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나의 도시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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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하다. 아니, 달콤하지 않다. 달콤하게 나아가는 정이현의 문장들에 빠져 읽다가 어느새 씁쓸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다. 후줄근한 모습으로 마주친 옛 애인 같은 느낌이랄까. 소설 속 일상은 경쾌한 느낌의 문장들과 자주 어긋난다. 크림 듬뿍 들어간 커피를 마시는 듯한 문장들 속에서 비릿한 냄새를 풍기는 일상을 마주하는 느낌이라니. 정이현의 노련하면서도 영리한 감각들에 감탄을 해야 하는 건지, 몇 잔의 술과 적당한 자기변명으로 살아가는 도시인의 일상에 서글픈 공감을 해야 하는 건지 자주 헷갈린다.


눈에 착착 감기는 문장들로 삼십대 초반의 일상이 묘사된다. 서른하나에서 이제 서른둘로 넘어가는 시기의 일과 사랑, 스무 살 때 품었던 삶에 대한 달콤한 기대가 조금씩 무너져가는 시간의 일상이 그려진다. 삼십대 초반의 미혼 여성 오은수의 이야기는 바로 이제 서른을 넘어선 일상을 보내고 있는 나와 당신의 이야기이다. 뜨거운 열정이나 사랑은 서랍 속에 쌓아둔 지 오래고 직장과 집을 왔다갔다 거리며 남들처럼 평범한 사람을 만나 결혼하기 위해 애쓰고 비슷비슷한 고독과 슬픔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그런 이야기들... 사랑과 일, 그것을 둘러싼 일상의 풍경 모두 왜 그렇게 비슷비슷한 걸까. 아니, 이럴 땐 너무 적나라하다는 표현을 해야 하는 걸까. 그녀가 묘사하는 풍경이 어쩜 이렇게 지독하게 공감이 되느냐 말이다. 그 절절한 공감 뒤엔 또 어찌나 쓰디쓴 맛이 남는지. 서른을 넘어선 사랑도,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일상도.    


서른을 넘어선 사랑은 너무 뜨겁지 않아서, 너무 무모하지 않아서 싱겁다. 안정된 직장을 찾는 것 마냥 결혼 상대자를 고르고, 친구의 결혼 소식에 요상한 기분이 드는 게 너무나 정상적인 삼십대 초반. 그래서 미래가 불안한 연하남과의 연애는 자연스러운 수순처럼 어긋나고 만다. 안정된 직장을 가진 남자와의 연애는 무언가 강렬하게 뜨거운 것이 없지만 그래도 어쩌겠는가. 불안정한 미래에 모험을 거느니 밋밋하지만 안정된 생활을 택하는 게 서른을 넘어선 사랑의 모습 아니겠는가.  


서른을 넘어선 일상 또한 싱겁긴 마찬가지다. 이젠 더럽고 치사한 일이 있어도 눈물 흘리지 않을 정도의 여유는 갖추게 되었지만 술에 취해 하지 말았어야 할 실수들을 저지르는 건 여전하다. 뒤에서는 수군거리지만 정작 앞에서는 할 말 못하는 거야 편하게 직장 생활을 하려면 어쩔 수 없는 것들이고 아무리 더러운 일이 있어도 과감히 사직서를 날리는 데는 무진장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알량한 자존심과 지독한 현실주의 속에서 지루한 줄다리기를 하는 것 같은 직장 생활이야 그렇다 치고 옛 애인의 결혼식 날 불러낼 마땅할 사람 하나 없는 초라한 인간관계와 그 속에서마저 깊은 속내를 드러내지 못하는 길들여진 외로움은 또 어떠한가. 도시인의 일상이란 것이 이토록 외로운 것이었나, 하는 새삼스런 자각이 스며든다. 친한 친구에게조차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기를 주저하면서, 포장된 마음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는, 그렇게 공허한 외로움 안에서 도시의 삶이 흘러가는지도 모른다.


