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 - The Color Of Pain
영화
평점 :
상영종료


 

<보라>는 피아노공장, 마네킨 공장, 채석장, 딸기농장 등의 다양한 노동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소음에 의한 난청, 유해화학물질에 의한 암과 각종 질환, 그리고 근골격계 등의 보편적통증을 다루는 다큐멘터리다. 그런데 이 다큐멘터리는 다른 노동현장을 다룬 다큐멘터리와 무언가 다르다. 낯설음! 조금 과장해서 이야기한다면 SF영화를 보고 있는 것 같다는 현실과의 간극, 이질감이 든다. 그 정체가 무엇일까?

 

노동현장과 통증, 그 익숙한 낯설음을 직시한다.

 

먼저 이 영화는 시작부터 약 1시간 반 정도까지, 산업안전보건법에 의해 전문의가 산업현장에서 시행하는 노동자들을 진찰하는 장면과 그 노동자들이 현장에서 노동하는 장면, 쉬는 시간에 동료들과 특별한 의미없이 하는 잡담 등을 나열한다. 극영화가 아닌 다큐멘터리의 경우도 대부분 시작과 중간, 끝의 구조 속에서 사건과 캐릭터가 변화되는 서사를 담기 마련인데 이 영화는 계속 파편적으로 나열만 한다. 보통 영화라면 1편의 런닝타임인 약 1시간 반이라는 긴 시간 동안 말이다. 그런데 이 장면들, 뭔가 이상하다. 우리의 일상 속에서 그 누구나 겪고 있을법한 모습들인데, 그 장면들이 낯설다. 장면과 장면 사이의 간극, 현실과 이미지 사이의 간극, 거기서 무언가 폭발할 것 같은 위기감, 현대 산업사회가 인간의 삶의 조건을 파괴해가는 어떤 증상과 증후. 저 누구나와 다를 바 없는 노동현장의 모습을 우린 미디어를 통해 제대로 본 적이 없다. 선전선동을 위한 노동다큐멘터리를 통해서 머리띠를 두르고 투쟁현장에 선 노동자들을 봤고, 공중파와 매스미디어에서 노동현장은 그저 배경화면의 일부로 보였을 뿐이다. 그래서 우린 노동현장을 한 번도 직시한 적이 없다. 그래서 <보라>의 일상적인 장면은 낯설다.

 

구석에 세워진 카메라와 해부학적 시선!

 

<보라>의 낯설음의 또 다른 이유는 카메라의 위치에서 비롯된다. 익숙하지 않은 시점. 영화의 대부분의 장면에서 카메라는 인물중심으로 따라가지 않고 공간 중심으로 멀리서 고정되어있다. 그런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 사운드는 붐 마이크로 따로 녹음됐다. 간혹 붐마이크에 녹음된 대사와 카메라가 잡고 있는 화면이 불일치하기도 한다. 공장의 노동자와 기계들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사운드는 화면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하는 대화가 들린다. 이런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촬영방법은 공장과 노동자에 대한 조감도의 느낌이 아니라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인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해부학적인 시선에 가깝다는 느낌을 준다. 그런 느낌을 강화하는 것은 공장 장면에 이어져 나오는 전문의와의 진찰과 대화 장면 때문이기도 하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질병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거나 인식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어지는 공장 장면들은 노동조건이 인간의 삶의 조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해부학적 시선으로 보여지는 것이다.

 

<보라>는 각종 산업현장을 나열하다가 갑자기 또 다른 한 편의 영화가 시작되듯 단절되는 후반부로 진입한다. 한 인터넷 서버업체에서 투잡을 뛰고 있는 청년이 밤에 흡혈귀가 관에 들어가듯 종이박스 안으로 들어가 휴식을 취하는 장면, 한 데이터복구업체에서 디지털시대에 대해 철학을 이야기하는 전문가, 취미로 사진을 찍는 사진동호회 회원들의 출사와 인터뷰로 맺음한다. 초반부의 강렬함이 갑자기 느슨해지면서 맥이 탁 풀리는 느낌. 어쩌면 이것은 변화하고 있는 시대와 다큐멘터리를 촬영하고 있는 이강현 감독 자신에 대한 자의식이 만들어낸 그림자 같은 느낌을 준다. 노동현장을 특수한 것이 아니라 이 시대의 보편적인 인간조건으로 보는 것. 그 현장을 담아내고 있는 다큐멘터리 감독으로서의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하는 것. <보라>는 기존의 노동과 관련된 다큐멘터리와 다른 새로운 시선으로서, 노동의 문제를 인간 보편의 문제로 담고자 하는 노력으로서 큰 의미로 다가온다. (<보라>1124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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