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그들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김승욱 옮김 / 은행나무 / 201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969년에 출판된 이 소설은 저자 조이스 캐롤 오츠가 60년대 초반, 디트로이트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던 경험에서 출발한다. 자신의 수업을 수강했다는 모린이라는 학생에게 편지를 받고 연락을 주고 받게 되어, 그의 현실같지 않은 인생과 가정사를 서술하는 형식이다. 여기서 ‘형식’이라는 말을 쓴 이유는 나처럼 실화를 각색한 것으로 오해하고 읽는 독자가 또 있을까 우려하는 마음에. 720여 페이지에 달하는 책을 읽는 동안 최고의 반전은 이게 작가의 상상력으로 써낸 ‘소설’이라는 점이었다. 프롤로그에 저자가 “소설처럼 구성한 역사 기록”이자 “현실적인 유일한 소설”이라 분명히 밝혔는데도 깜빡 속다니, 이건 독자의 잘못이라기 보다는 순전히 작가가 디테일을 너무 잘 살려 냈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의 배경은 1930년대부터 1967년 디트로이트 유색인 폭동까지로, 16세 한날의 실수로 엄마가 되고 엉겁결에 결혼해 '웬들'이란 성을 얻게된 '로레타'와 그의 자녀 '줄스'와 '모린'의 시선을 넘나들며 이야기가 전개된다. 세 인물의 공통점은 자신이 속한 계급을 부정하고 중산층으로 진입하고 싶은 욕망에 따라 살아간다는 것이다. 


"오늘도 절대 남한테 휘둘려 다니지 마. 줄스한테는 이런 말을 할 필요가 없지. 세상 물정에 밝은 아이니까. 하지만 너희 둘은 멍청해서 휘둘리기 딱 좋아. 그런 일이 생기면 참지말고 확실히 말해. 어림도 없다고. 절대 남한테 휘둘리지 마." (173쪽)


엄마 로레타는 금발머리 백인인 자신의 외모로 끊임없이 남자를 유혹한다. 남에게 휘둘려 자신이 원치 않던 인생을 살고 있다 얘기하면서도 기회가 있으면 남자에게 의지하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처럼 보인다. 사춘기에 접어들어 젊은 시절의 자신과 닮아가는 딸 모린을 보고 감탄하면서도 질투하고, 새 남편과의 밀당에 있어서 딸을 이용하기도 한다. 디트로이트 폭동 이후로 집을 잃고 대피소에 갔을 때도 로레타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아이 딸린 남성일 정도로 일관성있는 캐릭터다.



온 세상 사람들의 얼굴이 모두 교활하고 분노한 표정으로 단단히 굳어 있었지만 모린 자신은 단단하고 모진 부분이 전혀 없었으므로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 침묵 속으로 기어 들어가 모든 것이 깔끔하고 단정해질 날을, 저녁 식사가 끝난 뒤 부엌을 정리하듯 자신의 인생을 정리할 수 있게 되는 날을 기다렸다. 그때가 되면 그녀 역시 남이 상처를 입힐 수 없을 만큼 단단하게 영원히 굳어버릴지도 몰랐다. (183쪽)


엄마를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그의 사랑을 갈구하는 딸 모린이 원하는 것은 평범한 삶이다. 가족, 동네사람들, 학교 선생님들 모두의 얼굴이 찡그린 채 굳어있는 모습을 보고 자신이 그런 얼굴을 가질까 두려워 하고, 엄마가 팽개친 집안일을 도맡아 하며, 제인 오스틴 소설을 즐겨 읽고 도서관을 유일한 피난처로 삼는, 지옥같은 집을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돈이라는 생각에 원조교제를 시작했으나 계부에게 들켜 폭행당하고 일년 동안 정신을 놓아버린, 복잡한 성장과정을 거친 소녀. 그가 평생 원한건 ”하나의 인간”이 되어 “단단하게 고정된 사람으로서 성공하는 것”이었다. 그가 선택한 탈출구는 남의 남자를 빼앗아 결혼하는 것. 남자, 인간에 대한 신뢰가 없는 그녀에게는 이미 한 번 결혼해 자녀와 가정을 지킨 경험을 가진 남자가 가장 안전한 사람이다. 


