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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마크하기 22주 (공감9 댓글0 먼댓글0) 2024-12-30

24.12.23.
















딕테해설 완독. 약간은 안개가 걷히는 느낌이지만 완전히 내용을 이해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어느 정도는 작가가 그렇게 의도한 부분이 있으니 그걸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도 읽기의 한 부분일 터. 읽으면서 밑줄 그었던 부분들을 정리하며 마무리하려고 한다.



DISEUSE(말하는 여자)


속에서 웅얼거린다. 웅얼웅얼한다. 속에는 말의 고통, 말하려는 고통이 있다. 그보다 더 큰 것이 있다. 더 거대한 것은 말하지 않으려는 고통이다. 말하지 않는다는 것. 말하려는 고통에 대하여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속에서 들끓는다. 상처, 액체, 먼지. 터뜨려야 한다. 배설해야 한다. (13)



클리오 역사


진리는 그 자체 외의 모든 절제를 진실과 함께 포용한다. 그 밖의 시간, 그 밖의 공간, 자체의 시간의 유유한 광휘, 죽음의 유유한 표식을 상관하지 않고, 다른 삶들과 병행한다. 그 자체에게는 전혀 모르게. 그러나 노래하기 위하여. 누구에게 노래하기 위하여. 아주 부드럽게. (38) 


왜 지금 그 모든 것을 부활시키는가. 과거로부터. 역사를, 그 오랜 상처를. 지난 감정을 온통 또다시. 그것은 똑같은 어리석음을 다시 사는 것을 고백하기 위해서다. 지금 그것을 불러일으켜 잊힌 역사를 망각 속에서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다. 말과 영상 속에서 또 다른 말과 영상을 조각조각 끄집어내어, 잊힌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대답을 끄집어내기 위해서다. (43) 


목이 잘린 형상들. 낡은. 흉진, 이전의 형상의 과거의 기록, 현재의 형상은 정면으로 대면해 보면 빠진 것, 없는 것을 드러낸다. 나머지라고 말--, 기억. 그러나 나머지가 전부다.


기억이 전부다. 잃어버린 것에 대한 열망. 빠진 것을 지킨다.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부정의 사이에 고정되어 진보의 표시라고는 보이지 않는다. 그 밖의 모든 것은 시간이 지나면 나이를 먹는다. 단지. 어떤 사람들은 나이가 없다. (48)



칼리오페 서사시

 

당신은 다른 사람들처럼 강제로 주어진 언어를 말합니다. 그것은 당신의 언어가 아닙니다. 비록 당신의 언어가 아닐지라도 당신은 그 언어로 말해야만 한다는 것을 압니다. 당신은 이중 언어 사용자입니다. 당신은 삼중 언어 사용자입니다. 금지된 언어는 바로 당신의 모국어입니다. 당신은 어둠 속에서 말합니다. 비밀 속에서. 바로 당신의 언어를 말입니다. 당신 자신의 언어. 당신은 아주 부드럽게, 속삭여 말합니다. 어둠 속에서, 비밀스럽게. 모국어는 당신의 안식처입니다. 당신의 고향입니다. 당신의 존재 그 자체입니다. 진정으로. 말한다는 것은 당신을 슬프게 합니다. 그리움. 말 한마디를 발설하는 것은 죽음을 무릅쓰는 특권입니다. 당신뿐만 아니라 모두의 죽음을. 법으로 혀가 묶이고 말이 금지된 당신들 모두 하나. 당신은 마음 한가운데에 위는 붉고 아래는 푸른색인, 하늘과 땅을 의미하는 태극; 타이치t’ai-chi 마크를 가지고 다닙니다. 그것은 상징입니다. 속한다는 상징. 목적의 상징. 다시 찾을 수 있다는 상징. 탄생에 의한. 죽음에 의한. 피에 의한. 당신은 그 상징을 당신의 가슴 속에, - 속에, 당신의 - 속에, 당신의 영-혼 속에. (56)


당신은 씁니다. 당신은 쓰고 당신은 말합니다. 가면 속에 숨겨진 음성으로 달을 향해 말을 심고 바람에 말을 실어 보냅니다. 계절의 지나감을 통해. 하늘에 의해 물에 의해 말은 탄생하고 분별이 주어집니다. 한 입에서 다른 입으로 전해져, 한 사람이 읽고 다른 사람이 받아 읽으면서 그 말들은 온전한 의미를 실현하게 됩니다. 바람. 여명 또는 황혼에 진흙의 땅과 이동하는 철새들 남쪽으로 향하는 철새들은 주둥이 메시지의 씨를 위해 귀신의 베일을 씁니다. 통신. 말을 퍼뜨리기 위한. (58)