공허한 외로움으로 채워져 있는 도시인의 일상에서 결혼 또한 어떤 특별한 의미가 있을 리 없다. 그저 비슷해지기 위한 절차 같은 것. 비슷한 표정의 사람들, 의미 없는 비슷한 만남들 같은 비슷비슷한 것들이 흘러넘치는 과잉의 도시 속에서 삼십 대 초반 오은수, 그녀 또한 남들과 비슷해지기 위해 결혼 속으로 들어가려 한다. 무엇이 들어있는지 좀처럼 알 수 없는 결혼이지만, 그것의 바깥에서 영원히 머무를 자신이 없다. 안정된 직장을 가지듯이 안정된 생활 속에 편입하고픈 욕구. 평범하지만 평범하다고 탓할 수 없는 그런 욕구. 왜 모르겠는가.


오은수는 생각한다. 내 삶에 내비게이션이라도 달렸으면 좋겠다고. 가진 것 없고 이룬 것 하나 없는 서른둘이라고 해도 지금은 어느 쪽으로 가라고 알려주는 내비게이션만 있다면 그리 우울하지는 않을 텐데. 지금 이 길이 맞는 건지, 아니 적어도 후회하지 않을 길로 들어서긴 한 건지. 우유부단한 성격이라 해도, 방황의 이십 대를 지나 삼십대를 넘어섰다 해도 인생이란 여전히 그 길을 알 수 없는 미궁의 연속이다. 두 남자와의 사랑에서 벗어나 이제 새로운 길을 앞두고 있는 그녀. 어떤 길을 가게 되고 어떤 길을 맞이하게 될까. 가끔은 신호 위반을 하더라도, 속도 위반을 하더라도 정상적인 경로로 가고 있다고 속삭여주는 내비게이션만 있다면 좋을 텐데.


정이현의 문장은 감각적이다. 두꺼운 분량임에도 지루할 틈 없이 읽어 내려갈 수 있다. 나보다 나에 대해 더 많이 아는 친구와 대화하는 것처럼, 나를 콕콕 찌르는 일상들이 다가온다. 스노 팰리스가 아닌 스노우 펠리스에 사는 205호 여자 오은수처럼 비슷비슷하게 생긴 아파트에서 살아가는, 305호 여자일 수도 있고, 405호 여자도 될 수 있는 내 일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갈팡질팡하는 오은수 그녀처럼 늘 삶의 중요한 기로에선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한참을 서성이는 내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어쩌면 메신저 창은 항상 열어놓고 있지만 정작 하고 싶은 말은 쏟아내지 못하는 내 마음을 들켜버린 것만 같은 마음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소설을 읽고 나면, 엉뚱하게도 크림 듬뿍 얹은 커피를 마신 것 같다. 마실 땐 달콤하지만 잔이 비워질 때쯤이면 씁쓸한 뒷맛이 남는 그런 커피를 마신 것만 같다. 그렇게 지독한 공감 뒤엔 씁쓸한 맛이 남는다. 서른의 일상에 대한 쓸쓸한 무게감이 엄습한다.


나의 달콤한 도시 속엔 너무나 씁쓸한 나와 당신이 들어 있다. 지금 내가 일상을 누리는 이 곳, 비슷한 표정의 사람들과 비슷비슷한 친절과 비슷비슷한 만남들이 흘러넘치는 이 곳. 그렇지만 정작 내 삶의 알맹이들은 좀처럼 채워지지 않는 이 곳. 그래서 늘 갈팡질팡하는 내가 들어 있는 곳, 바로 이 곳이 나의 달콤한 도시다. 그리고 달콤하지 않은 나의 도시다. 어쩌면 달콤하게 포장된 내가 불안하게 서성이고 있을지도 모를 그 곳.