로레타의 장남 줄스의 삶은 두 여성의 삶과 비슷하면서도 대조를 이룬다. 빈민가 출신으로 고등학교를 중퇴하기까지 절도, 폭행 등의 비행을 저지르고 이후에도 습관을 버리지 못하지만, 백인 남성이라는 사회적 지위 덕분에 여성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기회가 많이 주어진다. 트럭 운전사, 꽃배달원, 부자 신사를 모시는 개인 운전사가 되기도 하고, 공장을 운영하는 큰아버지의 후계자가 될 뻔 하기도 한다.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 꼬박꼬박 어머니 로레타에게 돈을 보내 가족부양의 책임이행을 흉내내는 모습은, 결혼에 성공해 획득한 지위를 잃을까 두려워하고, 가족과 연을 끊는 것이 빈민층에서 벗어난 증거인양 조심스러워하는 모린과 대조된다. 줄스가 상위계급에 있어 집착하는 부분은 그가 첫눈에 반한 백인 여성 ‘네이든’을 대하는 태도에서 드러난다. 부잣집 외동딸인 네이든은 줄스에게 순수와 동경의 상징이자 욕망의 대상이다. 그녀는 그동안 줄스가 만나왔던 여자들과는 다르게 “날 멋대로 휘두르지마.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라며 따끔하게 거절하고, 줄스가 몸이 아파 자신을 돌봐주지 못하자 가차없이 떠난다. 심지어 더한 짓도 서슴지 않는다. 그럼에도 줄스는 네이든을 얻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할 준비가 되어있다. 


네이든이 등장하는 부분은 대부분 줄스의 시점에서 서술되기 때문에 좀 산만한 면이 있지만, 네이든의 말을 통해 사회의 계급 문제 뿐 아니라 젠더 문제도 부각된다는 점이 재미있었다. 네이든은 중산층(혹은 그 이상일 수도)이기 때문에 로레타, 모린, 줄스의 행동과는 확실히 구분되지만 여성이라는 점에서 ‘결혼’만이 탈출구라 여기는 로레타, 모린의 모습과 공통점을 갖는다. 당당하게 자신의 요구사항을 줄스에게 밝히는 모습, 결혼을 둘러싼 사회 규범에 굴복하고 체념하는 모습, 그러면서도 해방되어 자유를 갈구하는 모습이 공존하는 네이든은 자신 안에서 상충되는 가치에 갈팡질팡하는 느낌이었다(그래서 줄스와 함께 떠나고 싶었던 것 같기도).


여자는 꿈 같아. 여자의 일생은 기다림의 꿈이지. 그러니까, 여자는 남자를 기다리면서 꿈속에서 산다는 뜻이야. 굴욕적이지만 여기서 벗어날 길은 없어. 어떤 여자도 도망치지 못해. 여자의 일생은 남자에 대한 기다림이야. 그뿐이야. 이 꿈에는 문이 하나 있는데, 여자는 그 문을 통과해야 돼. 선택의 여지가 없어. 늦든 빠르든 그 문을 열고 통과해서 어떤 남자, 한 명의 남자에게 도달해야 돼. 여기서 벗어날 수가 없어. 결혼 상대는 누구든 상관없지만, 이 길에서는 벗어날 수 없어. (507쪽)



1967년 당시 디트로이트에는 백인이 15% 정도 밖에 없었다고 한다. 웬들 일가 식구들은 빈민가에 살고 있지만 자신이 백인임을 다행으로 여긴다. 디트로이트 흑인 폭동의 물결 가운데서 백인이라 얻는 이점도 있을 것이다. 저자가 의도하는 ‘그들(them)’이 빈민층 백인만을 가리키는지 흑인을 포함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책 뒤편에 실린 작가의 말을 통해 어느정도 짐작해볼 수는 있을 것 같다. 이 긴 소설은 정작 ‘그들’은 읽지 않지만 ‘그들’의 자녀 세대는 읽는다. ‘그들’의 아들딸들은 가족들 중 처음으로 고등학교, 대학교를 졸업했고, 전문직업 계급에 진입했다. 이들을 구분해주는 것은 부모가 자녀세대를 대견하게 여기는지, 아들딸들의 ‘상승’이 부모에게 상처를 주고 왜소하게 만드는지 여부 뿐이다. 


‘그들’의 부모세대를 대표하는 로레타와 ‘그들’을 벗어나 미국 발전의 주역인 ‘우리’가 되기 위해 몸부림치는 자녀세대 모린과 줄스를 통해 당시 미국 사회를 생생히 들여다 볼 수 있다는 점, 긴 분량에도 불구하고 몰입이 크게 흐트러지지 않을 정도로 짜임새가 좋다는 점이 이 책의 큰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넌 CIA 신원 조회에 통과한 게 자랑스럽냐?"
"그래, 자랑스러워. CIA 신원 조회에 통과한 게 자랑스럽다고. 그건 내가 충동과 감정에 져서 자신을 포기한 적이 없다는 뜻이고, 내가 계속 힘 있는 자리에 앉아 의미 있는 존재가 될 수 있을 거라는 뜻이니까. 그동안 `너희`는 밖에서 징징거리며 불평이나 하겠지…" (629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