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다고지 (30주년 기념판) 그린비 크리티컬 컬렉션 5
파울루 프레이리 지음, 남경태 옮김 / 그린비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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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익분파는 시간을 '길들이고' 인간을 길들이기 위해 역사의 과정을 늦추고자 한다. 좌익으로 돌아선 분파는 현실과 역사를 변증법적으로 해석하려 할 때 완전히 방향을 잃고 숙명론적 입장에 빠지게 마련이다. 우익분파와 좌익분파가 다른 점은, 전자는 현재를 길들여서 미래를 이 길들여진 현재로 재생산하고자 하는 반면, 후자는 미래를 예정된 것, 일종의 불가피한 숙명, 운명, 천명으로 간주한다. 우익과 좌익은 둘 다 반동적이다.

분파주의의 이 두 종류는 모두 역사를 자신의 전유물인 양 취급하면서 결국은 민중을 배제하게 되는데, 이것은 민중에 반대하는 또 다른 방식이다. 인간 해방에 헌신하는 혁명주의자는 현실을 가둬놓는 그러한 '확실성의 원'의 포로가 되지 않는다. 그 반대로 그들은 혁명성이 강할수록 현실 속으로 더 완전하게 들어가서 현실을 보다 정확하게 파악하고 변혁시킬 수 있게 된다.

자유에 대한 공포를 느끼는 사람은 해방과 자유를 위해 모험하기보다는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도피처를 찾는다. 헤겔 말에 따르면 이렇다. "자유는 오로지 삶을 담보로 걸어야만 얻을 수 있다. "

- 파울로 프레이리, <페다고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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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 아브르 - Le Havre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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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동북부의 한 항구도시, 르 아브르. 청년은 거의 없고 노인들만 사는 이 조용한 마을에 아내 아를레티와 단 둘이 사는 구두닦이 노인 마르셀이 있다. 어느 날 그 마을 선착장에 잘못 도착한 컨테이너 안의 불법이민자들이 경찰에 모두 잡혀가는데 이드리사라는 흑인소년만이 탈출한다. 소년을 발견한 노인 마르셀은 영국에 있는 그의 엄마를 찾아 밀입국시키기 위한 힘겨운 여정을 시작한다.

 

하층민들의 삶, 무표정의 표정, 침묵의 언어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의 영화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우리가 흔히 어느 곳에서나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 하층민들이다. <르 아브르>에 등장하는 인물도 아내와 단 둘이 살며 구두닦이로 벌이를 하고 아내에게 바게트 빵을 사가기 위해 매번 구멍가게에서 외상을 하는 노인과 집안일을 하며 병들어가는 아내, 이민 와서 구두닦이를 하는 동양인 청년, 또 외상을 할지 모르는 마르셀이 들어올까 바삐 셔터문을 내리는 구멍가게 부부,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으나 매일같이 저녁이 되면 라 모데르느라는 선술집에 모여 술을 마시는 노동자 복색의 사람들. 카우리스마키 영화 속의 이들은 하나같이 무표정한 표정이며 말이 별로 없다. 그리고 대사와 대사 사이에는 인과관계의 끈이 떨어져 있어 독백처럼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의도적으로 시적이거나 압축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니라 이미 눈빛만 보아도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이들 사이에 설명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그 설명이 필요 없는 대화 사이의 간극, 표정 사이의 간극, 그 빈 공간에 있는 것은 관객이 보면서 채워야 하는데, 거기에 우정, 연민, 사랑, 연대의 정이 있다.

