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시대 - 전2권 세트
노자와 히사시 지음, 신유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6년 12월
평점 :
절판


 

불행히도 드라마 ‘연애시대’를 보질 못했다. 주인공이 감우성과 손예진이고 보석처럼 빛나는 연기를 했다는 평을 읽긴 했다. 하지만 과연 드라마를 봤다면 이 소설을 기꺼이 읽었을까? 아마도 아니었을 거다. 무척 멋진 드라마라는 환상을 어느 정도 품고 있었기에 주저 없이 손을 뻗었던 것이다. 그러나 바꾸어서 소설을 미리 읽었고 드라마로 만들어진다는 걸 알았다면 눈을 크게 뜨고 드라마 시간을 기다렸을 것이다. 미묘한 심리지만 그런 거다.




남자와 여자는 이혼을 했다. 것도 일 년 삼 개월 전에. 그럼에도 주구장창 이런 저런 이유를 대며 만남을 지속한다. 이혼의 원인이 폭행도 바람도 아니고 죽도로 싸우다 환멸을 느낀 것도 아니므로 친구로 지내지 못할 것도 없다고 변명을 하면서 입버릇처럼 서로에게 새로운 사랑을 결혼을 종용한다. 네가 먼저 해라. 그럼 나도 하겠다. 아니다. 네가 먼저 하는 게 좋겠다. 그렇다. 척 들어도 마음과는 다른 말임을 알겠다. 미련이 철철 넘치는 게 보인다. 쿨한 관계? 그런 게 있을 리가 있나. 그들의 문제는 제대로 된 이혼의 과정을 거치지 않았으므로 이혼 후에라도 부딪치며 싸우며 정을 떼야 한다는 진단도 얼핏 수긍이 간다. 문제는 그들의 이혼은 아기를 잃은 게 원인이었고, 서로에게 품은 연민과 자책 때문이었고 시간이 흐르고 만남이 거듭 되도 이혼을 했던 당시의 상황에서 한 걸음도 떼지 못했다는 것이다. 여전히 오기와 자존심을 내세워 상대가 행복하면 내 마음쯤은 포기하겠노라 큰소리친다. 이타심도 정도가 있다. 이 정도면 부처님도 돌아앉겠다.




제목이 ‘연애시대’인 게 이유도 있었다. 결혼보다 연애. 이혼 후의 연애가 최고라는. 뭐 그런 건가? 이러니 적당히 잘난 남자와 혼자 살아도 능력 있는 여자의 이혼은 오히려 낭만적이기까지 하다. 마치 이혼을 해라. 그리고 연애를 하라고 부추기는 듯도 하다. 이렇게 멋진 이혼 후의 연애가 여기 있노라고. 사랑해서 떠나보낸다는 신판조의 능수능란한 작가의 글 솜씨는 매력이 있다. 그 작가가 마흔 네 살의 나이에 자살을 했다니 더 끌린다. 이런 근사한 연애 소설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왜 죽어야 했을까. 죽음의 어떤 면이 그를 매혹시켰을까. 작가의 요절은 분명 그가 남긴 글들을 빛나게 한다. 사소한 흔적에도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남자와 여자의 이혼처럼 그의 죽음도 어쩌면 우발적인 사고일지도 모르는데. 말해 버리면 아무것도 아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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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무진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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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의 가볍고 무거움을 떠나 의사의 선고가 내려지고 결과를 받아들이기까지의 시간은 고독하다. 외딴 섬에 갇힌 듯, 노 잃은 배처럼 표류하듯, 길 잃은 아이처럼 두렵다. 내 몸의 이상을 감지하고 의사와 마주앉기까지의 과정도 쉽지 않고, 전투를 앞둔 병사처럼 마음을 다잡아 피할 수 없다면 맞서라는 교훈을 되새길 때, 혼자여야 하는 사정은 더 아득하다. 가족이 없음은 다행일 수도 있고 불행일 수도 있다. 나눠서 반이 될지 배가 될지는 겪어봐야 안다.




