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과 장미 - Bread and Ro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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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대학교 청소용역노동자 170명이 올해 초 집단해고를 당했다. 하루 10시간 꼬박 일하고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75만원을 받으며, 난방시설도 갖춰지지 않은 곳에서 점심을 먹고, 동료들과 휴식할 시간도 가질 수 없으며, 점심식대는 하루 300원을 받는 노동자들. 그들은 거리로 나와 투쟁을 시작했고, 103주년을 맞은 세계 여성의 날인 38일 고대, 연대, 이대 청소용역노동자들이 뒤를 이어 연대파업에 돌입했다.

 

세계 여성의 날의 주제어는 빵과 장미였다. 빵과 장미는 1912년 미국의 메사추세츠 로렌스의 섬유공장 이민 여성노동자들의 파업투쟁에서 비롯된 구호이다. ‘은 생존권과 임금을 상징하고, ‘장미는 인권과 행복을 상징한다. ‘빵과 장미라는 단어는 2002년 한국에서 개봉한 켄 로치의 <빵과 장미>라는 영화를 기억하게 한다. 블루칼라의 시인, 좌파영화의 십자군이라 불리기도 하는 영국 영화감독 켄 로치는 노동자, 빈민, 이주노동자, 소수자들의 삶의 단면들을 비극적으로 다루면서도, 개인의 문제가 아닌 자본과 권력이란 시스템의 문제로 접근한 감독이다.

 

우린 빵을 원하지만 장미도 원합니다. 하지만 아무도 거저 장미를 주지 않습니다. 우리가 단결할 때 장미는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 삶을 휘두르는 회사에 맞설 만큼 강한 노조를 만들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권리를 위해 일어나십시오.”

 

영화 <빵과 장미>에서 노동운동가 샘의 연설 장면이다. 영화는 19904월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이민 청소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을 재현한 영화다. 영화가 시작되면 주인공인 마야와 몇몇 맥시코인들이 국경을 넘어 가쁜 호흡으로 달려 한 봉고차에 타는 장면을 거친 핸드헬드 카메라로 담는다. 마야는 언니가 살고 있는 로스앤젤레스로 불법 입국하는데, 시작부터 브로커에게 줄 돈을 준비하지 못한 언니로 인해 겁탈을 당할뻔 하는 위기를 모면하며 어렵게 미국생활을 시작한다. 하지만 술집을 제외하고 그녀를 받아줄 노동현장을 찾기란 쉽지 않다. 이후 언니가 일하고 있는 곳의 청소용역노동자로 취직하게 되는데, 그것은 이후에 밝혀지지만 언니가 동생의 취직을 위해 관리인과 잠을 자준 댓가였다.

 

마야는 처음 두 달 월급을 취직시켜준 관리인에게 상납하고 이후 몇 개월을 일에 적응해 나간다. 어느날 몇 분 지각했다는 이유만으로 동료가 해고당하는 사건 등을 당하는데, 이때 노조활동가 샘은 마야와 동료들에게 관리인의 문제가 아닌 건물주의 문제, 노조법을 어기고 있는 문제 등에 대해 설명하며 노조활동을 권유한다. 거의 이민자인 청소용역노동자들은 노조활동을 하게 되면 해고당할 두려움으로 선뜻 나서지 못하지만 집단해고에 직면하면서 샘과 노동조합과 함께 투쟁을 시작한다.

 

영화 <빵과 장미>에서 한 가지 점을 주목해서 보고 싶다. 마야의 언니 로자의 배신이다. 그들의 노조활동을 관리인에게 누설해 동료들이 해고되도록 하는 사람은 다름아닌 마야의 언니 로자였다. 마야는 집으로 달려가 언니에게 왜 그랬는지 분노해 질문하는데, 로자는 미국에 밀입국해서 동생 학비를 내고, 멕시코에 있는 가족의 생활비를 내고, 두 아이와 당뇨로 시력을 잃어가고 있는 보험이 없는 남편의 병원비를 내기 위해 자신이 저녁엔 몸을 팔고 낮엔 일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을 말하며 오열한다. 마야 역시 오열하며 난 아무 것도 몰랐어란 말밖엔 하지 못하며 뛰쳐나간다. 마야의 언니 로자 이 영화의 제목의 일부인 장미와 같은 이름인 로자’ - 는 동료들을 배신한 사람이지만 어쩌면 이 영화에서 가장 비극적 울림을 크게 가지는 인물이다. 다소 신파적인 설정으로 느껴질지 모르지만 영화는 냉정하게 노동자의 현실을 담아낸다. 그리고 그들이 결국 투쟁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보여준다.

