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 꺼진 마루에 앉아 커피 한 잔을 마신다. 무릎이 시리지만 커피의 뜨거움에 자족하며 어둠 가운데 내내 앉아 있다. 그리고 오늘, 여기에 머물다 간 사람을 생각한다. 사는 것의 고달픔에 대해서 길지도 짧지도 않은 얘기를 나눈,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사람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섬이 있다고 믿었다. 외로운 존재라는 의미와는 별개로 섬의 ‘고독’을 동경했다. 그러나 현실에서 고립은 불행이라고 가르친다. 타인과 어울려 손을 잡아주거나 내밀지 않으면 안 된다. 언뜻 스친 대화 중에는 둘은 정상이나 혼자는 비정상이라는 말이 있었다. 각기 다른 얼굴과 성향의 사람들이 태어나 죽는 과정에서 필연처럼 거치는 ‘결혼’의 의무, 권리를 다하지 않는 것에 대한 일반적인 이야기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나는 종교적인 인간이 아니다. 집단 보다는 개인을 존중하고 무리보다는 고립을 갈구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인간도 실제로 보았고 둘이 됨을 견디지 못하는 인간도 역시 보았다. 나는 아무래도 후자에 가깝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나탈리 골드버그 지음, 권진욱 옮김 / 한문화 / 2005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말할 때는 오로지 말 속으로 들어가라, 걸을 때는 걷는 그 자체가 되어라, 죽을 때는 죽음이 되어라. 그러므로 글을 쓸 때는 쓰기만 하라.  

 

처음 이 구절을 읽었을 땐? 와우! 그랬다. 당장 컴퓨터 앞으로 달려가 앉고 싶었다. 그리고 손가락을 쉬지 않고 움직여 장문의 글을 써야할 것 같았다. 그러나 웬걸......... 하루도 지나지 않아 이런 핑계, 저런 핑계, 못해, 안 해, 귀찮아하고 있다. 정신이 번쩍 드는 충격적 약발도 단 하루가 전부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이 놀라움 그 자체라는 것은 변함없다. 누구라도 이 책을 읽는 순간부터는 위대한 작가의 자질을 가진 잠재력의 소유자라는 행복한 착각에 빠져드니까. 어쩐지 뭔가가 허전하다 싶은 날, 책꽂이에서 뽑아 들고 아무 페이지나 펼치고 읽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면 곧 기분이 좋아지고 숨어있던 단어와 의미들이 두둥실 머릿속을 유영하리라. 그리고 부족하나마 완성된 한 토막의 에세이가 토해지리라.


일상은 때로 감각을 마비시킨다. 언제 어디서건 쓰라고 하지만 컴퓨터는커녕 펜과 종이도 여의치 못할 경우가 있다. 카페는커녕 어질러진 책상도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 마음속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쓰고 싶다는 욕구가 채워질 리가 만무하다. 하루 일을 끝내고 돌아온 집엔 물론 컴퓨터도 있고, 펜, 종이는 물론 시간과 여유도 구비되어있다. 그거면 되는 것일까? 정작 제일 중요한 스쳐지나간 영감의 그림자도 희미한데? 어떤 천재는 장소 불문, 시간 불문하고 써내려갈지도 모르지만 보통의 인간에게 그것은 잔인한 요구이다. 겨우 한다는 것이 이러한 푸념뿐.


시의 온기에서는 발을 떼고 시에 ‘대하여’ 말하는 데만 열을 올리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자. 시에 머물 수 있도록 가까이 다가가라. 작품 그 자체 속으로 들어가라. 그것이 시를 쓰고 배우는 방법이다.


시 속으로 들어가라니 정말로 쉽지 않은가. 아무나 가능하다는 듯, 못 들어가면 바보라는 듯 말한다. 어떤 수단을 쓰든 문을 열고 들어가 문을 닫으면 될 듯 하다. 그러나 문제는 시의 변덕이다. 때때로는 선뜻 열어주던 문도 제 기분이 나빠지면 결코 문을 열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자인 나탈리 골드버그는 글쓰기에 대한 강박증도 에너지라고 말한다. 회피하거나 게으름 피우는 대신 정면으로 문제와 맞서는 방법은 역시 글을 쓰는 것이다? 오, 간단한 치유법이다. 너무 쉬워서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다. 

 

글이 글을 쓰도록 하라. 당신은 사라진다.  


도대체 어디로? 역시 수행의 부족인가. 나는 느리고 더듬거리며 주저앉아 하염없이 허공을 쳐다보며 시간을 흘러 보내기 일쑤다. 그리고 결국 길을 찾지 못하고 뒤돌아서지만 되돌아 나오는 법도 잊을 때가 허다하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kleinsusun 2004-12-05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읽고 한달에 노트 한권은 꼭, 모조건 써야지 생각했는데...

