는 장면들 덕분에 읽는 맛이 남다르다. 영화 대본 작업을 많이 해본 사람이어서일까? 장면 전환의 묘와 이야기 서술의 명료함이 두드러진다. 특히, 초반 전반부, 즉 살인 사건의 두 범인인 리처드 히콕과 페리 스미스, 그리고 희생자인 클러터 가족에 대한 서술은 거대한 비극으로 치닫는 두 집단의 궤적을 잘 재현하고 있다. 직접 읽는 것 자체가 커다란 즐거움인 이런 책의 줄거리를 요약하는 것은 무모하고도 불필요한 일이 될 것이다.

책에 대한 느낌은 크게 두가지다. 우선, 트루먼 카포티의 탁월한 저널리즘적 상상력이다. 역자의 후기에도 드러나지만, 카포티의 이 책은 철저히 ‘사실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책에 소개되는 대화나 묘사가 취재에 기반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정말로 사실인지 알 도리는 없다. 하지만 때로는 상상이나 창작이 사실을 넘어서기도 한다. 특히, 사실만으로 사건을 이해하기 힘든 경우에 그러한데, 이때 상상력의 역할은 사실 만큼이나 중요해진다. 이러한 상상력의 개입은 도가 지나치지 않는 다면 사실을 재구성하는 데 오히려 도움이 되기도 한다. 상상력이 지니는 이러한 역설적인 구성의 힘을 느끼기에 이 책만큼 좋은 표본도 없을 터다.

둘째, 두 범인이 클러터 가족을 살해하고 잡힌 이후 부터의 서술은 그 밀도가 다소 떨어진다. 책 제목처럼 “냉혈한”을 다루려는 카포티의 시도가 눈에 띄게 흔들리고 있는 흔적도 곳곳에서 읽을 수 있다. 범인들을 동정하게 된 것일까? 리처드 히콕에 대해서는 모르겠지만, 인디언 태생에 외모와 가족에 대한 복잡한 컴플렉스를 지닌 페리 스미스에 대해서는 동정어린 시선이 분명히 느껴진다. 사법 체계 내에서 범인들을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카포티는 인간적으로도 그러할까,라고 묻고 또 묻는다. 재판이 보다 뒤의 시대에 이루어졌다면, 페리 스미스의 잔혹한 행위가 부분 정신 이상으로 진단받았을지도 모른다고 시사하는 부분이 묘한 여운을 남긴다.

영화 [카포티]는 이 책을 쓰면서 트루먼 카포티가 느꼈던 이러한 인간적인 떨림을 보여주고 있다. 클러터 살해사건은 야심적인 저널리스트로서 가장 먹음직한 사냥감이었을 터다. 하지만, 그 사건의 속살은 관찰자에게 말할 수 없는 고뇌를 안겨주었다. 어찌보면, 저널리즘의 걸작 [인 콜드 블러드]는 악마와의 계약이 만들어낸 저주다. 카포티는 자신의 남은 인생을 담보로 이 책을 완성했다. 영화는 이러한 카포티의 변화를 따라간다는 점에서 책과는 다른 방향에 놓여 있다(아마도 책을 읽지 않은 사람들에게 영화는 다소 무덤덤하고 어설퍼 보일지도 모르겠다). 악마의 도움으로 금단 너머를 기록한 카포티는 책 이후 단 한 작품도 쓰지 못했고 1984년 약물중독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당신이라면 이런 계약 앞에서 어떤 결정을 내릴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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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마 유키오 對 동경대 전공투 1969~2000 - 연대를 구하여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미시마 유키오.기무라 오사무 외 지음, 김항 옮김 / 새물결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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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마유키오대전공투]가 나름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신문의 북섹션에 꽤 많이 비중있게 소개되었으니, 이 정도면 기획에는 성공한 셈이다. 대부분의 언론이 착목한 내용은 천황제의 온전한 부활을 외치며 할복한 극우 미시마 유키오와 동경대를 점거하며 기존 체제의 붕괴를 꿈꾸었던 극좌 전공투 사이의 대화라는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대부분의 언론에서는 기사의 제목을 "극좌와 극우가 통했대"라는 식으로 뽑았다. 나도 북섹션의 유혹에 이끌려 책을 구입했지만, 책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정당한 것일까?