 

왜 우리의 드라마 속 브라운관, 영화 속 스크린에서는 대학 청소용역노동자들의 삶, 착취당하는 이주노동자의 삶, 해고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여성노동자의 삶, 최저생계비는커녕 주거와 의료, 교육의 기본권도 지키지 못하는 수많은 빈민들의 삶은 보이지 않을까? (브라운관 속에서 어쩌다 마주치는 사회적 소수자는 항상 출생의 비밀을 간직하고 태어나 결국 사회적 권력자의 도움을 얻어 꿈을 쟁취하곤 한다.) 왜 우리에겐 켄 로치가 없을까? 어쩌면 이 영화의 제목인 빵과 장미라는 상징! 근대화, 민주화를 거치며 빵은 조금이나마 쟁취했지만, 여전히 장미’, 행복한 삶을 추구할 권리는 멀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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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러브 - Glove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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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 시즌이 시작됐다. 1982년 시작된 프로야구는 올해로 서른 살, 관객 600만을 바라보는 한국 최고의 프로스포츠 중 하나이다. 하지만 종종 지적되듯, 한국엔 고교야구 구단이 50여 개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옆 나라 일본에 3천개가 넘는 고교야구단이 있음은 자주 비교되는 사실이기도 하다. 다만 이제 고교야구를 찾는 관객은 대부분 사라졌고, 찾는다면 그건, 고교야구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이후 프로야구에 입단할 뛰어난 선수의 장단점을 체크하기 위한 스카우터의 관점에서일 뿐이다. 누구나 알고 있을 이런 야구의 현실 속에서 영화 글러브가 존재한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충주 성심학교 청각장애인 야구단의 이야기다.

 

주인공은 전성기가 조금 지난 과거의 프로야구 에이스였던 김상남(정재영)이다. 그는 LG 구단으로부터 퇴출되어 성심학교의 감독으로 부임하는데 여기서부터 영화가 시작된다. 오합지졸이었던 성심학교 청각장애인 야구팀이 다른 고교야구팀과 대등한 경기를 펼치게 되기까지의 감동의 스토리! 그 과정은 비교적 성공적으로 그려져 영화는 흥행에도 성공했고 많은 관객들은 영화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

 

강우석 감독은 투캅스’, ‘마누라 죽이기’, ‘공공의 적(시리즈)’, ‘이끼등을 연출한 한국의 흥행감독이다. 1년에 50편 만들어지는 한국영화 중에서 10%만 흥행한다는 시장의 논리 안에서 성공한 몇 안되는 흥행감독이다. 그는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성심학교는 연습경기에서 대패를 하는데 연습경기 중 상대팀 선수들이 너무 실력차이가 심하자 경기를 봐주면서 일부러 삼진아웃을 계속 당한다. 그러자 김상남은 상대팀 덕아웃에 들어가 선수들을 일렬로 세우고 우리 아이들이 형편없이 못한다는 것은 나도 잘 알지만, 이렇게 봐주면서 하는 것은 아니잖아, 시혜와 동정이 아니라 더 가차 없이 밟아주라고, 아예 다시 일어날 힘이 없을 정도로 깨부수라고 말한다.

 

<글러브>에서 김상남 선수는 두 번의 일장연설을 한다. 첫 번째는 위의 연습경기가 끝난 후 성심학교 선수들에게 하는 연설, 자신들을 동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그들을 박살내버리라고, 깨부시라고, 이겨서 그래, 내가 이겼다외치라고. 두 번째는 자신의 퇴출을 결정하는 성심학교 이사회 앞에서, 자신은 떠나겠으니 이제 시작된 아이들의 열정은 자르지 말라고 한다.

