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방에서 이 책을 발견했을 때의 감회라니. 이게 어인 떡이냐. 속으로는 웃음을 감추고, 껄렁한 표정으로 책방 주인에게 얼마냐고 묻고, 가격을 흥정하고, 예상대로 거저나 다름없는 값에 낙찰을 본 후, 너무 좋아서 역시 속으로만 웃었다. 살다보니 이런 날도 있구나. 뭔가를 좋아해서 가지고 싶다고 해서 당장에 그것을 찾아다니는 열정이 부족한 나는 이렇게 우연찮게 원하던 것을 얻었을 때가 진짜로 행복하다. 돌부리를 걷어찼는데 굴러가던 돌이 쨍그랑 소리를 내며 오백 원짜리를 토했을 때랄까? 비유가 이상하네. 사바스 카페를 처음 접한 게 8년 전 쯤? 막 만화책의 재미에 빠져들 즈음이었다. 일본만화를 처음 접하게 된 계기가 되어 그 후 정신없이 온갖 만화를 다 읽기 시작했다. 가질 수만 있다면 꼭 가지고 싶은 만화 1순위였지만 막연히 구하기 쉽지 않은 만화려니 하고서 포기했는데, 이런 우연한 행운이 따라주다니. 아, 행복해서 죽을 지경이다.


아름다운 건 월요일의 아이

품위가 있는 건 화요일의 아이

울상을 짓는 건 수요일의 아이

여행을 떠나는 건 목요일의 아이

매력적인 건 금요일의 아이

고생하는 건 토요일의 아이

귀엽고 명랑하고 마음씨가 고운 건 일요일에 태어난 아이 


<목요일의 아이>라는 소설도 있었는데, 친구들과 돌려가며 읽고 나름 심각한 대화도 나누고, 하나같이 모두 여행을 떠나는 목요일의 아이를 꿈꿨었는데. ‘마더구즈’의 노래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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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2005-08-14 0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바스카페.. 너무 좋지요? ^^ 이 책 보면 저는 행복해지더라구요..
좋은 책 구하신거 축하드려요~

로드무비 2005-08-14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오래 전 운좋게 구했답니다.
우울과 몽상님이 좋아하시는 모습 보니 덩달아 기분 좋네요.^^

겨울 2005-08-14 1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개님, 로드무비님, 반갑습니다. ^^ 출판사에서 덤핑 처리한 책인지라 귀퉁이에 약간의 칼질을 당했지만 상태가 아주 양호합니다. 워낙 오래된 책이라 누렇게 색이 바랜 것은 감수하구요. 두 분 다 이 책을 가지고 계시다니, 기분이 두 배로 좋아집니다. ^^

딸기 2005-08-14 1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울과몽상님, 오랜만인듯해요 :)

겨울 2006-08-30 2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딸기님! 그동안 귀차니즘 병에 시달리느라요. 오늘 말복인데 맛난 것 드셨나요? 전 토마토와 옥수수, 오이를 주식으로 삼아 에어컨도 선풍기도 없는 방에서 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습니다. 어젯밤, 만화책을 읽느라 잠을 못자서 정신이 몽롱한지라 마당가에 쑥쑥 자란 잡초를 뽑은 후 샤워를 하고 나서 낮잠이나 잘까 합니다. ^^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 주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연민은 어느 정도 뻔뻔한 (그렇지 않다면 부적절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 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휘저어 놓는 고통스런 이미지들은 최초의 자극만을 제공할 뿐이다.(p. 154)


이 책은 에둘러 비유하거나 설명하지 않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그게 아니다 라고 말한다. 고개를 똑바로 들고서 하늘을 바라보기를 부끄럽게 만든다. 잘 못 알고 있는 것, 감추어진 진실, 허위의식, 가면을 집어던지라고 한다. 이제까지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한 것을 부끄럽게 만든다. 타인의 고통에 대해 눈물 따위 쉽게 가볍게 흘리지 말라고 한다. 연민이라고 믿은 것이 혹여 쾌감이 아닌가를 묻는다. 인간이 인간에 대하여 섣불리 강한 척을 하거나 손가락 하나 내미는 것으로 동정의 의무를 다했노라 교만하지 말라 한다.


