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크리스마스 - Christmass in August
영화
평점 :
상영종료



 8월의 크리스마스. 이젠 너무 많이 들어 익숙해진 제목이지만, 여전히 이 영화의 제목은 너무나 서정적인 울림으로 내게 다가온다. 한 번 마음에 든 영화는 몇 번씩이고 다시 돌려보는 나의 특성상 이 영화도 처음 본 후로 몇 번이고 다시 봤지만, 처음 봤던 그 때 느꼈던 그 아련함은 여전히 지워지지 않는다. 8월의 크리스마스, 그 묘한 어감에서 배어나오는 아름다움이란.

허진호 감독의 데뷔작이고, 한석규와 심은하 주연이라는 거창한 이름들 아래 놓여있는 이 영화는 그러나 그 자체로는 참 잔잔하고 소박하다. 멜로영화라지만 그 흔한 키스신 한 번 나오지 않고, 주인공이 시한부 인생이라는 통속적인 설정을 갖고 있지만 억지로 눈물을 강요하는 장면도 찾아볼 수 없다. 자극적으로 관객의 감정을 건드려대는 영화들에 익숙해진 사람이라면 이 영화를 한없이 지루하게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강렬한 팝아트보다는 잔잔한 수채화, 그것도 풍경화에 가까운 느낌의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영화지만, 내겐 참 좋은 영화였다.

'정원'은 동네의 사진사다. 작은 사진관에서 사진을 찍는 그는 평화로워 보이지만, 사실 삶의 끝을 바라보고 있는 환자다. 그는 더 이상 억울할 것도, 원망할 것도 없다는 듯 그저 평범한 일상을 살아간다. 그런 그의 앞에 '다림'이라는 여자가 나타난다. 주차 단속 요원인 그녀는 불법 주차를 한 차를 찍은 사진을 맡기기 위해 정원의 사진관을 찾는다. 그렇게 그의 일상과 그녀의 일상이 만난다. 아주 미묘하게 사랑의 감정이 자라나는 가운데로, 두 사람의 일상은 이전과 별로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흘러간다. 다만 함께 있는 시간의 밖에서 그의 일상에는 그녀를 생각하는 시간이, 그녀의 일상에는 그를 생각하는 시간이 조금씩 늘어갈 뿐. 그들의 사랑은 그렇게 소심하게, 그리고 조심스럽게 자라간다. 그래서 더욱 아련하고, 애틋하게 느껴진다. 

한석규의 연기는 참 담백하게 '정원'이라는 인물을 그려낸다. 그의 편안한 인상과 부드러운 목소리가 역할과 아주 잘 어울려서인지, 그의 연기에서는 어떤 가공된 면이나 인위적인 부분을 찾기가 힘들 정도였다. 엷어진 슬픔에도, 소소한 즐거움에도 웃음짓는 그의 모습은 이 영화의 흐름을 그대로 닮아 있었다. 영화를 보며 잘 감정이입을 하지 않는 편인 내가 영화 속 그의 모습을 보며 때론 가슴아파하기도 하고 때론 미소짓기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 한석규의 그 자연스러운 연기 덕분이었을 것이다. 심은하의 '다림'은 청순하면서도 도도한, 때로는 예측할 수 없지만 이해할 수는 있을 것 같은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그녀의 연기 또한 무척이나 자연스러워서 사랑에 빠진 그 미묘한 마음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많은 좋은 영화와 좋은 연기들이 있지만, 나는 이렇게 자연스러운 흐름의 영화와 그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연기가 좋다. 허진호 감독은 배우의 모습을 최대한 자연스럽게 영화에 녹여내는 방법을 아주 잘 아는 사람 같다. 그래서 내가 허진호 감독의 영화를 좋아하는가보다.

소박하고 단정한 영상과, 그에 어울리는 음악들도 좋았다. 반복되는 메인 테마도 좋았고, 정원의 나레이션과 함께 흐르는 산울림의 '창문 너머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 그리고 한석규의 목소리로 듣는 김광석의 '거리에서'도 좋았다. 이 영화에선 한석규의 나레이션이 많이 나오는데, 내용의 전달 효과도 있지만 그 감미로운 목소리 자체가 영화의 흐름을 부드럽게 이어주는 느낌도 컸다. 역시 배우의 목소리란 중요하구나, 를 다시 한번 느꼈던. 

오랜만에 다시 보고 나니, 가슴이 먹먹해진다. 영화 속에서 정원은 세월은 많은 것을 바꾸어놓는다고 하지만,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들이 분명 이 세상에는 있으리라. 이 영화도, 이 영화가 내게 주는 감정도 그런 것이기를 바란다. 아니, 믿는다. 정원에게 다림이 추억이 되지 않았던 것처럼, 이 영화도 내게 추억이 되지 않고 영원히 아련한 그 감정 그대로 남아 있기를. 그래서 때로 이토록 가슴이 허할 때 따스하게 채워줄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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