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제7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김금희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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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금희, 너무 한낮의 연애

 

다 읽고 나서 오는 저릿한 감정은 말로 어찌 설명할 수 있을지. 오늘은 사랑하지만 내일은 모르겠다는 양희에게 난 반했다. 덤덤한 수준을 넘어선 부동(不動)의 관계가 내게 주는 떨림. 자신의 청춘을 바친 기업에 팽()당한 뒤 살아가는 필용, 그는 다른 메뉴로 바뀌지 않고 사라져 버린 피시버거인가. 어제도 내일도 아닌 오늘은 그냥살고 있는 양희의 모습은 비웃질 않는 나무 그 자체 같다. 삶을 마주하는 자세는 서로 다르지만 삶을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은 한낮을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모습과 닮았다. 그런데 문득 조중균이 생각나는 건 왜일까.


돌아가는 길에 필용은 맥도날드에 더 이상 피시버거가 없다는 사실에 대해 생각했다. 다른 것으로 대체되지 않고 아예 사라져버린 그 메뉴란 것에 대해. 만약 피시버거가 사라지지 않고 뭔가 비슷한 것으로 바뀌었다면 불쾌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아주 결연하게 사라졌단 말이지. 이제 맛볼 수조차 없게 아주 그냥 끝. 다신 맛 못 봐, , 끝이야, 아주 없어, 이렇게. A가 유사한 A'B가 된 것이 아니라 AA인 채로 사라져버렸다는 건 햄버거 같은 정크 푸드의 역사에서도 아주 비장한 신이었다. (11)


필용과 양희는 성격이 전혀 달랐다. 필용이 앞으로 펼쳐질 인생, 그 과정에서 반드시 이겨내야 할 어려움,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고 나서야 갖게 될 성취와 인정에 대해 상상하며 지냈다면 양희에게는 그런 것이 없었다. 양희에게는 현재라는 것만 있었다. 하지만 그 현재는 지금 생생하게, 운동감 있게 펼쳐지는 상태가 아니라 안개처럼 부옇게, 분명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게 풀풀 흩어지는 것에 가까웠다. 뭔가 생활 자체가 그랬다. (15-16)


사랑한다며?”

, 사랑하죠.”

그런데 내일은 어떨지 몰라?”

.”

사랑하는 건 맞잖아. 그렇잖아.”

, 그래요.”

내일은?”

모르겠어요.” (22)


선배, 사과 같은 거 하지 말고 그냥 이런 나무 같은 거나 봐요.”

양희가 돌아서서 동네 어귀의 나무를 가리켰다. 거대한 느티나무였다. 수피가 벗겨지고 벗겨져 저렇게 한없이 벗겨져도 더 벗겨질 수피가 있다는 게 새삼스러운 느티나무였다.

언제 봐도 나무 앞에서는 부끄럽질 않으니까, 비웃질 않으니까 나무나 보라구요.”

필용은 양희 뒤에 서서 양희에게로 손을 뻗어보았다. 닿지는 않았다. 앞으로 한 걸음만 더 옮기면 손이 닿을 수도 있었지만 필용은 그러지 않았다. 자신의 얼굴이 간절함으로, 연민과 구애의 감정이 뒤엉킨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다는 걸, 자기 자신만은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필용은 말없이 르망에 올라탔다. 문산까지 오는 동안 필용이 전율했던 사랑은 사라지고 없었다. 아주 뻥 뚫린 것처럼 없어지고 말았다. 필용은 울었다. 울면서 무엇으로 대체되지도 좀 다르게 변형되지도 않고 무언가가 아주 사라져버릴 수 있음을 완전히 이해했다. 적어도 그 순간에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38)


시간이 지나도 어떤 것은 아주 없음이 되는 게 아니라 있지 않음의 상태로 잠겨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남았다. 하지만 그건 실제일까. 필용은 가로수 밑에 서서 코를 팽 하고 풀었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뭔가가 바뀌었을까. 바뀌면 얼마나 바뀔 수 있었을까. 가로수는 잎을 다 떨구고 서서 겨울을 견디고 있었다. 필용은 오래 울고 난 사람의 아득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 질문들을 하기에 여기는 너무 한낮이 아닌가, 생각하면서. 정오가 넘은 지금은 환하고 환해서 감당할 수조차 없이 환한 한낮이었다. (43)


3. 정용준, 선릉 산책

 

대성당같은 엔딩은 현실에 없다. 잠시나마 한두운을 이해했다고 여겼던 착각은 정해진 시간이 넘어서자 무너진다. 장애를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은 오만이 아닐까. 그랬기에 결말은 모르겠다.”의 연속일 뿐.

