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최대 문제는 자나깨나 미세먼지이다. 경제보다는 환경이 우선인 정책이 필요하다는 누군가의 역설처럼 이제 공기의 질은 사느냐 죽느냐의 갈림길이다. 나의 노력과 개선만으로 어쩌지 못하는, 몇몇 사람의 의지나 힘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국가적 재난이라는데 이견이 없다. 오감으로 느끼는 이 불안과 공포의 정체에 대해 사실 그동안은 설마 하면서 웃으며 지나쳤다. 바로 얼마전까지도 그랬다. 아무 생각없이 나와는 무관한 일처럼 흘려 듣고는 했다.

 

그런데 이번 주 내내, 안개처럼 자욱한 미세먼지의 막을 뚫고 고난의 행군이라도 하듯 산책을 다니면서 그 무서움을 실감하게 됐다. 인간이야 어찌어찌 마스크를 쓴다 해도 두 마리의 강아지와 동행은 선책과 필수 사이에서 무한한 고민거리를 안겼다. 집 안에 갇혀 창문 닫고 머무는 게 최선일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아하는 산책 시간을 유지해야 하는 건지의 기로였다. 참을만큼 참고 웅크리고 있다가 결국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룰루랄라 날뛰는 댕댕이들을 앞세워 거리로 나선 것은 진정 무엇이 최선인지 판단이 서지 않아서였다.

 

무엇이 건강한 삶일까. 웅크리고 갇혀 있는 것? 죽음을 무릅쓰고 즐거움의 원천인 산책을 즐기는 것? 거리를 따라 걸으며 사람들의 우중충한 표정과 바쁜 발걸음과 마주치며, 세기말의 우울과 불안의 징조를 체감한 것은 지나친 억측이고 과대망상일까. 과연 이 미세먼지라는 대재앙으로부터 도피처는 있을까? 어떤 임산부가 이민과 이주를 검토한다고 하던데, 그 혜택이 누구에게나 주어지지는 않을 터. 가장 취약한 계층은 떠날 수도 숨을 수도 없는 이 생을 먼지 구덩이 속에서도 연명해 나갈 것임을 안다. 사회적 약자에게는 선택권이 거의 없다. 그 자리를 지키는 것만으로도 힘이 든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고 굳게 믿고 살았다. 그러나 이제 그 신념이 흔들리고 있다. 내일의 태양은 뜨지 않을 수도 있다. 이제 숨쉬는 권리조차 무제한, 무료로 누릴 수가 없게 될 거라는 지극히 합리적인 의심과 불안이 또아리를 튼다. 저 품페이의 최후의 날이 머리를 스치는 것은 과대망상일까.

 

공상과학영화를 많이 본 후유증이라고 누가 말해줬음 좋겠다. 나와 댕댕이들은 아름답고 찬란한 봄을 맞이할 거라고.... 누구보다 낙관적으로 천하태평으로 살아가는 한량이 꾼 어처구니없는 꿈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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