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신 인형
왕멍 지음, 전형준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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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왜 읽는 것이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소설보다는 현실에 도움이 되고 삶에 지식이 되는 책을 읽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고 내게 충고했다. 나는 '현실에 도움이 되고' '삶에 지식이 되는' 책의 기준이 무엇인지 몰라 눈만 멀뚱멀뚱 하고 있을 뿐이었다. 분명히 소설은 내게 다분히도 현실적이었고 지적인 도구였다. 그것들은 현실에 대한 천착을 하고 살아가게 했으며, 수많은 세상의 이야기를 알려줬었다. 그것이 소설을 읽지 말아야 할 이유라고 한다면 도대체 어떤 책들이 소설을 대신한다는 것인지 나는 궁금했다. 봉건제도의 뿌리가 아직 깊이 남아있었던 1940년대의 중국에서 한 가정이 어떻게 해체 되고, 그 속에서 개인은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는지를 소설이 아니면, 어떻게 이렇게 깊이 들여다 볼 수 있는 것일까.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결코 헛된 일이 아님을, 나는 다시 한 번 깨닫는다.

1980년 독일에서 니자오의 회상으로 시작되는 이 이야기는 40년이라는 시간을 넘나들면서, 시대의 흐름에 따른 세대의 교체와 그 교체점에서 방황하는 인물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 인물들은 저마다의 고통을 안고 변화의 시기를 버텨나간다. 유럽으로 유학까지 다녀온 니자오의 아버지 니우청은 신지식인으로써의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에 고통스러워 한다. 그리고 이런 남편을 둔 쟝징은 여전히 봉건적인 생활에 젖어 있기에 남편과 끊임없이 대립하고 이런 불화를 고통스러워 한다. 한 가정의 중심축이 되는 이 부부의 고통을 보고 있는 쟝징의 어머니와 언니는 자신들의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쟝징이 필요하고, 이 부부의 불화가 그들을 쟝징과 연결시키는 매개체가 됨을 알기에 그것을 해소시킬 생각이 없지만 자신들의 처지에 또 다른 고통을 느낀다. 그리고 쟝징과 니우청의 자식들 역시 부모의 고통을 고스란히 함께한다. 이 우울한 이야기가 중심축이 되어 전개 되는 이 소설은 결코 즐거울 구석이 없고, 삶에 희망적일 이유조차 없어 보인다. 하지만 어렵게나마 이 소설을 읽게 하는 힘은 그 우울함 속에 진정성이 숨어있기 때문이고, 현재 우리의 모습 역시 발견되기 때문이다. 지식인이기 때문에 가져야 하는 드높은 이상은 현실과 전혀 들어맞지 않지만 현실을 개조할 의지 또한 엿보이지 않는 니우창의 모순, 봉건제에 얽메여 있지만 실생활에서는 그것을 거부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 쟝징과 친정 가족들의 모순, 이런 인물들의 모순들은 엄청난 환멸을 이끌어낸다. 하지만 그 속에서 우리 삶의 모순 또한 발견하게 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리 역시 변화하는 시대 속에 살고 있고 그 속에서 변하는 가치들에 얼마나 큰 혼란을 겪고 모순된 삶을 살고 있는가. 하지만 소설은 그 모순과 환멸이 우리에게 현실을 바꿀 수 있는 이상을 제시해 줌을 놓지 않는다. 그래서 이 단순해 보이는 구조가 사실은 결코 단순하지 않은 것이며, 그것이 바로 이 소설의 재미를 유발하고, 이 우울한 이야기를 결국은 희망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렇기에 왕멍이 작가의 말에서 '이상은 현실을 개조하지만, 이상은 반드시 현실의 노력을 통해 현실을 개조해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현실도 이상을 개조한다. 이 과정은 비록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그래서 오히려 큰 의미가 있는 것이다.'라고 하는 이 말은 스스로의 독백이기도 하겠지만, 결국 니자오의 말이 될 수도 있는 것이고 작가가 독자에게 하는 말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 또한 소설 속에서 계속해서 드러나는 니자오가 즉 왕멍이라는 공식을 대입해서 볼 때, 소설을 통한 과거와의 화해, 소설을 통한 자신의 모순과의 극복은 책을 읽고 난 후 독자가 느낄 수 있는 최고의 희열이 될 수도 있다.

도대체 소설이 무엇을 얼마나 더 가르쳐야 하는 것일까. 나는 늘 이렇게 소설 앞에서 부끄러워진다. 끝없이 자기 반성을 해야 한다. 이런 부끄러움을 주는 이 대단한 소설 앞에서는 노벨문학상 후보라던가 서울대학교 추천도서라던가의 수식어 역시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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