어머니, 저는 당신을 만나볼 수 있기 위해 꿈을 꿉니다. 잠 속에서는 천국이 가까이 내려옵니다. 어머니, 내 최초의 소리. 최초의 말. 최초의 개념. (60) 



우라니아 천문학


단지 이미지들뿐. 다만. 이미지들.

내가 들은 빗속의 신호들.

비가 눈으로 된 것에 불과한 말하기.

진실이든 진실이 아니든

더 이상 말하기가 가능하지 않다. (83) 



멜포메네 비극


나는 군중들이 나에서 몸으로 조여오는 것을 느낍니다. 이제 목소리는 더 우렁차게 울리고 나는 깨어짐의 파열을 일으키는 단 하나의 몸짓을 듣습니다. 나의 왼쪽 나의 오른쪽으로 다른 쪽을 향한 침묵이 앞으로 전진합니다그들은 이제 깨트립니다, 그들의 소리,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당신이 들었던, 그래서 꿈에서도 잊을 수 없었던 귀에 익은 소리, 깨트리는 소리의 결과. 연기는 대기를 감싸고 점점 피어올라 걷잡을 수 없이 퍼지고 우리는 부분으로 감소되고 뿔뿔이 흩어져 흰색과 회색 속에 가려집니다. 그 속에서 팔 하나가 머리 위로 천천히 올라와 탁한 흰색 속으로 사라집니다. 그리고 거기에선 무릎이 꺾인 다른 다리들이 땅에 엎어지고 온몸이 왼쪽으로 넘어집니다. 눈을 찌릅니다. 그것의 투입은 대기의 공기를 가르기 때문에 하늘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나는 방향감각을 잃고 텅 빈 거리를 달리다가 넘어집니다. 아무도 나를 보지 못했고 나는 걷습니다. 아무 데로나. 탁한 공기가 계속 눈을 찔러 눈물을 흘리며 나는 웁니다. 하늘에 남아 있는 가스 연기가 하늘을 흡수해버렸고 나는 웁니다. 거리는 깨진 벽돌 조각과 파편으로 뒤덮였습니다. 왜냐하면. 꽤 많은 신발짝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는 것을 봅니다. 때로는 그들이 가져온 돌멩이들 틈에 한 켤레가 떨어져 있는 것을 봅니다. 왜냐하면. 나는 찢어진 셔츠가 널려 있는 사이사이를 밟으며 울부짖고 절규합니다. 그들의 자취는 없습니다. 피밖에는. 왜냐하면. 그들 사이를 걷습니다. 그들이 걸었던 보도, 돌멩이가 떨어지듯 그들이 쓰러진 보도, 빗물로는 피가 지워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핏자국은 진하디진하게 남아 씻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우는 군중을 따라갑니다. 그들의 노랫소리, 텅 빈 거리를 따라 끊임없이 이어지는 그들의 목소리를 따라. (94-95)


경찰과 군인들은 누구인지도 모르는 자신들을 복제하여, 당해낼 수 없는 숫자로 배가하여 그들의 임무를 수행합니다. 그들의 직무 이행과 그들에게 주어진 신분은 그들의 고향보다도 더 멀리 나아가, 그들의 어머니와 아버지, 그들의 형과 누이, 그들의 아이들보다도 더 멀리 나아가 그들 자신의 핏줄기보다 더 멀리 나아갑니다. (96)



에라토 연애시


 "나는 다만 어린아이일 뿐입니다. 힘없고 약한, 그럼에도 나의 나약함이 곧 나 자신을 당신 사랑의 희생양으로 바칠 수 있는 용기를 줍니다. , 주님! 과거에는, 순수하고 오점 없는 희생양만이 강하고 힘있는 하느님에게 받아들여졌습니다. 신의 정의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완벽한 희생양이 필요했지만, 사랑의 법은 공포의 법으로 계승되었고 사랑은 나를 희생물로 선택하였습니다. , 약하고 불완전한 창조물. 이 선택은 사랑을 받을 만한 것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사랑이 더 완벽하게 충족되기 위해서는, 그 사랑 자체를 낮추고, 그 자체를 무까지로 낮추어 이 무를 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오 예수님, 나는 압니다. 사랑은 오직 사랑으로만 갚아진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당신에게 사랑을 사랑으로 갚음으로써 나의 가슴을 위로할 길을 찾았습니다." (123)



