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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드 돈 다이
짐 자무쉬 감독, 빌 머레이 외 출연 / 유니버설픽쳐스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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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드 돈 다이 The Dead Don’t Die, 2019, 짐 자무쉬

 

<천국보다 낯선> 이후 자무쉬의 팬이 되었고, 2016<패터슨>은 그의 최고의 영화였다. 그가 3년 만에 내놓은 <데드 돈 다이>, 자무쉬와 좀비영화라는, 잘 매칭되지 않지만, 다르게 생각해 본다면, 자무쉬의 영화들이 갖는 미국에 대한 이방인 정서에서 흥미로운 조합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결과는? 대부분의 자무쉬의 영화들이 평론가들의 극찬을 받아왔으나, <데드 돈 다이>에 대한 평가는 한결같은 악평!

 

나 역시 긍정적인 얘기를 하기 어려웠던 작품. 최근에 다시 볼 기회가 있었다. 생각해본다. 그렇게 악평만 받아야 할 작품이었을까?

 

당시 악평은 크게 두 갈래였다. 첫째는 메시지 차원. 자무쉬의 영화들은 정치적 메시지로 환원될 수 없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양면성, 의미의 애매모호성, 생의 불합리함과 모순들, 해석의 다양성과 개방성 등으로 평가를 받아왔는데, <데드 돈 다이>는 트럼프 시대에 대한 직접적 은유, 너무 직접적이어서 상투적인 비판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 그냥 누구나 하는 트럼프에 대한 비판을 좀비 장르를 통해 했다. 그런 면이 있다. 특히 꼴통 트럼프 지지자와 같이 행동하는 프랭크(스티브 부세미)라는 인물이 사회적 약자와 이민자를 대하는 태도, 은둔자 밥이 직접적인 대사로 표현하는 비판과 비유는 너무 노골적이다.

 

두 번째 갈래는 좀비장르에 대한 것. 조지 로메로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좀비영화 계보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그 영화에 대한 오마쥬라는 것을 받아들인다 해도, 자무쉬적인 새로운 시도나 상상력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 좀비들이 살아있을 때 했던 행동을 그대로 반복한다거나, 목이 잘릴 때 검은 먼지가 타버린 재처럼 피어오르는 것 등이 다른 좀비영화들과의 차별점이랄 수는 있겠으나 그 또한 상투적. 한 마디로 자무쉬의 좀비영화가 가지는 다른 재미가 전혀 없고 지루하다는 것.

 

대체로 위의 두 가지 비평에 대해서 반박하기는 어렵다. 자무쉬는 도대체 왜 이 영화를 만들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이번에 다시 봤다.

 

첫째, 조금 황당하게 느껴진 젤다(틸다 스윈튼)의 역할. 왜 틸다 스윈튼이란 대배우를 대려다가 장의사이자 검객, 그리고 외계인으로 등장시켰을까? 그녀는 도대체 이 좀비영화에 왜 등장했다가 중요한 역할을 할 듯 하다가 갑자기 우주선을 타고 떠나버리는 걸까?

 


이번에 다시 보면서 그녀의 존재가 각별하게 느껴진 것은, 처음에 봤을 때는 산 속에 숨어 사는 은둔자 밥(톰 웨이츠)이 화자, 또는 감독 본인의 입장을 대변하는 관찰자로 보였는데, 젤다가 또 다른 화자, 관찰자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무쉬의 대부분의 영화는 이민자의 시선으로 본 미국이라 할 수 있는데, 종말이 가까워 온 지구에 잠시 들린 외계인 젤다가 자무쉬의 영화들의 연장선에 있는 페르소나일 수 있겠다. 장의사라는 직업, 인간들의 죽음을 처리하는, 그리고 사무라이 검객, 좀비들의 목을 자르는, 그러나 외계인인 그녀는 끝까지 지구를 책임지지 않고 우주선이 오자 휙 떠나버린다. 지구는 지구인들이 지켜야지. 이방인 자무쉬는 아예 지구를 떠나버리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외계인의 시선으로 자기 스스로의 영화세계와 지구에서의 삶을 보고 싶었을까?

 

둘째, 처음 볼 때 의식하지 못했는데, 이 영화에서 누구도 타인을 단 한명이라도 살린 사람이 없다. 좀비들의 목을 자르긴 하지만 그건 모두 자기 목숨을 구하기 위한 것이었지, 타인을 살리기 위한 행동을 한 이는 영화 속에 단 한 명도 없다. 심지어 주인공은 로니(아담 드라이버)와 클리프(빌 머레이)도 한 번도 타인을 구하기 위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화자인 밥은 관찰자일 뿐이고.