 

영화에서 배우가 카메라 정면을 바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관객은 배우가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말하는 것 같아 몰입에 방해를 받아 판타지가 깨지기 때문에 거의 사용되지 않는 장면이다. <글러브>에서는 그런 장면이 많다. 특히 김상남 선수가 연설할 때 그는 카메라 정면을 보고 말한다. 야구부원에게 하는 말이지만 동시에 관객을 향해 하는 말이 된다. 그는 관객에게 말한다. 엄혹한 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처절하게 싸워 이겨야 한다고.

 

잠시 얼마 전 있었던 420일 장애인의 날 집회에서 장애인들이 하는 외침을 들어보자. “우리를 시혜와 동정의 대상으로 보지 마라!”. 김상남 선수의 말과 비슷하지 않냐고? 맞다. 하지만 같은 말인데 다른 의미를 전달한다. 무엇이 다르냐고? <글러브>에서 성심학교 야구단 선수들은 주체가 아니라 대상이다. 그들은 김상남 선수의 감동적인 연설의 대상이고, 김상남 선수로 인해 그가 말한 대로 분노해 열정적으로 훈련할 뿐이다. 하지만 그들에겐 갈등도 고민도 아픔도 모두 비장애인에게 투영된 의미로만 전달된다. 그들은 삶의 주체가 아니다. 그들의 삶의 결은 역설적이게도, 비장애인의 관점에서 바라본 눈물의 도구일 뿐이다. 그들은 단 한 번도 왜 자신이 야구를 하는지’, ‘야구를 하면서 무엇이 힘든지’, ‘고교야구 이후 자신이 실업야구, 프로야구단에 갈 수 있는 현실인지’, ‘야구단 안에서 불만이 무엇인지’, 그 무엇도 말할 기회가 없고, 말할 생각도 없고, 비장애인들에게 감동의 스토리를 전달하기 위해 분노의 외침을, 그것도 김상남 선수가 자극을 줄 때만 외칠 뿐인 인형이기 때문이다.

 

시혜와 동정의 대상으로 보지 마라’, 이 외침은 주체의 외침이어야 한다. <글러브>는 강우석 감독이, 비장애인들의 관점으로, 이 엄혹한 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한 투쟁을 이야기한다. 자본주의 경쟁사회에서 1등을 하기 위해 싸워 이기자고 말한다. 자신은 그 현실 속에서 이렇게 살아남았다고. 이 영화는 장애인 인권 영화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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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꾼 - Bleak Night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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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 년간 한국영화의 한 경향이라 할 수 있는 것은 독립장편()영화의 성장이다. ‘똥파리’, ‘낮술’, ‘짐승의 끝’, ‘무산일기’, ‘혜화,’, ‘회오리 바람’, ‘파수꾼등 주류영화의 외곽에서 저예산으로 만들어져 극장에서 개봉한 영화들을 말한다. 독립장편영화라는 말. 처음에 들을 땐 좀 어색하게 들렸는데, 왜냐하면 90년대까지만 해도 독립영화에서 독립장편영화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90년대 초반에도 파업전야닫힌 교문을 열고와 같은 독립장편영화들이 있었지만 그때는 독립장편영화란 말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그때 독립영화는 단편영화, 실험영화, 다큐멘터리영화들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독립영화는 극장개봉과는 먼 거리에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극장개봉을 위한 장편이란 형식은 큰 의미가 없었다. 좀 더 과장하면 극장에서 검열을 받는 장편영화는 독립영화의 흐름이 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90년대부터 상황은 변했고, 독립영화를 하는 사람들은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독립이란 무엇인가, 무엇으로부터의 독립인가, 자본, 검열, 주류적인 가치로부터의 독립인가 등의 논의들이 있었다. 합의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독립영화는 저예산영화’, ‘비주류영화’, 최근엔 다양성영화라는 말까지 사용되며, 흔히 충무로영화라고 말하는 주류영화 외곽에서 만들어지는 영화를 폭넓게 아우르는 개념으로 사용되어왔다.

