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르진스키가 살았던 시대에, 사람들은 대체로 철학을 어떠한 실제적 중요성도 없는 것으로, 심지어는 대상조차 없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사실 어떤 시대에 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어떤 세계관을 가장 널리 받아들이고 있는가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그 세계관이 그 사회의 경제와 정치와 풍속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9쪽)

그는 카프카가 그리고 있는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 금방 알아차렸다. 수치심으로 얼룩진 그 슬로 모션의 세계, 존재와 존재가 별들 사이의 텅 빈 공간만큼이나 막막하고 허허로운 공간에서 마주치기만 할 뿐 그들 사이에 어떤 관계도 맺어질 수 없을 것 같은 세계, 그것은 바로 브뤼노의 정신 세계였다. 이 세계는 느리고 차가웠다. 그래도 따뜻한 것이 있기는 했다. 여자들의 두 다리 사이에 있는 게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거기에 도달할 수 없었다.
(68쪽)

과거를 회상하다 보면, 모든 게 다 그렇게 되도록 예정되어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기 쉽다. 십중팔구는 틀린 생각인데도 말이다.
(75쪽)

인간이 하나의 동물로서 자신의 개별적인 삶을 자각하는 것은 먼저 고통을 통해서다. 하지만 사회적인 존재로서 자신의 개별적인 삶을 완전하게 자각하는 것은 <거짓말>을 매개로 할 때이다. 개별적인 삶은 사실상 이 거짓말과 혼동될 수 있다. 아나벨은 열여섯 살 때까지 부모에게 숨기는 것이 없었다. 미셸에게도 비밀로 하는 것이 없었다(그것이 아주 드물고 소중한 일이었음을 그녀는 비로소 깨닫고 있었다). 그날 밤 아나벨은 몇 시간 만에 인간의 삶이 거짓말들의 끊임없는 연속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84-85쪽)

새벽녘에 갑자기 천둥이 치고 사나운 돌풍이 불었다. 그는 자기가 조금 겁을 먹고 있다는 사실에 매우 놀랐다. 이어서 천둥 소리가 잦아들고 비가 후드득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했다. 빗방울들이 텐트의 천을 투덕투덕 때리고 있었다. 얼굴 바로 위에서 소리가 들리는데, 그의 몸에는 빗방울이 닿지 않았다. 문득 자기 인생이 그 상황과 비슷하리라는 예감이 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앞으로 인간의 다양한 감정들 사이로 지나가게 될 것이다. 때로는 그것들이 아주 가까이에 있을 수도 있으리라. 다른 사람들은 행복을 느끼기도 하고 불행을 느끼기도 하겠지. 하지만 그 감정들 가운데 어떤 것도 나에게 닿거나 영향을 미치지는 못하리라.
(93쪽)

그의 세계관은 대속이나 은총 같은 기독교의 개념과도 거리가 멀었고 자유나 용서와 같은 개념과도 무관했다. 그의 세계관은 기계적이고 비정한 성격을 띠고 있었다. 초기 조건이 주어지고 초기 상호작용의 네트워크에 매개 변수가 정해지면, 사건들은 인간의 마음과 무관한 텅 빈 공간에서 전개된다. 이 사건들이 결정론적인 성격을 띠는 것은 어찌할 수가 없다. 이미 일어난 일은 반드시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일이다. 그 밖의 가능성은 없었다. 그 일에 대해 누구도 책임질 수 없었다.
(97쪽)

사실, 육체적인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종교와 과학을 융합할 수 있다는 기대는 물거품이 되기 십상이고, 인간의 허영과 잔인성은 갈수록 심해질 수밖에 없지. 사랑이 작은 위안은 되겠지만, 그것도 희망이 될 수 없기는 마찬가지야.
(175쪽)

그는 오랜 세월에 걸쳐서 사람살이가 추잡하고 험악하다는 생각을 키워 온 바 있었다. 그가 보기에, 세상은 짐승들이 우글거리는 하나의 싸움터였다. 이 짐승들은 견고한 우리에 갇혀 더 넓은 지평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그 지평은 분명히 지각할 수는 있으나 도달할 수는 없다. 그 지평의 다른 이름은 도덕률이다. 하지만 혹자는 말한다. 사랑에 도덕률이 포함되어 있고, 사랑을 통해 도덕률이 구현된다고 말이다.
(222쪽)