 

꼬뮌과 연대, 그들은 그 속에서 누구나 영웅이다

 

르 아브르라는 조용한 마을에 흑인 소년 이드리사가 나타나자, 그를 도와주려는 노인 마르셀! 마을 사람들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소년이 불법이민자로 경찰에 쫓기는 것을 알고 있고, 마르셀이 하려고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며, 그를 돕기 시작한다. 영국으로 밀입국시키기 위해 돈이 필요하자 그 마을의 밴드 기타리스트 노인을 섭외하는데, 다툰 아내와 화해하기 전에는 공연을 할 수 없다고 한다. 마르셀은 그의 아내를 찾아와 화해시키고, 기타리스트 노인은 아내와 화해한 후 영웅적인 락커가 되어 공연을 한다. 경찰의 눈을 피해 소년을 숨겨 선착장까지 데려가는 일은 동양인 이민자가 맡는다. 마르셀은 공연에서 번 돈과 자신의 돈을 합쳐 소년을 영국에 밀입국시키기 위한 배에 태운다. 이 모든 과정 속에서 라 모데르는라는 선술집과 마을 곳곳에서 그들은 꼬뮌을 결성하고, 누가 누구에게 지시하거나 할 것 없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며 스스로 그들의 행동원칙을 만들어간다. 이에 경찰은 속수무책이다. 그 자발적인 꼬뮌 안에서 그들은 모두 영웅이다. 수직적인 인간관계가 아닌 수평적인 인간관계에서, 그들은 누구도 타인을 책하지 않으며 소년을 탈출시키기 위한 각자의 몫을 행한다. 그들의 무표정과 침묵 안에, 선술집의 일상 안에서 연대의 꼬뮌이 결성된다.

 

<르 아브르>가 비현실적인 동화 같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다. ‘비현실적이라고 말하는 것에는 현실 속에서 타인(소년)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는 생각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렇다, 그렇게 본다면 <르 아브르>는 비현실적인 영화다. 하지만 그것은 영화의 표면만 보는 것이다. 이야기된 것의 표면과 표면 사이에 있는 것, 프로이드가 말실수나 은유, 환유를 통해 보고자 했던 무의식, <르 아브르>의 대사 사이, 장면 사이, 표정 사이에 있는 노동자, 하층민의 언어에 주목해 본다면 <르 아브르>는 그저 비현실적인 동화만은 아니다. 불법이민자를 잡아가는 국가장치 속에서 하층민끼리의 꼬뮌과 연대는 소년을 구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국가에 대한 그들의 놀이이자, 언어이자, 문화이자, 축제이자, 투쟁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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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 The Color Of Pain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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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는 피아노공장, 마네킨 공장, 채석장, 딸기농장 등의 다양한 노동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소음에 의한 난청, 유해화학물질에 의한 암과 각종 질환, 그리고 근골격계 등의 보편적통증을 다루는 다큐멘터리다. 그런데 이 다큐멘터리는 다른 노동현장을 다룬 다큐멘터리와 무언가 다르다. 낯설음! 조금 과장해서 이야기한다면 SF영화를 보고 있는 것 같다는 현실과의 간극, 이질감이 든다. 그 정체가 무엇일까?

 

노동현장과 통증, 그 익숙한 낯설음을 직시한다.

 

먼저 이 영화는 시작부터 약 1시간 반 정도까지, 산업안전보건법에 의해 전문의가 산업현장에서 시행하는 노동자들을 진찰하는 장면과 그 노동자들이 현장에서 노동하는 장면, 쉬는 시간에 동료들과 특별한 의미없이 하는 잡담 등을 나열한다. 극영화가 아닌 다큐멘터리의 경우도 대부분 시작과 중간, 끝의 구조 속에서 사건과 캐릭터가 변화되는 서사를 담기 마련인데 이 영화는 계속 파편적으로 나열만 한다. 보통 영화라면 1편의 런닝타임인 약 1시간 반이라는 긴 시간 동안 말이다. 그런데 이 장면들, 뭔가 이상하다. 우리의 일상 속에서 그 누구나 겪고 있을법한 모습들인데, 그 장면들이 낯설다. 장면과 장면 사이의 간극, 현실과 이미지 사이의 간극, 거기서 무언가 폭발할 것 같은 위기감, 현대 산업사회가 인간의 삶의 조건을 파괴해가는 어떤 증상과 증후. 저 누구나와 다를 바 없는 노동현장의 모습을 우린 미디어를 통해 제대로 본 적이 없다. 선전선동을 위한 노동다큐멘터리를 통해서 머리띠를 두르고 투쟁현장에 선 노동자들을 봤고, 공중파와 매스미디어에서 노동현장은 그저 배경화면의 일부로 보였을 뿐이다. 그래서 우린 노동현장을 한 번도 직시한 적이 없다. 그래서 <보라>의 일상적인 장면은 낯설다.

