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평점 :
절판


1. 채식주의자


첫인상을 요약하자면, 피가 한 줌 흩뿌려진 '내 여자의 열매' 같았다. 이 작품의 초점은 갑작스럽게 육식을 중단한 '나'의 아내, 영혜에게 집중되어 있다. 왜 그녀는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했는가. 꿈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나오지만, 그것은 육식으로 대표되는 동물성을 거부하겠다는 한 동물의 몸부림처럼 보인다. 이 세계는 살아남기 위해서 반드시 육식을 해야 한다고 인간에게 강요하는, 그런 세계다. 그리고 인간들은 그것이 정언 명령인 양 육식의 논리, 즉 동물성의 규칙을 지키며 살아간다. 육식의 논리는 잡아먹는 자와 먹히는 자의 상하 관계를 생산하고, 이를 거부하는 영혜는 채식주의자, 라는 이름으로 규정되어 핍박받는다. 그렇다면 영혜는 정말 채식주의자인가. 영혜는 소위 건강을 위해서나 동물을 보호하기 위해 채식을 하는 채식주의자와는 다르다. 그녀가 채식을 하는 것은 잔혹함과 폭력성을 품고 있는 동물성 자체에 대한 거부이기 때문이다. 이런 채식으로의 변화에는 어린 시절 겪었던, 개에 대한 폭력의 경험이 자리하고 있다.


"네 꼴을 봐라, 지금. 네가 고기를 안 먹으면, 세상사람들이 널 죄다 잡아먹는 거다. 거울 좀 봐라, 네 얼굴이 어떤가 보란 말이다." (60쪽)


하지만 인간은 이 세계의 질서를 거부하는 자를 가만두지 않고 잡아먹으며 살아왔다. 아니, 생존해왔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그것이 약육강식이라는 논리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이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고기를 먹이려던 장인의 몸부림은, 자신의 혈육을 이 세계에서 살아남도록 하려는 어떤 보호본능과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이미 동물의 삶을 거부하기 시작한 영혜에게, 그것은 죽음과도 같은 것이다. 결말부에서 밖으로 나와 환자복 상의를 벗고 있는 영혜의 모습은 광합성을 연상시키는데, 이는 그녀가 단순히 동물성을 거부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식물성을 지향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다만 의문이 드는 것은, 왜 그녀가 동박새를 물어뜯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동물성의 폭력에 대한 작은 저항일까.


2. 몽고반점


이 소설 전체를 지배하는 키워드는 탐미와 관능인 것 같다. 여기에서 초점은 영혜의 형부인 '그'에게로 옮겨간다. 비디오 아트를 제작하는 그는 오로지 대상의 이미지를 탐(구)하는 사람으로 보인다. 그런 그를 사로잡은 몽고반점의 이미지, 그리고 영혜의 이미지는 그에게 끝없는 창작과 소유의 욕구를 불러 일으키는데, 그의 동물적 욕망을 들끓게 하는 것이 다름아닌 영혜의 식물성이라는 것은 참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식물성의 이미지는 바로 몽고반점, 성년에 이른 어떤 동물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몽고반점으로 집약된다. 


반점은 과연 엄지손가락만한 크기로 왼쪽 엉덩이 윗부분에 찍혀 있었다. 어떻게 저런 것이 저곳에 남아 있는 것일까.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약간 멍이 든 듯도 한, 연한 초록빛의, 분명한 몽고반점이었다. 그것이 태고의 것, 진화 전의 것, 혹은 광합성의 흔적 같은 것을 연상시킨다는 것을, 뜻밖에도 성적인 느낌과는 무관하며 오히려 식물적인 무엇으로 느껴진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 (101쪽)


아마 그의 욕망은 자신과 전혀 다른 어떤 대상에 대한 호기심과 소유욕, 더 나아가면 파괴의 욕구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나체의 몸에 꽃을 그린 영혜를 탐하고 취하는 것은 자신과 다른 대상의 이미지를 취하고자 하는 동물의 욕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정말 하고 싶었어요...... 그렇게 하고 싶었던 적이 없었어. 그 사람 몸에 뒤덮인 꽃이요...... 그게 날 못 견디게 했던 거야. 그것뿐이에요." (131쪽)


영혜는 이제 동물성을 거부하는 것에서 나아가 식물성을 지향한다. 그리고 자신의 본질과 전혀 다른 식물성에 대한 지향은 식물성을 탐닉하는 것으로 변하는데, 몸에 꽃을 그리고 온 형부와의 결합을 허락한 것은 식물성의 이미지를 욕망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는 그녀의 식물성을 소유하기 위해 자신에게 식물성의 이미지를 덧씌우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모습을 본 다른 사람들은 "안돼 보여. 온몸에 꽃을 그려놓은 형 모습이......"(137쪽)와 같은 반응을 보이고, 식물성의 이미지를 욕망하는 것조차 불허한다. 식물성을 탐했던 인간은, 정신병원으로 끌려가 동물성의 법칙을 주입받고 교정되어야 할 대상일 뿐이다.


읽으면서 그가 찍고 싶어했던 남녀의 교합으로 점철된 '몽고반점 2'는 절대 찍힐 수 없을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그래서인지 뒷부분을 읽으면서 뜨악했던 순간이 있었다. '몽고반점 2'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굉장히 관능적으로, 때로는 퇴폐적인 모습으로 그려지기까지 한다. 자신이 욕망하고 소유하고자 하는 자기파괴적인 충동이 인상적이기도 하면서, 어쩌면 그것 역시 동물성의 한 면모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이 단편의 흐름과 상관없이, 표현의 자유에 대한 최근의 이슈가 잠시 떠오르기도 했다. 난 예술에 있어서는 표현의 자유에 제한을 두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쪽이지만, 분명히 많은 고민과 논의가 필요한 지점이긴 하다. 이미 그 논의는 확산되지 못하고 수렴되어 버렸지만...


