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달콤한 나의 도시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7월
평점 :
달콤하다. 아니, 달콤하지 않다. 달콤하게 나아가는 정이현의 문장들에 빠져 읽다가 어느새 씁쓸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다. 후줄근한 모습으로 마주친 옛 애인 같은 느낌이랄까. 소설 속 일상은 경쾌한 느낌의 문장들과 자주 어긋난다. 크림 듬뿍 들어간 커피를 마시는 듯한 문장들 속에서 비릿한 냄새를 풍기는 일상을 마주하는 느낌이라니. 정이현의 노련하면서도 영리한 감각들에 감탄을 해야 하는 건지, 몇 잔의 술과 적당한 자기변명으로 살아가는 도시인의 일상에 서글픈 공감을 해야 하는 건지 자주 헷갈린다.
눈에 착착 감기는 문장들로 삼십대 초반의 일상이 묘사된다. 서른하나에서 이제 서른둘로 넘어가는 시기의 일과 사랑, 스무 살 때 품었던 삶에 대한 달콤한 기대가 조금씩 무너져가는 시간의 일상이 그려진다. 삼십대 초반의 미혼 여성 오은수의 이야기는 바로 이제 서른을 넘어선 일상을 보내고 있는 나와 당신의 이야기이다. 뜨거운 열정이나 사랑은 서랍 속에 쌓아둔 지 오래고 직장과 집을 왔다갔다 거리며 남들처럼 평범한 사람을 만나 결혼하기 위해 애쓰고 비슷비슷한 고독과 슬픔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그런 이야기들... 사랑과 일, 그것을 둘러싼 일상의 풍경 모두 왜 그렇게 비슷비슷한 걸까. 아니, 이럴 땐 너무 적나라하다는 표현을 해야 하는 걸까. 그녀가 묘사하는 풍경이 어쩜 이렇게 지독하게 공감이 되느냐 말이다. 그 절절한 공감 뒤엔 또 어찌나 쓰디쓴 맛이 남는지. 서른을 넘어선 사랑도,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일상도.
서른을 넘어선 사랑은 너무 뜨겁지 않아서, 너무 무모하지 않아서 싱겁다. 안정된 직장을 찾는 것 마냥 결혼 상대자를 고르고, 친구의 결혼 소식에 요상한 기분이 드는 게 너무나 정상적인 삼십대 초반. 그래서 미래가 불안한 연하남과의 연애는 자연스러운 수순처럼 어긋나고 만다. 안정된 직장을 가진 남자와의 연애는 무언가 강렬하게 뜨거운 것이 없지만 그래도 어쩌겠는가. 불안정한 미래에 모험을 거느니 밋밋하지만 안정된 생활을 택하는 게 서른을 넘어선 사랑의 모습 아니겠는가.
서른을 넘어선 일상 또한 싱겁긴 마찬가지다. 이젠 더럽고 치사한 일이 있어도 눈물 흘리지 않을 정도의 여유는 갖추게 되었지만 술에 취해 하지 말았어야 할 실수들을 저지르는 건 여전하다. 뒤에서는 수군거리지만 정작 앞에서는 할 말 못하는 거야 편하게 직장 생활을 하려면 어쩔 수 없는 것들이고 아무리 더러운 일이 있어도 과감히 사직서를 날리는 데는 무진장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알량한 자존심과 지독한 현실주의 속에서 지루한 줄다리기를 하는 것 같은 직장 생활이야 그렇다 치고 옛 애인의 결혼식 날 불러낼 마땅할 사람 하나 없는 초라한 인간관계와 그 속에서마저 깊은 속내를 드러내지 못하는 길들여진 외로움은 또 어떠한가. 도시인의 일상이란 것이 이토록 외로운 것이었나, 하는 새삼스런 자각이 스며든다. 친한 친구에게조차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기를 주저하면서, 포장된 마음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는, 그렇게 공허한 외로움 안에서 도시의 삶이 흘러가는지도 모른다.