 

최근 주목받는 독립장편영화와 독립영화작가들의 등장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봐야할까? 저예산으로 만들어져 전용관이나 CGV에서 열어주는 몇 개 안되는 개봉관에서 상영하는 장편영화가 독립장편영화인가? 독립장편영화를 만들어 주목받는 소수의 감독들이 이후 충무로로 건너가 장편상업영화를 찍는다면 그는 독립영화감독인가? 반대로 그들이 계속 얼마 안되는 독립영화지원과 소수의 개봉관을 계속 잡고 있다면 다른 알려지지 않은 독립영화감독들은 어떻게 영화를 만들고 개봉할까?

 

서론이 길었다. 이 짧은 지면에 독립장편영화의 개념, 정체성, 미래에 대해 깊게 다룰 수 있는 공간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시작한 것은 <파수꾼>을 통해, 그것을 독립장편영화라 부르건, 아니면 다른 무엇이라 부르건, 어떤 가능성과 희망을 봤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모색을 통해 한국영화가 변하고, 우리의 삶의 질이 더 풍요로워질 수는 없을까에 대한 질문을 하기 위해서다.

 

<파수꾼>은 한 고등학생의 (자살로 추측되는) 죽음으로 시작해 그 학생의 아버지가 죽음의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을 통해 드러나는 고등학생 남자 아이들 사이의 우정, 갈등, 오해 등의 관계를 보여주는 영화다. 영화는 시작하자마자 고등학교 남자 아이들이 떼를 지어 한 명의 학생을 구타하는 장면을 핸드헬드로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그리고 나서 자식을 잃은 아버지가 학교에 찾아가는 장면이 이어진다. 학교 폭력을 다룬 영화, 왕따를 당한 약한 아이의 자살과 학교 폭력을 다룬 영화일 거라 예상하게 하면서 영화는 시작되지만, 자살한 학생은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였고, 학교폭력을 다룬 영화도 아니다. 서사가 진행되면서 세 명의 친구사이 사소한 오해가 파국으로 치닫기까지의 과정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오해와 갈등도 뉴스에 보도될만한 대단한 이유는 제시되지 않고, 일상적인 생활에서 누구에게나 있을법한 사소한 사건들과 대화들로 이루어져 있다. 학교 짱인 기태는 친한 친구인 희준과 사소한 갈등이 생긴 후, 희준이 자신을 멀리 하며 침묵하자,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한다. 그 중 한 장면. 기태 : ‘뭐가 문제야?’, 희준 : ‘왜 이래?’ ‘그런 것 없어’, 기태 : ‘왜 웃어?’ 희준 : ‘뭐가?’ 기태 : ‘날 보고 얘기해희준 : ‘?’ 기태 : ‘왜 그렇게 봐이런 식이다. 뭔가 터질 것 같은 긴장감이 존재하지만 그 긴장감은 내용을 가지지 않고 공기로만 존재하며 그들이 속으로 생각하는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전달하지 않는다.

 

영화는 희준의 관점, 또 다른 친구인 동윤의 관점으로, 죽은 기태와의 이전 관계에 대한 과거의 기억을 보여주면서 기태의 죽음의 이유를 조금씩 짐작하게 하지만 그에 대해 사회적 이유나 개인적 환경의 이유 같은 것을 제시하진 않는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가 지금 동시대의 현실을 날카롭게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리얼리티를 획득한다. 2001년 흥행기록을 새로 쓴 곽경택 감독의 <친구>의 비극은 드라마로만 보이지만 <파수꾼>은 이 시대의 현실에 대한 우울한 울림을 가지는 이유다.

 

독립장편영화의 가능성, 희망, 미래를 말할 수 있는 점은 바로 이 지점에서일 것 같다. 주류의 상업적인 기획에서는 보여주지 못했던, 또는 보여줄 수 없었던, 재현방식. 영화라는 창을 통해서 현실을 보여주는 어떤방식. ‘무엇을 말하는가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보여주는가의 문제. 그것을 통해 현실과 영화가 관계를 맺는 방식의 문제로서의 영화. 영화는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 그를 통해 동시대의 삶의 풍경에 대해 질문하는 것. ‘독립장편영화라는 개념은 새로 씌어져야겠지만, 그 개념을 새로 씀에 있어서 <파수꾼>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작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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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아트 - 예술의 최전선
진중권 엮음 / 휴머니스트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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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이 애스콧의 미디어아트 개념에는 수많은 신조어들이 있다. 그 신조어들을 제대로 이해해야 아마도 그의 미학이 이해될 것 같다. 개념들을 중심으로 짚어본다. (굵은 글씨는 내 생각)

1. 인터랙티비티에 대해.