달콤한 나의 도시엔 달콤하지 않은 나와 당신이 너무 많이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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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6-11-25 0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선 축하합니다. - 알라딘 마을 아프 -

ALINE 2006-11-27 2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락사스님. 감사합니다.^^
 
나는 선생님이 좋아요
하이타니 겐지로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 양철북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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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을 읽는 동안 괜스레 눈물이 나려 했다. 아름다운 선생님에 관한 이야기는 가슴 뭉클한 면이 있는 것 같다. <나는 선생님이 좋아요>는 아이들을 마음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아름다운 선생님들과 그리고 그 선생님들에 의해 점차 마음을 여는 아이들의 이야기다. 하이타니 겐지로의 17년간의 교사 경험이 녹아 있다고 하는 이 작품에서 아이들을 진정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선생님들을 만날 수 있다.


고다니 선생님은 아직 새내기 선생님이다. 마음이 여려 쉽게 울음을 터뜨리는 초보 선생님이지만, 아이들을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만큼은 어떤 선생님보다도 크다. 말도 잘 하지 않고 아이들과 어울리지도 않는 데쓰조의 마음을 열기 위해서 고다니 선생님은 차근차근 노력해간다. 파리를 키우는 데쓰조의 건강이 염려된 고다니 선생님은 잘 설득해보려 하지만 오히려 데쓰조의 마음만 상하게 할 뿐이다. 할 수 없이 고다니 선생님은 데쓰조가 파리 키우는 것을 도와주면서 점차 데쓰조의 마음을 열려고 시도한다.


고다니 선생님의 노력이 빛을 발하면서, 데쓰조는 서서히 변화하기 시작한다. 글씨도 쓸 수 있게 되고, 고다니 선생님에게 몇 마디 안 되는 말이지만 말도 하게 된다. 선생님에게 믿음이 생긴 것이다. 파리 연구를 도와주는 선생님에게 마음을 연 것이다. 그렇게 서서히 변화해가기 시작하는 데쓰조가 마음을 여는 과정을 하이타니 겐지로는 담담하게 담아냈다. 고다니 선생님의 노력이 없었다면 한 아이는 그렇게 소외당하고, 무관심 밖에서 혼자 나돌았을 것이다. 그런데 따뜻한 선생님의 보살핌이 한 아이를 파리 박사로까지 변화시켰다.


매일 집에 찾아가서 학교에서 돌봐주지 못했던 부분들을 보살펴주는 고다니 선생님의 따뜻한 마음은 정말 감동적이었다. 그 따뜻한 마음은 정신지체아인 아이를 보살펴주는 부분에서도 잘 드러났다. 선뜻 맡겠다고 하기 어려운 아이를 맡아서 반 아이들과 함께 돌봐주는 풍경은 가슴시릴 정도로 뭉클했다. 특수학교로 보내져야 하는 아이와 헤어지는 장면에선 읽는 나조차도 눈물이 날 정도였다. 선생님의 따뜻한 마음도 감동적이었지만, 같이 당번을 정해서 도와주기로 한 아이들의 따뜻한 마음도 감동적이었다. 선생님의 깊은 뜻을, 아이들이 잘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 기억에 남았던 장면은 공개 수업 장면. 아이들에게 어떻게 글을 쓰도록 자극을 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고다니 선생님의 수업 방식은 참 인상적이었고, 기억해둘만 했다. 그저 글을 써보아라, 라는 명령으로 그치지 않고, 아이들에게 끊임없이 호기심을 유발시키고, 감동을 선사하고, 그 밀려오는 감정의 순간 글을 쓸 수 있도록 하는 독특한 방식이 아이들 속에 들어있는 능력을 어떤 식으로 발휘시킬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장면이었던 것 같다.


그 인상적이었던 수업 장면 끝에선 데쓰조의 글이 또 한 번 감동을 선사해주었다. 선생님이 좋다는 아이의 말. 꽁꽁 닫혀 있었던 아이의 마음을 문을 열고, 이렇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게 만든 건 분명 고다니 선생님의 노력 덕분이다.