-가족들 이외에는 암을 알리지 마십시오. 암환자라는 걸 주변에서 알게 되면 신변을 정리할 때 불이익을 당하는 수가 있습니다. 제가 워낙 많은 환자들을 봐서 하는 말입니다.
의사가 메모지를 꺼내서 주의사항을 적어주었다. 술 담배 섹스를 끊고 잠을 많이 잘 것, 피로를 느끼지 않을 정도로 가벼운 산책을 할 것, 청국장을 많이 먹을 것, 고등어 꽁치 방어 같은 등 푸른 생선을 많이 먹을 것······· (318쪽)




어느 날 갑자기 간암을 선고 받으며 시한부 인생이 된 그 남자의 여정에 공감하는 건, 그 메마른 삶을 놓치지 않고 따라갈 수 있는 건, 전혀 상상하지 못한 질병이라는 벽 앞에 섰었던 기억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시간에 맞추어 약을 먹고 운동을 하고 먹어선 안 될 음식과 먹으면 좋은 음식을 따져 매끼마다 의무처럼 우걱우걱 먹어대는 한없이 작아지고 약해진 자신을 들여다본 사람만이 읽을 수 있다는 뭐 그런 얘기는 아니지만 아는 것과 이해하는 것은 다르니까.




장편소설을 선호해서 단편은 어지간해선 읽을 기회가 없다. 짧지만 강렬한 뭔가를 곱씹으며 그 여운을 붙들어 맬 능력도 없고. 그럼에도 가끔 경험이나 기억에 맞물린 이야기를 만나면 푹 빠져들어 단편이 이런 거구나 한다. 아마도 ‘화장’이 처음 읽은 김훈의 소설이었을 게다. 강렬하면서도 그 건조함에 질려했던 기억이 있는데, 두 번째 읽어보니 처음과는 또 달랐다. 평소 읽는 방식으로 후다닥 단편을 읽어선 안 된다는 걸 다시 새겼다. 알면서도 고칠 수 없는 습성은 무섭다. 정말 좋아한다면 그리고 여유가 있다면 한 글자 한 글자 베껴 쓰며 읽기도 좋다. ‘강산무진’도 그렇게 읽기 시작했다.




갑갑하고 건조하고 출구가 없어 때때로 숨이 꽉 막히는 나날을 굳이 소설에서 찾아 읽고 감동했느니 하는 건 거짓일 런지도 모르지만. 그건 있다. 어려서는 단지 글자 이상도 아니었을 것들이 보인다는 거. 그 이면의 이면까지도 그려진다는 거. 부끄럽지만 연륜이다. 그럴 때가 되었음을 알겠다. 그래서 작가는 집요할 정도로 독자에게 들이대는지도 모른다. 읽힐 거라는 걸 알고, 어쩌면 반복해서 읽을 거라는 걸 알고. 대단한 힘이다. 소설을 읽는 저마다의 방식은 다르겠지만 결국 길은 하나로 통한다. 김훈이라는 이름. 그의 에세이 네 권을 읽은 다음에 만난 소설집이라는 것도 의미라면 의미다.




나는 몸의 안쪽에서부터, 감당할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는 우울과 어둠이 안개처럼 배어 나와서 온몸의 모세혈관을 가득 채운다. 물기를 잔뜩 머금은 스펀지가 물을 떨구듯이, 게눈에 거품이 끓듯이 조금씩 조금씩, 겨우겨우 몸 밖으로 비어져 나온다. 그런 날 나는 대낮에도 커튼을 닫고 어두운 방 안에서 하루 종일 혼자 누워 있었다. (234쪽)