로이 애스콧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미디어아트에서 상호작용과 관련해선 항상 나오는 이야기다. "의미와 체험은 부분적으로 관객에 의해 창조됩니다. 여기서 예술가는 인터랙티비티가 발생하는 콘텍스트의 제공자에 가까워집니다."(p44) 뭐 그닥 새로운 얘긴 아니다. 바르트의 '저자의 죽음'이나 '작품에서 텍스트로'와 관련된 이야기들의 연장선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애스콧에게서는 더 유물론적 태도가 있는데 - 이건 아마 벤야민의 영향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 가령 이런 관점들, "예술작품은 시스템의 한 부분", "관객의 행동이, 그들의 개념적, 물리적 행동이 작품의 물리적 본성에 영향을 끼칩니다"(p44)란 대목들. 더 나아가서 애스콧은 미디어아트란 작품이라기 보다는 사람들의 인식과 감각기관의 일부이고, 예술(미디어)이란 개념 자체가 변화되는 일부로 보는 것 같다.

작가와 관객과 작품을 고정되어 나누지 말고 역전도 시켜보고 관객이 작품을 쓰도록도 해 보고 작품도 계속 변형시켜보는 작업?

2. 텔레노이아

"그것은 일종의 축복을 일컫는 거예요"(p46) 여기엔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기술축복, 다른 하나는 공동체의 축제. 서구의 경우 과도한 프라이버시의 개념으로부터 억압된, 그로부터의 해방된 공동체. 뭐 대략 이런 뜻이다. "그 누가 나에 대해, 또는 이것에 대해 아는 것을 원하지 않아란 두려움을 우리는 파라노이아라 부르죠. 그런데 네트워킹의 효과는 제가 텔레노이아라 부르는 축복을 가져오죠." 그는 페이스북을 한 예로 이야기한다. 그가 이야기하는 기술은 여기서 물리적 기계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촉촉한' 미디어라고 말하는 생물학적인 것과의 융합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흥미로운 지점 중 하나 "우리가 서로를 (명사가 아니라) 동사로 여긴다면 우리는 행복할 겁니다."(p49) 심광현 선생이 문화과학에서 자주 하는 이야기 중 하나로 "문명도 문화도 인간이 만든 건데, 차이는 문명은 '명사'이고 문화는 '동사'"라고 했던 이야기가 기억난다. 관련된 이야기로 보인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역사와 시스템 안에서 변하는 존재인데, 오리는 종종 고정된 사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작품 안에서도. "나는 동사다."

동사로서의 인간과 사물. 

3. 하이퍼코텍스

"웹은 그냥 도서관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일부입니다." 웹과 실재가 분리된 세계가 아니란 것. 또 신체에 대한 기술의 개입을 권력개입이라 비판하는 폴 비릴리오에 대해 "가련한 늙은이"라 칭하며 "인공과 자연의 분리는 당신도 알고 있듯이 서구의 이분법적인 사고에서 나옵니다. 특히 비릴리오가 그 사고를 구현하고 있지요"라 비판한다. (p55) "이것은 도시고 저것은 시골이라고 구별하는 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습니다." 흠 "네트워크의 일부"가 된다는 것을 "느낀다"는 것. (p58)

공동체와 네트워크에 대한 상상!!!

4. 웜홀

다른 차원의 시공간을 연결해 시간여행이 가능하게 해 주는 장치에 대한 고안. "실험실로, 숲으로, 산으로, 또는 그 밖의 어떤 것으로든 웜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웜홀링은 또 다른 우주에 즉각적으로 접근한다는 생각입니다. "(p64) 하이퍼링크에 대한 것.

