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 처음 해보는 일은 셀 수도 없이 많다. 옻순을 삶는 일도 그 중의 하나다. 양은 냄비에 적당히 물을 넣고 끓기 시작하면 옻순을 넣는다. 그리고 휘휘 젓고 뒤집어주면서 옻순의 단단한 줄기가 역시 적당히 익기를 기다린다. 그런데 여타 나물들을 데치는 수준과는 다르게 물이 내내 끓는 동안에도 옻순의 형태는 달라지는 게 거의 없다. 참 단단한 녀석이다. 펄펄 끓는 물에서도 야무지게 더 짙은 초록으로 빛나면서 싱싱할 수 있다니. 난생 처음 옻순을 삶고 시큼한 초장을 듬뿍 찍어 먹어본 날. 의외의 오묘한, 단맛과 고소한 맛을 닮은 녀석에게 흠뻑 빠져들었다. 이제는 절대 너를 홀대하지 않으마.

 

나는 5월의 이맘 때가 좋다. 화창한 하늘도, 하나둘씩 새순이 돋아나는 나무들도, 꽃봉오릴 수줍게 벌리는 키 작은 꽃들도, 빨래줄에 널어 놓은 빨래까지도 어여뻐 보인다. 마치 눈에 콩깍지가 쓰인 것처럼 세상과 사람들이 달리 보인다. 아마도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의 힘일 것이다. 대지가 숨을 쉬고 깨어나고 빠르게 성장하는 모습이 하루가 다르게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제일 먼저 화단을 둘러본다. 딱히 씨를 뿌리거나 물을 주지 않아도 지난 해 피고 지며 떨어진 씨앗이 싹을 돋우는 모습은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고 경이롭다. 화원에서 업어오는 크고 화려한 꽃이 주는 즐거움은 잠시 잠깐이다. 성형미인과 자연미인의 차이처럼 인공적인 미는 눈을 즐겁게 할뿐 마음 깊은 곳까지 스며들어 감성을 자극하진 못한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겨울 2010-05-14 1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반가운 여우님!^^
내집도 낯설수가 있구나 생각하는 중입니다.
천만다행히도 옻 안타요.
나이 마흔이 넘어서야 옻맛을 알았지만, 이게 어디냐 싶어요.


잉크냄새 2010-05-31 1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다시 불밝혀진걸 오늘에야 보았네요.
음, 왜 빈집님의 새글이 서재브리핑에 안떴는지 모르겠네요.
건강하시죠? 자주 뵈어요.

겨울 2010-06-03 0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늦었지만, 잘 지내시죠?
시간이 흘러 사람도 환경도 풍경도 바뀌지만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마음들이 있음을 확인하네요.
이곳에 들러 가만히 웃던 시절이 그리워요. 지금이라서 안될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죠.
 



 

 

 

 

 

 

 

 

 

 

 

 

우리집 강아지는 여전히 호기심 천국. 화단 구석구석, 마당 구석구석 뒹굴며 구르며 뛰다 엎드려 뻗쳐를 한다.  

귀여운 건 아주 잠시 잠깐이었다. 보통의 강아지가 다 이런가 하다가 그럴리가 없음을 안다. 얘가 유난스러운 거다. 발에 밟힐 정도로 성가시게 졸졸 따라다니는 건 기본. 바지건 웃옷이건 물고 늘어지는 건 예사. 십만 년 만의 상봉도 그렇게 요란스럽지는 않겠다. 이상하고 이상한 녀석때문에 하여튼 고민이 많다. 붙들어 매놓자니 가엾고, 풀어놓자니 부담백배다. 사람이건 짐승이건 연을 맺는다는 건 역시 어렵고도 어렵다는 걸 통감 중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나는 한나의 글씨체를 들여다보면서 그것을 쓰느라고 그녀가 얼마나 많은 힘을 소모하였으며 또 얼마나 투쟁을 해야 했을지 깨달았다. 나는 그녀가 자랑스러웠다. 동시에 나는 그녀가 불쌍했다. 너무나 지연되고 실패한 그녀의 인생이 불쌍했고, 그녀 인생 전체의 지연과 실패가 가엾게 여겨졌다. 어느 누가 제때를 놓쳤을 경우, 어느 누가 무엇을 너무 오랫동안 거부했을 경우, 또 어느 누구에게 무엇이 너무나 오랫동안 거부되었을 경우, 그것이 나중에 가서 설사 힘차게 시작되고 또 환희에 찬 환영을 받는다고 해도, 나는 것은 이미 때가 너무 늦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너무 늦은’이라는 것은 없고 ‘늦은’이라는 것만 있는 것인가. ‘늦은’ 것이 ‘결코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것인가. 나는 모르겠다. (199~200쪽)  



한나는 내가 알아온 어떤 주인공들보다 매력적인 인물이다.  그녀가 명백하게 끔찍한 죄를 지었다. 그녀는 잘못을 시인하지만 묻는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했겠냐고. 판사도 검사도 변호사도 대답할 수 없는 그 질문은 이 책을 읽고 있는 읽었을 모든 사람을 향한다. 나라면 과연 어땠을까. 그 아비규환의 전쟁터에서 운이 좋아 살아남는 거 외에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누가 그녀에게 쉰들러가 될 것을 요구할 수 있을까.  

