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사이버 신인류 - KI신서 551
황상민 지음 / 21세기북스 / 2004년 2월
평점 :
품절


황상민, <대한민국 사이버 신인류>, 21세기북스, 2004

요란한 선언, 그러나 빈약한 구체성

1. 요지는 간략하다

황상민 교수의 요지는 간단하다. 산업화는 뒤졌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는 산업 입국의 구호로 역설적으로 인터넷이라는 공간이 생겨났고, 이를 점거한 것은 주류 사회의 주변인(주변인)이었던 청소년과 폐인들이었다. 이들의 철학, 사고방식, 라이프 스타일은 모두 기성 세대와 충돌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미 견고한 구조를 지닌 오프라인의 세계와 새로운 질서를 내포한 온라인의 세계가 충돌한다. 더불어, 오프라인 세계에는 불가해한 온라인 세계에 대한 근심이 날로 커져간다.  온라인 게임의 PK를 현실 사회에서 벌어지는 살인의 연장으로 이해하고, 강짱에 환호하는 온라인을 정신병원과 다르지 않다고 규정해버린다. 하지만, 온라인 세계는 그 나름의 논리를 지니며 기성 세대와 구별되는 확연한 독자적인 철학, 미학, 행동 양식을 지닌 것이다. 이를 적극적으로 이해하려하지 않고 기성의 틀로 재단하려 하는 한 오프라인의 세계와 온라인 세계의 반목을 지속될 것이다.

위에서 보듯, 황교수의 책처럼 대규모의 패러다임 시프트를  외치는 주장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비난 인터넷 열풍 뿐이랴. 산업 사회의 종말, 근대의 종말 등 여러 변화를 징후 삼아 이를 새로운 시대로 나누려는 논자들의 시도는 매우 일상적이다.

2. 구체성의 결여

황교수의 주장과 비슷한 계열로는 더글러스 러시코프의 [카오스의 아이들]과 쉐리 터클의 [스크린 위의 삶]이 있을 터이다. 두 책 모두 선형적인 논리와 대별되는 맥락적인 논리를 말하며, (강도의 차이는 있으나) 이를 독자적인 무엇으로 적극적으로 구축하고자 시도했다. 그런데, 이 두 권의 책과 황교수의 책은 결정적인 부분에서 차이가 난다. 러시코프나 터클의 책이 자신이 주장하려는 바를 구현하고 있는 대상에 대해 깊이 천착하고 있어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풍부한 구체성을 체감케해준다면, 황교수의 책은 반대로 그 대상에서 계속 멀어지는 느낌이다. 예를 들어, 책에서 가장 구체적인 장이라고 할만한 5장 "온라인 게임: 네버랜드에서 하는 놀이"를 보면 리니지에 대한 피상적인 분석에 머물고 있을 뿐이다. 그나마, 소개되고 있는 구체성 조차 게임을 직접 플레이한 사람의 심층을 파고드는 것이라기 보다는 얄팍한 서베이 결과나 단편적인 신문 기사에 머물고 있다. 책의 논지를 떠나서 이러한 구체성의 결여는 책 읽는 맛을 뚝 잘라먹는 부분이다.

덧붙여 말하면, 책에서 간간히 소개되고 있는 신문기사들이 왜 게재되었는지 잘 이해할 수 없었다. 기사들은 이미 잘 알여진 사건들로 반복적이며 단편적이다. 만일, 이 책의 목표가 사이버 세계를 정신병원으로 오해하고 있는 기성 세대의 시각을 교정하기 위한 것이라면 어느정도 수긍할 만하다. 하지만, 세상 돌아가는 일에 어지간히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익히 알고 있는 사례들을 재삼 반복적으로 소개할 필요가 있었을까?

3. 지나치게 명쾌한 논리의 어색함 혹은 당황스러움

책은 매 챕터 끝 마다, 기성세대와 사이버 신인류의 사고방식을 도표로 정리해주고 있다. 복잡한 현실을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다면 이는 분명 미덕이다. 하지만, 그 정리와 도식화가 무리하게 진행된다면, 오히려 고개가 갸우뚱거려지는 부분이 늘게 마련이다. 도식화의 논리는 간단하다.

