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발, 문태준 (현대시학, 2003년 8월호) 동아일보에서 발견한 시.

어물전 개조개 한 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 맨발을

내밀어보이고 있다

펄과 물 속에 오래 담겨 있어 부르튼 맨발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 갔다

저 속도로 시간도 길도 흘러왔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게 천천히 돌아왔을 것이다

늘 맨발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잃고서는 새가 부리를 가슴에 묻고 밤을 견디듯이 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픔을 견디었으리라

아, 하고 집이 울 때

부르튼 맨발로 양식을 탁발하러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

맨발로 하루 종일 길거리에 나섰다가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움막 같은 집으로 돌아오면

아, 하고 울던 것들이 배를 채워

저렇게 캄캄하게 울음도 멎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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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바타 쇼의 이 소설의 또 다른 제목은 '청춘'이다. 아마도 이게 원제이지 싶다. 내가 생각해도 내가 가진 책의 저 제목은 너무 신파스럽다. 성장통은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한번은 오는 고통스런 기억이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지만 어떤 이는 죽을 만큼 또 어떤 이는 그저 그렇다는 시큰둥한 반응이 전부일 수 있는데, 소설 속의 주인공이 겪은 성장통은 죽거나 혹은 살거나다. 그리고 소설의 매력은 타인의 견딜 수 없는 고통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경험한다는 거다. 

[나는 그 무렵 아르바이트에서 돌아오는 길에 자주 헌책방에 들렀다. 그리고 막연하게 눈에 띄는 책을 꺼내 들고 시간을 보냈다. 어떤 날은 겉표지만을 바라보면서 30분이 넘게 내내 서 있기도 했다. 그럴 때 나는 책의 제목따위를 읽는다기보다는 변색한 종이라든가 색바랜 문자, 손때 묻은 얼룩, 혹은 그 책이 지닌 음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무의미한 시간 보내기였다. 하지만 우리들의 일상 가운데 무엇인가 시간 보내기 이외의 다른 무엇이 있겠는가. 그럼에도 나는 내 나름대로 책을 사랑하기도 한다.

어느 곳이나 헌책방 앞에는 한 권에 몇십엔 정도하는 싸구려 책들이 한무더기씩 쌓여 있다. 나는 대개 그러한 책을 살 마음도 없이 손에 꺼내들고 있었던 것이다. 볼품없이 더렵혀진 책더미를 한 권 씩 살펴 나가노라면 <육아법>이라든가 <피임법>, 혹은 <혁명과 투쟁>이라는 제목의 책들과, 가끔은 영문학을 전공한 대학원생인 나조차 제목을 알 수 없는 영문학 관계의 낡은 번역서가 섞여 있었다. 번역한 사람 역시 이미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런 책을 손에 들면 본문보다는 번역한 사람의 후기를 먼저 읽었다. 거기에는 대개 아직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이 책을 일본에 소개하는 일이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에 대하여 다소 열띤 기세로 역설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 사람이 펴낸, 평생동안의 유일한 한 권의 책일런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래서 후기 역시 어느 정도 흥분한 기색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렇게나 기대하며 펴낸 책도 거의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못한 채 헌책방의 싸구려 책더미 속에 파묻혀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굳이 그러한 후기를 가지고 비아냥거릴 생각은 없다. 꽤나 점잖은 말투로 어떤 문학관의 편향성을 꾸짖는 학자투의 묵직한 어조 속에는 기묘하게도 어린아이 같은 기쁨과 삶의 중대한 문제에 영향을 주고 있다고 하는 흥분으로 인한 의식하지 못하는 쾌활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일찌기 나의 친구였던 한 여학생이 자살했을 때, 그녀의 친구들이 그 죽음을 슬퍼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드러내 보이던 쾌활함, 어쩌면 기쁨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것과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러한 옮긴이에게 있어서 책을 낸다는 것은 중대한 일이었을 테고, 그것 때문에 다소 흥분하고 쾌활해 하더라도 좋을 당연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

살아가는 일이 결국은 갖가지 시간 보내기의 퇴적으로 이루어진다면, 틈틈이 무엇엔가 몰두할 수 있거나 몰두하는 시늉을 낼 수 있는 소일거리가 있다는 건 나쁘지 않다.

나는 낡은 헌책더미 사이를 서성거리면서 생각했다. 나 역시 앞으로 반 년이 지나면 지방대학의 강사가 될 터이고, 그리고 머지않아 한 권쯤 번역서를 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때가 되면 나 역시 조금은 흥분하고 들뜬 후기를 쓸 것이고, 그리하여 얼마간은 행복해질 것이다.]