 

문득 이 영화에서 인물들이 캐릭터가 아니란 느낌이 들었다. 어떤 인격을 연기하는 캐릭터가 아니라 배치된 사물 같은, 그래서 인물들이 어떤 사건을 겪으며 이야기가 펼쳐지는 드라마 구조가 아니라, 영화 전체를 그냥 하나의 시, 다수의 인물이 존재하긴 하나 전부 단지 한 명의 화자(감독 자신)가 쓴 시의 일부일 수 있겠다는 생각. 그래서 첫 번째 살인을 발견한 현장에 온 로니와 클리프와 민디 모두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데, 이것 역시 시적 반복과 변용으로 읽을 수 있고, 마지막에 로니와 클리프의 대본을 미리 봤다거나 쪽대본만 봤다는 건, 이 장편 시를 쓰고 있는 과정이고, 여기서 마지막 줄을 어떻게 쓸지 감독의 고민을 형상화한 것.

 

셋째,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의 유일한 생존자들인, 은둔자 밥과 세 명의 소년원의 아이들. 그 중에서 은둔자 밥은 감독 자신이라 할 수 있으니, 이 세계의 생존자는 아이들 세 명 뿐인데, 그 아이들은 감독이 바라보는 마지막 인류의 희망이라 할 수 있겠다. 그래서 기후 위기와 지구 멸망이 다가오는 뉴스를 바라보는 아이들이 어떻게 이 세계를 헤처나갈 수 있나에 대한 영화. 거기서 어른들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 세 명의 아이를 돕는 어른은 단 한 명도 없다. 세 명 스스로 좀비로부터 피해 어딘가로 갈 뿐이다.

 

두 번째 봤으나 난 여전히 이 작품을 좋아할 순 없다. 다만 <데드 돈 다이>를 통해 그의 고민이 무엇이었을까 생각해보고 싶었다. 종말을 향해가는 지구를 바라보며 감독 자신의 시선(밥의 시선), 외계생명체의 시선(젤다의 시선), 그리고 아이들의 시선을 통해 장편시 한 편을 쓴다는 기분으로 만든 영화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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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의 성공과 실패
존 버거 지음, 박홍규 옮김 / 아트북스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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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그의 삶 자체가 현대미술의 역사라고 해도 과장이 아닐 피카소의 작품들을 보면 이게 한 사람의 작품이 맞나 의심스러울 정도로 다양하다. 그러나 그 다양함을 관통하고 있는 일관성이 있다면 그건 아마도 그의 이름 자체 피카소’, 고유명사가 아닌 하나의 장르가 되어버린 피카소란 이름이 아닐까.

 

1943년에 전시된 숫소 머리는 잘 알려진 작품은 아니다. 존 버거의 <피카소의 성공과 실패>에서 처음 발견했다.

 

존 버거는 이 작품을 통해 피카소의 마술사로서의 예술가의 측면을 본다.

 

마법은 하나의 환영이다. 그러나 그것이 현대 세계에서 갖는 적절성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중략) 마법은 처음에 인간을 과학의 시초로 이끌어 주었다.”

 

나는 사물을 다루듯이 그림을 다룬다. 창문 밖을 내다보듯 바로 그렇게 나는 창문을 그린다. 만일 열린 창문이 그림 속에서 잘못되어 보이면, 나는 커튼을 쳐서 창문을 막아버린다.”

 

피카소의 작품은 현실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창조한다. 그러나 그 창조란 무에서 창조하는 것이 아닌 배치를 바꾸거나, 관점을 바꾸거나, 마술처럼 눈속임을 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는 그렇게 사물들, 자연의 질서를 자신의 시선으로 지배하고자 하는 열망에 사로잡혀 있다. “그래서 그는 신들릴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유희이다. 그러나 유희와 마법은 완전일치가 가능하다.”