기성 세대       = 선형적, 규칙, 논리, 규칙 중시, 일과 놀이의 분리, Top-down, 명분 중시, 근대적, 물질적 성공, 결과 중시...
사이버 신인류 = 비선형적, 상황, 맥락, 창조 중시, 일과 놀이의 통합, Bottom-up, 표현/재미 중시, 탈 근대적,  과정 중시...

이념형을 구분했다는 것이 문제는 아니다. 다만, 이 이념형을 도구로 보지 않고 무리하게 현실로 끌어내릴 때 문제가 생기게 된다. 어차피, 변화라면 두가지 세계관이 충돌하면서 빚어지는 것일테니, 현실의 청소년이 경험하는 것은 그들의 품은 새로운 세계관과 기존의 주어진 세계관의 충돌일터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두 세계의 충돌은 저자가 말하듯, 온라인 세계에 대한 매도, 오해, 게임중독, 자살과 같은 극적인 충돌만 가져올까?

오히려, 이러한 충돌이 예외적인 것은 아닐까? 인지할 수 없는 가운데, 두 세계는 적당한 수준에서 섞이고 적당한 수준에서 타협한다. 저자가 대한민국의 정보화를 혁명적인 단절로 파악하고 있다면, 내가 보는 현실은 진화적인 변형이다. 인터넷이라는 충격은 새로운 세계관을 배태했지만, 이 세계는 기존 세계와 뒤섞이면서 서서히 변화한다. 폐인을 자처하는 청소년들의 진짜 삶, 의식, 철학은 이 뒤섞이는 혼합점 어딘가에 위치해있을 법 싶다.

너무 뻔한 이야기 아니냐고? 맞다. 하지만, 뻔한 이야기를 뻔하지 않게 역동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이론가의 의무 아니던가?

4. 온라인 게임에 대한 이해와 오해

책 전체에 걸쳐 가장 뚜렷한 논지라면 온라인 게임에 대한 기성 세대의 오해에 대한 반론이다. 황교수는 온라인 게임 중독이란 없다고 말한다. 온라인 게임의 세계는 독자적인 생존 논리를 지닌 세계이며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데에서 온라인 게임을 둘러싼 오해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온라인 게임이 하나의 독자적인 세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데 동의할 수 있다. 하지만, 앞서와 마찬가지로 그 세계는 현실의 세계에 비해 얼마나 자립적일까? 아이템 현금거래가 온라인 세계를 지지하는 현실은 무엇인가? 황교수는 이를 디지털 이미지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여 터트린 21세기형 대박신화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그 획득한 가치 때문에 그가 옹호하고자 하는 온라인 세계의 가치가 거꾸로 파괴되고 있다는 역설은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황교수는 선행한 학술적인 실증 조사에서 온라인 세계가 오프라인의 물욕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점을 보이려 노력한 바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온라인 게임을 즐기는 유저라면, 그가 옹호하고자 하는 그 하나의 온라인 게임이 전적으로 '재미'와 '폐인'의 논리에 따라서만 굴러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터이다. 과연 새로운 가치와 철학을 구현하는 온라인 세계가 이미 낡은 오프라인 세계의 논리와 가치에 종속된 것이라면? 아이템 현금거래는 온라인 세계의 가치가 범람해 만들어진 맥주의 거품 같은 찌꺼기에 불과한 것인가?

또한, 온라인 게임에 대한 그의 열렬한 옹호는 또다른 의문을 불러 일으킨다. 황 교수는 아무래도 게임을 좋아하는 것 같지는 않고 책 곳곳에서 그런 흔적을 읽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이 컴퓨터의 도움을 얻어 체험한 인터랙티비티의 총아라 할만한 컴퓨터 게임과 온라인 게임은 어떻게 구분될까? 컴퓨터 게임은 단순한 반복과 무의미한 시간 죽이기임에 반해서, 온라인 게임을 사회를 체험하는 것이기에 가치를 지니는 것일까? 황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게임을 수백 번 박복하면서 해 보는 과정을 통해 게임의 기본 기법을 스스로 마스터한 초기 온라인 게임 개발자들은 정규 대학에서 게임에 관한 전문 지식이나 기술을 배운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 대부분은 게임에 빠져 거의 '폐인'처럼 지냈던 사람들이었다. 자신들이 좋아하는 반복되는 경험을 통해 감추어진 구도와 기본적인 기술을 파악하고 스스로를 마스터로 만들고 결국에는 게임에 대해서 거의 신과 같은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남은 것은 새로운 창조자가 되는 것뿐이다."