책 읽고 산 노트의 반도 못 썼네요.ㅋㅋ 대단한 책이죠?

이 책을 쓴 나탈리의 글을 틱낫한의 사랑법 소개글로 만났어요. 반갑더군요,
 

 

집집마다 나름의 김장의 미학이 있겠지만 우리 집도 별나다. 시골에서는 대개 아들, 딸, 손자, 며느리를 불러 모아서 날을 잡기 마련이다. 누구네 집에는 누가 와서 얼마나 했다더라 하는 식이다. 그리하여 올 해도 어김없이 서울 오빠며 동생들과 함께 주말에 모여 들었고 천장 낮은 시골집은 복작복작, 간만에 본 할머니는 증손녀, 손자 얼굴 보는 재미로 싱글벙글 환하다. 일요일 새벽 세시 경, 낮부터 절인 배추를 행구기 시작해서 다섯 시에 끝났다. 뜨끈한 온돌방으로 기어들어가 한숨 자고 일어나니 아침 일곱 시, 먼저 일어나신 할머니가 끓인 배추된장국을 서둘러 먹고, 미리 썰고 다져 놓은 부재료를 커다란 고무 다라에 섞는 일이 본격적인 김장의 시작이다. 고춧가루, 찹쌀 끓인 것, 새우젓, 쪽파, 무, 갓, 멸치액젓, 마늘, 생강, 기타 등등 두 개의 고무 다라 가득 넣고 버무리는 일은 요령 좋은 작은 엄마의 손맛이 최고다. 




여자들이 김치 속을 만드는 동안 아빠와 아이들은 마당 한가운데에 장작불을 피운다. 간밤에 내린 서리가 하얗게 가라앉은 아침은 제법 춥지만, 만장일치로 일거리도 줄일 겸해서 마당에서 김장을 하기로 합의했다. 들마루 위에 척척 걸쳐놓은 절인 배추를 작은 그릇에 옮겨 모닥불 주위로 둘러앉아 각자 재주껏 속을 넣은 김치를 역시 각자 가져온 김치 통에 예쁘게 담아내는 게 어설픈 우리들의 일인 것이다.




김장 하는 날이라고 특별히 맞춘 시루떡이 배달되고, 따뜻한 김이 오르는 떡을 막 바른 배춧잎에 싸서 먹으니 별미다. 아이들의 간식은 호일에 싸서 장작불에 구운 고구마다. 평소에 하나도 먹지 않던 고구마를 세 개나 먹어치울 정도. 배춧잎을 뜯어 내밀면 덥석 잘도 받아먹는 네 살짜리 막내 지솔이 단연 인기다. 일하는 제 엄마에게 칭얼대는 법도 없이 언니 오빠들을 따라다니며 잘도 논다. 너른 마당에 탁 트인 산과 들을 배경으로 별다른 장난감도 없이 뛰노는 아이들이 정겹다. 그러면서 드는, 돌아오기엔 너무 멀리 나가있다는 생각. 아이들은 점점 시골에서 멀어져갈 것이고, 어른들은 아이들을 따라 정신없는 삶을 복잡한 도시 속에다 뿌리내릴 것이다. 가족들이 모두 모여 김장을 하는 오늘 같은 날이 앞으로 몇 번이나 있을까.




김장이 얼추 끝나가자, 오빠는 벌써부터 불꽃이 사그라진 숯 위에 석쇠를 걸고 삼겹살을 굽는다. 아이들 입에 잘 구워진 고기 한점씩 넣어주고 좋아서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이 정답다. 겨울이 시작되는 길목이다. 가족이라는 이름이 무거운 굴레로 목을 조이던 시절도 있었지만 그래도 좋은 일이 훨씬 많았다. 앞으로도 오래오래 다툼 없이 지내기를. 



댓글(5)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날개 2004-11-29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님의 김장은 정말로 정겹고 즐거운 행사군요.. 시루떡을 막 버무린 김장김치에 싸서 먹는 맛이라.. 침이 싸악 돕니다요~ >.<

겨울 2004-11-29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노동과 놀이가 적당히 버무려진 행사였습니다. 그래서 온몸이 근육통과 감기기운으로 내내 시달린 우울한 월요일이 되었지만요.ㅠㅠ

잉크냄새 2004-11-30 0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랫만에 느껴보는 어릴적 고향풍경이네요....아늑합니다...

갈대 2004-11-30 0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치에 고구마에 시루떡에 삼겹살까지!! 침 꼴딱~^^

겨울 2004-12-01 2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들 김장은 하셨나요?
 