헌책방에 들르는 어딘가 느슨하고 나태한 일상 안에서 이루어진 상념이다. 이 서장을 읽어가노라면 본문에 대한 미련을 떨굴 수가 없게 된다.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권태로운 삶이 번쩍하는 무언가를 찾아서 다음 페이지를 넘기고 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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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특히 집에서 쉬는 일요일은 바쁘다. 토요일 늦은 시간까지 여유를 부리다가 정오가 가까울  쯤에 일어나는 탓도 있고, 늦은 아침겸 점심을 먹고 빨래거리를 찾아 세탁기를 돌리며 대청소를 시작해서 이불이며 베개, 방석에 앉은 먼지를 마당에 나가 털어내고, 따사로운 햇살을 듬뿍 쪼여주노라면 기분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집 밖 구석구석에 산처럼 쌓인 눈더미에서 녹아내리는 물이 졸졸 흐르는 기이한 풍경은 실로 오랜만, 눈삽을 찾아 괜히 헛손질도 해보고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을 밟고 올라서서 굴러도 보는 그야말로 망중한이다.

폭설이 내린 금요일 내내 시골에 계신 부모님은 축사 지붕에 올라가 쌓이는 눈을 끌어내리느라 구슬땀을 흘리셨다. 덕분에 큰 피해를 입지 않고 무사히 넘기셨다는 전화에 안도하는 순간에도 내 마음은 둥둥 공중에 떠 있었다. 어쩌면 내 생에 단 한 번일 눈잔치에 흥분이 되어서, 축복에서 재앙으로 이어서 지옥으로 묘사되는 나라 안 사정이 피부로 와 닿지를 않았다. 발목을 적시며 사선을 넘은 행군을 하듯 걸어온 출근길도, 퍼붓고 또 퍼붓는 잿빛 하늘의 무거움도, 까만 눈을 반짝이며 입가에 스민 미소를 감추지 못하는 아이들과 버스가 끊겨 두세 시간을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는 현실 아닌 현실을 신기해 하는 지인들의 음성에 덩달아 내 목소리도 높아졌다.

할머니에게도 동심이 있다. 꼼짝없이 방에 갇히셨다고 불평을 하시면서도 그것을 억울해 하시지는 않는다. 집 밖에 나섰다가 혹여 다치실라 절대 대문을 넘지 말라고 당부하였는데 축사에 있는 엄마가 걱정된다고 기어이 나가셨다고 뒤늦게 엄마의 전화로 알게 되었다. 못말리는 우리 할머니, 하지 말란다고 얌전히 계실 분이 아니다. 시골집은 아마도 천지분간 안갈 정도로 설경이 대단할 터이다. 당분간은 쓸쓸해 할 틈도 없으실 거다. 오늘 같은 날엔 아마도 장독대가 걱정이 되어 쓸고 닦고 하시리라.

두 조카 아이들도 행복으로 죽을 지경인 모양, 젖은 옷을 벗어놓고 다시 나가 놀더라도 이 자연의 경이를 즐기고 누리라 했다. 사는 일은 예측불허다. 곧 죽을 것 같이 괴롭다가도 어느 순간 웃음을 참지 못해 깔깔 거리고 있다.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일, 누구 탓을 하고 짜증을 부리는 일은 잠시 접어두고 격려하고 위로하며 힘을 모아서 다시 일어서기를 ... 햇살을 보니 봄이다. 눈 쌓인 3월의 봄 앞에서 흉흉했던 세간의 일들은 잠시 잊고 꿈을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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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4-03-07 2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읽다보니 그 장면장면들이 상상이 갑니다. 아름다운 산문이라는 게 바로 이거구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겨울 2004-03-08 2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지런한 마태우스님은 칭찬의 달인이십니다.^ ^
 

고추장을 담근다고 일주일 전부터 전화를 하시던 할머니, 급기야 일요일에 일을 치룬다고 통고하셔다. 토요일부터 오라는 말씀에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미뤘는데, 일요일 아침에 동생에게 전화가 왔다. 일년 중 할머니에게는 가장 큰 행사랄 수 있는 고추장 담기에 불참하면 일년내내 원망과 잔소리를 듣지 않겠느냐고 하면서 무조건 가자는 말이었다.

할머니가 낙향을 하신 지도 일년, 십여 년 사시던 곳을 떠나 새로운 환경에 어떻게 적응하실 지 걱정이 많았는데 산 것으로 치면 시골이 훨씬 익숙한 분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건강하게 잘 지내시는 것 같아서 마음이 편하다. 최근에는 동네에 목욕탕 겸 찜질방이 생겨서 이틀에 한번씩 다니신다고 좋아라 하셨다. 도시에서는 늘 기름값이 아까워 제대로 따뜻한 물도 쓰지 못하셨는데, 다행인지 할머니의 낙향에 맞추어서 목욕탕이 들어섰다. 한 달에 만원만 내면 뜨거운 물을 실컷 쓴다니 할머니가 제일로 기뻐할 일이었다.

그러나 부모님이 계시다고 해도 홀로 있는 시간이 거의 대부분이라 늘 마음이 무겁고 불편했다. 말로는 자주 찾아뵙겠다고 하면서도 게으름만 피우고 걸려오는 전화도 신간에 쫒겨 받거나 아예 걸 생각도 안하고 어쩌다 생각이 나면 죄책감에 우울한 인간이라니.