그녀는 문맹이었다. 문맹 때문에 스스로를 변호할 기회마져 버리고, 18년의 수형생활을 선택한다. 글을 쓰거나 읽지 못한다는 수치감 때문에 자존심을 지키려는 그녀의 필사적인 노력은 눈물겹고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그래서 긴 수형생활을 마감하고 바깥세상으로 나오려는 찰나 목을 매 죽은 선택에 대해서 왜냐고 물을 수가 없었다. 그 긴 시간을 견뎌놓고 드디어 글을 읽고 쓸 줄도 알게 되었는데 어째서, 왜, 그녀는 죽어야 했느냐고?   

솔직히 충격이고 상상 밖이었다. 왈칵 눈물이 쏟아질 만큼 어안이 벙벙했다. 그녀가 그에게 무엇을 바랜 것, 새로운 직장이나 집, 가구가 아니라는 건 분명하다. 더이상 소년이 아닌 그에게서 돌이킬 수 없는 시절의 순수와 반짝임을 기대하지도 않았을 터다. 그녀를 체념케 하고 절망케 하고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자신은 놓치 않고 있던 끈을 놓아버린 그를 대면하는 순간부터였다. 사람이, 사랑이 변하고 늙고 병들어 복구불능이 되어지는 너무나 당연한 수순들이, 면역력을 상실한 한나에겐 치명적이었을까. 아니면 단지 그녀라서 그랬던 것일까. 진실은 한발자국씩 느리다. 한나가 기다려온 편지가 결코 오지 않은 것처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째서 그 열 살짜리 말라깽이 소녀가 이토록 오래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 것일까........

그녀는 방과후에 다가와 내손을 잡았다. 그 사이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것뿐이다.

하지만 아오마메는 그때 그의 일부를 가져가버린 모양이다. 마음이나 몸의 일부를. 그리고 그 대신 그녀의 마음 혹은 몸의 일부를 덴고 안에 남기고 갔다. 아주 짧은 시간에 그런 중요한 주고받음이 이루어졌다. (BOOK2,110페이지)

 

디킨즈의 소설에 나오는 고아들처럼. 상처받은 영혼이 상처받은 또 다른 영혼에게 끌리듯이 그렇게 무심코 다가갔던 소년과 소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스침과도 같은 마주침의 기억이 영혼에 각인되었다. 삶의 목적이 되고 존재의 이유가 될 만큼의 무게감이다.

 

손에서 놓을 수가 없도록 재미있다. 아주 빠르게 읽힌다. 무섭고도 두려워서 타본 적 없는 롤러코스터가 이럴까. 흥미와 스릴, 연민과 안타까움, 조바심과 기대치의 카타르시스가 마치 내면에서 폭발하는 듯했다.

 

덴고와 아오마메. 그들이 언제쯤 어떻게 만나질까 하는 당연한 기대는 나뿐일까. 이 소설에 빠져든 사람 전부가 아마도 똑같은 예상과 추측을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당연함이 비극의 전조라는 것도 짐작한다. 그렇지 않다면 너무 평범해져 버리니까. 
 

후카에리는 부서질 듯 연약한, 매혹적인 이미지에 반하여 실제는 팜므파탈적이다. 의도하였건 의도하지 않았건 그녀의 ‘자각’으로 인해 시작되었으므로. 아버지, 후카다가 리시버가 된 것도 그로인해 참을 수 없는 고통 속에 던져진 것도, 의지와는 무관하게 십대의 어린 소녀들과 성관계(다의적인 교접)를 가지게 된 것도 그리하여 아오마메로 하여금 그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전가하는 것도, 모두 시작은 후카에리였다. 그녀는 아오마메가 간절히 간절히 원하지만 가지지 못했던 사람(혹은 사랑)도 아주 쉽게 갖는다.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 라는 선한 눈망울로 응시하면서. 한 세계를 깨웠고 그 세계에 반하여 도피하여 ‘공기번데기’라는 소설을 세상에 내놓아 대항마를 세운 장본인이다.

 

내 의문은 새로운 리시버가 된 덴고의 역할이다. 그는 첫 번째 리시버였던 후카다와 다른 역할인가. 죽음에 이르러 공기 번데기가 된 아오마메를 과연 구원할 수 있을까. 그들의 사랑은 이루어질까. 후카에리는 선일까 악일까.