엘리테레 서정시


죽은 시간. 텅 빈 눌림이 매장된다 다시 소생하기에는 박약하고 기억에는 저항한다. 기다린다. Apel. Apellation. 발굴. diseuse로 하여금 하게 하라. Diseuse de bonne aventure. 그녀로 하여금 불러내도록 하라. 그녀로 하여금 오래 오래 다시 또다시 내려지는 저주를 깨뜨리도록 하라. 그녀의 목소리로, 땅바닥을 꿰뚫고, 타르타로스의 벽을 뚫고 우묵한 그릇의 표면을 빙빙 돌며 긁어내게 하라. 밖으로부터 소리가 들어가게 하라. 그릇의 텅 빔 그것의 잠들어 있음에. 그때까지. (135) 


죽은 낱말들. 죽은 언어. 사용하지 않음으로 해서. 시간의 기억 속에 묻혀버림. 고용되지 않았다. 발설되지 않았다. 역사. 과거. 말하는 여자, 9일 낮과 9일 밤을 기다리는 어머니를 찾아내도록 하라.

기억을 회생시키라. 말하는 여자, 딸로 하여금 땅 밑으로부터 나타날 때마다 샘을 회생시키도록 하라.

잉크가 다 말라 없어지기 전에, 쓰기를 마침내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기 전에 가장 진하게 흐른다. (146)



탈리아 희극


미래가 없다, 다만 시간의 몰려옴이 있을 뿐. 설명할 수 없고, 공허하며, 무형의 시간, 그녀는 그것을 향해 움직이도록 기대될 뿐이다. 앞쪽으로. 앞으로. 그리고 어떻게든 현재를 지나쳐버린다. 망각의 은총으로 스스로를 구제하고 있는 그 현재. 그녀는 그것을 어떻게 정당화시킬 수 있었을까. 현재의 가시성이 없이.

그녀는 실제의 시간을 대치할 수 있다고 자신에게 말한다. 그녀는 자신에게 시간을 앞에 전시하고 그것을 엿보는 자가 된다고. 그녀는 죽음은 절대로 오지 않는다, 올 수 없다고 자신에게 말한다. 그녀는 죽음을 대치할 수 없다는 것을, 실제로 죽지 않고는 그것의 극복이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152-153) 


그녀는 글을 쓸 수만 있다면 계속 살 수 있다고 자신에게 말한다. 그치지 않고 계속 쓸 수만 있다면 하고 자신에게 말한다. 글을 씀으로써 실제의 시간을 폐기할 수 있다면 하고 자신에게 말한다. 그녀는 살 것이다. 그녀 앞에 그것을 전시해놓고 그것의 엿보는 자가 될 수 있다면. (153)



테르프시코레 합창 무용


깨어진다는 것. 깨어진 말로 구술한다는 것. 깨어진 말로 말한다는 것. 깨어진 말로 얘기한다는 것. 깨어진 말을 한다는 것. 깨어진 언어. 피진어. 깨어진 낱말. 말하기 전. 말해지는 대로. 말한 대로. 말해지려던. 말하기 위해. 그러면 말하라 (173) 