 

숫소 머리는 자전거의 안장과 핸들을 그 모양을 전혀 변형시키지 않고, 자전거에서 떼어낸 이후 그대로 붙였다. “그가 한 일이란 그것이 하나의 숫소 머리의 이미지가 될 가능성을 본 것뿐이다. 이 가능성을 보는 행위는 일종의 이름짓기 행위였다. ”이것을 숫소 머리로 하라,“ 피카소는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이 작품을 통해 피카소의 창작방법의 두 가지 성격을 볼 수 있다. 하나는 사물을 그 사물의 본연의 목적과 질서로 보지 않고 마술가(작명가 또는 사물에 의미를 부여하는 지배자)의 관점에서 새로운 목적과 질서를 부여하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왜 하필 소인가 하는 것인데, 피카소 하면 프랑스의 화려한 삶을 떠올리겠지만, 그는 스페인의 시골 출신. 당시 유럽대륙의 많은 나라들이 산업화와 도시화가 절정을 이루었으나 스페인은 중세에서 벗어나지 못한 전근대적인 나라. 소는 그의 유년시절과 원초성의 상징. 그의 그림에서 종종 인간도 소의 모습과 닮아있기도 하다. 가장 현대적인 예술가인 동시에 가장 원초적인 예술가이기도 한 피카소의 뿌리가 이 작품 숫소 머리에도 숨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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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부당한 몸 - 장애와 질병에 대한 여성주의 철학 그린비 장애학 컬렉션 2
수전 웬델 지음, 강진영.김은정.황지성 옮김 / 그린비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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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사라 웬델의 <거부당한 몸>을 읽고 세미나를 한 적이 있다. 수잔 웬델은 근육통성 뇌척수염이란 의료적 기준으로 봤을 때 장애와 비장애의 경계에 있는 질병을 앓고 있었다. 그녀는 스스로 장애를 인정하면 법적, 사회적 장애인이라는 낙인을 찍어야 하고, 장애를 인정하지 않고 사회생활을 하려면 자신보다 건강한 사람의 기준으로 일해야 하는 압박을 가져야 했다. 모든 사람은 각자 다른 몸을 가지고 있지만 이 사회는 사람의 차이를 보지 않고 획일적인 건강정상성의 기준으로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이분법으로 나누고, 아파서 쉬는 모습을 보면 성실하지 않은 것으로 평가한다.

 

사람을 도구적으로 보고, 일을 중심에 놓는 사회에서 모든 사람은 끊임없이 과로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아프다고 말하는 것은 변명처럼 보이고 게으름을 피우는 것처럼 받아들여 질까봐 두렵다. 한국사회의 급속한 근대화, ‘하면 된다는 표어, 서구 근대의학과 병원의 유입, 질병을 외부에서 침투한 세포, 바이러스에 의한 것으로 보면서 생긴 위생권력, 이런 모든 것들이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오히려 한국은 서구보다 더 서구화되어 있다. 코로나 사태를 대하는 방식만 해도 한국이 서양보다 더 서양의 병리학적 태도와 위생권력에 강력한 신념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신체를 자연과의 연관이 아닌 계산 가능하고 통제 가능한기계론적 대상으로 보기 때문이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오히려 최근 서양에서는 동양의 양생술의 전통과 유사한 고민을 가지고 반성하며 대체의학을 연구하기도 하는데, 우리는 양생술을 미신과 비과학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이상적이고 건강한 신체에 대해 어떤 기준을 마련해 놓는 태도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배제한다. 성실하지 않거나, 위생적이지 않거나, 장애가 있는 사람으로 규정하고 배제한다. 질병을 악마로 취급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질병을 안고 살아간다. 질병과 투쟁하기도 하고 타협하기도 하며 함께 살아간다.

 

비마이너에서 <질병과 함께 춤을>을 연재한 분들이 아픈 몸 선언문을 작성했다. 이렇게 말한다.

 

불현듯 삶을 파고든 질병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혼돈, 통증, 성찰 그리고 가끔은 기쁨을 만나는 일이다. 특히 한국처럼 건강에 대한 강박과 열망이 가득한 건강중심사회에서, ‘아픈 몸은 생의학적 고통 위에 차별과 편견을 통한 사회적 고통까지 경험한다. 구성원들은 원고를 함께 쓰며 질병이 남긴 상처와 고통의 이유를 질문하고, 그 고통의 무늬를 개인화하지 않으며 사회적 요소와 유기적으로 읽어 내고자 했다.”


아래는 아픈 몸 선언문 전문


https://www.beminor.com/news/articleView.html?idxno=20635&fbclid=IwAR0lVxQlivyBuWgNT_3p9XWfShwdqQoPZ7ODLLYoyQyLIbsSh6VNbUdaMN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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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본 주홍색 연구 (양장) - 1887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
아서 코넌 도일 지음, 공경희 옮김 / 더스토리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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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읽었던 코난 도일의 <주홍색 연구>를 다시 읽었다. 작년 겨울 내겐 추리소설 바람이 다시 불었다.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 느낀 건, 보르헤스가 코난 도일에게 영향을 받았다는 건 바로 이래서구나, 였다. 한때 추리소설 애독자였던 적이 있지만 범죄 그 자체를 풀어나가는 이야기 구조에 집중해, 그 곁을 감싸고 있는 분위기에 대해선 무관심했다. 그런 탓에 보르헤스가 본 것은 내게 보이지 않았다.