책의 앞부분에 해당하는 둘 간의 대담은 읽고는 그들의 만남이 이렇게 단순하지 않음을 깨달았다.(1) 극과 극은 통한다는 일반적인 통설이 항상 맞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경우를 자주 보게 되긴 하지만, '법칙'이라고 주장할 만큼은 못된다. 게다가, 미시마와 전공투 간의 대화에 대해 이러한 꼬리표를 다는 것은 어떤 점에서 부당하기까지 하다. 그들의 어색한 통정은 '극과 극은 통하기 마련'이라는 조소의 자기장에서 훌쩍 벗어나 있다는 편이 옳을 것이다.

우선, 둘 간의 대화/논쟁은 전혀 도식적이지 않다. 놀랍게도 정세적이거나 정치적이지도 않다. 천황제라는 첨예한 문제에 대해 대립할 때에도 둘은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수준까지 깊게 들어간다. 둘 간의 대화는 공간과 시간성의 모순적 충돌, 역사에서 과거-현재-미래의 뒤엉킴, 한 실존적 개체를 존재하게 만드는 동인, 기존 체제의 파열과 해방구의 생성과 같이 얼핏보면 사변적이고 철학적인 주제들을 주로 섭렵하고 있다. 아마도, 노회찬과 정형근이 벌이는 시사토론 류의 재미난 싸움의 풍경을 기대했던 사람들이라면 다소 실망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 점이 둘 간의 만남을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으로 만든다. 구체적인 것이 항상 진리에 보다 가깝게 닿아 있고, 우리는 그 맥락에서만 비로소 진리 일반과 조우할 수 있다. 그래서, 전공투가 점령한 찰나의 해방구에서 벌이는 이들의 철학적이지만 치열한 논쟁이 훨씬 값진 것이다.

극좌와 극우가 통한다면 어떤 의미에서 그럴까? 폭력의 사용을 동의한다는 점에서? 아님 둘다 기존 체제를 꽤나 싫으니까? 이런 단편적인 대답을 넘어서려면 미시마가 왜 홀홀단신으로 봉쇄를 뚫고 동경대로 향했는지 알아야 할 것이다. 미시마 유키오와 동경대 전공투가 공유한 지점은 무엇이었을까? 한쪽은 일반화된 국가 정신으로서의 천황을 옹호했고 다른 쪽은 기존 체제의 소실점으로서의 해방구를 꿈꾸었던 존재들이었다. 아마도, 이들이 공유했던 것은 어정쩡하지만 강고했던 '일본 자본주의'의 종말이라는 지향이었을지도 모른다. 미사마는 '일본'에, 전공투는 '자본주의'에 온통 천착했던 것이 차이랄까? 이런 점 때문인지, 보편과 특수라는 범주의 문제에 있어서 둘의 차이는 상당히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는 이 논쟁에 담긴 가장 흥미로운 점의 하나이다.

나하고 제군들의 정치사상은 정반대라고 합니다. 정말 정반대겠지만, 단지 나는 지금까지 일본 지식인들이 사상과 지식에 힘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만으로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모습이 지긋지긋하게 싫었습니다. … 나는 일본인의 안심해버린 눈 속에서 뭔가 불안을 읽어내려 합니다. … 그런 점에서 제군들과 나 사이에 어떤 공감이 있을까 하고 이야기하러 왔지만, 나는 결코 제군들의 지지자가 아닙니다. 제군들을 이해하고자 하는 욕망에 불타 여기에 온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서로 상대를 이해하지 않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오늘은 이야기로 한판 붙어보고 싶습니다.