어떤 곳을 지옥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사람들을 그 지옥에서 어떻게 빼내올 수 있는지, 그 지옥의 불길을 어떻게 사그라지게 만들 수 있는 지까지 대답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따라서 우리가 타인과 공유하는 이 세상에 인간의 사악함이 빚어낸 고통이 얼마나 많은지를 인정하고, 그런 자각을 넓혀나가는 것도 아직까지는 그 자체로 훌륭한 일인 듯하다. 이 세상에 온갖 악행이 존재하고 있다는 데 매번 놀라는 사람, 인간이 얼마나 섬뜩한 방식으로 타인에게 잔인한 해코지를 손수 저지를 수 있는지 보여주는 증거를 볼 때마다 끊임없이 환멸을 느끼는 사람은 도덕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아직 성숙하지 못한 인물이다. 나이가 얼마나 됐든지 간에, 무릇 사람이라면 이럴 정도로 무지할 뿐만 아니라 세상만사를 망각할 만큼 순수하고 천박해질 수 있을 권리가 전혀 없다.   (p. 167)


아프가니스탄 카불시의 한 화상병동을 취재한 방송을 보았다. 이제 막 열두 살이 된 소녀가 등유를 온몸에 들이부었다. 아버지에게 팔려 시집을 갔으나 남편과 시어머니의 학대를 견디다 못해 분신을 기도했단다. 이웃의 남자가 주변을 맴돌며 관심을 보였다는 이유로 분신을 기도하여 전신에 화상을 입고 아프다고 소리치는 소녀도 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아버지나 남편이 아닌 남자로부터의 그러한 행위는 강간과도 같다. 그래서 소녀는 순결을 잃었다고 믿으며 등유를 들이부은 것이다. 며칠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텔레비전의 그 이미지를 통해서 나는 내가 거기에서 태어나지 않았음을 안도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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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들
요시다 슈이치 지음, 오유리 옮김 / 북스토리 / 2005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오늘은 일요일이다. 많고 많은 일요일 중의 하나지만, 누군가에겐 특별한 하루일 수도 있는 일요일이다. 늦은 아침에 일어나 넘어가지 않는 밥을 한 숟가락 밀어 넣고, 컴퓨터의 전원을 넣어 부팅을 시킨 후, 대강의 청소와 쓰레기를 분리수거 했다. 그리고 겉잡을 수 없이 자란 화단의 무성한 풀들을 두려운 시선으로 노려보다가 역시나 손을 댈 엄두를 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무시무시하게 뜨거운 햇살을 보니 커튼을 걷어 빨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세탁기를 돌리고, 내친 김에 욕실도 세척락스를 분무기로 뿌려가며 매끈하게 닦아주고, 마침내 컴퓨터 앞으로 돌아와 앉았다.


나의 일요일은 할머니의 전화 한통으로 시작을 했다. 건강하신지 식사는 하셨는지 잘 지내시라는 안부전화는 부쩍 아파진 다리를 끌고 청소며 빨래며 밥을 홀로 챙기는 그 쓸쓸함에 미치면서 급속도로 가라앉았다. 대개의 경우 나의 일요일은 방콕이다. 밀린 잠을 자거나 책을 읽거나 온종일 컴퓨터를 붙잡고 있다. 한마디로 대문 밖으로는 한발자국도 떼놓지 않는다. 일요일에 누가 온다거나 간다거나 하는 걸 아주 싫어하기에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온전하게 홀로 보내는 이런 시간이야말로 행복의 극치다.


요시다 슈이치의 ‘일요일들’이란 소설을 화장실에 두고 읽기 시작한지 일주일 만에 끝낸 일요일 아침이다. 손에 가벼운 두께의 하얀 책을 보노라니 그렇다면 나의 일요일들은 어떤 그림일지가 궁금해졌다. 현재의 나는 과거의 나로부터 와서 미래의 어딘가로 향하고 있다. 한사람의 평범하고 단순해 보이는 삶에는 얼마나 많은 우여곡절이 담겨있는지는, 나란 인간을 조금만 들여다봐도 알 수 있다.