이외에도 감동을 전해주는 장면들은 많다. 담담한 문장들인데도, 읽는 내내 마음이 따뜻했던 건 아이들을 진정으로 이해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마음으로 전해주는 이야기들 덕분이었다. 고다니 선생님 외에도 아이들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있는 아다치 선생님 같은 선생님들이 마음을 푸근하게 만들어준다. 쓰레기 처리장 주위에 살고 있는 서민 계층의 아이들이지만, 어떤 아이들보다 순수하고 해맑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선생님들. 그래서 쓰레기 처리장 이전 문제로 아이들이 학교를 옮길 수밖에 없게 되었을 때,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아이들을 지켜내기 위해 노력한다.


교육에 아름답다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다면, 이 책에 나오는 교육의 모습은 아름답다는 수식어를 수 십 번은 붙여도 부족할 듯싶다. 아이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마음으로 대화하는 일. 그리하여 닫힌 마음의 문도 열게 만드는 일. 그것은 분명 아름다운 일이고 값진 일이다. 이 책은 그 아름다운 일의 가치를 다시 한 번 깨닫게 해 준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참 따뜻해져왔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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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크릿 하우스 - 평범한 하루 24시간에 숨겨진 특별한 과학 이야기 공학과의 새로운 만남 27
데이비드 보더니스 지음, 김명남 옮김 / 생각의나무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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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보더니스의 <시크릿 하우스>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존재하고 있는 것들에 관하여, 그리고 우리가 미처 느끼지 못하고 있지만 지금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관하여 이야기해주는 책이다. 우리의 평범한 24시간동안의 일상을 과학자의 눈으로 들여다보면 어떤 풍경일까. 이 책은 바로 그런 지적 호기심에서 출발한다.

데이비드 보더니스는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일상생활을 들여다본다. 침대 안 집먼지 진드기에서부터 식탁위에 있는 세균들, 그리고 음식으로 떠도는 세균들과 변기의 물을 내릴 때 발생하는 병원성 물방울들까지 우리의 집안 곳곳의 미세한 부분들을 관찰해 나간다. 관찰이 계속될수록, 집은 편안한 휴식처가 아니라, 세균이 꿈틀대는 공간으로 변모한다. 이쯤 되면 미세한 세균들을 눈으로 관찰할 수 없는, 우리의 낮은 시력에 감사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세균이 가장 많이 득실대는 곳 부엌에서부터 침실, 욕실 등 집안의 곳곳을 탐사하는 중간 중간, 우리가 먹는 것, 그리고 우리가 입는 것 등 우리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사물들을 분석하기도 한다. 데이비드 보더니스는 친절한 과학자의 입장에서 우리의 일상을 세심하게 설명해준다. 과학자의 시선이지만 편하게 읽어 내려갈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일상이 그대로 담겨 있기 때문이다.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잠들기까지 우리가 접하는 것들이 과학적인 시선으로 담겨져 있다. 평범하게만 느껴졌던 일상의 모든 일들이 새로운 시선으로 거듭난다. 그의 시선이 스쳐가는 순간, 우리의 일상은 더 이상 평범하지만은 않게 된다.

이 책을 읽고나면, 손님을 초대하여 같이 저녁을 먹는 행위나 기분전환삼아 향수를 뿌리는 일, 양치질을 하고 머리를 감는 일도 무심코 지나칠 수 없게 된다. 단란한 저녁식사의 장소인 식탁도 예사로워 보이지 않고, 침대는 조금 거북스러운 공간이 되기까지 한다. 하물며 욕실은 그 떠도는 공기들을 생각하면 들어갈 때마다 찜찜할 것 같다. 그뿐 아니다. 치약이나 스타킹, 케이크에 숨겨진 과학적 사실을 알고 나면, 뜨끔한 공포 소설을 읽는 것만 같은 기분에 빠져들기도 한다. 무심코 먹었던 콜라나 감자칩도 이젠 가벼운 마음으로 먹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이르면 조금 우울해지는 것도 같다.

