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장을 담근다고 일주일 전부터 전화를 하시던 할머니, 급기야 일요일에 일을 치룬다고 통고하셔다. 토요일부터 오라는 말씀에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미뤘는데, 일요일 아침에 동생에게 전화가 왔다. 일년 중 할머니에게는 가장 큰 행사랄 수 있는 고추장 담기에 불참하면 일년내내 원망과 잔소리를 듣지 않겠느냐고 하면서 무조건 가자는 말이었다.

할머니가 낙향을 하신 지도 일년, 십여 년 사시던 곳을 떠나 새로운 환경에 어떻게 적응하실 지 걱정이 많았는데 산 것으로 치면 시골이 훨씬 익숙한 분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건강하게 잘 지내시는 것 같아서 마음이 편하다. 최근에는 동네에 목욕탕 겸 찜질방이 생겨서 이틀에 한번씩 다니신다고 좋아라 하셨다. 도시에서는 늘 기름값이 아까워 제대로 따뜻한 물도 쓰지 못하셨는데, 다행인지 할머니의 낙향에 맞추어서 목욕탕이 들어섰다. 한 달에 만원만 내면 뜨거운 물을 실컷 쓴다니 할머니가 제일로 기뻐할 일이었다.

그러나 부모님이 계시다고 해도 홀로 있는 시간이 거의 대부분이라 늘 마음이 무겁고 불편했다. 말로는 자주 찾아뵙겠다고 하면서도 게으름만 피우고 걸려오는 전화도 신간에 쫒겨 받거나 아예 걸 생각도 안하고 어쩌다 생각이 나면 죄책감에 우울한 인간이라니.

고추장, 된장 만들기를 전두 지휘하시는 할머니 팔순도 훌쩍 후반에 다다른 노인이라 믿기지 않게 기력이 좋으시다. 환갑을 넘긴 엄마의 끊임없는 질문과 손녀들의 수다에도 아랑곳없이 묵묵히 할 일을 다 하셨다. 동글동글한 옹기마다 누구거 누구거라고 하시며 장독대에 나란히 진열을 하시며 흐뭇해 하는 얼굴이 참 밝아서 마음이 훈훈했다. 할머니는 행복하셨다. 그걸로 됐다는 생각이 마냥 들었다. 더이상 연민과 동정으로 애닯게 바라보지 않아도 저렇게 당당하게 우뚝 서 계신 것을 내 짧은 잣대로 재지 말자고 생각했다. 

열 아홉에 시집가서 스물 셋에 과부가 되신 후 두 아들을 잃으셨다. 일제시대와 육이오 전쟁이 할머니 인생사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지독한 가난과 가혹한 시집살이까지 인간이 겪어야할 수난이란 수난은 온통 할머니 몫이었다. 그렇게 살아남으셨다. 거짓말하지 않고 사기치지 않고 올곧게 살아오셨다. 할머니의 인생은 내게 있어 더도 말고 이렇게만 살라는 기준이 되었다. 내 자리에서 사소한 것을 지키며 반듯하게 모나지않게 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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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4-03-02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굴동굴한 옹기'나눠주는 기쁨이 할머니에게는 일년중 가장 큰 기쁨이 아닐런지요??가장 큰 슬픈은 장맛이 변해갈때쯤이 또한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할머니의 장맛이 오래도록 맛나길 바랄께요 (줄겨찾기는 진작에 되어있었는데 글은 이제야 올리네요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