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름과 미루기의 결과로 어제 요리 내용을 기록하지 못함. 이 시절의 감자는 싹이 났거나 날 준비를 하거나, 조만간 먹을 수 없는 상태가 된다. 그래서 감자채볶음을 하기로 함. 김수미의 조리법으로 할까 하다가 찾기가 귀찮아서 그냥 대충 과거에 하던 기억을 더듬어 만듬. 기름에 마늘 볶다가 소금에 버무려 놨던 감자채를 넣고 휘젓기. 청양고추랑 파 준비하고 소금 후추 설탕 약간 넣고 볶기. 고추 파 넣고 뚜껑 덮어 놓기. 감자가 익으면 먹기. 그냥 대충 만든 것 치고는 먹을 만하다. 성의 없는 요리법이지만,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는 거 보다는 나으니까 위안을 삼는다. 완성된 요리는 동생과 나눠 먹는다.

 

댕댕이들과 카페를 가면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격하게 반기거나 완곡히 싫어한다고 표현하거나. 어느쪽도 취향이니 받아들인다. 반기는 주인도 다른 손님이 있으면 실내에 들어오라는 말은 아낀다. 다행히 테라스에 테이블이 있으면 다행이지만 그도 없으면 쓸쓸히 돌아선다. 그럴싸한 테라스가 있는데, 댕댕이 출입을 금하면 좀 실망하고 의기소침하다. 테이크 아웃 커피 한 잔을 들고 공원 비스무리한 공간을 찾아 헤매다가 않을 자리를 찾으면 행운이고 아니면 서서 걸으며 커피를 마셔야 한다. 댕댕이들 간식도 길 가에 주저않아 먹인다. 적응하면 나름 괜찮다. 인간도 댕댕이도 적응의 동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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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 미니멀한 라이프를 지향한다. 얼마전 부터는 냉장고 파먹기를 실천하고 있다. 냉동실 구석에 언제적 건지도 모를 잔멸치를 있길레 드디어 볶았다. 삼등분을 해서 동생까지 주고나니 나름 뿌듯하다. 요리도 하고 나눔도 했으니 일석이조다.

 

하루에 몇 개의 책이나 옷을 정리해 버리는 일상은 보고 듣던대로 유익하다. 보관하거나 진열하고 있던 물건이 사라지는 동시에 걱정거리 하나를 덜어내는 기분이랄까? 버리면 채우기 위해 사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기우였다. 버릴 물건을 사지 않으려는 신중함이 생겼다. 일회용품에 대한 소비와 구매도 현격히 줄었다. 쉽게 쓰고 버릴 물건인지 아닌지를 꼼꼼하게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다. 소비를 지향하는 자본주의 사회가 낳은 온갖 넘쳐나는 폐기물들과 쓰레기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되었다. 일회용이 된 가구들과, 멀쩡한 생활용품이 버려져 동네 곳곳에 방치되고 있는 문제도 자각하게 되었다.

 

처치곤란 쓰레기의 나라, 마구 사고 마구 버리고, 마구 먹어대고, 오물로 토해내는 암울한 디스토피아. 결코 지나친 걱정거리들이 아닌, 지금 우리 주변의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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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금치국을 끓이다. 하루 한가지 요리를 하자라는 결심이 불현듯 들면서다. 이제까지 나는 하루 한가지의 요리조차도 하지 않고 살았노라는 고백이기도 하다. 시금치국이 요리냐 하겠으나 내게는 엄연한 요리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니 당연히 엄청난 시간을 투자한 요리다. 적당히 육수 만들고 된장 풀어 끓인 시금치국은 사실은 맛은 없었다. 맛은 없지만 남기지 않고 끝까지 먹어치울 것이다. 누군가를 위한 음식이 아닌 나 자신을 위한 음식에 호불호는 없다. 나는 미각을 상실한 배고픈 짐승일 뿐이니까.

 

노안이 시작된 어느날 부터 책읽기는 멈춤 상태다. 안경은 세 번째 맞췄다. 눈이 아프거나 두통이 생긴다는 이유로 멋지지도 돋보기 안경이 줄줄이 세 개다. 늘어선 안경을 보면 웃프다. 나이듦을 실감한다. 여전히 적응중이다.

 

더이상 스키니진을 사지 않겠다는 결심은 결국 또 다른 스키니진을 사면서 무너졌다. 나이도, 몸매도, 삶의 질도 적당히 넉넉한 옷을 사 입어야한다고 가리키는데, 또 다시 스키니진을 그것도 구멍 숭숭 뚫린 찢어진 진을 사고야 말았다. 이것이 마지막이다. 진심으로 이것이 마지막이다.