이것은 아마도 미디어아트를 창작할 때 항상 고려해야할 부분일 것 같다. 어딘가 한 곳에 정지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유연하게 다른 장소로 연결될 수 있는 상상이란 지점에서.

5. 자아의 상실이 아닌 자아의 복수성.

프로이드의 무의식의 존재로부터 더 나아가는 이야긴데, 모든 사람은 여러 개의 자아를 가지고 있단 얘기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은 '자아들'을 창조하는 것이지 하나의 자아를 창조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p66)

뭐 아주 새로운 이야기라 할 순 없겠다. 음. 이걸 단순히 세컨드 라이프나 아바타, 웹 안에서의 그러니까 가상현실에서의 다중자아로만 생각하면 재미없을 것 같고, 그 변화를 모두 포함한 장, 바로 현실에서 다중자아로 생각할 때 훤씬 풍부한 사유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6. 아포리아

애스콧의 개념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 중 하나가 '아포리아(Aporia)'다. 아포리아란 불확실성, 모순, 연속성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비연속적 문제를 뜻한다. "모순으로 가득 찬 아포리아의 상태에 있을 때, 그것을 누군가 때려눕히거나 쏘아 죽이는 식으로 풀어서는 안됩니다."(p70) 푸하하. "아포리아는 우리가 처한 조건입니다." "아포리아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통제를 함으로써 권력을 잡으려는 이들입니다."(p72)

굳이 미디어아트를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아포리아'는 모든 예술작품, 모든 삶의 태도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서구 근대의 분과예술의 벽을 넘기 위해서도, 바로 이 모순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두려워해선 안된다. 이는 '옹달샘'을 만들면서 우리가 하지 못하고 봉합했던 지점이기도 하다. 

그의 현행 미디어아트에 대한 비판에 귀기울여보자. "창에 브라인드좀 달아야 할 것 같아. 그리고 벽에 파워포인터가 더 많아야 할 것 같아. 가능한 많이"(p74) 미디어아트의 현실이 이렇다는 거다. 더 많은 장치를 세우고, 떼깔 반지르하게 만들고, 스펙터클 만들려는 시도들. 그게 미디어아트가 아닌데 많은 아티스크가 그렇게 하고 있단 거다. 

이 얘기 들으며 '옹달샘' 만들며 나도 그런 생각이 없지 않았다는 걸 안다. 부끄러워진다. 조금이나마 관객들을 즐겁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변명해 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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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릿 - 청소년과 어른, 그리고 어린이를 위한 그림책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프리드리히 카를 베히터 엮음, 김경연 옮김 / 보림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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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필요에 의해서 그림책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몇 권 읽었는데 그 중 '햄릿'을 소개한다. 그림책들 중 창작물도 많지만 고전을 아이들에게 쉽게 읽히기 위해 개작된 것들도 많다. '햄릿'도 그런 범주에 드는 그림책일 듯 하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깜짝 놀랐다. 그림책이 이렇게 잔인할 수가. 원작인 세익스피어의 햄릿보다 베히터의 햄릿은 더 암울하고 비극적이다.
 