인간의 행위가, 특히 개인의 정치적 행동이 이성에 따라 자유롭게 결정된다는 믿음이야말로 민주주의의 토대다. 하지만 이 믿음은 아마도 자유와 예측 불가능성을 혼동한 결과일 것이다. 강물이 흘러가다가 교각 주위에 다다르면 소용돌이를 일으킨다. 이 강물의 소용돌이는 구조적으로 예측이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해서 이 소용돌이를 놓고 <자유롭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244쪽)

인생은 혼미하고 긴 우수(憂愁)의 시간대로 점철되어 있다. 사람들은 인생의 대부분을 맥이 빠진 채로 보낸다. 그러다 보면 어느 날 갑자기 갈림길이 나타난다. 이 갈림길에서 어느 쪽을 선택하든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고 만다.
(267쪽)

현대인들의 의식은 언젠가는 죽게 마련인 인간 조건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오늘날 사람들은 아주 오래오래 줄기차게 자기들 나이에 대해서 생각한다. 일찍이 어떤 시대, 어떤 문명에서도 나이에 대한 생각이 이토록 집요했던 적은 없다. 현대인들 각자의 머릿속에는 미래에 대한 한 가지 단순한 전망이 들어 있다. 자기의 남아 있는 삶에서 기대할 수 있는 육체저 쾌락의 총량이 고통의 총량을 밑도는 때가 오리라는 전망 말이다. 사람에 따라 이르거나 늦거나 하는 차이는 있지만, 현대인들은 누구나 자기에게 남아 있는 쾌락과 고통의 양을 비교하는 때를 맞게 된다. 인생의 어느 고비부터 이런 성찰은 자살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267쪽)

현대인들의 특성을 잘 보여 주는 예가 하나 더 있다. 사람들에게 물어 보라. 만일 폭탄 테러를 당하게 된다면 자기가 어떻게 되기를 바라느냐고.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팔다리가 잘리거나 얼굴이 흉해지기보다는 그 자리에서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 이유는 뭘까? 그들이 삶에 조금 지쳐 있다는 것도 물론 한 가지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주된 이유는 불구가 되거나 몸의 기능을 잃고 살아가는 것이 죽음을 포함한 그 어떤 것보다도 끔찍해 보인다는 것이다.
(268쪽)

어떤 사람들을 몇 년 동안, 때로는 몇십 년 동안 자주 만나다 보면, 개인적인 문제나 정말 중요한 화제를 회피하는 것이 서서히 버릇처럼 되어 간다. 그러면서도 언젠가 더 좋은 기회가 오면 그런 것들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으리라는 전망은 끝없이 뒤로 미루어지지만 결코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것이 사라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떤 인간관계도 좁고 고정된 틀에 완전히 매여 있는 것은 아니기 대문이다. 결국 사람들은 <진정한> 인간관계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는다. 그 기대는 몇 년동안, 때로는 몇십 년 동안 유지된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어떤 결정적인 사건(대개는 죽음이라는 사건)이 일어나서 이미 때가 너무 늦었음을 일깨워 준다. 우리가 품었던 <진정한> 인간관계에 대한 기대가 실현되지 않았음을 말이다.
(288쪽)

유머는 사람을 구하지 못합니다. 따지고 보면 거의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죠. 유머를 가지고 인생사를 대하는 게 몇 년 동안은 가능할 겁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죽음이 임박하는 순간까지 유머를 잃지 않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결국 인생은 사람의 마음을 부숴 버립니다. 평생에 거쳐 용기나 침착함이나 유머 같은 특성을 키워 왔다고 해도 마지막 순간이 되면 마음이 허물어지고 말죠. 그러면 사람들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가십니다. 결국 남는 것은 고독과 추위와 침묵뿐입니다. 종당엔 그저 죽음이 있을 뿐이죠.
(3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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