폴림니아 성시


엄마 나를 창문으로 올려주세요, 그의 시야로부터 너무 높이 올려다 보는 어린아이. 유리창 사이로 어떤 영상이 이제 검은색 회색들의 희미함, 그녀의 시야 위에 머뭇거리는 그림자들 머리는 가능한 만큼 뒤로 젖혀졌다. 나를 창문으로 올려주세요, 하얀 창틀과 그 사이 유리, 이른 황혼 또는 여명의 빛이 어두울 때, 선은 그림자에 지워지고 집들은 지나가는 빛에 그림자 우물을 드리울 때. 짧다. 밤을 향해 모두 짧다. 골목길은 마지막 집 뒤로 모퉁이를 돌아가는 끝없는 길. 담벽들, 손으로 만든 돌 벌집들 하나하나가 금빛을 품고 광선의 흰색을 반사한다. 창틀과 유리 사이에 아무도 없다. 나무들은 앞으로 다가올 전망을 기다리며 침묵을 고수한다. 만약에 일어난다면. 부동의 침묵을 들어 올리기 위한 부단한 지킴 속에서. 나를 창문으로, 그 그림의 영상으로, 올려주세요. 암석의 무게에 매여 있는 밧줄들을 풀어주세요. 처음엔 밧줄들, 그리고 정적을 깨트리기 위하여 나무 위에 긁히는 소리, 종들이 떨어지자 울림이 뒤따른다. 정적을 깨트리기 위하여 무게를 들고 있는 밧줄이 나무에 긁히는 소리. 종들이 떨어지며 하늘에 소리를 떨친다. (191) 



작품 해설_「『딕테』와 차학경의 예술 세계」(김경년)


딕테는 모두 열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부분 'DISEUSE(말하는 여자)'를 제외하면 각 부분마다 그리스 신화의 시신詩神과 각 시신들이 주관하는 학문 또는 주제가 제목처럼 앞서고, 그다음에는 실제의 역사적 여성(유관순, 저자의 어머니 허형순, 성녀 테레즈, 무성영화 잔 다르크의 수난의 주인공으로 분장한 프랑스 여배우 르네 팔코네티 등)의 사진 또는 그림의 영상이 등장한다. 원문은 영상 다음에 시작되며, 문체는 대부분 시적 산문이라고 할 수 있다. (223) 


따라서 첫 부분은 가장 자서전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가능한 한 최소한의 말을 하기 위해" 또는 '말을 하고 싶은 욕망'의 갈등으로부터 사포와의 접신을 통해 '언제나, 있는 시간은 모두, 좌로, 우로, 배설하는, 말하는 여자'로의 변신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제부터 그는 말 없는 유관순, 어머니(허형순 여사), 잔 다르크, 성녀 테레즈 등 여성의 삶, 즉 여성들의 경험의 연대성을 제시한다. (224)


차학경의 작품에서 언어에 대한 성찰은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딕테에서 가장 눈에 띄는 특수성은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프랑스어와 영어의 병행 사용이 눈에 띈다. 그 밖에도 언어의 유희 같은 패러디, 언어의 잠재적인 모호성 추구, 언어의 분해와 재결합, 언어의 음상音像 또는 형태소를 중심으로 한 연쇄 변화 등 다양한 언어 표현 수단들이 자유자재로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언어의 형태소에 따라 변화되는 의미의 변형을 추구하고 있다.

때로는 정례적인 문법에 어긋나는 영어 용법을 볼 수도 있고(예를 들어 선행사가 없는 대명사, 특히 ittheir 등의 사용, 전치사의 생략 등) 때로는 영화의 극본 같은 현재형 묘사, 또는 시제가 부정한 동사 원형들이 나타난다. 이는 문장 전체에 탄력, 그리고 나아가 시간의 한 정에 구애받지 않는 생동성을 부여한다고 할 수 있다. 차학경은 시간과 공간의 없음, 곧 시공의 초월, 그리고 그것의 영원성으로의 연결에 대해 가장 깊이 생각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며 그것이 이런 언어 표현 방식으로 나타난 것이 아닌가 한다. 예를 들면, 문법 카테고리의 하나인 '시제'의 사용을 거부한 것은 '문법이 임의로 한정시키는 시간의 제약성'에 구애받지 않으려는 시도로 보인다. (226-227)


각 부분들이 소설적 이야기로서의 연결성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모든 이야기가 여성 인물들을 다루고 있으며, 나아가서는 사포와 아홉 명의 시신에 역사 속의 실제 인물, 즉 유관순, 저자의 어머니, 잔 다르크, 성녀 테레즈 등을 연결시킴으로써 역사적 연관성과 대응성, 그리고 여성 체험의 연대성을 동서양의 차이 없이 제시한다고 할 수 있다. 궁극적으로 이 책은 자신으로부터 시작하는 분산된 세계diaspora 속에 소외된 이방인/소수민족의 존재성, 여성의 체험, 일제 강점기 한민족의 수난, 분단과 민주주의를 위한 수난, 순수한 사랑에의 갈망, 그리고 저자 자신에 대한 자서전적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227)



