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책방 순례/ 문화서점

문화서점(02-374-3383). 서대문구 남가좌동 197-13. 주인 양원석(1951년생).
헌책방은 정거장이라 생각해요. 책은 임자한테 가야한다는 게 지론이죠. 보다시피 시나 소설 같은 단행본이 대부분이고, 학술 관련 서적도 대부분 개론서들이죠. 좋은 책은 바로바로 나가고 그렇지 않은 것들만 남았기 때문이지요. 30년 되풀이된 들고남이 좁은 공간에 고였으니 세월의 기울기가 더 뚜렷하지요.


좋은 책을 집에 가져다 두었느냐고요? 아녜요. 그럴 만한 책이 나오지도 않고요, 그런 욕심도 없어요. 물론 젊었을 때는 달랐죠. 집으로 찾아온 손님들과 술을 마시다가 손님이 조르면 그냥 넘기곤 했어요. 한번은 신석정 시인 사촌 집에서 엽서 100여장이 나왔는데, 문인들끼리 교류한 것들이더라구요. 두루마리 편지도 있고 원고들도 있었어요. 황순구 교수라고 알죠? 그 양반이 그걸 알고는 사흘 내리 찾아와서 달라고 조르더군요. 그래서 넘기고 말았지요. 이효석의 엽서 한장은 기념으로 두고보려 했는데 그것마저 다 쓸어가버려 지금도 섭섭해요.
하동호 선생 있죠? 그 분은 성산동 살 때 자주 왔는데 눈이 안 보이면서도 책을 샀어요. 나더러 서문과 뒷장 서지사항을 읽어달라고 해서 살지말지를 결정했어요. 책값을 한번도 깎지 않았지요. 그리고 같은 책은 아무리 귀한 것이어도 두 권을 사지 않았어요. 그러면 장사꾼이 된다는 거죠. 물론 상태가 좋은 것과 바꾸는 경우는 있었지만….


총각 때 연세대 앞에서 ‘구루마’ 장사를 했어요. 밤 10시에 도서관에서 나오는 학생들을 상대로 책 외상을 놨지요. 다음 날 대부분 책값을 가져왔어요. 장부는 따로 없었구요. 그러다 74년에 여기에 자리잡았어요. 76년에 결혼해서 77년, 79년 아들 둘을 낳았어요. 큰 애가 문창과를 나와 출판사에 취직했고 둘째는 1학기를 남겨두었으니 헌책방해서 아이들을 키운 셈이죠. 전에는 아내와 아들이 도와줘 연희동 연남동 수색까지 책을 거뒀는데 요즘은 혼자서 하기 때문에 오전에 오토바이로 근처 고물상을 돌 뿐이에요. 12시께 문을 열어 밤 10시까지 해요.


 근래에는 인터넷 책거래가 늘고 나오는 양도 줄어 그전만은 못해요. 특히 아이엠에프가 큰 원인이에요. 그때 책을 덜 사기 시작했기 때문에 지금 헌책방이 책가뭄이죠. 그런데다 황학동 사람들이 고물상에서 싹 쓸어가요. 책, 옷, 신발 할 것 없이 조금 이상하다 싶은 것은 다 쓸어가요. 심지어 고물행상들한테까지 명함을 돌려요. 그러니 변두리 헌책방이 다 죽죠.

 헌책방 한 것 후회 안 해요. 헌책방 안 했으면 좋은 사람들을 어떻게 만날 수 있었겠어요. 다만 앞으로가 문제죠 뭐. 더위가 끝나면 살기 위한 몸부림을 한번 쳐볼랍니다. 그러다 안되면 접어야죠. 옛날 공씨책방 하던 공진석씨가 체계적으로 참 잘 했어요. 그만치는 못해도 좀 잘했으면 좋겠는데…. 그 양반 술 참 좋아했어요. 4홉들이 소주에 라면땅 안주 놓고 함께 술먹은 기억이 나요. 혹시 기자 양반도 술 좋아하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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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촌헌책방(02-3141-5843)은 책이 많다. 북아현동 추계예술대 앞에서 신촌으로 옮겨올 때 1t 트럭 열네 대 분량이었다. 지금은 더 늘어 책방인지 창고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100권이 들어오면 20~30권이 팔린다는 주인 오응(64)씨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곳은 책방으로 시작해 창고로 변하는 중이다.


30평 넓이의 이곳은 사방벽과 책꽂이에서 넘쳐난 책들이 책꽂이 위에, 바닥에 마구 쌓여있다. 최소한의 손길만 주기로 한 것인가, 책의 쌓임도 되는대로다.   

