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기증.감정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23
W. G. 제발트 지음, 배수아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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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주(Hommage), 라는 단어가 책을 읽는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오마주는 원래 영화에서 존경의 표시로 다른 작품의 주요 장면이나 대사를 인용하는 것을 이르는 용어다.(네이버 백과사전) 명백하게 말하자면 제발트의 <현기증. 감정들>은 오마주라고 부르기는 어려울 테지만, 이 소설의 모습을 내가 설명할 수 있는 단어는 오마주라는 단어뿐이었다. 언어 수준의 빈약함이란...

 

소설은 분명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다. 굉장히 집중해서 작가가 어딘가 슬쩍 집어넣었을 카프카의 그림자를 찾고 그것을 추적해야 작품의 묘미를 알 수 있다. 작품 곳곳에는 카프카의 단편 '사냥꾼 그라쿠스'의 변주가 숨겨져 있는데, 세 번째 장인 ‘K 박사의 리바 온천 여행’ 에 줄거리가 나와 있지만(일곱 쪽밖에 되지 않는 짧은 단편이므로 거의 모든 내용을 다루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단편을 먼저 읽고 보는 것이 작품을 읽는 데 훨씬 도움이 된다. 실제로 책을 읽다가 도중에 '사냥꾼 그라쿠스'를 읽은 뒤, 다시 앞부분을 읽으면서 아, 하고 깨달았던 순간이 있었으므로.

 

리바의 부둣가에는 이른 시간임에도 두 소년이 벌써 나와 앉아서 주사위놀이를 하고 있었다. 벨은 마담 게라르디에게 육중한 낡은 배 한 척을 가리켜 보였다. 돛대는 위에서 삼분의 일 정도 지점에서 부서졌으며 누렇게 변색된 돛은 다 찢어져 너덜거렸다. 그 배는 아마도 방금 부두에 도착한 듯이 보였는데, 은색 단추가 달린 검은 옷차림의 두 남자가 들것 하나를 배에서 육지로 운반해내는 중이었다. 들것은 보풀이 인 커다란 꽃무늬 비단천으로 덮여 있었고, 그 아래에는 사람이 누워 있는 것이 확실했다. 그 장면을 목격한 마담 게라르디는 기분이 좋지 않아 그 자리에서 당장 리바를 떠나자고 말했다.

- '벨, 또는 사랑에 대한 기묘한 사실' (27p)

두 소년이 방파제 위에 앉아 주사위 놀이를 하고 있었다. (...) 푸른 작업복을 입은 한 남자가 상륙하여 밧줄을 고리에 걸어 당겼다. 은단추가 걸린 검정 저고리 차림의 다른 두 남자들이 사공 뒤에서 들것을 들고 들어오는데, 그 위에는 꽃무늬에 술이 달린 큰 비단보에 덮여 분명 한 사람이 누워 있었다.

- 이주동 옮김, '사냥꾼 그라쿠스',『카프카 전집 1 - 변신』, 솔출판사

 

소설은 스탕달의 전기를 다룬 첫 번째 장, 1980년과 1987년 화자가 이탈리아를 여행한 일을 다룬 두 번째 장, 카프카가 1913년 이탈리아 여행을 떠난 시기를 다룬 세 번째 장, 그리고 이탈리아에서 자신의 고향 W로 돌아와 유년 시절을 회상하는 네 번째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홀수 장은 실존 인물들의 이탈리아 여행을 다루고 있어 짧고, 짝수 장은 분량이 길어 '약-강-약-강'과 같은 모습을 띠는데, 곳곳에 카프카의 그림자가 배어있음을 알 수 있다. 화자(제발트 본인일 거라고 추측되는)의 이탈리아 여행 역시 카프카의 이탈리아 여행의 궤적을 밟고 있으며, 곳곳에 등장하는 그라쿠스의 변주들은 너무 많아 다 적을 수도 없다. 내가 읽으면서 느꼈던 점은, 스탕달-카프카-제발트의 모습이 굉장히 닮아서, 그들의 모습이 하나로 겹쳐지는 것 같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고독하고, 현실과 미지의 세계를 오가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곳곳에 나타나는 그라쿠스의 환영은 이런 겹쳐짐을 더욱 극대화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런 수많은 접점들을 통해 제발트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우리가 알다시피, 사실과 기억은 전혀 다르다. 벨 스스로도, 설사 직접 체험한 일에 대한 생생한 기억의 장면이라 할지라도 그 신뢰도는 현저히 낮을 수밖에 없다고 썼다.'(12p)라고 나와있듯, 사실과 기억 사이에서 떠도는 더없이 초라한 존재의 모습이었을까.

 

작품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역시 현기증과 감정들이다. 화자는 놀라울 만큼 해박한 지식으로 장면을 생생하게 기록하다가도, 불현듯 찾아오는 현기증과 감정들로 인해 미지의 경계를 떠돈다. 문제는 이렇게 현실과 미지를 왔다갔다하는 과정에서 점차 네 개의 장의 인물들이 하나로 겹쳐진다는 것이다. 마치 장자의 호접지몽처럼. (그라쿠스 역시 죽었지만 생과 사를 떠돌게 되었다는 점에서 같이 묶을 수 있겠다) 이런 점에서 봤을 때 스탕달과 카프카의 이탈리아 여행에 대한 충실한 기록으로 보이는 1장과 3장 역시 화자에 의해 변형되었을 것이라는 의심을 피할 수 없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사실과 기억은 전혀 다르므로.

 

이 소설은 어렵다. 문장에 담긴 단어들을 하나하나 꼼꼼히 읽어야 그 의미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정도이다. 나 역시 이 작품을 온전히 이해했다고 말하지는 못하겠다. 스탕달과 화자의 연결성에 대한 확신이 아직도 없으므로...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이제까지의 소설들과는 분명히 다른 지역을 개척했다고 볼 수 있다는 것, 현기증이라는 경계 사이에서 떠도는 화자와 인물들의 모습에서 어느 순간 그 겹쳐짐에 감탄하는 순간이 오리라는 것. 자신도 모르게 그라쿠스-카프카-제발트로 연결되는 지점을 찾게 되리라는 것. 내가 이 소설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부분은 그 정도인 듯하다.

 

덧 ) 번역의 문제는 여러모로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 역자 해설에 붙은 말처럼 '제발트적 울림'을 줄어들게 하지 않게 하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직역한 것 같이 갑작스럽게 삽입되는 문장, 띄어쓰기와 오탈자는 지적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해설을 독자가 제발트를 어느 정도 알 것이라는 전제하에 쓰는 것도 마음에 안 들었다. 이 작품이 제발트의 첫 소설인만큼 제발트를 이 책으로 처음 접하는 독자들이 많을 텐데, 이런 식으로 해설을 쓰면 안 되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독일어로 읽으면 좀더 제발트의 아름다움을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럴 일은 아마도 내겐 없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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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윗듀 2015-08-21 1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진짜. 이 책 언제 읽지. ㅋㅋㅋ

아무 2015-08-21 19:19   좋아요 0 | URL
3일만 투자하시면 됩니다 ㅎㅎ.... 오랜만에 보물찾기하는 느낌이 들었던 책.. 덕분에 카프카 전집까지 찾아보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