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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데이 걸(1disc) - 디지팩
제프 버터워스 감독, 마티유 카소비츠 외 출연 / 아인스엠앤엠(구 태원) / 2003년 11월
평점 :
품절
소심한 은행원 존은 지리멸렬한 일상을 뒤집는 선택을 하는데, 바로 인터넷으로 아내를 주문하는 것이다. 각양각색의 러시아 여성들이 ‘나를 봐 주세요’라고 말하고 있고, 그 중 마음에 드는 여성을 선택하고 대금을 지불하면 배달이다. 그러나 웬걸, 공항에서 만난 여자는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팔등신 미인, 게다가 영어라고는 오로지 예스밖에 모르는 골초다. 예쁜 여자도 좋지만 소통이 불가한 미인은 버겁기만 하고, 결국 러시아로 돌려보낼 결심을 하는데.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 라는 얼굴로 담배를 피거나, 뜨개질을 하던 나디아는 돌연 요염한 여우로 돌변 존을 덮친다. 순진남을 꼼짝달싹도 못하게 만드는 금발 미녀의 육탄돌격은 가히 상상을 초월하고, 존은 속절없이 그녀에게 빠져든다.
그러던 어느 날, 나디아의 생일에 보기에도 수상쩍은 두 명의 러시아 남자가 들이닥친다. 반가워하는 나디아의 열렬한 환영인사로 얼떨결에 분위기에 휩쓸려 놀지만 의혹은 불거지고, 존은 그들에게 나가달라고 부탁한다. 다음날, 나디아가 손수 뜬 빨간 스웨터를 입어보며 존은 행복감에 젖어있는데, 평온했던 부엌이 돌연 강도와 인질이라는 살벌한 곳으로 바뀐다. 나디아의 목에 들이댄 칼을 보고 냉철한 판단력을 잃어버린 존은 부랴부랴 근무하는 은행으로 달려가 자신이 보관하고 있는 금고열쇠로 거금을 훔쳐 몸값을 지불한다.
영화는 두 남자의 정체를 드러내는데 일말의 주저도 없다. 두 남자 알렉세이와 유리, 그리고 나디아는 국제적인 결혼사기극을 벌이는 상습범이었던 것이다. 나디아를 향한 진심어린 존의 사랑은 어처구니없는 웃음꺼리가 되고, 은행 강도범으로 쫓기는 신세가 되는 일련의 과정들은 굉장히 빠르다. 거기에서 존의 사소한 감정들은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분노나 후회, 연민, 자괴감은 보는 이의 몫이다. 그리고 거금을 갈취한 사기범들의 희희낙락과 다툼, 불편한 속내가 드러나면서 오히려 천하의 악녀로 찍혔던 나디아에 대한 연민이 치민다. 그녀는 임신했다는 사실을 연인에게 고백하는 순간 연인에게 차인다. 존과 다를 바 없는 신세로 전락한 것이다. 결국엔 원점이다.
이 정도가 되면 흔히 생각하기를 뭔가 거한 복수극이 진행되겠지 하겠지만 천만에다. 어쨌거나 콩깍지가 단단히 쓰인 존은 나디아를 용서하고 러시아행 비행기를 태우기로 하는데, 영화는 존의 눈물겨운 희생을 외면할 수가 없었나 보다. 어찌해서 은행에서 훔친 거금을 되찾고 러시아행 비행기에 나란히 오르는 결말이니까.
톰 크루즈와의 결별 이후, 니콜 키드만의 행보는 눈부시다. 과연 이 영화에서 니콜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뱅상 카셀, 마티유 카소비츠의 이력도 화려하다면 화려하지만 러시아인 건달 역은 누가 했어도 그만큼은 했을 것이다. 그녀의 변화 중에는 작품을 고르는 대단한 안목도 있다. 최근의 영화들 거의는 그녀여서 대단했다. 전남편의 등이 아닌 그 너머를 볼 줄 아는 눈을 가진 여배우, 아직 보지 못한 다음 작품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