‘언니의 폐경’속 자매들은 무력하다. 그녀들의 나약과 순응과 고요는 불편하다. 남자는 인간으로서 납득하면서 여자는 어쩔 수 없이 여자여야 하는 한계와 현실은 피해망상일까. 미루다가 맨 마지막에 읽은 이유다. 그리고 숙제다. 인간으로서 공감할만한 응원하고 지양할 여자를 만나고 싶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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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기다리고 기다리던 연꽃이 드디어 피었다. 새끼손가락 한마디만한 봉오리가 진흙 속에서 빼꼼 머리를 내밀기 시작한 순간부터, 날마다 들여다보고 또 보는데, 그 감질 맛이란. 숨이 꽉 막히는 기분이랄까. 하긴 꽃뿐이 아니라 잎도 마찬가지다. 뾰족한 잎 끝이 보이는 순간부터 돌돌 말린 잎을 물 위에 꼿꼿이 세우고 있다가 서서히 잎을 펼치는 과정을 아침 점심 저녁으로 바라보는 것은 감동 그 자체다. 또, 편하게 누울 자리를 찾아서 줄기를 뻗치다가 물 위에 납작 눕거나 허공에 서 있을 때, 그 반들반들 윤이 나는 짙은 초록의 잎이 얼마나 사랑스러운가를, 타인에게 설명한다는 것은 팔불출의 짓이다. 꽃은 이른 아침 노란 속살을 내보이다가 점심이 지나면서 꽃잎을 하나둘씩 오므리기 시작하고, 급기야 저녁이 오면 봉오리 상태로 돌아간다는 것을 발견하고 탄성을 지르고, 그 봉오리가 연잎 밑으로 숨었을 때 또 감탄하느라 하루가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모르겠다. 만나는 사람마다 연꽃이 피었노라 자랑하고 구경 오는 사람마다 작은 즐거움을 나눠준 것도 착한 일이라면 착한 일일지. 이 동네에서 기르는 연꽃은 실상 두어 달 전에 이미  피고 졌다. 그러니 이 아인 귀염을 독차지하는 늦둥이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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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두 송이가 피었다가 지고, 오늘은 여섯 송이가 활짝 피어 눈이 부시다.

딱 하루밖에 살지 못하는 운명이 안타깝지만 그 화사함에 비추어 여한이 없다.

지는 꽃 뒤에는 새 꽃이 필 준비를 한다.

그녀는 지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피는 모습만을 보여준다.



일일초. 성장은 늦되더니 자그마한 키로 열심히 꽃을 피워 올린다.

화단에 심었는데, 월동을 위해 화분에 옮겨야 할지 고민 중이다.

울타리 아래 화단은 빛 보다 그늘이 많아 여러모로 열악한 환경이지만 

좁은 화분보다 선호한다.



비에 젖은 이름모를 얼룩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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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과 밤의 세계는 다른 차원처럼 극명하다.

이 소설 속에는 내가 좋아하고 연민하는 인간 군상들이 등장한다. 잠을 이루지 못하는, 깨어 있어야 하는 혹은 잠 잘 수 없는 이들의 이야기다. 밤의 매혹은 무거운 눈까풀을 밀어 올리며 새벽을 기다려본 사람만이 안다. 노동을 하건, 책을 읽건, 수다를 떨거나 술을 마시건 깊은 밤을 지나 새벽이 오고, 푸른빛이 나는 회색의 하늘을 바라보며 공중에 떠가듯이 걸어갈 때의 오묘한 충만감이란. 몸은 천근이지만 마음은 깃털처럼 가벼워 이 세상이 아닌 딴 세상을 유영하는 착각마저 든다. 밤사이 머리를 짓누르던 삶의 고민, 실연의 고통, 죽을 것처럼 괴롭던 일상의 저주로부터 잠깐이지만 해방이다. 그건 밤을 지나온 새벽의 마법이다.






딱히 하루키를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지만 그의 소설은 기껍게 읽는다. 명성에 중독된 것일까. 타성일까. 엄청 재미있다거나, 골이 아프게 딱딱하면서도 감동이 물밀듯 밀려온다거나 하는 건 아니지만, 감성을 건드리는 무언가가 있나 보다. 그 매력이 그의 책에게로 끌어  당긴다.






드디어, 부레옥잠의 꽃이 피었다. 연한 보라색의 화사한 꽃이다. 기대했던 이상으로 아름답다. 옥잠화의 하얀 꽃과 어우러진 달콤한 향에 밤새 취하고 또 취할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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