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나의 글씨체를 들여다보면서 그것을 쓰느라고 그녀가 얼마나 많은 힘을 소모하였으며 또 얼마나 투쟁을 해야 했을지 깨달았다. 나는 그녀가 자랑스러웠다. 동시에 나는 그녀가 불쌍했다. 너무나 지연되고 실패한 그녀의 인생이 불쌍했고, 그녀 인생 전체의 지연과 실패가 가엾게 여겨졌다. 어느 누가 제때를 놓쳤을 경우, 어느 누가 무엇을 너무 오랫동안 거부했을 경우, 또 어느 누구에게 무엇이 너무나 오랫동안 거부되었을 경우, 그것이 나중에 가서 설사 힘차게 시작되고 또 환희에 찬 환영을 받는다고 해도, 나는 것은 이미 때가 너무 늦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너무 늦은’이라는 것은 없고 ‘늦은’이라는 것만 있는 것인가. ‘늦은’ 것이 ‘결코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것인가. 나는 모르겠다. (199~200쪽)  



한나는 내가 알아온 어떤 주인공들보다 매력적인 인물이다.  그녀가 명백하게 끔찍한 죄를 지었다. 그녀는 잘못을 시인하지만 묻는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했겠냐고. 판사도 검사도 변호사도 대답할 수 없는 그 질문은 이 책을 읽고 있는 읽었을 모든 사람을 향한다. 나라면 과연 어땠을까. 그 아비규환의 전쟁터에서 운이 좋아 살아남는 거 외에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누가 그녀에게 쉰들러가 될 것을 요구할 수 있을까.  

그녀는 문맹이었다. 문맹 때문에 스스로를 변호할 기회마져 버리고, 18년의 수형생활을 선택한다. 글을 쓰거나 읽지 못한다는 수치감 때문에 자존심을 지키려는 그녀의 필사적인 노력은 눈물겹고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그래서 긴 수형생활을 마감하고 바깥세상으로 나오려는 찰나 목을 매 죽은 선택에 대해서 왜냐고 물을 수가 없었다. 그 긴 시간을 견뎌놓고 드디어 글을 읽고 쓸 줄도 알게 되었는데 어째서, 왜, 그녀는 죽어야 했느냐고?   

솔직히 충격이고 상상 밖이었다. 왈칵 눈물이 쏟아질 만큼 어안이 벙벙했다. 그녀가 그에게 무엇을 바랜 것, 새로운 직장이나 집, 가구가 아니라는 건 분명하다. 더이상 소년이 아닌 그에게서 돌이킬 수 없는 시절의 순수와 반짝임을 기대하지도 않았을 터다. 그녀를 체념케 하고 절망케 하고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자신은 놓치 않고 있던 끈을 놓아버린 그를 대면하는 순간부터였다. 사람이, 사랑이 변하고 늙고 병들어 복구불능이 되어지는 너무나 당연한 수순들이, 면역력을 상실한 한나에겐 치명적이었을까. 아니면 단지 그녀라서 그랬던 것일까. 진실은 한발자국씩 느리다. 한나가 기다려온 편지가 결코 오지 않은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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