이 책방은 신촌 버스정류장에서 동교동 쪽으로 10여m쯤에 난 골목으로 꺾어들면 바로다. 그러나 젊고 싱싱한 사람들이 북적이는 신촌로터리를 지나온 자한테는 진득하니 책등에 시선을 주기가 힘들다. 첨단 신상품의 집적장인 백화점을 거쳐왔다면 더욱 그럴 터이다.
백화점과 책방의 낙하공간에 존재하는 버스정류장은 책으로 향한 발길을 방해한다. 정류장은 이동의 시작점, 그 어름에서 볼 일이 끝난 사람들이 한 방향으로 시선을 주어 자신을 태워갈 버스를 기다리는 곳이다. 어디선가 다가올, 혹은 막 떠나가려는 기득권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무리진 사람들의 욕심덩어리를 헤쳐 지난다는 것이 영 어색하다.


상품의 현란함에 현혹된 눈은 이미 충분히 피로하여 2층 높이의 헌책방 간판에 시선을 주지 못한다. 거기다가 큰 길과 가까운 탓에 책방이 거리를 등지고 있음이 두드러진다. 그래서일 거다.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이 마치 흥신소나 전당포로 이어지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계단을 사이로 책방과 마주보는 복덕방이 낯설고, 그 낯섦은 책방에서 다시 한번 뒤집히면서 증폭된다.


주인 오씨는 하품을 뻑뻑하고 있었고, 젊은 동업자 김창수(48)씨는 넓은 창턱에 누워 있었다. 실내등 스위치를 올리자 어둠 속의 책들이 갑자기 소리쳤다. 그것은 아우성이었다.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그것은 소리없는 비명으로 바뀌었다. 그 와중에 <만화로 보는 그리스·로마신화>(가나출판사) 낱권, 오래된 <가면극>(이두현, 한국가면극연구회)이 눈에 들어왔을 뿐이다.


소중한 책을 보여달라자 비로소 주인은 불룩한 비닐봉지를 내왔다. 그 안에는 해방 직후에 나온 시집과 소설(<청록집> <나비와 바다> <포도> <목화씨 뿌릴 때>)과 잡지 창간호(<민주조선> <조선민중> <괴기>)가 들어 있었다. 100만원, 70만원, 50만원, 20만원…. 가격을 말하는 오씨의 표정은 점점 부풀었다. 채규엽의 에스피 음반 <순풍에 돛달고> <권농가>도 있다면서 목록을 보여주었으나 가격은 굳이 말하지 않았다. “집에는 이보다 더 쎈 것 3천권쯤 있는데 팔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결코 닿을 수 없는 가격 너머의 책 구경은 복이라기보다 기이함에 가까웠다.   
주인은 무더위에 힘겨운 땀을 흘렸고 책상에는 <된장의 달인들>(지오북)이 펼쳐진 채 엎어져 있었다.


 
한겨레신문 05. 8.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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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방 헌책음반 사고팔고’(02-824-8033)는 자기네가 무엇을 한다는 내용 자체가 이름이고 간판이다. 인터넷주소(www.oldbook8949.co.kr) 역시 그렇다. 그런 만큼 여주인 조화영(42)씨의 말은 직설적이다.
 “책방 하려는 분 있으면 찾아줘요. 등록한 책이 2만5천권, 모두해서 3만권 있어요. 권리금 3천만원, 책값 별도고요.” 5년 전의 기억으로 반갑게 맞아놓고 대뜸하는 말이다. “근데, 헌책방 책값은 주인 맘대로지요.” 덧말까지 감안하면 힘들다는 하소연인 셈.

강남중 정문 앞에 자리한 책방은 40평. 오른쪽 반은 도서관처럼 분야별로 정리된 온라인용, 왼쪽 반은 헌책방답게 대충 정리한 오프라인용이다. 주인은 오프라인 쪽에 컴퓨터를 두고 온라인 손님을 응대하다가 오프라인 손님이 오면 자판대화에서 입말대화로 모드를 전환했다.
남편이 ‘기름값도 못 건지면서’ 거둬온 책을 밤을 도와 분류하고, 낮동안 틈틈이 표지를 스캔하여 서지사항과 함께 입력한다. 밤은 밤대로 낮은 낮대로 쉴 틈이 없다. 책을 손질해 꽂아두고 팔 즈음에 서지와 가격을 매기면 그만이던 시절이 그립다.
 “인터넷이 사람을 각박하게 만들어요. 헌책방에 책을 파는 사람들이 리스트상의 값에 견줘 쳐달라고 해요. 책이 달리니 어쩔 수 없이 그런 값에 사게 돼요. 당연히 값이 비싸지죠. 전에는 헌책방 인심이 후했는데….”
서지가 사이트에 올라가는 즉시 책들은 온라인 공간으로 이동한다. 주목할 만한 책은 첫페이지에 표나게 올린다.