고추장, 된장 만들기를 전두 지휘하시는 할머니 팔순도 훌쩍 후반에 다다른 노인이라 믿기지 않게 기력이 좋으시다. 환갑을 넘긴 엄마의 끊임없는 질문과 손녀들의 수다에도 아랑곳없이 묵묵히 할 일을 다 하셨다. 동글동글한 옹기마다 누구거 누구거라고 하시며 장독대에 나란히 진열을 하시며 흐뭇해 하는 얼굴이 참 밝아서 마음이 훈훈했다. 할머니는 행복하셨다. 그걸로 됐다는 생각이 마냥 들었다. 더이상 연민과 동정으로 애닯게 바라보지 않아도 저렇게 당당하게 우뚝 서 계신 것을 내 짧은 잣대로 재지 말자고 생각했다. 

열 아홉에 시집가서 스물 셋에 과부가 되신 후 두 아들을 잃으셨다. 일제시대와 육이오 전쟁이 할머니 인생사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지독한 가난과 가혹한 시집살이까지 인간이 겪어야할 수난이란 수난은 온통 할머니 몫이었다. 그렇게 살아남으셨다. 거짓말하지 않고 사기치지 않고 올곧게 살아오셨다. 할머니의 인생은 내게 있어 더도 말고 이렇게만 살라는 기준이 되었다. 내 자리에서 사소한 것을 지키며 반듯하게 모나지않게 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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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4-03-02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굴동굴한 옹기'나눠주는 기쁨이 할머니에게는 일년중 가장 큰 기쁨이 아닐런지요??가장 큰 슬픈은 장맛이 변해갈때쯤이 또한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할머니의 장맛이 오래도록 맛나길 바랄께요 (줄겨찾기는 진작에 되어있었는데 글은 이제야 올리네요 반갑습니다.^^)
 

겨울생이라 입버릇처럼 '나는 겨울이 좋아' '추워도 겨울이 최고'라던 내가 올 해는 어쩐지 봄이 기다려진다. 혼자 나는 겨울이어서일까? 새삼 혼자가 되었다고 유난을 떨 이유도 없는데 원인이 있다면 그것이지라는 결론이다. 이런저런 공과금을 납기일이 지나 내고, 닫힌 대문에 낯선 메모가 남겨지고, 광고지가 마당을 어지럽히는 풍경도 이전에는 없었는데 정말 혼자라는 깨달음.

빈 방에 TV를 켜 놓는 습관이 생겼다. 주로 머무는 곳은 컴퓨터 방이면서 TV  혼자 자정이 넘도록 떠들게 놓아둔다. 적당한 소음은 정신건강에 유익하다고 생각하는데, TV 소음은 때로 수면제로도 이용한다. 자동꺼짐 버튼으로 몇 분 후를 설정해 놓고서 잠자리에 드는 것이다. 대개는 대담프로나 음악프로를 듣는 듯 마는 듯 하다가 설풋 잠이 드는데 어찌나 달콤한지 책을 읽다 졸린 것과는 비교가 안된다.  사실 TV 없이 사는 연습을 하려고 하다가도 이런 용도가 아쉬워서 없애질 못하고 있다. 스스로 생각해도 이상한 버릇이다.

겨울을 예찬하던 시절에는 봄이 오는 즐거움을 알지 못했다. 봄비에 땅이 젖는 것도 매서운 듯 서늘한 바람도 마치 처음처럼 생경하다. 요즘의 나는 걸음마를 배우는 아기마냥 신이 나서 걸어다니고 있다. 바깥으로 나가면 물씬 느껴지는 내음이 완연히 봄이다. 내의를 벗어던진 다리 사이로 스며드는 찬바람의 정체도 봄이다. 이른 봄날 아침에 발간 볼을 하고 진한 커피를 마시는 행위에서 살아있음을 절감하는 시절이다.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 수많은 날들의 반복일 뿐이지만 내 안의 무언가가 변했고 그것을 소중히 감사하게 여기는 때가 드디어 온 것인가. 

봄에는 일찍 일어나는 연습을 해야한다. 겨우내 부린 늦장이 창 턱에 걸린 햇살에게는 통하지 않을 터이다. 핸드폰의 알람을 십여분 앞당기고 일어나자마자 가벼운 스트레칭을 해야지. 그리고 봄에는 다시 산에 오를 준비도 하고, 무겁고 칙칙한 겨울 옷의 정리도 필수다. 이러고 있으니 마치 신입생같다. 새 옷, 새 신발, 새 노트와 책을  준비하고 설레이는 마음에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하던 어린 날의 내가 생각난다. 무지, 순수, 철없음의 결정체 혹은 가장 선했던 날 들.

 문득 '시지프의 신화'를 다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너무 어려서 일찍 손에 들고 읽었다가 된통 혼난 책, '인생은 무의미하다, 그러나 살아야한다.'고...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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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4-02-28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봄이 주는 마력을 마음껏 향유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