그때까지 그는 자신이 사회적 이슈에 대한 작품으로 화를 겪을 수는 있으리라는 상상은 해본 적이 있었지만, 음란물을 제작한 자로 낙인찍힐 수 있다는 생각은 미처 해보지 못했다. 작품을 만들며 그는 언제나 자유로웠으므로, 자신에게 무한정의 자유가 허락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조차 실감한 적이 없었다. (75쪽)


3. 나무 불꽃


제목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보진 않았는데, 지금 쓰면서 떠오르는 이미지는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타오르는 불꽃이다. 인간이라는 종이 나무로 대표되는 식물을 파괴하는 불로 인해 이 세계에서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을 표상하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들고... 작품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이제 동물이 아니야 언니.

중대한 비밀을 털어놓는 듯, 아무도 없는 병실을 살피며 영혜는 말했다.

밥 같은 거 안 먹어도 돼. 살 수 있어. 햇빛만 있으면.

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정말 나무라도 되었다고 생각하는 거야? 식물이 어떻게 말을 하니. 어떻게 생각을 해.

영혜는 눈을 빛냈다. 불가사의한 미소가 영혜의 얼굴을 환하게 밝혔다.

언니 말이 맞아...... 이제 곧, 말도 생각도 모두 사라질 거야. 금방이야.

영혜는 큭큭, 웃음을 터뜨리고는 숨을 몰아쉬었다.

정말 금방이야. 조금만 기다려, 언니. (186-187쪽)


식물성의 이미지를 탐했던 영혜는 이제 식물이 되려 한다. 그러나 동물이 식물로 변하는 방법은, 죽음뿐이다. 그런 영혜를 바라보는 언니는 동물성의 세계에서 살아왔던 자신의 삶이 무너진 것을 느낀다. 그것은 어떤 질병의 형태로 오는데, 이 세계가 보았을 때 그것은 떼어내기만 하면 되는 폴립의 형태로 존재한다. 끝없이 식물이 되려는 영혜의 모습이 동물성의 세계에서 살아남고자 인내하면서 쌓여왔던 내면의 고통과 압박감을 수면 위로 드러내게 만들었다. 어떻게든 견뎌내고자 세계의 질서에 순종했던 그녀의 삶은 결국 죽은 것과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봄날 오후의 국철 승강장에 서서 죽음이 몇달 뒤로 다가와 있다고 느꼈을 때, 몸에서 끝없이 새어나오는 선혈이 그것을 증거한다고 믿었을 때 그녀는 이미 깨달았었다. 자신이 오래 전부터 죽어 있었다는 것을. 그녀의 고단한 삶은 연극이나 유령 같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그녀의 곁에 나란히 선 죽음의 얼굴은 마치 오래전에 잃었다가 돌아온 혈육처럼 낯익었다. (201쪽)


세계가 가하는 고통이 너무나 극심했던 어느 새벽, 아이의 젖내와 배냇내가 배어있는 보라색 면티셔츠마저 그녀에게 안도감을 주지 못했던 새벽에 그녀는 아파트 뒷산을 오르고, 그곳에서 고통과 두려움과 함게 '이상한 평화'를 느낀다. 그리고 새벽마다 빈 욕조 안에서 '캄캄한 숲이 덮쳐'오는 것을 본다. 그것은 동물적인, 그래서 폭력적인 세계에서 벗어나고 싶은 무의식적 욕망일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영혜처럼 이 세계를 거부할 용기가 없다. 그래서 그녀는 '어쩌면 꿈인지 몰라'라고 되뇌며 영혜를 병원으로 보내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이 연작소설을 매듭짓는 성과를 거두고 있긴 하지만, 세 편 중에선 가장 인상적이지 않았던 작품이었다. 한강스럽지 않았던 작품들 뒤에 갑자기 한강의 색채가 물씬 배어든 작품이 나온 것 같았다고나 할까... 세 작품 중 한강 특유의 서정성이 돋보여서 이질적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좀더 처절하지 못해서, 격렬하지 못해서 만족하지 못했나 싶기도 하고...


사실 오늘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혜의 언니와 같은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세계의 질서를, 동물적이어서 폭력적이고 잔혹한 그 질서를 차마 거부할 생각을 못하는 사람들. 거부하면 죽음의 길만이 드리워질 것을 알기에 그냥 생존하고 있는 사람들. 어쩌면 세계는 이미 저항할 수 없을 만큼 동물성 그 자체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식물의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이 필요한 것일까.


별점에 대해 굉장히 고민을 많이 했는데, '몽고반점'이 주었던 강렬한 인상을 생각해서 네 개를 매기기로 했다. 사실 '몽고반점'이 워낙 강렬해서 다른 두 작품의 빛이 바래지는 것 같기도 하다. '채식주의자'도 되게 선명한 작품인데도.. 지금까지 읽었던 한강의 작품(그래봤자 장편 두 권이지만)과 다른 면모가 보여서 인상적이었던, 그래서 궁금해지게 만든 작품이기도 하다. 앞으로 더 찾을 시간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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