 

구석에 세워진 카메라와 해부학적 시선!

 

<보라>의 낯설음의 또 다른 이유는 카메라의 위치에서 비롯된다. 익숙하지 않은 시점. 영화의 대부분의 장면에서 카메라는 인물중심으로 따라가지 않고 공간 중심으로 멀리서 고정되어있다. 그런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 사운드는 붐 마이크로 따로 녹음됐다. 간혹 붐마이크에 녹음된 대사와 카메라가 잡고 있는 화면이 불일치하기도 한다. 공장의 노동자와 기계들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사운드는 화면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하는 대화가 들린다. 이런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촬영방법은 공장과 노동자에 대한 조감도의 느낌이 아니라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인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해부학적인 시선에 가깝다는 느낌을 준다. 그런 느낌을 강화하는 것은 공장 장면에 이어져 나오는 전문의와의 진찰과 대화 장면 때문이기도 하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질병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거나 인식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어지는 공장 장면들은 노동조건이 인간의 삶의 조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해부학적 시선으로 보여지는 것이다.

 

<보라>는 각종 산업현장을 나열하다가 갑자기 또 다른 한 편의 영화가 시작되듯 단절되는 후반부로 진입한다. 한 인터넷 서버업체에서 투잡을 뛰고 있는 청년이 밤에 흡혈귀가 관에 들어가듯 종이박스 안으로 들어가 휴식을 취하는 장면, 한 데이터복구업체에서 디지털시대에 대해 철학을 이야기하는 전문가, 취미로 사진을 찍는 사진동호회 회원들의 출사와 인터뷰로 맺음한다. 초반부의 강렬함이 갑자기 느슨해지면서 맥이 탁 풀리는 느낌. 어쩌면 이것은 변화하고 있는 시대와 다큐멘터리를 촬영하고 있는 이강현 감독 자신에 대한 자의식이 만들어낸 그림자 같은 느낌을 준다. 노동현장을 특수한 것이 아니라 이 시대의 보편적인 인간조건으로 보는 것. 그 현장을 담아내고 있는 다큐멘터리 감독으로서의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하는 것. <보라>는 기존의 노동과 관련된 다큐멘터리와 다른 새로운 시선으로서, 노동의 문제를 인간 보편의 문제로 담고자 하는 노력으로서 큰 의미로 다가온다. (<보라>1124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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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민과 나데르의 별거 - Nader and Simin, A Separation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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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영화제에서 황금곰상과 남녀배우상을 모두 석권해 화제가 된 영화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는 한국을 비롯한 전세계에서 흥행과 비평 모두 성공중인 영화다. 법원에서 이혼 소송 중인 부부의 이야기로 시작해 복잡한 사건이 얽혀드는 이 영화의 줄거리만 소개하려 해도 이 지면은 부족하다. 줄거리만 복잡한 것이 아니라 영화를 둘러싸고 있는 외연, 이란 사회의 종교와 법, 계급과 성, 현대와 전통, 국가와 가족 등의 문제 속에서 개인의 삶이 어떻게 꼬여가는지 이야기하는 것도 흥미롭겠지만 모두 생략하고 여기서는 두 가지 포인트만 짚으려 한다.

 

<라쇼몽> 혹은 <그 남자 그 여자의 사정>

 