개인적으로 더욱 흥미로웠던 것은 미시마 유키오라는 인물이다. [금각사] 등을 통해 유미주의를 지향한 일본 소설가 정도로만 알고 있었던 나에게 그의 사상적 깊이와 통찰력은 꽤나 놀라운 것이었다. 토론을 마치고 난 이후 미시마 유키오가 따로 정리한 후기를 읽고는 굉장한 통찰력과 지력을 가졌던 인물이었다는 점을 새삼 알 수 있었다.

나의 전공투 방문은 대체로 유쾌한 경험이었다. … 나중에 들은 일이지만 '민청'(일본공산당 계열의 학생조직)이 토론회 유인물을 전부 뜯어냈기 때문에 토론장을 가리키는 표식은 전혀 없었다. … 나는 어디로 들어가야 할지 모른 채 입구에서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

잠시후 토론장 입구에 나를 고릴라 모습으로 캐리커처한 그림이 눈에 들어왔는데, 큰 글씨로 '근대 고릴라'라고 쓰여 있고 고랼라 사육료가 100엔 이상이라고 적혀 있었으며, [엽은인간]과 그 밖의 내 저서로부터 뽑아낸 인용문이 여기저기 풍자적으로 붙어 있었다. 내가 그걸 보고 웃는 것을 보며 많은 학생들이 이중삼중으로 나를 둘러싸고 웃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 자체에서 나는 이미 이 회합에 웃음이 섞여 있다는 사실을 알아챌 수 있었다. 물론 그러한 웃음이 냉소나 조소일 수도 있으나, 적어도 사람은 웃으면서 싸우지는 못한다. …

나는 그들의 논리성을 인정하더라도 그들이 노리는 권력이 그다지 논리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들이 적대하는 권력 자체의 비논리성이야말로 나 또한 싸워야 할 커다란 대상이라는 사실은 말할 필요가 없다. 내가 그러한 권력을 진정 논리적으로 만드는 일에 성공했을 때 3파 전학련(미시마는 전공투라는 말 대신 3파 전학련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또한 그와 마찬가지로 진정한 적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아닐는지?

책장을 넘기면서, 최근 몇 년간 우리의 진보진영에서 풍부해진 68에 관한 각종 담론에 중요한 공백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프랑스를 비롯해 서구의 68년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와 운동의 로망까지도 생겨났지만, 이러한 관심이 무색하리만치 일본의 전공투를 진지하게 소개한 책이나 글은 드물다. 일본에 대한 민족 보편의 거부감이 무의식적으로 이러한 무관심을 낳은 것은 아닐까?
어떤 면에서 보면, 일본의 전공투 운동은 서구의 68보다 한층 더 흥미롭다. 우선, 히로마츠 와타루가 사상사적으로 제기했다는 '근대의 초극론'을 운동과 담론의 형태로 미리 (상당히 온전한 형태로) 선취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서구의 68만큼이나 일본의 전공투 운동은 자본주의를 넘어서 근대라는 시대 자체에 대한 성찰이자 항의였다.(2) 요컨대, 전공투는 패전의 민족적 굴욕을 딛고 단숨에 세계 제 2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해버린 일본의 특수성에 입각한 구체적이고 진지한 문제제기였던 셈이다. 한국 사회가 몇몇 지점에서 일본과 상당히 닮았다는 현실을 고려한다면, 전공투 운동에 대한 반성적 검토에서 우리가 배울 것이 꽤 많을지도 모를 일이다.