가령 이런 거다. 살인사건의 행방이 오리무중, 한 주요 참고인이 위험할지도 모를 상황에서 한가하게 음악을 듣고 있던 홈즈가 왓슨에게 말한다. “다윈이 음악에 대해 뭐라고 말했는지 아나? 인류는 언어가 생기기 전부터 음악을 작곡하고 감상하는 능력이 있다고 주장했지. 우리가 음악에 이토록 영향을 받는 것도 그 때문일 거야. 이 흐릿한 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유년 시절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는 셈이지.”



누군가를 추적하고 돌아와선 책을 하나 꺼내며, “어제 노점에서 구했어. <국제법>이라는 책인데 1642년 롤랜즈의 리에주에서 라틴어로 발행된 거야. 찰스 1세의 머리가 아직 어깨 위에 붙어 있었을 때 이 갈색 장정의 책이 나왔지. 겉장과 속편지 사이의 헛장에 구리올미 후테의 장서라고 빛바랜 잉크로 쓰여 있어. 윌리엄 화이트는 누군지 모르겠군. 필체에 법률가 내음이 묻어나는 걸로 봐서 17세기 실용주의 법률가인 것 같기도 해.”



사건과 전혀 관련 없어 보이는 이런 이야기들이 왜 나오는 걸까? 좀 더 가보자.



사건이 언론에 보도가 되는데, 주요 신문들의 기사를 요약해서 보여준다. ‘<데일리 텔레그래프> 벽에 피로 글자가 쓰여 있다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정치 망명자나 혁명가에 의해 저질러진 것으로 보았다. 미국에는 무수한 사회주의자들이 있는데 피살자는 조직의 규율을 위반하여 추적당해온 것이 분명하다는 주장. <스탠더드> 무법적인 학살 행위가 대개 자유당 정부 아래서 발생한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그런 사건은 대중의 정신이 혼란스럽고 모든 권위가 약화될 때 발생한다. <데일리 뉴스> 이것이 분명 정치범죄. 자유주의의 독선과 증오가 유럽대륙의 여러 정부에 영향을 끼침으로써 영국으로 수많은 사람이 오게 되었는데, 대륙에서 험한 일들을 겪지만 않았다면 선량한 시민이 되었을 사람들이다.’



<주홍색 연구>는 대략 200페이지 안쪽의 짧은 소설이다. 그런데 중간, 대략 100페이지 정도에 범인이 밝혀지고 심지어 잡혀버린다. 나머지 100페이지부터 다시 모르몬교도의 아메리카 대륙 이주와 정착 서사가 나오고 그 안에서 범인과 피해자의 윤곽이 드러나는 구조다.



홈즈는 살인현장을 보고 나와 왓슨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번 사건을 주홍색 연구라고 부를까 하네. 우리라고 예술적 용어를 쓰지 말란 법은 없으니. 빛깔 없는 삶의 실타래 속으로 주홍색 살인의 실이 엉켜 있어.” <주홍색 연구>의 영어 원제목은 ‘A Study in Scarlet’ 이다. 무슨 미학논문 제목 같긴 하다.



앞서 언급한 다윈의 음악 얘기, 17세기 법학서적, 언론의 보도 내용 등은 모두 이 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그래서 이 소설을 읽은 후에 그 내용이 기억에 남아있는 독자가 많지는 않을 거다. 코난 도일은 왜 이런 이야기들을 썼을까?



다윈에 대한 이야기에서 주목할 것은 음악이 아니라 마지막 문장이다. ‘이 흐릿한 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유년시절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다. 19세기말 영국을 이 흐릿한 세기로 그곳의 어떤 이들의 살인사건에는 그들의 유년시절로부터 비롯된 이야기가 있다. 이로써 이 살인사건은 현재 벌어진 어떤 개인의 일이지만, 그 개인의 과거에 얽히게 되고, 그것은 단지 한 개인의 과거가 아니라 인류의 과거, 역사에 연결된다.