소설가는 마술사다. 요시다 슈이치의 소설을 읽으면 읽을수록 이 작가는 매력적이다 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무엇이 어째서인지는 불분명하다. 뚜렷하게 이 소설의 무엇이 좋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아닌데, 이 작가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정도를 넘어선다. 그는 나의 무언가를 건드렸고 절묘하게 글로서 표현했다. 무엇이지? 무엇일까.


‘일요일들’의 마지막 이야기를 읽으면서 급기야는 눈물도 몇 방울 흘렸다. 엄마를 찾아 떠난 형제가 등장할 때마다 가슴이 두근두근 하더니, 일요일의 어느 날 도쿄의 어느 호텔에서, 입양되어간 동생과 만나는 형을 따라간 노리코의 이야기는 절정이었다. 세상의 끝에 다다른 듯 낙심해 있던 노리코도 생각하지 않던가. 나쁜 일만 있었던 건 아니라고. 인생이 막다른 골목에 왔다고 생각하는, 그래서 다시 일어설 엄두를 내지 못하고, 어영부영 개기고 있던 일요일의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돌이켜보니 그런 날들은 수없이 많았고, 지나가면 아무것도 아닌 기억이 되고 만다. 특별히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일요일을 보내고 있을 사람들이 이 책을 읽어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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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기만 하면 자신과 주변인의 얘기 보따리를 풀어놓는 사람이 있다. 어디서 그 많은 말들이 쏟아져 나오는지 대단한 기억력이란 감탄을 하며 넋을 놓고 들을 때가 있다. 남달리 사랑도 많고 미움도 많고 근심도 많고 좋아하는 것만큼 싫어하는 것도 많은 결과적으로 욕심이 많은 사람인 그는 일 또한 열정적으로 몸이 부서져라 한다. 삶에 대한 그러한 의욕과 애착, 집착과 체력을 나는 단 한번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를 만나 그의 얘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에너지를 얻는다.


감정이나 갈등을 마음에 쌓아두기를 반복하는 사람은 병이 들기 십상이다. 반면 어떤 경로든 누굴 향해서든 뱉어내고 표현하고자 애쓰는 사람은 굉장히 큰 상심이나 상처일지라도 미약하나마 치유가 되거나 짊어진 짐의 무게를 덜기 마련이다. 현실이 끔찍하도록 암담한 상황에 처해진 어떤 이는 어떻게든 낙관하고 긍정하려 안간힘을 쓰며 좋았던 날들을 추억하고 끄집어내면서 넘칠 정도로 너무 많은 것을 가졌던 대가의 의미로 현재를 살아간다고 했다. 그녀 또한 달변가다. 열심히 들어주는 사람이 있는 한 물 흐르듯 매끈한 그녀의 수다는 몇 시간이고 계속된다.


주변을 둘러보면 뭔가를 말하고자 하는 사람은 넘쳐나는데 정작 귀 기울여 들어줄 사람은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아이건 어른이건 여자건 남자건 사소한 빌미만 제공하면 속 깊은 얘기를 줄줄 흘리는 시대, 정작 그들은 자기 말들에 취해 타인의 말은 들을 줄 모르면서, 누구라도 제 속에 쌓이고 쌓인 화를 제발 말이 되게 해 달라고 간구하는 사람들이 넘치는 시대, 어쨌건 수다는 힘이고 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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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2005-07-31 2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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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워낙 말주변이 없어서 듣고 있는게 편하더라구요... ^^


겨울 2005-07-31 2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저 또한 주로 듣는 쪽입니다. 사실 말하기보다 듣는 일이 어렵다고 생각해요. 적절할 순간에 대꾸를 넣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데요. 사람을 사귀면서 가장 지루할 때는 상대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해 아무말도 없을 때더라구요.
 