책의 내용은 매우 훌륭하지만, 책 자체는 그리 권할만 하지는 않다. 책은 두권의 원저를 합쳐놓은 형태인데, 당시 미사마와의 대담에 참석했던 사람들의 후일담을 담고 있는 후편이 필요했는지 의문이다. 이 부분의 사료적인 가치가 얼마나 뛰어난 것인지 섣불리 판단하기 힘들겠지만, 근대의 초극론이나 신으로서의 천황과 인간으로서의 천황의 차이와 같은 미묘한 역사특수적 맥락과 쟁점에 무지한 나 같은 사람들이 감당하기에 벅찬 지적 생략과 축약이 너무 많았다. 오히려, 대담 자체와 참석자들의 후기만으로 구성된 전편과 역자의 친절한 해설이 곁들여진 형태로 마무리 되었다면 책 자체나 가격 모두에서 만족할 만 했으리라.

P.S. 집에 [전공투]에 대한 만화책이 한 권있다. 지금은 절판된 책인데, 무척 흥미로운 책이다. 이 대담집을 읽고 다시 보니 훨씬 더 쏙쏙 잘 들어오는 듯.


(1) 기사를 썼던 기자들도 최소한 앞 부분의 대담은 읽었을텐데, 왜 한결같이 위의 기조로 기사를 썼는지 모를 일이다.

(2) 자신있게 말할 수는 없지만, 한때 유행했던 가라타니 고진의 논의들 역시 이 맥락에서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느낌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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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연쇄살인 - 희대의 살인마에 대한 범죄 수사와 심리 분석
표창원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05년 6월
평점 :
품절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다. 연쇄살인자(serial killer)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 아마도 데이비드 핀처의 <세븐>의 오묘한 분위기 때문인 거 같기도 하고, 존 맥노튼의 <헨리: 연쇄 살인자의 초상>이 준 커다란 문화적 충격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아니면, 원래 슬래셔 무비를 좋아하는 '악취미' 가 어느덧 이쪽으로 슬쩍 물꼬를 틀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책을 고를 때 "연쇄 살인"은 어느덧 중요한 키워드가 되어 있었다(뭐 그렇다고 내가 이쪽으로 매우 많은 책을 탐독했다는 것은 아니니 오해는 마시길).

우선, 이 방면에서 영화/소설에서 단편적으로 엿본 내용(혹은 편견)들을 그나마 체계적으로 다듬게(혹은 교정하게) 해주었던 책은 레슬러의 [살인자들과의 인터뷰]였다. 프로파일링 기법을 현장에서 개척하고 다듬었던 장본인 답게 그 사례들이 매우 생생했고 수사관 레슬러의 체험과 얽혀있는 살인의 추억들이 생생하게 다가왔다. 희대의 살인마들의 진짜 후일담을 만나는 즐거움(혹은 관음증) 또한 쏠쏠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다만, 개인적인 경험과 뒤섞여 있어서 그런지 개념의 정립이나 사건의 재구성이 그닥 치밀하지 못한 점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나중에 원본을 아마존에서 찾아보니, 이 책은 전문 작가와 함께 집필된 대중적으로(아울러 꽤나 자극적으로) 기획된 책이었다.  

문득, 이 책을 읽으면서 (어느 책을 읽으면 그렇지 아니하랴만) 우리의 상황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한국에는 전형적인 의미의 연쇄 살인범은 없다는데, 과연 그래? 연쇄 살인은 누군가 주장하듯이 도시 및 자본주의 발달과 연결된 그 무엇일까?(에릭 라슨의 베스트셀러 [화이트 시티]는 이 점에서 도시가 창출해내는 이성과 광기의 이중주에 대해 매우 구체적인 풍경화를 보여주고 있기는 하다) 유영철 등의 범죄에서 드러나는 바, 최근 급증하는 한국의 연쇄살인적 징후를 담게 된 범죄들은 역으로 한국의 자본주의 발달 정도를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나? 문득, 한국에 범죄사를 이런 시각에서 살펴본 책이나 연구는 없을까 궁금해졌지만 취미로 파고들기에는 너무 깊이 들어가는 탐사라서 레슬러의 책을 덮은 후로는 쭉 잊고 지냈다.

