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카피하다 - Certified Copy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어린시절에 동화책을 읽던 경험을 한 번 떠올려보자. 신비롭거나 새로운, 재밌거나 감동적인 그 이야기의 세계 속에 빠져들어가 밤잠 설치며 이야기 속에 빠져들어갔던 순간을. 우린 그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 되어보기도 하고, 반대로 내 삶 속에 그 소설 속의 인물을 가져와 새로운 이야기를 상상해보기도 하며, 좀 더 나아가서는 현실 속에서 그 이야기의 역할극을 만들어보며 친구들과 장난을 치기도 한다.

 

한편 조금 더 성숙해져 청소년이 된 후, 그러니까 이야기와 현실을 분간할 수 있게 된 후, 어떤 소설책을 읽으면 그 소설에 대해 친구와 토론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작품을 쓴 저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 저자에 대해 궁금하게 생각하기 시작한다. J.D. 셀린져의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책은, 그 책을 읽고 나면 저자에게 전화해 수다를 떨고 싶어지는 그런 책이라고 주인공이 말하는 장면이 있다. 이 소설책 작가는 어떤 사람일까에 대한 상상! 작가를 직접 만나서 책에 대한 대화를 하는 것에 대한 상상!

 

얼마 전에 한국에도 개봉한 인도의 거장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이 만든 <사랑을 카피하다>의 원제목은 Certified Copy, 직역하면 인증된 복제품이다. 영화의 첫 장면은 영국 작가인 제임스 밀러가 이탈리아 투스카니 지역에서 자신의 책 ‘Certified Copy’에 대한 강연 영화는 강연 내용을 꽤 길게 보여주는데 간단히 요약하면 진품성이란 개념은 허위고, 복제품(모사)이 원본보다 훌륭할 수 있다는 내용의 강연 - 을 하는데, 강연회에 참석한 사람들 중 한 명의 여성(줄리엣 비노쉬)을 알게 되고, 이후 그녀와 하루 동안 이탈리아 여행을 떠난다. 영화는 그 몇 시간의 여행을 담고 있다. 그러니 이렇게 이 영화를 이렇게 요약할 수 있겠다. 작가와 독자가 함께 떠나는 여행이라고.

 

그런데 이 여행이 어느 순간 갑자기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균열이라는 것은 영화에 몰입하는 것을 방해하고, 영화를 보는 관객이 낯설어지면서, ‘이게 무슨 의미지?’하는 의문을 품게 되는 순간을 말한다. 제임스 밀러는 여성(배역-줄리엣 비노쉬, 영화 안에서 이름이 없다. 이하 여성이라 쓴다.)에게 자신의 책의 발상이 시작된 경험이 한 아이와 그의 엄마가 나누는 대화 장면에서 시작했다고 말하는데, 그 이야기를 들으며 여성이 눈물을 흘린다. 제임스 밀러가 본 엄마는 바로 그 여성이었던 것이다. 그럼 작가와 독자의 만남일 뿐 아니라 작가와 작가에게 영감을 준 실제 인물과의 만남인 것일까? 그런데 웬걸? 갑자기 여성이 기묘한 역할극을 시작하는데, 제임스 밀러와 자신이 결혼한 지 15년 된 부부인 것처럼 행동한다. 점차 이 둘은 예전에 겪었던 것과 바로 결혼기념일인 어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면서 심지어 부부싸움을 한다. 관객의 혼란은 심화된다. 이건 그냥 역할극인가? 아니면 작가와 독자로 만난 앞부분이 실제 부부이면서도 처음 만난 것처럼 행동한 것이었고, 그 둘은 원래부터 부부였나? 이 혼란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해결되지 않는다.

 

영화 속 제임스 밀러가 쓴 책 Certified Copy 의 주제로 돌아가 보자. 복제품(현실을 모사한 이야기, 소설, 영화, 예술작품)은 원본(, 현실)만큼 훌륭할 수 있다는 주제! 이 주제를 중심으로 영화를 다시 보자. 제임스 밀러라는 작가는 어쩌면 이 영화의 감독인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본인의 재현일 수 있다. 또 독자로 나오는 여성은 이름이 주어지지 않았는데 그녀는 골동품 주인이다. - 전시된 예술작품, 모사된 세계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밀러는 더 이상 세상에 새로울 것은 없고 그 안에서 복제품의 의미는 그 복제품을 소비하는 독자(관객)가 만드는 것이란 관점을 설득시키려 하고, 여성은 예술작품(가령 한 여성이 남성에게 머리를 기대고 휴식을 취하는 조각상)의 의미는 삶 그 자체에 쓰여질 때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밀러는 예술작품을 통해 관객이 해석과 상상을 통해 의미를 만들기를 원하고, 여성은 예술작품을 통해 삶의 진실을 보고자 한다.

 

엔딩 타이틀이 끝나고 밀러와 여성의 부부관계는 9시까지 기차역에 가는 시간까지만 지속되는 것일지 아닐지에 대한 질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둘의 관계의 모사를 통해 부부간 삶의 진실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일 것이다. 어린 시절에 했던 것처럼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와 그의 영화 속 세계로 들어가거나, 반대로 그를 이곳 한국에 초대해 새로운 이야기를 상상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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