영화의 첫 장면에서 부부로 보이는 남녀(아내 씨민과 남편 나데르)가 아이의 양육 문제로 외국으로 가느냐 마느냐를 놓고 설전을 벌인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두 명은 카메라 정면을 보고 이야기한다. 법원의 판관에게 하는 이야기인 동시에 관객을 향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결국 씨민은 이혼은 하지 못하고 별거에 들어가고, 나데르는 치매인 아버지를 간병하기 위해 라지에라는 여성을 고용하는데, 어느날 집에 들어와 보니 라지에는 없고 아버지는 침대에 묶인채 죽을뻔한 위기를 겪고 그녀를 해고한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나데르는 라지에를 밀치는데, 이후 그녀는 사산하게 되고, 나데르는 살인죄로 고소당한다. 다시 법원! 이후 영화는 나데르의 사정을 나데르의 관점에서, 라지에의 사정을 라지에의 관점에서, 그리고 사건을 둘러싼 사람들(아내, , 가정교사, 이웃집 여성 등등)의 각각의 증언을 듣는다. 누구의 이야기가 진실인가? 일본의 거장 구로자와 아끼라의 <라쇼몽>을 본 사람이라면 그 영화를 떠올릴 것이다. 본 사람의 입장에 따라 재구성되는 영화.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는 결국 하나의 진실을 향해 가지만, 각자의 개인적 사정과 윤리적 책무 사이에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들만을 보여줄 뿐이다. 여기서 누가 거짓을 말했는지, 누가 범죄자인지를 판별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 그 자체가 오히려 삶의 진실이 아닌가란 질문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알프레드 히치콕과 추리소설의 구조

 

영화는 계속 사건에 사건이 겹치고,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 안에 중요한 단서들이 있지만, 사건의 핵심, 가령 정말 나데르가 밀쳐서 라지에가 유산하게 된 것인지, 라지에가 집에서 나간 할아버지를 찾기 위해 거리로 나갔을 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등은 보여주지 않는다. 영화의 모든 사건들은 촘촘하게 엮이는데, 여기엔 셜록 홈즈나 에르큘 포와로 같은 탐정은 없다. 오히려 그 탐정의 역할은 영화가 끝나고 나서 관객에게 남겨진다. 해외의 언론과 비평가들이 현대판 알프레드 히치콕이란 찬사를 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123분이라는 짧지 않은 런닝타임 동안 관객은 단 몇 초도 쉬지 못하고 사건의 진실이 무엇인지, 추리소설을 읽듯 사건을 추적해 가는데, 영화가 끝나면 그때 비로소 사건의 진실은 바로 우리들이 이곳에서 지금 살아가고 있는 민초들의 삶이라는 울림을 가지게 된다.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작가가 관객에게 무엇을 전달하는 시대는 끝났고, 관객 스스로 작품에서 의미를 찾는 시대다라고 말한다.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는 이란사회의 특수성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이기에 많은 나라에서 이국적인 가치관들에 낯설어한다고 한다. 가령 독실한 무슬림인 라지에가 바지에 소변을 본 할아버지의 옷을 갈아입혀줘야 할 때 그녀는 종교가이드에게 전화를 걸어 그래도 죄가 아닌지 물어보는데 가령 그런 장면은 우리에게도 낯설다. 하지만 이 영화의 그런 특수한 상황들은 더 큰 보편성 안에서 작동한다. 세계 어느 곳에서 사는 사람들이라 해도 겪고 있고 고민할 수밖에 없는 보편적인 질문들, 그래서 이 영화 속의 사건들이 낯설지만, 동시에 익숙하고 공감을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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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카피하다 - Certified Copy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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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시절에 동화책을 읽던 경험을 한 번 떠올려보자. 신비롭거나 새로운, 재밌거나 감동적인 그 이야기의 세계 속에 빠져들어가 밤잠 설치며 이야기 속에 빠져들어갔던 순간을. 우린 그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 되어보기도 하고, 반대로 내 삶 속에 그 소설 속의 인물을 가져와 새로운 이야기를 상상해보기도 하며, 좀 더 나아가서는 현실 속에서 그 이야기의 역할극을 만들어보며 친구들과 장난을 치기도 한다.

 

한편 조금 더 성숙해져 청소년이 된 후, 그러니까 이야기와 현실을 분간할 수 있게 된 후, 어떤 소설책을 읽으면 그 소설에 대해 친구와 토론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작품을 쓴 저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 저자에 대해 궁금하게 생각하기 시작한다. J.D. 셀린져의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책은, 그 책을 읽고 나면 저자에게 전화해 수다를 떨고 싶어지는 그런 책이라고 주인공이 말하는 장면이 있다. 이 소설책 작가는 어떤 사람일까에 대한 상상! 작가를 직접 만나서 책에 대한 대화를 하는 것에 대한 상상!