 

뵐 때마다 잘 좀 먹으라 걱정을 해 주시는 분이 있다. 오늘도 그냥 요구르트 두 개, 플레인 요구르트 하나, 직접 만드신 샌드위치 두 조각을 건네주신다. 멀리서 이걸 들고 오신 정성 때문에 울컥 한다. 보시는 앞에서 먹성 좋게 먹어야 하는데, 요구르트를 꺼내 달게 마시고 샌드위치는 집에 가서 먹겠다고 약속드렸다. 타인을 위한 그분의 세심한 배려가 내게는 종종 불가사의처럼 여겨진다. 나란 인간이 엄청 몰인정하고 이기적으로 비추는 건 예사고 받는 것의 십분의 일도 돌려드릴 수 없어 부담스럽다. 사랑도 받아본 사람만이 베풀 줄 알고 음식도 먹어봐야 즐길 수 있다고 했던가. 그렇담 나는 지독한 애정결핍증 환자임이 분명하다. 새삼스러운(?) 이 발견이 참 경악스럽다.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엄마와의 기억이 전무하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엄마에 관한 얘기를 할라치면 나이차가 좀 많은 철없는 언니쯤으로 묘사를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뭐랄지, 엄마를 정서적으로 꽤 이질적인 존재처럼 느껴왔다. 외동에 유복자로 자랐고 할머니의 온전한 보살핌을 받았음에도 정작 자신의 자식에 대한 모성은 많이 부족한 사람, 현재 팔순을 훌쩍 넘기신 할머니에게 자식의 양육이며 생활의 전반적인 의무를 다 짊어지게 하였음에도 그것에 대한 하등의 감사나 미안함을 갖지도 않는 사람, 가끔 표현하는 애정이 도를 지나쳐 오히려 부담스럽고 불화의 근원이 되는 사람, 그래서 적당한 포장을 한 후에나 대화가 가능한 사람, 엄마란 존재는 그랬다.


할머니라는 매개가 없으면 엄마와의 관계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거나, 설령 있어도 지극히 건조한 형식적인 혹은 불안한 관계 이상도 이하도 아니므로 그렇다면 나는 어쩔 것인가 하는 고민을 종종 했다. 언젠가 언뜻 말다툼을 할 적에 할머니에 대한 우리들의 애정을 시기하는 엄마의 원망을 들은 적이 있었다. 할머니가 가로막고 있어서 자식들이 아무도 엄마를 좋아하지 않고 있다는 뭐 그런 내용이었는데, 어이가 없음에도 일부 수긍은 갔었다. 동생들과 모여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만일 할머니가 안계시면 이라는 가정을 했을 때 우리는 어찌되나 하다가 눈물을 주룩주룩 흘린 적이 있었다. 지금보다 많이 어릴 때지만, 우린 할머니라는 동아줄을 위태롭게 붙들고 있었고 그 동아줄이 끊어지는 상상만으로 견딜 수 없는 슬픔과 아픔을 느꼈다.


인간은 일생을 걸쳐 성장을 지속한다고 믿는다. 엄마도 마찬가지다. 주름과 흰머리가 아니라도 줄줄이 딸린 손자 손녀에게 할머니라 불릴 만큼 세월이 흘렀다. 나도 예전의 나가 아니듯 엄마도 예전의 엄마는 아니다. 약하고 불안정하고 예민한 환자였던 엄마는 몹시도 무디고 무뎌졌다. 죽어라 채우지 못한 공허감을 신앙에 집착하고는 있지만 스스로 만족하시니 뭐랄 것도 없다. 이제는 미리 단정 짓지 않고 가능한 말로 표현하고 싸우고 필요하면 손을 내밀 생각이다. 엄마에게 나는 어려운 딸이었다. 한번도 먼저 손을 내밀지 않았다. 인간이 얼마나 상처받기 쉬운 존재인가를 고려할 때 나로 해서 받은 엄마의 근심과 상처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동전의 양면 같은 인간의 양면, 그리고 마주치는 손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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