 “온라인 손님은 굉장히 민감해요. 좋은 책 올리면요~, 어떻게 알고 오는지 귀신 같아요.”
온라인은 달리는 자전거 같아서 계~속 책을 올려야 한다. 그러니 일에 치어산다. 책은 내용과 무관하게 제목과 서지, 그리고 무게로만 존재한다.
온라인 단골은 그들이 사는 책의 종류와 주문·배송 과정에서 직업과 성품을 짐작한다. 마침 주문이 들어온 책들을 포장하면서 “학교에 계시는 분 같다”고 말했다.
 “주문하고는 몇시간마다 전화를 하는 분도 있고요. 책을 받아보고는 생각과 다르다면서 물러달라는 분도 있어요.” 그래서 정해둔 원칙. 주문한 것과 다른 책을 보냈거나 책 상태를 설명하지 않았거나, 잘못의 책임이 책방에 있는 경우 외에는 반품이나 환불은 없다.


리스트에 오른 책을 찾지 못해 낭패인 때도 잦다. 온라인쪽 공간을 마냥 닫아둘 수는 없어 책손님한테 공개하면서 책을 보고 제 자리에 두라지만 잘 지켜지지 않는다.
 “주문한 책이 없잖아요? 그러면 화를 내는 분들이 많아요. 할 수 없죠 뭐. 사과하는 수밖에. 배송하면서 주문서에 사과메모와 더온 돈을 되돌려 보내요.” 큰 박스 귀퉁이를 적당히 갈라 척척 굽힌 뒤 테이핑하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쾅 소리에 깜짝 놀라 보니 가로로 쌓아둔 고서 여러 권이 전축 위에 떨어지는 소리였다. “에고, 우리집 재산 다 넘어가네.” 잠시 기자가 뒤적거리며 <일대의 유업>(염상섭, 을유문화사, 1960), <비정의 곡>(정비석, 삼중당, 1973) 등을 구경한 뒤끝이었다.
 
 
한겨레신문 05. 7.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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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고래서점’

고래서점은 세 군데다. 용산구 보광동 오산학교 부근, 숙대입구역(지하철 4호선) 근처, 그리고 인터넷 온라인. 이 가운데 보광동 것이 남순복(62)씨가 시작한 원조. 숙대입구역은 동생인 순운(52)씨의 새책방, 온라인은 아들이 4년 전 시작한 헌책방이다.


원조 보광동 고래서점(02-793-0039)은 지하철 6호선 이태원 역에서 한강 쪽으로 버스 두 정거장 거리, 0015번 종점 근처다. ‘그곳에서 좋은 책을 구했다’, ‘책값이 헐하다’는 입소문이 났다. 출판사를 했던 주인 남씨는 청계천을 거쳐 27년 전에 이곳에 정착했다.


주변에 책방이 없고 미국 이민자들의 책이 많이 나와 문전성시였다. 특히 값이 싸 학기 초면 학생들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하지만 요즘은 한산하다. 대부분의 학부모들이 새책을 선호하고 더럽다면서 아이한테 헌책을 만지지도 못하게 하는 축도 있다. “사람들이 올챙이적 생각을 못 해요.” 어쩌면 반대로 그가 옛 생각만 하는지도 모른다. 동아대백과사전이 천덕꾸러기로 쌓인 현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다.


책이 안 들어오는 걸까. 온라인 아들 책방으로 옮겨 갔을까. 소설과 수필 등 가벼운 읽을 거리 반, 중고교 참고서 반이다. “책이 나올 때 왕창 나오고 팔리기도 금세지요.” 그런 흔적인 듯 표지가 떨어져나간 딱지본과 40년대에 나온 대학교재가 숨어 있다. 크리스티앙 자크의 <람세스> 등 원서들과 김영승의 시집 <취객의 꿈> 등 시집이 많다.


남씨는 사회봉사라고 생각하면서 책장사를 했다면서 돈에 연연했다면 책방을 오래 하지 못했을 거라고 말했다. 요즘은 조금 후회된단다. 뭘 바라고 한 것은 아니어도 전세살이에다 몸이 망가져 마음조차 불편하다.
그러나 아들들이 정직하게 잘 자라줘 ‘가난한’ 아비의 마음은 부자다. 맏이가 연극배우 동진(34)씨, 둘째가 온라인으로 가업을 이은 동일(33)씨다.
동일씨는 제약회사의 일본지사에서 일하면서 그곳 헌책방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사회봉사라는 명분도 있고 사업성도 있다는 것이 그가 내린 결론이다. 그의 인터넷 책방(www.gorebook.co.kr)은 아버지의 상호를 땄고 전화 연락처도 아버지 거다. 자신은 의정부에 따로 40평 창고를 두고 아르바이트생을 써 하루 수백권의 책을 인터넷에 올리고 있다. 그전 수입에 못 미쳐도 책 가까이 있다는 것 자체가 즐겁다. 그래서 책이 있다면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달려간다.