 

4. 장강명, 알바생 자르기

 

문득 채만식의 치숙을 생각했다. 전적으로 은영의 시점에서 서술되고 있기 때문에 작가노트에 나온 것처럼 “‘교활한 서민층 어린애한테 걸려 고생하는 착한 중산층 여자 이야기냐’”고 읽을 수 있겠지만, 현실을 생각해 보면 은영은 치숙만큼이나 신빙성 없는 화자다. 전체 구조에서는 을이지만 자기보다 못한 병의 입장인 혜미(대화체를 제외하면 그녀는 항상 이름이 아닌 여자아이로 불린다)에게 하는 행동은 유사-갑질과 다르지 않다. 더한 것은, 은영 부부가 그런 바닥에서는 우리가 더 약자라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어떻게든 퇴직금과 4대 보험료를 받으려 하고, “어시스턴트가 아닌 어드미니스트레이터로 기록된 서류를 받기 위해 따지는 혜미를 욕할 수 있을까. 단지 밀린 월급을 달라고 했을 뿐인데 동전 더미를 던져주는 현실에서, 혜미는 자기 나름의 생존법을 배운 것뿐이다. 사장과 은영의 입장에서 싹싹하지도 않고 나서서 일하지도 않는 혜미가 못마땅했겠지만, 이런 시각은 알바생들을 양산한 구조를 은폐하고 감춘다. 그런데 이 작품을 은영의 시점으로 풀어낸 건 그동안의 장편에서 보였던 작가의 중립적인 시선과 관련이 있는 걸까.


-그건 자기도 몰랐잖아.

-?

-걔 불쌍하다고, 잘 봐주려고 했었잖아. 가난하고 머리가 나빠 보이니까 착하고 약한 피해자일 거라고 생각하고 얕잡아 봤던 거지.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거든. 걔도 알바를 열 몇 개나 했다며. 그 바닥에서 어떻게 싸우고 버텨야 하는지, 걔도 나름대로 경륜이 있고 요령이 있는 거지. 어떻게 보면 그런 바닥에서는 우리가 더 약자야. 자기나 나나, 월급 떼먹는 주유소 사장님이랑 멱살잡이해본 적 없잖아? (170)


6. 최정화, 인터뷰

 

그를 나락으로 가라앉혔던 인터뷰의 원본. 항상 불안에 사로잡혀 있는 그는 어느 호프집에서 인터뷰의 사본을 각색해본다. 한 남성의 허위와 위선, 그리고 불안. 그를 이해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단둘이 남게 되자 나타나는 공감의 결여. 그리고 이를 간파한 남자의 불안이 또다른 사본을 만든다. “아니, 남자였습니다.” 하고.


최정화의 소설 속에서 인간은 내면과 사유가 결여된 공허한 존재이다. 그들은 정합성 없는 사회(언론)를 신봉하고, 타인들의 환심을 사는 데만 신경을 곤두세운다. 키르케고르는 불안이 실존의 전제조건이 된다고 했지만, 최정화가 그려낸 불안한 현대인들에게는 개심이나 구원의 여지가 남아 있지 않다. 이런 회의주의로 말미암아 최정화는 이전 시대의 대표적 작가들과 구별된다. (261)


7. 오한기, 납치

납치라는 모티프가 작품 내용과 상관없이 계속 반복되면서, 떠올린 모티프를 소설로 만드는 데 실패한 작가의 ()일상사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의 클린트 이스트우드이후 두 번째인데, 전에 읽은 게 더 나은 것 같다. 왜 그의 소설 속 화자는 모두 (실패한) 소설가들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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