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인생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4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6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을 읽었다......... 나를 이 세계에서 데려가주기를 기원하며. 거기는 여기보다 더 나은 곳일 때도 있고 상상보다 더 나쁜 곳일 때도 있다. 환호와 상처, 무엇이건 결과를 감당하는 건 내 몫이다. 읽지 않았더라면 다른 세계를, 사람을, 장소를 만났을까. 후회하고, 회의하고, 긍정하고, 부정한다.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은 난 어떤 책의 주인도 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책을 산다는 것, 소유한 다는 것, 읽는다는 것 그 어떤 여타의 행위도 내가 그 책의 우위에 있음은 아니다. 오히려 한 권의 책이 책꽂이에 놓일 때마다 내 몸, 혼의 일부가 종속된다. 책의 존재와 의미는 한없이 무거워, 버려야겠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엔 이미 옴짝달싹도 못하게 사지를 결박당한 이후다. 읽고 있는 책의 무거움을 알아채지 못한 가볍고 가여운 인생이다. 좀 더 오래, 미치지 않고, 읽고 싶다. 아니, 살고 싶다.  

읽는다면 즐거울 거야. 믿는다면 너는 인생을 망쳐버릴 거야. 한 발자국, 아니 두 발자국, 아니, 여섯이나 일곱 발자국쯤 멀리 떨어져야 한다. 경솔하게 손을 내밀어, 동등하리라는 착각은 금물이다. 잊지 말자. 즐거움을 얻는다. 하지만 믿지는 않겠다. 신을 불신하듯 책을 불신한다. 경외감을 품지만 두려워하고 공포에 떨지만 절대, 절대 가까이 가서 만지거나 믿지는 않겠다. 질문을 던지고 답이 없어도 화내지 않는다. 서두르거나 안달하지 않고,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그리하여 허영의 독이 중화되기를.

 

습한 십이월, 스물두 살의 합리적인 공학도. 그곳, 그 나라, 책. 읽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내던졌던. 불현듯 읽고 싶어 꺼내 든 매혹적인 그런 책이다. 전체가 아니라 한 구절이, 단어에 뒤흔들리게 하는. 결코 읽었다거나, 이해한다거나, 재미나 흥미가 있거나 없다고 말 할 수는 없지만 알고는 있노라고 하고 싶은. 첫 번째를 읽다가 그 내용과는 무관한 그러나 책이라는 같은 이름으로 불린다는 이유로 오만가지 상념들에 둘러싸여 주저앉은. 이상하고도 이상한, 어쩌면 마법에 걸린 책이 며칠 동안 내 앞에 펼쳐져 있다. 느리게 나아가지만 서둘지 않는다. 일부러 다른 곳을 바라보고, 다른 것을 뒤적이고, 읽다가 말다가, 밑줄을 그어놓은 처음으로 돌아갔다가 원래의 페이지로 와서 새로운 밑줄을 긋기를 반복한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읽을까, 궁금하다가 이내 잊는다. 

 

나도 그런 이름이 있었다면, 나도 그런 아버지가 있었다면, 나도 다른 사람이 되고 싶었을 거야. 이 책을 지금 이 순간 읽고 있는 건 우연이다. 반드시라고 말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가 말하는 것, 원하는 것을 알듯도 싶지만 아니어도 괜찮다. 미로에 갇혔지만 두렵지 않은 것처럼, 길이 계속되어 어딘가로 통하는 한 걷는 것을 멈추지 않을 것처럼. 읽고 질문을 던지고 답을 모른다해도 상관하지 않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루고 미루던 숙제를 해결하듯, 병원엘 갔다. 누군가 뒷덜미를 움켜쥐고 병원 앞에 던져줬음 싶은 치과와 겸사겸사 근처에 있는 안과까지. 스케일링은 굳이 할 필요 없다는 얘길 듣고 약간 시리고 부은 잇몸만 간단하게 치료하는 걸로 끝. 환절기마다 의례 겪는 일이라 등한시했던 눈은 생각 외로 심각하다는 말에 좀 놀랐다. 너무 심하게 비벼서 눈 안과 밖이 헐 지경이란다. 좀 강한 스테로이드 안약이랑 방부제가 안 든 일회용 안약을 처방받고 알레르기 약 아침과 저녁 분 3일치를 처방 받았다. 부작용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말에 강한 거 말고 효과가 늦어도 좋으니 약한 거 달라고 했더니 그래도 며칠은 써봐야 한단다. 약국언니한테 물었더니 별로 강한 것도 아니라고. 약국에서 느끼는 거. 이 사람들 자신들이 배운 지식의 몇 프로나 써 먹을까. 어떤 질문이건 건성이고 병원에서 받아온 처방대로 약 짓기만 분주하다. 약국이란 약을 파는 마켓 이상도 이하도 아닌 곳. 처방전을 들고 오는 손님에게는 서비스 만점이고 그 외는 대충인 듯 기분이 들고. 병원과 약국 사이의 어떤(?) 거래도 궁금하고. 집 근처에 아주 바쁜 내과가 있는데(당뇨 전문) 그 아래 약국의 주인과 혈연관계라더라, 는 소문이 있다. 뭐, 그럴 수도 있는 거지만.