 

커피와 수다와 시간은 참 잘 어울리는 조합이다. 아무리 잿빛 하늘이 암울하고, 미세먼지로 코가 막히고 목이 아파도, 음악이 흐르는 아늑한 공간에서의 커피와 수다, 흐르는 시간은 디저트처럼 달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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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최대 문제는 자나깨나 미세먼지이다. 경제보다는 환경이 우선인 정책이 필요하다는 누군가의 역설처럼 이제 공기의 질은 사느냐 죽느냐의 갈림길이다. 나의 노력과 개선만으로 어쩌지 못하는, 몇몇 사람의 의지나 힘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국가적 재난이라는데 이견이 없다. 오감으로 느끼는 이 불안과 공포의 정체에 대해 사실 그동안은 설마 하면서 웃으며 지나쳤다. 바로 얼마전까지도 그랬다. 아무 생각없이 나와는 무관한 일처럼 흘려 듣고는 했다.

 

그런데 이번 주 내내, 안개처럼 자욱한 미세먼지의 막을 뚫고 고난의 행군이라도 하듯 산책을 다니면서 그 무서움을 실감하게 됐다. 인간이야 어찌어찌 마스크를 쓴다 해도 두 마리의 강아지와 동행은 선책과 필수 사이에서 무한한 고민거리를 안겼다. 집 안에 갇혀 창문 닫고 머무는 게 최선일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아하는 산책 시간을 유지해야 하는 건지의 기로였다. 참을만큼 참고 웅크리고 있다가 결국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룰루랄라 날뛰는 댕댕이들을 앞세워 거리로 나선 것은 진정 무엇이 최선인지 판단이 서지 않아서였다.

 

무엇이 건강한 삶일까. 웅크리고 갇혀 있는 것? 죽음을 무릅쓰고 즐거움의 원천인 산책을 즐기는 것? 거리를 따라 걸으며 사람들의 우중충한 표정과 바쁜 발걸음과 마주치며, 세기말의 우울과 불안의 징조를 체감한 것은 지나친 억측이고 과대망상일까. 과연 이 미세먼지라는 대재앙으로부터 도피처는 있을까? 어떤 임산부가 이민과 이주를 검토한다고 하던데, 그 혜택이 누구에게나 주어지지는 않을 터. 가장 취약한 계층은 떠날 수도 숨을 수도 없는 이 생을 먼지 구덩이 속에서도 연명해 나갈 것임을 안다. 사회적 약자에게는 선택권이 거의 없다. 그 자리를 지키는 것만으로도 힘이 든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고 굳게 믿고 살았다. 그러나 이제 그 신념이 흔들리고 있다. 내일의 태양은 뜨지 않을 수도 있다. 이제 숨쉬는 권리조차 무제한, 무료로 누릴 수가 없게 될 거라는 지극히 합리적인 의심과 불안이 또아리를 튼다. 저 품페이의 최후의 날이 머리를 스치는 것은 과대망상일까.

 

공상과학영화를 많이 본 후유증이라고 누가 말해줬음 좋겠다. 나와 댕댕이들은 아름답고 찬란한 봄을 맞이할 거라고.... 누구보다 낙관적으로 천하태평으로 살아가는 한량이 꾼 어처구니없는 꿈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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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흐른다는 말이 사실일까.

오랜만에 만난 친구나 지인들을 보면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이에겐 물흐르듯 느슨하게 고요한가 하면 또 어떤이에겐 혹독한 태풍이나 폭우처럼 할퀴고 지나가니까. 찰나처럼 빠른 시간이 있고 억만겁처럼 느껴지는 지루하고 무료한 시간이 있으니까. 행복은 짧고 고통은 길게 느껴지는 법이다. 불행은 끝도 없이 계속되는 듯한데 찬란한 기쁨은 왜 이리 덧없이 빠를까.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이를 만났다. 즐겁고도 슬픈 이야기를 나눴다. 더 살아보아야 하지만 삶은 여전히 녹록치 않고, 우리들의 앞날은 여전히 안개 자욱한 불확실성이었다. 위로 받고 위로 건네고 밥 먹고 커피 마시며 나눠 가진 오늘, 우리들의 시간은 어떻게 기억될까, 좋은 날일까. 의미는 너와 내가 정하기 나름일 것이다. 나는 이미 좋게 가져가기로 정했다. 너의 시간은 네 뜻대로 정하리.

 

어디서 어떻게 누구와 어우러져 살든, 올곧은 영혼과 마음 잃지 말기를 바랬다. 우리에게 내일은 여전히 어둡고 긴 터널이지만, 우리는 천천히 걷는 법을 알고 있으니까. 결코, 넘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느리게, 한 발 한 발 걸어가되, 가끔은 멈추어서 쉬어도 가되, 주저앉지는 말도록 하자.

 

친구야.

나의 행복과 너의 행복을 위해 기도할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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