이런 기억들이 되살아 난 것은 최근 표창원 교수의 책이 출간되고 난 이후였다. 원래 TV 고발 프로에서도 살인 관련 프로를 꼼꼼히 챙겨봐서인지 그의 얼굴이 그닥 낯설지 않았는데, 차분한 말투와 학자적인 신중함을 이미 인상깊게 눈여겨 봐둔 터였다. 한마디로 이 책은 연쇄살인을 한국의 맥락에서 (그것도 대중과 호흡하면서) 접근하려는 하는 꽤 야심적인 시도이다. 대개, 이런 대단한 시도들은 처참하게 실패하기 마련이어서 다소 걱정이 앞섰지만, 적어도 찌는 듯한 여름 날씨를 잊는데 조금은 도움이 되리라 기대하며 책을 집어들고야 말았다.

도입부로 들어간 최인구 사건을 제외하면 책은 연쇄살인에 대한 이론과 제반 개념을 정리하고 이를 기반으로 한국의 연쇄살인을 역사적으로 풀이해가는 구성을 취하고 있다. 한국의 연쇄살인'사史'라고 이름 붙여도 나쁘지 않을 듯 싶다.

앞 부분에 해당하는 이론적 접근에서 가장 인상깊게 본 것은 연쇄살인(serial murder)와 연속살인(continuous murder) 간의 개념 정리이다. 분명한듯 하면서 번역 자체에서부터 제법 애매한 개념인데, 저자는 이 부분을 꽤나 명쾌하게 정리해주고 있다. 그에 따르면 연속살인은 단속없이 감정의 흥분상태가 지속되면서 이루어지는 "spree murder"에 가깝다. 그에 반해 연쇄 살인은 하나 하나의 살인 사건이 독자적인 계획과 실행의 단위 지니면서 중간 중간의 냉각기를 거치는 형태를 띠고 있다.

아울러, 저자는 연쇄 살인에 대한 널리 알려진 기준과 조건들을 나열하며 대중 문화를 통해 과장되고 왜곡된 통념(증거를 남기지 않는 치밀한 살인, 특이한 시그니쳐 등)에 대한 일정한 교정을 시도하고 있는데, 이 역시 눈여겨 봐둘만 하다. 레슬러의 책처럼 연쇄살인범에 대한 프로파일링은 그들에 대한 심리 분석을 통해 범인의 성격에 대한 공통점을 추려내는 것을 핵심으로 한다. 레슬러의 책에도 그 과정과 연쇄 살인의 특징이 어느 정도 서술되어 있으나 이 책이 보다 정돈되고 간결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것도 책의 장점이다. 하지만, 심리학적 접근에서 흔히 접하기 쉬운 요인 나열식 분류와 서술 방식은 뭔가 결정적인 한방이 빠진 다소 맥빠진 느낌이다. 이러한 느슨함은 저자의 한계라기 보다는 아직까지 연쇄살인범의 재구성에 있어 보다 온전하게 다가가지 못하는 프로파일링 기법의 한계가 아닐까 추측해본다.

책에서 프로파일링 기법의 현단계와 그 쟁점에 대한  논의가 빠져 있는 점이 그래서 아쉽다. 개인적으로는 프로파일링 기법이 더욱 많은 사례와 보다 꼼꼼한 항목으로 정리 분류되는 단계를 겪는다면, 통계학적인 방법을 통해 양적으로 보다 정교한 접근을 취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즉, 프로파일링의 다양한 세부 항목들과 범죄의 성향 수법들 및 각종 전과 및 범죄 자료들을 통계학적으로 연관시키는 시스템이 가능하다면 전문가들의 질적 진단에 의한 오류를 최소화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기대 말이다. 책에서도 프로파일링이란 것 자체가 수사에 혼선을 초래하고 되려 범인의 검거를 방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조심스럽게 추구되어야 한다는 조건을 달고 있지만, 이를 보정하기 위한 별다른 대책이나 방법이 소개되어 있지는 않다. 이에 대한 추가적인 논의가 궁금하다면 범죄심리학 문외한이 너무 앞서 나간 것이 될까?