일단, 맞다고 하자. 그렇다면, 한국의 온라인 게임은 매니아의 산물이고 그래서 상업적인 성공과 배치될지도 모를 자체적인 논리를 지니게 되었다. 하지만, 한국 온라인 게임산업의 과거와 현재가 그랬는지는 역시 실증을 거쳐야 하는 문제로 남는다. 그리고, 그 도도한 폐인들이 그토록 빠른 속도로 2-3년 만에 비즈니스의 논리로 흡입되어 간 현실의 궤적은 어떻게 된 것인지 매우 의아스럽다.

그런데, 몇 십 페이지 후에 황교수는 이와는 다른 이야기를 설파한다.

"흥미롭게도 현재 한국 사회에서 온라인 게임을 기획하거나 개발하는 사람들이 가진 패러다임은 실제로 이 게임 세계를 이용하는 사용자와는 뚜렷한 차이가 있다. 청소년들이 대부분의 온라인 게임을 통해 얻는 경험, 아니 온라인 게임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해할 수 있는 패러다임은 신과학 패러다임이다. 하지만, 게임 세계를 물리적으로 만들고 관리하는 사람들은 사용자와 달리 구과학 패러다임을 활용해야 한다. 왜냐하면 게임 활동이란 이들이 설정한 규칙에 따라 사용자들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 이런 이유 때문에 온라인 게임에서 일어나는 활동을 규제하고 게임 내의 행위를 어떻게 판단할 것인지의 문제와 관련하여 게임 세계에서는 관리자와 사용자 간에 갈등과 긴장관계가 형성된다."

앞서 황교수의 호기로운 매니아론이 왜 여기선 한풀 꺾이고 말았는지 일단 이해하기 힘들다. 게다가, 온라인 게임의 사용자와 관리자를 선량한 신과학 패러다임 대 불량한 구과학 패러다임으로 나누는 논리는 더욱 궤변에 가깝게 느껴진다.

첫번째와 두번째 주장을 합쳐,폐인이 그토록 강한 의지와 힘을 가졌다면 왜 독자적인 게임을 형성하지 못했을까, 라는 세번째 의문이 남는다. 상업적인 요소가 배제되더라도 말이다. 오히려, 이 부분에서는 온라인 천국 한국이 아니라 MUD 게임의 오랜 전통을 지닌 서구의 텍스트 온라인 게임이 훨씬 더 타당한 사례가 되지 않을까 싶다. 상업성을 제한하면서도 상상력에 의해 만들어져나가는 부분이 극대화된 가상 사회, 이것이야말로 아직도 생존해있는 수 많은 텍스트 기반 MUD 게임의 모습이 아닐까?

이러한 황교수의 동요는 온라인 게임의 현실을 그의 이념형에 너무 성급히 끼워맞추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그의 관점은 한국의 온라인 게임이 지닌 특수성을 걸러내지 않은 채, 온라인 게임 일반의 진화형으로 바로 일반화시킨다는 점에서 더욱 위험하다. 온라인 게임 내의 행태를 그 자체의 논리로 이해하자는 주장은 타당하지만, 그래서 PK나 현거래가 모두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5. 과연 이 책의 독자는 누구일까?

사실, 이 책을 고른 이유는 황교수가 이 분야에서 나름의 권위자이기 때문이었다. 온라인 게임이나 사이버 문화를 학술적으로 이해하려는 틀이 부족한 가운데, 가장 앞서 있는 사람의 주장을 통해 정수를 취해보고자 했다. 하지만, 내가 책에서 느낀건 상당한 실망감 뿐이다.
이 책에서는, 페이퍼 RPG와 코스츔 플레이에서 새로운 놀이의 가능성을 끌어내고 이를 근대적 사고체계가 지닌 선형성의 붕괴와 멋지게 연결시킨 러시코프의 감각도, 컴퓨터를 매개로 체험한 인터랙티비티가 MUD게임으로 만개하게 되는 과정을 따라간 터클의 섬세함도 찾을 수 없었다.

남은 것은 무엇인가. 나에게, 이 책은 앙상한 선언문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독자는 누구일까? 사이버 세계를 오해하고 있는 기성세대? 이 책을 읽고 기성 세대가 교화될 수 있다면 개인적으로도 무척 다행스럽게 느껴진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런 일이 벌어질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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