공허한 외로움으로 채워져 있는 도시인의 일상에서 결혼 또한 어떤 특별한 의미가 있을 리 없다. 그저 비슷해지기 위한 절차 같은 것. 비슷한 표정의 사람들, 의미 없는 비슷한 만남들 같은 비슷비슷한 것들이 흘러넘치는 과잉의 도시 속에서 삼십 대 초반 오은수, 그녀 또한 남들과 비슷해지기 위해 결혼 속으로 들어가려 한다. 무엇이 들어있는지 좀처럼 알 수 없는 결혼이지만, 그것의 바깥에서 영원히 머무를 자신이 없다. 안정된 직장을 가지듯이 안정된 생활 속에 편입하고픈 욕구. 평범하지만 평범하다고 탓할 수 없는 그런 욕구. 왜 모르겠는가.
오은수는 생각한다. 내 삶에 내비게이션이라도 달렸으면 좋겠다고. 가진 것 없고 이룬 것 하나 없는 서른둘이라고 해도 지금은 어느 쪽으로 가라고 알려주는 내비게이션만 있다면 그리 우울하지는 않을 텐데. 지금 이 길이 맞는 건지, 아니 적어도 후회하지 않을 길로 들어서긴 한 건지. 우유부단한 성격이라 해도, 방황의 이십 대를 지나 삼십대를 넘어섰다 해도 인생이란 여전히 그 길을 알 수 없는 미궁의 연속이다. 두 남자와의 사랑에서 벗어나 이제 새로운 길을 앞두고 있는 그녀. 어떤 길을 가게 되고 어떤 길을 맞이하게 될까. 가끔은 신호 위반을 하더라도, 속도 위반을 하더라도 정상적인 경로로 가고 있다고 속삭여주는 내비게이션만 있다면 좋을 텐데.
정이현의 문장은 감각적이다. 두꺼운 분량임에도 지루할 틈 없이 읽어 내려갈 수 있다. 나보다 나에 대해 더 많이 아는 친구와 대화하는 것처럼, 나를 콕콕 찌르는 일상들이 다가온다. 스노 팰리스가 아닌 스노우 펠리스에 사는 205호 여자 오은수처럼 비슷비슷하게 생긴 아파트에서 살아가는, 305호 여자일 수도 있고, 405호 여자도 될 수 있는 내 일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갈팡질팡하는 오은수 그녀처럼 늘 삶의 중요한 기로에선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한참을 서성이는 내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어쩌면 메신저 창은 항상 열어놓고 있지만 정작 하고 싶은 말은 쏟아내지 못하는 내 마음을 들켜버린 것만 같은 마음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소설을 읽고 나면, 엉뚱하게도 크림 듬뿍 얹은 커피를 마신 것 같다. 마실 땐 달콤하지만 잔이 비워질 때쯤이면 씁쓸한 뒷맛이 남는 그런 커피를 마신 것만 같다. 그렇게 지독한 공감 뒤엔 씁쓸한 맛이 남는다. 서른의 일상에 대한 쓸쓸한 무게감이 엄습한다.
나의 달콤한 도시 속엔 너무나 씁쓸한 나와 당신이 들어 있다. 지금 내가 일상을 누리는 이 곳, 비슷한 표정의 사람들과 비슷비슷한 친절과 비슷비슷한 만남들이 흘러넘치는 이 곳. 그렇지만 정작 내 삶의 알맹이들은 좀처럼 채워지지 않는 이 곳. 그래서 늘 갈팡질팡하는 내가 들어 있는 곳, 바로 이 곳이 나의 달콤한 도시다. 그리고 달콤하지 않은 나의 도시다. 어쩌면 달콤하게 포장된 내가 불안하게 서성이고 있을지도 모를 그 곳.
달콤한 나의 도시엔 달콤하지 않은 나와 당신이 너무 많이 들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