좌우간, 이렇게 잘 정리된 이론부를 지나고 나면 1970년대부터 2000년대의 유영철까지 연쇄살인범죄의 궤적들이 빼곡하게 수록된 역사로 나아가게 된다. 단편적으로 기억하고 있는 사건들의 내막을 알게 되면서 느끼는 경이와 두려움에 책장을 정신없이 넘기고 말았다. 저자의 말처럼, 이렇게 생각보다 많은 연쇄살인 사건들 앞에서 화성 사건은 되려 너무 과장된 면이 없지 않다.

사회과학을 전공하는 입장에서 가장 먼저 들어오는 것은 우리에게 유달리 사회적 균열의 틈새에 놓인 찰스 맨슨형의 연쇄살인자가 많았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실제 부자들에 대한 공격이라는 형태로 실현되었건 아니면 엉뚱하게 사회적 약자에 대한 폭력으로 우회되었건 간에, 사회에 대해 느낀 소외감이 그들의 범죄에 주요한 동기이자 뒤틀린 정당화였다는 점은 일견 놀랍기도 하다. 하지만, 어찌 보면 급속한 사회이동의 자취에 남겨진 집단 정신병의 상흔인가 싶어 뒷맛이 씁쓸하다.  

그간 우리가 언론에서 단편적으로 때로는 선정적으로 접해온 사건들에 대해 저자가 많은 자료를 접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만, 레슬러의 책에서 보듯 프로파일링의 핵심이 실제 범인과의 면밀한 접촉을 통한 이론화/유형화에 있다고 할 때, 책의 서술이 수사 자료 및 알려지지 않았던 후일담에 대한 재구성과 분석에 치우친 듯한 느낌은 꽤나 아쉽게 다가온다(실제로 저자가 범인들에 대한 프로파일링의 기회를 가졌는지 나로서는 알 도리가 없다). 범인에 대한 심리분석 역시 고개를 끄덕이게 할 뿐 뇌리의 현들을 튕겨주는 듯한 탄력은 찾아보기 힘들다.

물론, 이는 전적으로 저자의 잘못이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레슬러는 자신의 책에서 연쇄살인자를 형장의 이슬로 허무하게 보내기보다 이들을 거름삼아 연쇄살인범을 예방할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러한 프로파일러의 호소는 그것이 공익의 차원에서 아무리 타당하더라도 현행의 법 체계 내에서 제도적으로 수용되기도 힘들 듯 하거니와 직접적인 형태의 복수를 원하는 대중의 불같은 정서와도 부합하지 않을 것이다.

한편, 학자의 길을 걷기 전에 경찰에 직접 몸담았던 저자가 들려주는 수사 과정의 이모저모는 <살인의 추억>과 겹쳐지는 부분이 많아서 인지, 황당함과 안타까움을 전하기도 한다. 관할 구역 간의 보이지 않는 텃세와 내부의 정치적인 고려사항 혹은 쓸데없는 시국관리에 치안력을 낭비하는 동안 수사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거나 한번 잡았던 범인들을 종종 놓치게 되는 대목들에서는 자연스레 눈살을 찌푸리게 되었다. 반면, 이 모든 악조건들 속에서도 (살인의 추억의 송강호가 분했던 시골 형사의 자세 마냥), 발로 죽어라 뛰어 범인을 잡아내고 말았던 대한민국 형사들의 근성 앞에서는 솔직히 박수라도 쳐주고 싶었다.(참고로 말하면, <살인의 추억>에 등장하는 형사중 누구편이냐고 묻는다면 공식적으로 서울 형사 편이라고 말하겠지만, 심정적으로는 시골 형사라고 고백하고 싶을 때가 종종 있다.)

