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 창문을 열면 보이던 나무로 된 대문 집에 사시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화창한 오후, 느닷없는 119구급차 소리가 들려 나가보았다가 목격한 현장이다. 돌아가셨구나 라는 느낌이 왔다. 지난 가을부터 거동이 불편하셨고, 올 봄부터는 아예 바깥 출입이 없으시더니 결국 그리 되셨다. 84세의 연세는 적지도 그렇다고 많지도 않다. 요양원을 거치지 않고, 시름시름 앓아누웠다가 한 열흘 가까이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셨지만, 가족들에게도 당사자에게도 큰 고통이나 고생을 동반하지 않은 마지막 모습인 셈이다. 마지막에 좋은 일 하셨노라 동네 사람들이 너도나도 떠든다. 할아버지는 6.25 전쟁 때 북한 인민군으로 내려왔다가 포로가 되었다가 눌러앉은 이력이 있으시다. 혈혈단신, 일생을 고향에 있는 가족을 그리워하며, 북한 출신이라는 핸디캡 때문에 주사가 심하셨고, 가족에게도 좋은 아버지나 남편은 결코 아니었던, 괴짜 내지는 이상한 사람이라는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게 만들던 사람이었다. 죽어야만 갈 수 있고 만날 수 있는 고향, 부모형제들이라니..... 지상 최후의 분단 국가라는 낙인이 이런 것인가. 소설같지만 엄연한 현실이다. 

 

오는 6월 18일에 김수영이 죽고, 주제 사라마구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라딘을 통해 확인하면서 가슴 한구석이 싸하니 아팠다. 그들의 글을 읽으며 그들의 삶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졌었기 때문일까. 완전한 타인을 향해 이런 감정이 들리는 없다. 새삼 책을 읽는다는 행위에 대한 책임감이 느껴진다. 누군가의 글을 읽는다는 건, 혹은 누군가에게 내 글이 읽힌다는 건 벌거벗은 영혼 내지는 몸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자각이다. 좋아하는 작가의 전작을 찾아 읽으면서 그 작가의 모든 것을 소유한 듯한 자부심내지 착각에 빠질 때가 있다. 누군가의 글을 읽었다는 것과 그를 안다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 협소한 공간에서도 종종 그러한 일들이 일어난다. 삶의 일부인 글을 보면서 글쓴이에게 잣대를 들이대는, 물론 다수는 말과 행동이 그리고 글이 일치되는 삶을 누릴 수도 있지만, 나는 글과 말과 행동이 다 제멋대로 놀 때가 많더라만. 솔직히 이 세가지의 일치가 가능은 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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