 

이 세상에는 절대적인 선도 없고 절대적인 악도 없어. 선악이란 정지하고 고정된 것이 아니라 항상 장소와 입장을 바꿔가는 것이지. 하나의 선이 다음 순간에 악으로 전환할지도 모르는 거야. 중요한 것은 이리저리 움직이는 선과 악에 대해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지. 어느 한쪽으로 지나치게 기울면 현실적인 모럴을 유지하기가 어렵게 돼. 그래, 균형 그 자체가 선인게야. (book2,289p) 
 

아오마메, 나는 반드시 너를 찾아낼 거야~  

무슨 일이 있건, 그곳이 어떤 세계이건, 그리고 그녀가 누구이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08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덥석 손이 가서 읽어지는 책이 아니었다. 몇 번이나 제목만을 읽고는 지나쳤다. 결국에는 에라 모르겠다 싶어(딱히 읽을 게 없기도 했지만) 읽고 말았다. 역시나 눈물 콧물 징징 흘리고 아침에 눈이 퉁퉁 부은 눈을 얼음으로 찜질하는 사태 발생했지만, 오랜만의 만족스런 책읽기였다. 냉동실 구석, 무척 오래된 청국장 한 덩이를 발견해 끓여놓고는 그 여전한 맛에 새삼 놀라는 기분이랄지. 암튼, 제목 타령에 대한 변을 하자면 ‘엄마’라는 단어가 세상 누구에게나 그리움의 원천은 아니라는 거다. 모정의 축복이 비처럼 내리기도 하지만, 에누리도 없이 가혹하게 버림받는 경우도 있고, 극단적인 좋은 엄마가 절반이면 나머지 절반의 나쁜 엄마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엄마가 그리운 사람들이 읽고 지나간 자리에 남아서 뒤늦게 그런 ‘엄마’를 가져보지 못한 사람이 읽을 수도 있다는 뭐 그렇고 그런 넋두리인 셈이다. 나의 어린 시절 엄마의 자리에는 늘 할머니가 계셨다. 소풍 때도, 장에 가는 날도, 논일 밭일을 하던 아스라한 기억 속에도 온통 할머니 뿐, 어디에도 엄마는 없었다. 돌아가신 것도 아니고 같은 집에 살고 있었는데, 왜 그랬는지 당사자인 엄마에게 물어본 적이 없으니 여전히 모르겠다. 그런고로 내게 ‘엄마’라는 호칭은 낯설음이다. 부르기 위해 있는 이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아무런 감동도 여운도 느껴지질 않는 글자다. 자라면서 내 엄마가 보통의 다른 엄마들과 다르다는 깨달음은 고스란히 상처로 남았다. 다르다는 건 그게 무엇이든 행복과는 멀어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노련하고 노련한 언어의 연금술사가 빚어놓은 ‘엄마’가 참 부러웠다. ‘엄마’의 고통스런 세월에 눈물 흘리고, 분노하고, 안타까움을 느끼면서도 그녀가 탐났다. 내 눈물은 그녀가 가여워서이기도 했지만 가질 수 없었던 것에 대한 욕심이었던 것이다. 소설가라는 예술가가 빚어놓은 ‘엄마’는 전설 속의 영웅이나 다를 바 없다. 동경하고 원하고 탐이 나지만, 소망일뿐이다. 내 것이 될 수 없는 타인이 것을 향한 시기심, 질투, 분노로 인한 외면이 이 책에 대한 솔직한 평가다. 물론 ‘엄마’에 버금가는 할머니가 계셨고, 그걸 자랑스러워했고, 아직도 최고라고 믿지만 마음 구석에는 빈자리가 있고, 그것은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째다'로 소설은 시작한다. 길을 잃으신 할머니가 파출소에 계시다는 전화를 받고 달려간 어느 날의 저녁이 떠올랐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생각나지 않았다는 할머니를 잡고 엉엉 울었던 기막힌 기억. 그렇게 몇 번이나 할머니는 길을 잃고 해매셨다. 그게 치매의 시작인줄 그때는 몰랐다. 소설 속 ‘엄마’에 버금가는 할머니의 굴곡진 삶은 내게도 우산처럼 드리워져 영향을 미쳤다. 전쟁과 가난 속에서 두 아들을 잃는 고통에 이르기까지 현재의 눈으로는 도무지 있을 법하지 않은 소설 같은 얘기들을 인이 박히도록 듣고 또 들었다. 이제는 귀도 눈도 기억도 온전하지 않은 할머니께 이 소설을 읽어드려야겠다. 여기 할머니처럼 산 ‘엄마’ 이야기가 있노라고. 할머니처럼 그녀도 과거의 망령에 시달리고, 후회하고, 원망하고, 죽은 이를 그리워하고, 고통에 사무쳤노라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엄마를 부르며 엄마와 살았던 집으로 돌아갔노라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