 

얼마 전에 한국에도 개봉한 인도의 거장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이 만든 <사랑을 카피하다>의 원제목은 Certified Copy, 직역하면 인증된 복제품이다. 영화의 첫 장면은 영국 작가인 제임스 밀러가 이탈리아 투스카니 지역에서 자신의 책 ‘Certified Copy’에 대한 강연 영화는 강연 내용을 꽤 길게 보여주는데 간단히 요약하면 진품성이란 개념은 허위고, 복제품(모사)이 원본보다 훌륭할 수 있다는 내용의 강연 - 을 하는데, 강연회에 참석한 사람들 중 한 명의 여성(줄리엣 비노쉬)을 알게 되고, 이후 그녀와 하루 동안 이탈리아 여행을 떠난다. 영화는 그 몇 시간의 여행을 담고 있다. 그러니 이렇게 이 영화를 이렇게 요약할 수 있겠다. 작가와 독자가 함께 떠나는 여행이라고.

 

그런데 이 여행이 어느 순간 갑자기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균열이라는 것은 영화에 몰입하는 것을 방해하고, 영화를 보는 관객이 낯설어지면서, ‘이게 무슨 의미지?’하는 의문을 품게 되는 순간을 말한다. 제임스 밀러는 여성(배역-줄리엣 비노쉬, 영화 안에서 이름이 없다. 이하 여성이라 쓴다.)에게 자신의 책의 발상이 시작된 경험이 한 아이와 그의 엄마가 나누는 대화 장면에서 시작했다고 말하는데, 그 이야기를 들으며 여성이 눈물을 흘린다. 제임스 밀러가 본 엄마는 바로 그 여성이었던 것이다. 그럼 작가와 독자의 만남일 뿐 아니라 작가와 작가에게 영감을 준 실제 인물과의 만남인 것일까? 그런데 웬걸? 갑자기 여성이 기묘한 역할극을 시작하는데, 제임스 밀러와 자신이 결혼한 지 15년 된 부부인 것처럼 행동한다. 점차 이 둘은 예전에 겪었던 것과 바로 결혼기념일인 어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면서 심지어 부부싸움을 한다. 관객의 혼란은 심화된다. 이건 그냥 역할극인가? 아니면 작가와 독자로 만난 앞부분이 실제 부부이면서도 처음 만난 것처럼 행동한 것이었고, 그 둘은 원래부터 부부였나? 이 혼란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해결되지 않는다.

 

영화 속 제임스 밀러가 쓴 책 Certified Copy 의 주제로 돌아가 보자. 복제품(현실을 모사한 이야기, 소설, 영화, 예술작품)은 원본(, 현실)만큼 훌륭할 수 있다는 주제! 이 주제를 중심으로 영화를 다시 보자. 제임스 밀러라는 작가는 어쩌면 이 영화의 감독인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본인의 재현일 수 있다. 또 독자로 나오는 여성은 이름이 주어지지 않았는데 그녀는 골동품 주인이다. - 전시된 예술작품, 모사된 세계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밀러는 더 이상 세상에 새로울 것은 없고 그 안에서 복제품의 의미는 그 복제품을 소비하는 독자(관객)가 만드는 것이란 관점을 설득시키려 하고, 여성은 예술작품(가령 한 여성이 남성에게 머리를 기대고 휴식을 취하는 조각상)의 의미는 삶 그 자체에 쓰여질 때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밀러는 예술작품을 통해 관객이 해석과 상상을 통해 의미를 만들기를 원하고, 여성은 예술작품을 통해 삶의 진실을 보고자 한다.

 

엔딩 타이틀이 끝나고 밀러와 여성의 부부관계는 9시까지 기차역에 가는 시간까지만 지속되는 것일지 아닐지에 대한 질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둘의 관계의 모사를 통해 부부간 삶의 진실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일 것이다. 어린 시절에 했던 것처럼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와 그의 영화 속 세계로 들어가거나, 반대로 그를 이곳 한국에 초대해 새로운 이야기를 상상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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