오는 길에 산 사과가 겁나게 달다. 트럭 한가득 쌓인 붉은 사과가 어찌나 탐스럽던지 풍덩 빠지고 싶더라. 사과는 이맘때가 가장 싱싱하고 맛나다. 또, 어떤 과일도 사과맛에 비할 바가 아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늙은 호박이 세 통 생겼다. 항아리처럼 생긴 호박은 시골 다녀온 동생이 업어왔고, 팔뚝마냥 길쭉하니 매끄럽게 잘 익은 건 앞집에서 주셨고, 긴 것과 둥근 것의 중간 정도 되는 곰보마냥 얽은 흔적이 표면에 있는 건 오가며 인사 나누는 아주머니가 선뜻 안겨 주셨다. 늙은 호박 아니 탐스럽게 익은 호박을 윤기 나도록 닦아서 신발장 위에, 마루에, 방에 하나씩 놓아두고 바라본다. 요리는 모르겠고 두고 보는 용도로 제격이다. 가을이다. 고향은 가을걷이로 바쁘다. 작년부터인가. 매상(추곡수매)을 안 하면서 쌀의 수확량은 급격히 줄었다. 힘들어 하실 때마다 쌀농사를 줄이라고도 했었다. 논 위에 버섯막사, 축사가 세워진 것도 옛일이다. 그것들도 곧 헐리어 잡초만 무성한 잊혀 진 땅이 될 거다. 부모님 살아서는 쌀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후는 어찌될지 알 수 없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잉크냄새 2007-10-16 1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걷이 끝난 논은 얼마나 허전할까요.

겨울 2007-10-17 1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전하다는 생각보다는 한가로워 좋다는 생각이 먼저였어요.
정말 징그럽게 바쁘니까요.
요즘은 그럴 여가도 못 내지만, 텅 빈 논을 가로질러 걷는 걸 좋아해요.
이를테면 지름길.
 

 

 

 

 

 

 

찰라 속으로 들어간다




벌 하나가 웽 날아가자 앙다물었던 밤송이의 몸이

툭 터지고




물살 하나가 스치자 물속 물고기의 몸이 확 휘고




바늘만 한 햇살이 말을 걸자 꽃망울이 파안대소하고




산까치의 뾰족한 입이 닿자 붉은 감이 툭 떨어진다




나는 이 모든 찰라에게 비석을 세워준다




오랜만에 내 맘을 홀리는 시집(가재미)을 샀다. 근데, 가재미가 어떻게 생겼더라.




***엄마가, 도토리묵을 쑤어 오셨는데 함지박 안에서 출렁거린다. 적당히 굳어야 모양 좋게 잘라낼 텐데, 하룻밤을 재워도 출렁거린다. 시외전화를 걸어 왜 이러느냐 하소연을 했더니 엄마의 한숨 섞인 말; 누가 도토리와 밤을 반반으로 섞어 묵을 만들면 맛이 좋다하길 레 덥석 사고를 쳤노라고.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굳지를 않아 썩은 밤새 한잠도 못 잤노라고. 그리하여, 당분간 흐물흐물 출렁거리는 도토리와 밤이 섞인 묵을 열심히 먹지 않으면 안 된다. 언제는 묵 맛을 알고 먹었나. 간장 맛으로 겨우 먹었지. 청포묵, 메밀묵은 아는데 밤묵은 처음이다. 그런 묵이 정말 있기는 한 건가. 아님 울 엄마가 순진하신 건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해질녘에는 주위가 어두워져 가는데다 피로가 겹쳐 우울해졌지만, 해가 저물어버리자 오히려 조금씩 힘이 나기 시작했다. 자신이 새로운 세계의 주민이 된것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낮의 세계는 끝났지만, 밤은 이제 막 시작됐을 뿐이다. 모든 것의 시작은 언제나 기대에 가득 차 있다. (105쪽)

그들이 원한 것은 아니지만, 태어남과 동시에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인 관계. 아무리 외면해도 없던 일로 되돌릴 순 없는. 그 소년과 소녀가 밤의 피크닉을 떠난다. 그리고 길 위에서 용서와 화해가 이루어진다.  그들이 치뤄내는 성장통이 어찌나 달콤한지.

낮보다는 밤을 좋아한다. 밤의 세계에는 보이지 않는 마법의 장막이 드리워져 있다. 일반적인 피크닉은 상식적으로 낮에 이루어진다. 일본의 고등학교에 이런 행사가 정말 있는 건가. '밤의 피크닉'은 멋진 발상이다.   

중학교 2학년인 현에게 책을 건넸지만 그 아이가 어떤 방식으로 읽어낼지는 모르겠다. 작고, 약하고, 울보였던 현이는 어느덧 남자의 모양을 갖추고 목소리를 깐다. 요즘은 한창 농구에 열중인데, 성장을 지켜본 입장에서는 길쭉길쭉한 손가락 발가락만 봐도 감회가 새로울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예쁜 건, 간간히 건네는 책들을 대부분 소화해 낸다는 것. 운동과 공부하는 틈틈히 소설을 읽는 소년의 모습은 아름답다.   

'도서실의 바다'는 묘한 단편들이다. 위의 책 외에는 온다 리쿠를 몰랐기에 더욱 생경하다. '밤의 피크닉'에도 이야기의 전반적인 흐름과 엇갈리는 미스테리 요소가 끼어 있다. 그 부분이 중요한 열쇠라서 뜨악스럽기도 했다. 단편들은 하나같이 미스테리와 판타지가 버무려진 영화의 줄거리를 읽는 느낌이다. 이 작가의 책만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몰아서 읽으면 재미있을 지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