작품 해설_「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이름」(권영민)


'딕테'라는 작품 제목은 '받아쓰기'라는 특별한 글쓰기 방식을 의미한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복합적이면서 이중적 성격이 강하다. 받아쓰기의 행위는 모든 글쓰기의 출발이면서 동시에 글쓰기라는 행위 자체의 본질적 속성을 그대로 말해준다. 일반적으로 받아쓰기'라는 행위에서 언제나 문제가 되는 것은 글쓰기의 주체적 의지가 제대로 반영되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말해주는 자가 언제나 우위에 있고 그것을 받아쓰는 자는 언제나 말하는 대로 '받아쓰기'만 하면 된다는 의미에서 받아쓰기가 갖는 주체의 수동성을 암시한다. 하지만 이러한 '받아쓰기'의 행위는 인류의 역사 자체가 가지는 다양한 전승의 의미를 포함한다. 신화는 일종의 '받아쓰기'를 통해 후대에 전승된다. 그것은 단순한 수동적 글쓰기가 아니라 인간의 기억을 만들어내고 그에 따라 행동을 지배한다. 그러므로 신화는 인간 사유의 근원적인 상징이 되는 것이며 인간의 모든 글쓰기는 결국 이 신화를 '받아쓰기' 하는 데에서 생겨난 다양한 이야기의 변형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231-232)


딕테에서 독자들이 당혹해할 수밖에 없는 특징은 목소리가 다른 화자의 진술이 서로 뒤섞인 다양한 삽화가 어떤 규칙 없이 결합되고 있는 점이다. 그러므로 스토리를 지닌 어떤 내용의 서사적 연결이나 의미의 맥락을 따지기가 쉽지 않다. 더구나 여기저기에 다양한 사진이 끼어들어 읽기를 방해한다. 사진은 그 텍스트 자체가 특정 시간에 정지된 이미지를 독자에게 보여준다. 사진 속의 이미지는 침묵이면서 동시에 침묵하는 언어다. 이러한 복잡한 구조는 때로는 몽타주의 기법으로, 때로는 콜라주의 파격처럼 서로 겹치는 메시지와 이미지의 착종으로 서사 공간 자체를 입체화한다. (233)



24.12.24.














희랍어 시간다시 읽기. 여자와 남자의 이야기가 번갈아가며 전개되고 말과 시력을 잃어버린(잃어가는) 인물들의 이야기에서 세공된 문장들을 감탄하면서 읽게 된다. 드디어 단둘이 만나게 되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남자의 모습에서 멈춤.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보았는데, 영화관에서 자꾸 큰 소리로 속닥거리는 남자 때문에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영화는 소설을 충실히 재현해냈다는 생각이 들었고, 킬리언 머피가 연기한 빌 펄롱도 내면을 표현하는 표정 연기가 영화에 깊이 빠져들게 해 감탄하면서 보았다. 네드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잊고 있었어서 집에 와서 다시 소설을 훑었고, 이 작품은 역시 소설이 훨씬 좋구나, 라고 생각하며 책을 덮었다. 맡겨진 소녀(영화는 말없는 소녀)는 영화를 먼저 보고 소설을 나중에 보았었는데 그때는 감상이 정반대였던 기억이...


펄롱을 괴롭힌 것은 아이가 석탄 광에 갇혀 있었다는 것도, 수녀원장의 태도도 아니었다. 펄롱이 거기에 있는 동안 그 아이가 받은 취급을 보고만 있었고 그애의 아기에 관해 묻지도 않았고그 아이가 부탁한 단 한 가지 일인데수녀원장이 준 돈을 받았고 텅 빈 식탁에 앉은 아이를 작은 카디건 아래에서 젖이 새서 블라우스에 얼룩이 지는 채로 내버려두고 나와 위선자처럼 미사를 보러 갔다는 사실이었다. (99)


생각해보면 올해는 영화를 책보다 더 자주 보았던 것 같은데(무비랜드를 알게 된 것과도 관련이 있다), 영화에 대한 감상들을 각각 적어서 투비에 연재해볼까라는 생각도 해보았으나 전혀 실천하지 못했다. 여러모로 기록과 정리, 리뷰에 있어서는 만족스럽지 못했던 한 해. 내년에는 좀더 열심히 읽고 써야겠다는 생각을 또 한다. 투비컨티뉴드...