 

새벽, 빗소리에 잠이 깨었다가 다시 기분 좋게 잠이 든 것은 좋았는데, 나갈 시간이 되도록 계속해서 내리고 있어 기분이 가라앉았다. 초겨울의 비 내리는 이런 날에 집을 나서기는 정말 죽도록 싫다. 현관문을 여니 마당 가득 쌓인 나뭇잎, 하늘을 보니 온통 잿빛, 덩달아 아래로 쳐지는 어깨, 우, 정말 싫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날개 2004-11-26 2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비오고 흐린날은 집에서 꼼짝 안합니다.. 나가야 할 일은 최대한 뒤로 미루고 밍기적 거려요~

겨울 2004-11-26 2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날엔 겨울잠을 자는 동물들이 부러워요. 마음속으로 내내 '곰이 되고 싶어요' 한다는...
 
버스데이 걸(1disc) - 디지팩
제프 버터워스 감독, 마티유 카소비츠 외 출연 / 아인스엠앤엠(구 태원) / 2003년 11월
평점 :
품절


 

소심한 은행원 존은 지리멸렬한 일상을 뒤집는 선택을 하는데, 바로 인터넷으로 아내를 주문하는 것이다. 각양각색의 러시아 여성들이 ‘나를 봐 주세요’라고 말하고 있고, 그 중 마음에 드는 여성을 선택하고 대금을 지불하면 배달이다. 그러나 웬걸, 공항에서 만난 여자는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팔등신 미인, 게다가 영어라고는 오로지 예스밖에 모르는 골초다. 예쁜 여자도 좋지만 소통이 불가한 미인은 버겁기만 하고, 결국 러시아로 돌려보낼 결심을 하는데.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 라는 얼굴로 담배를 피거나, 뜨개질을 하던 나디아는 돌연 요염한 여우로 돌변 존을 덮친다. 순진남을 꼼짝달싹도 못하게 만드는 금발 미녀의 육탄돌격은 가히 상상을 초월하고, 존은 속절없이 그녀에게 빠져든다.


그러던 어느 날, 나디아의 생일에 보기에도 수상쩍은 두 명의 러시아 남자가 들이닥친다.  반가워하는 나디아의 열렬한 환영인사로 얼떨결에 분위기에 휩쓸려 놀지만 의혹은 불거지고, 존은 그들에게 나가달라고 부탁한다. 다음날, 나디아가 손수 뜬 빨간 스웨터를 입어보며 존은 행복감에 젖어있는데, 평온했던 부엌이 돌연 강도와 인질이라는 살벌한 곳으로 바뀐다. 나디아의 목에 들이댄 칼을 보고 냉철한 판단력을 잃어버린 존은 부랴부랴 근무하는 은행으로 달려가 자신이 보관하고 있는 금고열쇠로 거금을 훔쳐 몸값을 지불한다.


영화는 두 남자의 정체를 드러내는데 일말의 주저도 없다. 두 남자 알렉세이와 유리, 그리고 나디아는 국제적인 결혼사기극을 벌이는 상습범이었던 것이다. 나디아를 향한 진심어린 존의 사랑은 어처구니없는 웃음꺼리가 되고, 은행 강도범으로 쫓기는 신세가 되는 일련의 과정들은 굉장히 빠르다. 거기에서 존의 사소한 감정들은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분노나 후회, 연민, 자괴감은 보는 이의 몫이다. 그리고 거금을 갈취한 사기범들의 희희낙락과 다툼, 불편한 속내가 드러나면서 오히려 천하의 악녀로 찍혔던 나디아에 대한 연민이 치민다. 그녀는 임신했다는 사실을 연인에게 고백하는 순간 연인에게 차인다. 존과 다를 바 없는 신세로 전락한 것이다. 결국엔 원점이다.


이 정도가 되면 흔히 생각하기를 뭔가 거한 복수극이 진행되겠지 하겠지만 천만에다. 어쨌거나 콩깍지가 단단히 쓰인 존은 나디아를 용서하고 러시아행 비행기를 태우기로 하는데, 영화는 존의 눈물겨운 희생을 외면할 수가 없었나 보다. 어찌해서 은행에서 훔친 거금을 되찾고 러시아행 비행기에 나란히 오르는 결말이니까.


톰 크루즈와의 결별 이후, 니콜 키드만의 행보는 눈부시다. 과연 이 영화에서 니콜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뱅상 카셀, 마티유 카소비츠의 이력도 화려하다면 화려하지만 러시아인 건달 역은 누가 했어도 그만큼은 했을 것이다. 그녀의 변화 중에는 작품을 고르는 대단한 안목도 있다. 최근의 영화들 거의는 그녀여서 대단했다. 전남편의 등이 아닌 그 너머를 볼 줄 아는 눈을 가진 여배우, 아직 보지 못한 다음 작품이 기대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