어쨌든, 이래저래 아쉬운 점은 있지만 [한국의 연쇄살인]은 전체적으로 균형 잡혀 있으며 유쾌하지는 않을지라도 재미 삼이 읽기에 나쁘지 않은 책이다. 책장을 덮으면서 문득 미셸 푸코의 근대에 관한 연구의 메스가 (정신)병원을 향해 있음을 떠올리게 되었다. 과거 병원이야말로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재판소와 같은 역할이었고, 바로 그 작용에 근대와 함께 성립한 이성의 권력이 함께 작동하고 있었다고 그는 보았다. 아마도 한국의 연쇄살인범에서 한국의 근대화가 빠른 속도로  움직이면서 만들어낸 권력 작용의 집단적인 병적 징후들에 대한 '고고학적인 발견'을 이룰 수 있지는 않을까 공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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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짜경제학 - 상식과 통념을 깨는 천재 경제학자의 세상 읽기
스티븐 레빗 외 지음, 안진환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5년 6월
평점 :
절판


존 베이츠 클라크 메달을 받은 스티븐 레비트야 경제학계에서는 널리 알려진 인물이지만, 책 제목이 참으로 요상하다. 아마존에서 사려고 벼르다가, 최근 눈에 띄게 빨리진 베스트셀러의 국내 번역 속도를 감안하여 조금 더 기다리는 전략을 취했다. 역시나! 책이 바로 번역되어 나왔다. 역자가 썩 마음에 들진 않지만 나름 무난한 번역을 하는 사람이라서 그럭 저럭 마음에 든다. 역시 기획출판에 있어서도 제국이 한수 위라는 생각이다. 최고의 경제학자와 최고의 글쟁이를 붙여 놓았으니 도랑 치고 가재 잡겠다는 노림수다. 대개, 논리는 칼 같아도 언어가 빈곤하고 건조한 것이 경제학자라는 족속이고 보면 저자 둘이 엮인 것은 썩 훌륭한 궁합이다.

이미 그 괴상한 제목과 흥미로운 내용으로 북미에서도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른 책인데, "Freakonomics"라는 제목보다는 원저의 부제가 나의 마음을 더 끌었다. " A Rogue Economist Explores the Hidden Side of Everything" 얼마나 멋진 제목인가. 특히, "Rogue"라는 대목이 와 닿는다. 어떻게 국역본에서 이 단어를 "천재"로 번역했단 말인가!

책은 술술 잘 읽힌다. 속독과는 거리가 멀지만, 잡은지 하루만에 뚝딱 해치웠다. 책은 제목 그대로 삶의 이면을 집요하게 파고 든다. 그는 경제학이 소비자, 기업과 같은 전통적인 주제들을 분석하는 데 활용하는 방법으로 현실을 고문하면 흥미로운 질문과 생뚱맞지만 쓸만한 해답이 튀어나온다고 믿는다. 그 방법이 뭐냐고? 바로 사람들은 인센티브에 반응한다는 단순하지만 명징한 사실이다.

이 인센티브라는 무기로 미국 사회의 역사와 동시대의 삶을 헤집어 놓는데, 그 질주는 어지러우리만치 종횡무진이다. 고부담 시험제도 하에서 교사가 학생들의 점수를 조작할 가능성을 탐색하다가, 스모 선수들의 암묵적 담합을 밝혀내는가 하면, 다시 시선을 틀어 KKK단과 부동산 중계업자가 공유하고 있는 엉뚱한 정보의 문제를 밝혀낸다. 은밀한 갱단의 조직구성이 세상에 널린 자본주의 기업 맥도날드과 닮았다는 괴변에서 그들의 조직운영의 인센티브를 논하는가 하면, 낙태시술의 합법화가 미국의 범죄율을 줄였다는 논쟁적인 주장으로 거침없이 나아간다. 아이의 이름을 선택하는 데 있어 작용하고 있는 사회적 요인에 대해서 매우 황당해보이지만 세밀한 논설에 이르면, 어느새 아쉬움에 쩝쩝거린 채 책장의 끝을 잡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된다. 품격과 재치까지 곁들여진 산뜻한 지적 수다의 향연이라면 느낌을 적당히 표현한 것이 될까?