“아직 걸음마예요. 10년 앞을 보면서 책을 갖추고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1년 뒤엔 창고를 넓혀야 한다. 국내에서 자리잡고 나면 중국과 일본에도 지점을 내고 싶다.
“아무리 인터넷을 통한 정보가 많아도 책을 통한 깊은 전문지식과 비교가 안 됩니다.” 그는 21세기에도 책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고엽제전우회 군복을 매장 한쪽에 걸어둔 아버지의 눈길이 착 가라앉은 반면, 책과 책방에 관해 얘기하는 아들의 전화 목소리는 무척 상기돼 있었다.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 / 한겨레신문 05. 6.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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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성서점’

종로구 혜화동에 자리잡은 혜성서점(02-741-0143). 문고판, 프랑스어 어린이책을 지나면 근자에 나온 헌책들이 꽂혔거나 쌓여 있다. 책들이 깔깔하다. ㄱ자 통로의 코너에 주인이 버티고 앉아 더이상 접근을 막는다. 들어올 때 한차례 눈길을 주었을 뿐 읽던 책으로 다시 옮겨간 주인의 시선은 완강하다. ‘도대체 읽는 책이 뭐기에.’

주인의 다리를 밀어내고 안쪽으로 들어가 낡은 책들을 보다가 문득 통로 끝 천장에 가까운 책꽂이에 꽂힌 시커먼 책이 눈에 들어왔다. <명주기봉> 하, <쌍천기봉> 중. 엥? 문화재관리국 장서각 귀중본 총서로 1978년, 79년에 200부 한정 영인한 궁체 한글본이다. 송·명대를 배경으로 귀족들의 남녀관계, 권력 암투를 다룬 ‘가문소설’. 궁중 또는 사대부 여인들이 주로 읽은 것으로 추정된다. 비슷한 <명주보월빙>, <윤하정삼문취록>과 <완월회맹연>은 활자본으로 풀어 펴낸 바 있으나 <명주기봉>과 <쌍천기봉>은 몇 차례 영인되었을 뿐이다. 일반인들한테는 부담스럽고 연구자가 한정돼 굳이 풀어쓸 필요 없는 축이다.


책 구경이 끝나서야 비로소 주인 전순인(67)씨와 눈이 마주쳤다. 혜화동 안국동 충신동 명륜동 성북동 등이 혜성서점의 관할구역. 유서깊은 동네들인데다 작가 문인이 많이 살아 쏠쏠한 책들이 많이 ‘나왔다’고 말했다.
“문집 같은 한적은 더이상 안 나와. 저거? 다 족보야. 고서점은 이제 끝이야. 고서를 보는 사람도 없고 수집하는 사람도 거의 없어.”


1969년 중간상으로 책을 만지기 시작한 전씨는 79년에 10여년의 눈썰미로 목좋은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동안 쏠쏠한 책들이 많이 나와 그 덕에 ‘먹고 살고 아이들을 가르쳤다’. 80년대 재개발 붐이 일면서 사람들은 새 집에 어울리지 않는 책들을 털어내고, 강남으로 이사가는 사람들 역시 그 책들을 버렸다. 책방으로서는 노다지였던 셈. 그러나 엄청나게 쏟아지던 고서는 공사가 마무리되면서 뚝 끊겼다. 요즘은 고서보다는 헌책을 더 많이 취급하게 되었다.
고서랄 것도 없는 <명주기봉>과 <쌍천기봉>은 영광의 그림자인 셈이다.


“책장사 35년인데 아직도 보지 못한 책들이 나와.” 40~50년대 책이 종류와 내용에서 의외로 풍성한 것 같다고 말했다. 책방 주인한테 그럴 정도면 내공이 얕은 손님한테야 더 그렇지 않겠는가. 벽 한바닥 가득 꽂힌 누렇게 바랜 책들이 새삼스럽다.
“요즘 학생들 책 안 봐. 고등학생이나 대학생이나 일체 안 와.” ‘문화의 거리’라는 대학로가 멀지 않고 학생들로 버글거리는 성균관대가 코 닿을 거리. 전씨의 말에는 회한과 약간의 분노가 어렸다. 그래도 책 좋아하는 사람들은 서점이 있어줘서 고맙다고 한다며 자위다. 그가 보던 책은 <藝(예)에 살다>(김충현, 범우사). 팔라고 하니, 보는 책을 왜 그러느냐며 거절했다.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 /한겨레신문 05. 6.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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