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 아브르 - Le Havre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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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동북부의 한 항구도시, 르 아브르. 청년은 거의 없고 노인들만 사는 이 조용한 마을에 아내 아를레티와 단 둘이 사는 구두닦이 노인 마르셀이 있다. 어느 날 그 마을 선착장에 잘못 도착한 컨테이너 안의 불법이민자들이 경찰에 모두 잡혀가는데 이드리사라는 흑인소년만이 탈출한다. 소년을 발견한 노인 마르셀은 영국에 있는 그의 엄마를 찾아 밀입국시키기 위한 힘겨운 여정을 시작한다.

 

하층민들의 삶, 무표정의 표정, 침묵의 언어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의 영화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우리가 흔히 어느 곳에서나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 하층민들이다. <르 아브르>에 등장하는 인물도 아내와 단 둘이 살며 구두닦이로 벌이를 하고 아내에게 바게트 빵을 사가기 위해 매번 구멍가게에서 외상을 하는 노인과 집안일을 하며 병들어가는 아내, 이민 와서 구두닦이를 하는 동양인 청년, 또 외상을 할지 모르는 마르셀이 들어올까 바삐 셔터문을 내리는 구멍가게 부부,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으나 매일같이 저녁이 되면 라 모데르느라는 선술집에 모여 술을 마시는 노동자 복색의 사람들. 카우리스마키 영화 속의 이들은 하나같이 무표정한 표정이며 말이 별로 없다. 그리고 대사와 대사 사이에는 인과관계의 끈이 떨어져 있어 독백처럼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의도적으로 시적이거나 압축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니라 이미 눈빛만 보아도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이들 사이에 설명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그 설명이 필요 없는 대화 사이의 간극, 표정 사이의 간극, 그 빈 공간에 있는 것은 관객이 보면서 채워야 하는데, 거기에 우정, 연민, 사랑, 연대의 정이 있다.

 

꼬뮌과 연대, 그들은 그 속에서 누구나 영웅이다

 

르 아브르라는 조용한 마을에 흑인 소년 이드리사가 나타나자, 그를 도와주려는 노인 마르셀! 마을 사람들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소년이 불법이민자로 경찰에 쫓기는 것을 알고 있고, 마르셀이 하려고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며, 그를 돕기 시작한다. 영국으로 밀입국시키기 위해 돈이 필요하자 그 마을의 밴드 기타리스트 노인을 섭외하는데, 다툰 아내와 화해하기 전에는 공연을 할 수 없다고 한다. 마르셀은 그의 아내를 찾아와 화해시키고, 기타리스트 노인은 아내와 화해한 후 영웅적인 락커가 되어 공연을 한다. 경찰의 눈을 피해 소년을 숨겨 선착장까지 데려가는 일은 동양인 이민자가 맡는다. 마르셀은 공연에서 번 돈과 자신의 돈을 합쳐 소년을 영국에 밀입국시키기 위한 배에 태운다. 이 모든 과정 속에서 라 모데르는라는 선술집과 마을 곳곳에서 그들은 꼬뮌을 결성하고, 누가 누구에게 지시하거나 할 것 없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며 스스로 그들의 행동원칙을 만들어간다. 이에 경찰은 속수무책이다. 그 자발적인 꼬뮌 안에서 그들은 모두 영웅이다. 수직적인 인간관계가 아닌 수평적인 인간관계에서, 그들은 누구도 타인을 책하지 않으며 소년을 탈출시키기 위한 각자의 몫을 행한다. 그들의 무표정과 침묵 안에, 선술집의 일상 안에서 연대의 꼬뮌이 결성된다.

 

<르 아브르>가 비현실적인 동화 같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다. ‘비현실적이라고 말하는 것에는 현실 속에서 타인(소년)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는 생각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렇다, 그렇게 본다면 <르 아브르>는 비현실적인 영화다. 하지만 그것은 영화의 표면만 보는 것이다. 이야기된 것의 표면과 표면 사이에 있는 것, 프로이드가 말실수나 은유, 환유를 통해 보고자 했던 무의식, <르 아브르>의 대사 사이, 장면 사이, 표정 사이에 있는 노동자, 하층민의 언어에 주목해 본다면 <르 아브르>는 그저 비현실적인 동화만은 아니다. 불법이민자를 잡아가는 국가장치 속에서 하층민끼리의 꼬뮌과 연대는 소년을 구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국가에 대한 그들의 놀이이자, 언어이자, 문화이자, 축제이자, 투쟁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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