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개인의 운명을 바꾸었느니, 전쟁이 기성 질서와 생활 감정을 어쨌느니, 전쟁이 무엇을 무엇했느니, 그래 전쟁이 없었다면 네가 운동의 네번째 법칙을 발견할 것을 못 했단 말인가. (...) 전쟁이 저를 이렇게 만들었어요. 당치도 않은 피해망상을 실습해보는 갈보의 센티멘틀리즘, 거짓의 무리들이여 열세 번이나 지옥으로 가라. 만일 그대들의 말이 옳다면 나의 옆에 다소곳이 앉은 이 여자의 눈이 보여주는, 저 순결성을 어떻게 풀이할 것인가. 그녀도 분명 전쟁을 나라 안에서 겪은 바에는. 전쟁은 게으른 자와 음탕한 자들에게만 핑계를 주었다. 그뿐.
(164쪽)

숱하게 터져나가던 포탄들의 숫자를 그 자신의 인간 수업의 수입란에다 염치 없이 적어넣었었다. 숯덩이처럼 나동그라져 구르던 주검이며, 동강난 팔이며 다리들을 그 자신의 수난으로 셈한 데 잘못이 있었다. 피를 부르며 부서지던 그 포탄들은 장군의 전황 지도에 필경 가장 관계 깊은 사실이었고, 동강난 팔과 다리는 `남`의 팔 `남`의 다리였지, `그`의 팔 `그`의 다리가 아니었다는 지극히 당연한 진실을 느지막이나마 깨닫고야 말았다. 그의 팔다리는 여전히 붙은 자리에 붙은 채 전쟁은 끝났던 게 아닌가. 그는 아무것도 잃지 않은 채 전쟁을 치른 것이다. 이 시대에 살 수 있는 세금을 치르지 못했을 뿐더러, 부듯해졌다고 생각했던 몸의 밀도는 바늘 끝으로 살짝 건드리면 소리만 요란스럽게 터지고 말 저 풍선의 밀도마냥 얄팍한 거짓이었다. 퇴역 후 의젓한 긍정의 기분에 싸일 수 있었다는 것도, 남들은 눈알을 뽑히고 다리를 날려보낸 그 끔찍한 도살장에서, 말끔한 몸으로 살아났다는 사실에서만 가능한 일이 아니었던가. 긍정이라느니 차라리 까불싸한 맛조차 있었던 퇴역 직후의 그의 마음, 계집애들 분홍 손수건마냥 반지레하던 그 느긋함 속에는,

남의 주검을 발돋움삼아서 죽음의 골짜기를 빠져나온 자기 겸연쩍음을 얼버무리려고 자기를 속이는 빛은 없었던가.
(173-174쪽)

거울 속에는 쫓기는 사람의 초조함을 숨기느라고 짐짓 평정을 꾸민 가짜 성자의 탈이 있었다. 신의 창조에 들러리 선 사람만이 가질 만한 자신을 꾸민 눈, 바로 그것을 어기고 있는 입의 선. 탈의 데생은 위태로워 어느 선 하나 차분함이 없다. 양식의 모방에 과장된 필체로 그려진 서투른 초상화였다. 저 탈을 피가 흐르도록 잡아 벗겼으면. 그 뒤에는 깨끗하고 탄력 있는 살갗으로 싸인 얼굴이 분명 감춰진 것을 알고 있다.
(175쪽)

이 사랑이란 불씨는, 사람들이 어쩌지 못할 죽음의 냉기를 막기 위하여 만들어낸, 인간 자신의 재산이다. 온대에 사는 신의 나라에 사랑이 있었을 리 없다. 삶을 을러대 추위 속에서 태어난 인간의 발명품이다. 사랑이 아무리 불타도, 눈이 닿는 곳까지 허허한 얼음 벌판의 추위를 막을 수는 없었을 게다. 그러나 사람들은 태우고 또 태웠다. 지구의 양 꼭지에만 남기고 대부분의 땅을 녹여버린 것은, 그 얼마나 많은 세월을 사람들이 태워온 사랑의 열매일까.
(200쪽)

그러나 지구는 또다시 얼어붙기 시작했다. 이 눈에 보이지 않는 얼음은 더욱 차갑다. 눈에 보이지 않는 탓으로 우리는 옛사람들보다 불씨를 허술히 다룬다. 휘몷아치는 바람 속에, 깊은 얼음구멍 속에, 우리의 불씨를 빠뜨렸을 때, 우리는 얼어죽는다. 춥다. 현대는 정말 춥다. 혼자서는 불을 못 피운다. 바람을 막으며 손바닥만한 얼음 위에 불을 피우려면 두 사람이어야 한다.
(200-201쪽)

민은 한 발도 움직이기는커녕 손의 자리도 바꾸지 못했다. 만일 자기가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그녀의 균형이 무너질 것 같았다. 자꾸 머리가 어지러워온다. 자기만 `사람`이고 다른 사람은 인형으로 알고 살아오던 사람이, 처음으로 또 다른 자기 밖의 `사람`을 발견한 현장에서 느끼는 멀미였다. 사막과 인형들을 상대로 저 혼자만의 독백을 노래하며, 포탄에 찢어진 `남의 팔다리`를 가로채면서 살아온 자에게는, 지금 테라스 위에서 맞서오는 `사람`의 모습은 어지러웠다. `사람`이란 이렇게 무서운 것......
(249-2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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