경제학자로서 레비트가 지닌 미덕은 크게 두가지라고 보고 싶다. 우선, 레비트는 경제학자들이 지니고 있는 "무게감"  혹은 "진지함"이 없다. 세속적인 수준에서 경제학이라고 하면 뭔가 거대한 것을 추구해야 할 듯(물가 안정을 추구하고, 효율성을 추구하고, 실업을 줄이는 등의 공공 선의 추구에서 주식 등 투자나 이재에 밝아 떼 돈을 번다는 사적인 성공의 쟁취까지)하거나, 전문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일단 "Econ(omics)"이라는 운을 떼기 전에 "Math(ematics)"라는 고된 수련장에서 강철처럼 단단하게 몸을 만들고 나와야 할 것 같은 직업적 강박관념 말이다. 오히려, 이러한 사슬에서 자유로운 사고를 펼치는 것이야말로 그의 장점이 아닐까 싶다.

두번째로 그의 실증 지향적 사고방식이다. 공상이나 술자리에서의 안주거리 정도로 적합할 법한 추론을 헛되게 날리지 않고 해당되는 자료를 발견해내는 그의 감각은 거의 '동물적'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실증을 중시하는 태도야 이미 경제학 일반에서 보편화된 것이지만, 미시 자료를 뽑아내는 그의 솜씨는 훔쳐오고 싶을 만큼 부러운 재능이다.

대개, 이런 식의 책은 경제학적인 기본 논리를 어중간하게 끌어들여 그 개념을 간략히 소개하고는 "알기 쉬운"이나 "열린" 따위의 제목을 달아놓기 일쑤다. 아니면 비교적 세밀한 논설을 취하고 있어도 그 논리가 너무 역겨워 받아들이기 힘든 경우가 많은데(랜즈버그의 [Armchair Economist]가 딱 그렇다. 최근 [런치타임 경제학]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번역되어 나왔다), 이 책은 그 두 가지 함정을 모두 잘 빠져나온 책이다. 다만, 몇몇 대목에서는 뒷맛이 개운치 않은 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더운 여름날을 잊게 해줄 만큼 짜릿한 지적 여행임은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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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것의지망생 2005-07-10 0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책은 열심히 보고 있지만 종횡무진 질주에 어지러워하고 있는 참이었는데.. 정말이지 롤러코스터 같은 책입니다. 서평 즐겁게 읽고 갑니다~

초콜렛 2005-07-14 1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서평 고맙습니다. 이 책 찜했습니다.

두비 2005-07-20 2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단한 서평입니다. 이 책을 편집한 편집자인데요... 앞으로 책 만들 때 이 서평 떠오를 것 같습니다. 참! 'rouge'를 '천재'로 바꾸어 부제를 단 점은... 솔직히 상업적인 고려 때문이었습니다. '괴짜'에 '깡패''불량'까지 가기에는...

귀여운양~ 2005-07-21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멋진 서평이네요. 저도 한번 읽어 봐야 겠습니다.

오우아 2005-07-26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괴짜 경제학이라는 호기심에 재밌게 읽었습니다. 또한 좋은 서평을 대하고 보니 저의 부족함을 느낌니다. 다만 조금 아쉬움이 있다면 사과 속에 왜 레몬이 들어있는지, 생각해봤으면 어땠을까 합니다. 이것은 저자 말대로 정보의 비대칭성 문제와 관련이 있는데 그 부분에 대한 해석이 없음이 아쉬움으로 남는 듯 합니다. 좋은 서평 잘 읽었습니다.

2005-07-26 10: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슈마리 2005-07-26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왔더니, 이렇게 많은 덧글을. jozefow님 말이 맞네요. 제가 원래 이름을 잘 틀립니다. 고쳐두겠습니다. 모두들, 감사합니다.

더운 여름 건강하게 보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