줄거리는 기본적으로 원작 햄릿과 (결론이 조금 다르지만) 동일하다. 등장인물은 햄릿, 크로디어스(숙부), 거트루드(어머니이자 현재는 크로디어스의 아내), 폴로니어스(재상), 오필리어(폴로니어스의 딸), 그리고 어릿광대와 곰으로 압축되어 있다. 어릿광대와 곰의 등장은 그림책이니 아이들에게 친숙하게 다가가기 위한 장치로 생각할 수 있겠으나 그런 이유만 있지 않다. 어릿광대와 곰은 원작 햄릿의 햄릿의 친구인 호레이쇼와 근위대원들, 그리고 연극을 공연하는 배우들 등의 여러 역할을 동시에 하는데, 그보다 더 중요하게 햄릿의 또 다른 자아를 연기한다는 점에서 베히터의 '햄릿'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어릿광대와 곰이 햄릿의 자아를 대신하면서 세익스피어의 '햄릿'과 전혀 다른 '햄릿'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잘 알다시피 세익스피어의 대부분의 인물들은 수다스런 캐릭터들이다. 세익스피어는 말들의 잔치고, 그 말들의 은유와 환유, 몰래 듣는 말, 오해하는 말들로 서사가 진행된다. 원작의 '햄릿' 역시 수다스런 캐릭터다. 그는 자기 심정을 다 떠벌리고 다니고, 연극을 하거나 거짓도 말하고, 고독도 독백으로 호소한다. 그런데 베히터의 '햄릿'에서 햄릿은 대사가 없다. 그는 내성적이고 고독하고 결국 복수도 하지 못하고 자기 스스로 마음의 쇠사슬에 묶여 탑 안에 혼자 머물 수밖에 없는 인물이 된다. 오필리어와의 사랑도,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것도 모두 자기 마음 속에 가둬둘 수밖에 없는 햄릿이 됐다. 햄릿이 이런 캐릭터가 될 수 있는 이유는 그의 또 다른 자아, 수다스런 자아인 어릿광대와 곰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베히터의 '햄릿'이 세익스피어의 햄릿과 가장 크게 달라진 지점이고, 세익스피어의 비극보다 훨씬 더 현대적인 비극이 된 것으로 생각된다.(베히터의 햄릿에서 햄릿이 하는 말은 딱 세 마디인데, '오필리어', '쥐들이 바스락거려', '내가 찌르려던 건 다른 쥐였는데'가 전부다. '죽느냐 사느냐 이것이 문제로다'는 아예 나오지 않는다.)

세익스피어의 원작을 읽지 않은 독자라면 사실 이 그림책은 동시대의 가족 이야기로 읽힐 수 있을 것 같고, 아마도 어린 아이가 읽으면 아버지의 죽음과 어머니의 삼촌과의 결혼, 그리고 사랑하는 오필리어와 맺어질 수 없는 현대적인 비극으로 읽힐 것 같다. 원작을 읽은 독자라면 원작에 대한 재해석을 하면서 더 풍요로운 읽기가 가능할 것 같기도 하다. 

원작의 1막에서 아버지의 장례식이 끝난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에서 숙부와 어머니의 결혼식이 끝난 어느 잔치, 햄릿은 어머니가 정절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하여 한을 풀어놓고, 이후의 여러 막에서 햄릿은 어머니와 숙부의 결혼에 대해 고통스러워 하는데, 이 베히터의 햄릿에서 그런 모든 장면들은 단 하나의 씬으로 압축되어있다. 숙부와 어머니의 침대 아래에 몰래 웅크리고 누워있는 모습. 아이들 그림책으로는 충격적으로 느껴지는데, 원작의 햄릿이 어머니에게 양가적인 감정을 느끼며 갈등하고, 호통하고, 질러대는 고통이었다면, 베히터의 햄릿의 고통은 고독하고 내면화되어 있다. 

 원작의 햄릿은 오필리어를 아버지의 복수를 실천하기 위해 이용만 하고 이미 영국에서 돌아오기 전에 오필리어는 죽어 있지만, 베히터의 햄릿은 그녀에 대한 사랑도 아버지에 대한 복수도 실천하지 못하고, 오필리어의 아버지, 폴로니어스만 죽인 채로, 마음의 쇠사슬을 채워버리고 만다. 오필리어는 햄릿을 찾아가 쇠사슬을 풀어주고 '이리와, 새야, 널 날게 해줄게'라고 말한 채, 자신은 이성을 잃어버리고 광인이 된다. 햄릿의 또 다른 자아인 어릿광대와 곰은 마음의 쇠사슬에 묶인 햄릿을 그대로 둔 채, 광인이 된 오필리어를 따라가며 베히터의 '햄릿'은 끝난다. 세익스피어의 비극이 운명적인 비극이라면 베히터의 비극은 스스로 선택하는 비극이라 더 고통스럽다. 

베히터의 햄릿이 아이들을 위한 그림책으로 좋은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세익스피어의 햄릿을 개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해 현대적인 새로운 비극을 만들었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 같다. 그림책이 이렇게 강렬할 수 있다는 것에 이 그림책의 의미를 담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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