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히도 열 마리 중 막내로 태어났다. 제 형제 누이들과는 털 색깔도 달랐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치열한 자리다툼에서 밀려났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관심을 받지도 못하고 느리고 약한 존재로 각인되었다. 괴롭힘이 시작됐다. 할퀴어지고 밀쳐지고 밟히고 눌리고 물리고. 그럼에도 살기위한 몸부림을 멈추지 않았을 작은 강아지가 피투성이가 되어 우리집으로 실려왔다. 머리를 들지도 못하고 숨만 할딱거리는 녀석의 몸은 온통 상처투성이에 핏물과 오물로 범벅이었다. 

그 밤 내내, 열이 오르는 녀석에게 해열제와 항생제를 먹이며 지켜보았다. 다행히도 간식용 고기를 아주 맛나게 허겁지겁 먹어치우는 모습을 보면서 회복되리란 희망을 품었다. 그리고 아침이 되어 느리게 휘청거리며 절룩이며 걸어다니는 모습을 보았다. 그렇게 기쁨이 됐다. 기쁨, 반갑다.

 

약한 존재는 어째서 표적이 될까. 약하면 약한 모습으로 살아가면 되지 않을까. 강해지기 위한 노력이 부족하다고 지적을 받아야 할까. 어째서 이 모든 게 네 탓이어야 할까. 일주일, 이주일 지나고 기쁨이는 이제 껑충껑충 뛰어다닌다. 화단에 심어놓은 꽃과 나무들은 초토화가 되었고, 온 집안의 신발들은 기쁨이를 피해 높은 곳으로 이동해야 한다. 기쁨의 입을 거친 모든 물건들은 너덜해지고 망가지고 부서진다. 세상에 태어난지 겨우 3개월 만이다. 파란만장 기쁨이는 순종 도사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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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 창문을 열면 보이던 나무로 된 대문 집에 사시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화창한 오후, 느닷없는 119구급차 소리가 들려 나가보았다가 목격한 현장이다. 돌아가셨구나 라는 느낌이 왔다. 지난 가을부터 거동이 불편하셨고, 올 봄부터는 아예 바깥 출입이 없으시더니 결국 그리 되셨다. 84세의 연세는 적지도 그렇다고 많지도 않다. 요양원을 거치지 않고, 시름시름 앓아누웠다가 한 열흘 가까이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셨지만, 가족들에게도 당사자에게도 큰 고통이나 고생을 동반하지 않은 마지막 모습인 셈이다. 마지막에 좋은 일 하셨노라 동네 사람들이 너도나도 떠든다. 할아버지는 6.25 전쟁 때 북한 인민군으로 내려왔다가 포로가 되었다가 눌러앉은 이력이 있으시다. 혈혈단신, 일생을 고향에 있는 가족을 그리워하며, 북한 출신이라는 핸디캡 때문에 주사가 심하셨고, 가족에게도 좋은 아버지나 남편은 결코 아니었던, 괴짜 내지는 이상한 사람이라는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게 만들던 사람이었다. 죽어야만 갈 수 있고 만날 수 있는 고향, 부모형제들이라니..... 지상 최후의 분단 국가라는 낙인이 이런 것인가. 소설같지만 엄연한 현실이다. 

 

오는 6월 18일에 김수영이 죽고, 주제 사라마구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라딘을 통해 확인하면서 가슴 한구석이 싸하니 아팠다. 그들의 글을 읽으며 그들의 삶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졌었기 때문일까. 완전한 타인을 향해 이런 감정이 들리는 없다. 새삼 책을 읽는다는 행위에 대한 책임감이 느껴진다. 누군가의 글을 읽는다는 건, 혹은 누군가에게 내 글이 읽힌다는 건 벌거벗은 영혼 내지는 몸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자각이다. 좋아하는 작가의 전작을 찾아 읽으면서 그 작가의 모든 것을 소유한 듯한 자부심내지 착각에 빠질 때가 있다. 누군가의 글을 읽었다는 것과 그를 안다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 협소한 공간에서도 종종 그러한 일들이 일어난다. 삶의 일부인 글을 보면서 글쓴이에게 잣대를 들이대는, 물론 다수는 말과 행동이 그리고 글이 일치되는 삶을 누릴 수도 있지만, 나는 글과 말과 행동이 다 제멋대로 놀 때가 많더라만. 솔직히 이 세가지의 일치가 가능은 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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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을 쓸고, 마른 나뭇가지며 낙엽들을 주워 모으고, 겨우내 단단해진 흙을 보슬보슬하게 파헤치며 발견한 것들. 앵초, 수선화, 나리, 민트 종류의 움트는 새싹들이라니!! 연초록 혹은 짙은 보랏빛의 촉들이 신기해서 하염없이 들여다 봤다. 그러다 걱정이 되는 게 한시도 가만있질 못하는 말썽꾼 녀석. 희망이. 우리집 강아지. 분명코 사방팔방 밟고 다니며 파헤치리라. 이 화창한 봄날에 녀석을 묶어놓을 수도 없고 하늘의 뜻에 맡겨야 하는 건가, 싶어 근심 가득이다. 해마다 되풀이 되는 일이지만 조심스레 관찰하며 보살피던 싹들이 부러지거나 뿌리가 드러나있는 모양은 유쾌하지 않다. 때론 억장이 무너진다. 그럼에도 희망이의 자유를 구속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희망과 절망이 반복되는 피치못할 사정의 그래도 좋은,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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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이 눈, 비, 바람과 더불어 왔다.

호된 시작이지만 마을을 굳건히 하기엔 더할나위 없다.

꽝꽝 얼어붙은 현관문을 밀어내고 뜨거운 입김 호호 뱉어내면서 얇게 깔린 눈얼음을 밟으며 웃을 수가 있어서 좋다. 정신이 번쩍드는 이런 날이 좋다.

밤새 자글자글 끓던 난로 위의 주전자는 아침이 되어도 기운차다.

물이 끓는 모양에는 마법사의 손끝이 닿아 있는 듯, 뜨거움은 곧 열정이다.  

아무리 뜨거운들, 신비 가득한 차향과 어우러진 입맛은 안식을 주니

거기가 곧 천국이 아닐까. 

이 겨울이 가도 나는 이 자리에 앉아 한 잔의 차를 마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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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을 좋아했던 날들이 있었다. 토요일과 일요일이 기다리고 있고 월요일은 멀다는 이유로. 하지만 이젠 좋은 소식을 가져오면 좋은 날일 뿐이다. 반갑지 않고 석연치 않은 손님이 다녀간 오늘은 내내 찜찜함을 떨구지 못하고 있다. 소심증의 발동이다. 거짓말에 익숙한 사람을 만난 후엔 후유증이 더 크다. 물론 예전보다야 상처를 치유하고 마음을 다스리는 시간이 많이 짧아졌고 어지간해서는 무던하게 넘어가려 애쓰고 있지만, 완벽히 무시할 수는 없는 모양이다. 

 

초등학교 동창들을 부를 땐 친구이기 보다는 왠지 동무라는 느낌이 강하다. 들과 산을 뛰어다니며 유년을 공유했던 동무들은 깊은 추억 속에 잠들어 있다가도 한번씩은 이렇게 깨어난다. 30년도 더 지난 후의 전화 한통에서, 가물가물 아슬라한 기억 속, 순수함의 절정을 이루던 때의 그리움 가득한 이름들을 부르다가. 오늘, 명경의 전화가 그랬다. 동무야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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