24.12.28.


희랍어 시간완독. 언어를 가졌으나 상실한 이와 시력을 상실해가는 이의 묘한 만남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세계를 향해 자신을 표현할 수단을 상실해 내면으로 침잠해가는 이와 세계를 이해할 수단을 상실해 세계와 소통할 수 없어 내면으로 침잠하는 이. 두 사람이 처음으로 교감하는 마지막 부분의 이야기가 아득하면서도 아름답게 시처럼 펼쳐진다. 분명하게 묘사되는 사건이 없음에도 다 읽고나면 여운이 남게 되는 작품.


가끔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나요.


우리 몸에 눈꺼풀과 입술이 있다는 건.


그것들이 때로 밖에서 닫히거나,

안에서부터 단단히 걸어잠길 수 있다는 건. (161)


마모된 거대한 톱니의 일부를 만지듯 그녀는 자신의 입술을 쓸어 본다. 오래전에 퇴화된 기관을 기억하듯, 말들이 떨며 솟아오르던 경로를 머릿속으로 더듬는다.

자신이 말을 잃은 것이 어떤 특정한 경험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다.

셀 수 없는 혀와 펜 들로 수천 년 동안 너덜너덜해진 언어. 그녀 자신의 혀와 펜으로 평생 동안 너덜너덜하게 만든 언어. 하나의 문장을 시작하려 할 때마다 늙은 심장이 느껴졌다. 누덕누덕 기워진, 바싹 마른, 무표정한 심장. 그럴수록 더 힘껏 단어들을 움켜쥐었다한 순간 손아귀가 헐거워졌다. 무딘 파편들이 발등에 떨어졌다. 팽팽하게 맞물려 돌던 톱니바퀴가 멈췄다. 끈덕지게 마모된 한 자리가 살점처럼, 숟가락으로 떠낸 두부처럼 움푹 떨어져나갔다. (165)


어두운 초록색 흑판에 백묵으로 문장을 쓸 때 나는 공포를 느껴요.

방금 내가 쓴 글씨지만, 십 센티미터 이상 눈에서 떨어지면 보이지 않아요.

암기한 대로 소리내어 읽을 때 공포를 느껴요.

태연하게 내 혀와 이와 목구멍으로 발음된 모든 음운들에 공포를 느껴요.

내 목소리가 퍼져나가는 공간의 침묵에 공포를 느껴요.

한번 퍼져나가고 나면 돌이킬 수 없는 단어들. 나보다 많은 걸 알고 있는 단어들에 공포를 느껴요. (167)















나는 매주 시체를 보러 간다읽기 시작. 법의학이란 무엇이고 어떤 학문인가를 다양한 사례를 통해서 쉽게 보여준다. 통상 우리는 범죄와 연결짓곤 하지만 사실 일상의 모든 죽음과 관련있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어비읽기. 치킨 런쿵후하는 자세를 읽음.

치킨 런은 자살하려 했지만 우연히 치킨 배달부에게 구해진 남자와 비좁은 방에서 겨우 살아가다 사람을 구했다는 이유로 자살을 도와주게 된 치킨 배달부의 반복되는 자살 실패담. 나란히 병원에 실려가는 장면에서 씁쓸한 웃음을 짓게 된다.

쿵후하는 자세는 할 일이 없이(아마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계속 자전거를 타고 떠도는 화자에게 끊임없이 무엇을 하고 있냐고 시비를 거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처럼 읽힌다. 어쩌면 잠시 나만의 쿵후를 하기 위한 자세를 잡고 있었을 뿐인데 아니꼬운 눈으로 지금 뭐하는 거냐며 시비를 거는 세계. 이 세계가 규정한 을 하고 있지 않으면 의심스런 눈초리로 바라보는 세계를 배회하는 이에 대한 이야기.



24.12.29.


나는 매주 시체를 보러 간다읽기. 2부는 생명의 시작과 죽음의 정의가 어떻게 변해왔는지부터 시작해 안락사 논쟁에 대한 이야기까지 접근한다. 교양 강의의 성격상 각각의 주제를 아주 깊이 있게 다루지는 않는 편. 그래도 보라매병원 사건’, 사망 원인과 사망 종류의 차이, 죽음의 변천사 같은 내용은 흥미롭게 읽었다. 이제 3부만 남겨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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