17세기 실용주의 법률가의 <국제법>에 대한 서적은 영국의 제국주의, 또한 영국 안에 있는 다양한 이주민들의 역사와 연결된다. 모르몬 교도의 아메리카에서의 정착 과정, 그 안에서 벌어진 일, 그게 영국으로 오게 된 사연.



그래서 이 범죄에 대한 각종 신문에서 언급된 정치범죄, 사회주의와의 연관성 등도 이 사건이 벌어진 시대의 분위기를 형성한다. <주홍색 연구>가 발표된 1887년은 마르크스 사후 3년이기도 하다.



아마 보르헤스는 코난 도일의 홈즈라는 캐릭터보다는 코난 도일의 소설이 텍스트 그 자체인 역사와 만나는 지점을 봤던 것 같다. 보르헤스의 시점에서 코난 도일의 추리소설을 다시 읽으면 재밌겠다, 는 생각을 해 봤지만 아직 그의 다음 작품들은 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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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몽드 디플로마티크 Le Monde Diplomatique 2021.1 2021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월간지) 편집부 지음 / 르몽드디플로마티크(잡지)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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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위기 혹은 3차세계대전에 의한 지구멸종위기가 발생했을 때, 서구 선진국의 부유층들이 생존할 수 있는 지하벙커를 소재로 하는 SF 영화들이 있는데, 코로나로 인해 언제가 될지 모를 그 날을 대비하고 있는 거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미국의 부유층들이 수영장이 딸린 호화대피소를 사들이고 외딴 섬에 피신하고 있다거나, 사막지역에 지어진 벙커용 집들을 사들이고 있다거나, 벙커 제조업체 ‘서바이벌 콘도’가 판매량이 급증했다거나 하는 기사들이 나온다. 일부 호화 벙커는 수영장과 체육관, 암벽등반 시설까지 갖추고 있으며 한화로 30억원이 넘는다고 한다. 더불어 개인용 항공기와 호화 요트에 대한 수요도 크게 늘었다 한다.


부유층만의 풍경은 아니다. 대도시 중산층들도 재택근무, 원격근무가 가능한 이들은 도시에서 빠져나가 넓은 전원주택으로 이동하고 있다. 샌프란시스코의 아파트 임대료가 20%가 빠지고 부촌의 저택 값도 10% 내렸다. 뉴욕 맨하탄의 집값은 33%나 내렸다. 도시 탈출이 벌어지고 있다. 물론 아무나 도시 탈출을 하는 것은 아니다. 재택근무가 가능하거나 프리랜서로도 충분한 돈을 버는 전문가그룹, 그리고 전원주택을 구해 이동할 여유가 있는 이들, 도시의 집은 그대로 두고 시골에 별장을 얻을 수 있는 이들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일부 부동산 전문가들은 이러한 도시에서 시골로의 이동은 저성장시대, 예견되었던 일인데, 코로나로 인해 앞당겨 추진되는 거라 말하기도 한다. 이러한 경향은 기후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하나의 조건으로 본다는 거다. 대도시 집값이 떨어지고 인구가 빠지고 있다면 좋은 일? “줌과 아마존에 의한 도시탈출의 비현실성”(디플로마티크 2021 1월호)이란 기사에서 브누아 브레빌은 도시 확대의 우려가 있다 말한다. 도시에 모든 직장과 시설이 있는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로 도시가 그 경계선을 넓히며 빈부격차가 더 심해지는 불평등한 거대도시화가 이뤄질 뿐일 수 있다는 것. 자연으로의 회귀나 생태적인 변화가 아니라 ‘줌이나 아마존’ 같은 거대 온라인 기업에 대한 의존성을 높이는 도시확대가 될 수 있다는 우려다.


한국의 수도서울은 어떤가? 코로나로 시민들을 집밖에 돌아다니지 못하게 윽박지르고, 방역단계조정 및 핀셋 방역으로 영세상인들의 목을 조이면서, 철도와 강변북로에 집을 더 짓겠다는 걸 부동산대책으로 내는 이곳에 코로나시대에 대한 고민은 무엇인지. 서울에 정치적, 경제적, 교육적, 문화적 실질자원과 상징자원이 모두 몰려있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라는 걸 몰라서 그러는 건지 알고도 자기 이익을 위해서 그러는 건지. 한국의 코로나에 대한 대책은 딱 두 개다. K방역과 백신! 방역과 백신이 코로나에 대한 해결책이 될지 안 될지는 알 수 없으나(난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생각하지만, 어쨌든), 그 과정에서 한국사회의 양극화가 심화되고 빈곤층과 소수자에 대한 혐오가 커지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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