알고 나면 모든 것이 달라 보인다. 그러니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이 괜한 말은 아닌 셈이다. 우리의 감각이 얼마나 우리의 편의대로 길들여져 있는지를 느끼게 해준다. 우리가 자주 먹는 것들에 대한 적나라한 분석은 우리의 무심함과 비례하여 우리를 놀라게 한다. 깔끔함에 대한 다소의 강박이 있다면, 이 책을 읽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 이 책은 해결책을 제시해주진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책을 읽는 일이 거북하게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우리의 일상에 스며있는 과학을 보는 재미를 알게 해주기 때문인 것 같다. 물이 끓고 있는 주전자 안이나 한밤중 쟁반에 놓여진 사과에서 일어나는 과학적인 작용들을 상상할 수 있는 기회를 안겨주기 때문이다. 무심코 지나쳤던 일상의 사물들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만으로도 이 책의 매력은 충분하다. 눈으로 보이지 않는 것들을 상상하는 일을 즐기는 독자라면, 이 책은 지적인 호기심을 충분히 충족시키고도 남을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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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09-11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과는 다르게 지루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ALINE 님의 리뷰를 읽고 나니 더욱 궁금해집니다. 거북스러운 공간이 되는 침대와 공포소설같은 스타킹, 케이크라니, 이건 어쩌면 패스트푸드 업계를 파헤친 책보다도 더 호러 영화같은 건 아닐까, 생각이 들면서도 더욱 궁금해지는 이유는, 패스트푸드에는 안가면 그만이지만 내가 살고 있는 집에선느 벗어날 수 없다는 점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요.
8할을 이야기하면서도, 아주 결정적인 2할을 이야기 하지 않아 궁금하게 만드는 재주가 대단하십니다.

ALINE 2006-09-12 2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Jude님. 님의 말씀대로 내가 살고 있는 집에선 벗어날 수 없으니 더 끔찍한 느낌이 들었던 것 같아요. 지금 바로 나의 얼굴에서, 그리고 내가 쉬고 있는 침대 위에서 세균이 꿈틀대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좀 무서워지긴 해도 정말 재미있게 읽은 책이예요.
결정적인 사실들은 직접 책에서 확인하는 게 나을 것 같아 일부러 언급하지 않으려고 했어요.^^
 
셀프
얀 마텔 지음, 황보석 옮김 / 작가정신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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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 사이에 자신의 성이 바뀐 것을 알게 된다면 과연 어떤 느낌이 들까. 단순히 신체적 변화만으로 나를 그동안 규정짓고 있었던 생각들이, 내 자아가 쉽게 변할 수 있을까. 사랑마저도 신체적 변화에 맞게 변할 수 있을까. 얀 마텔의 소설, <셀프>는 그런 질문들만으로도 충분히 무거운 소설이다.

하룻밤 사이에 남자에서 여자로 성이 바뀌어버린 소설가의 이야기를 통하여 얀 마텔은 성의 경계를 가뿐히 넘나든다. 충격도 놀라움도 없다. 단지, 어느 날 남자에서 여자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저 추측해왔던 것을 이제 온몸으로 겪을 뿐이다. 그리고 상상해왔던 것과 다른 것을 확인하면서 그는 바뀐 몸에 적응해나간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사람들을 만났고, 관계를 맺는다.

처음에는 여행지에서 만난 중년 여성 러스와의 만남. 사람들이 보기엔 다소 이상해보일 수도 있는 관계가 소설가인 ‘나’에게는 자연스럽다. 여행지에서의 만남이었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낯선 여행지에서는 무슨 일이든 적응하기 쉬운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뒤이어 계속되는 만남. 남자와의 관계는 어색할 수밖에 없다. 자신이 남자임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자연스러운 관계의 모양이 소설가인 ‘나’의 내면에서는 어색할 수밖에 없다. 동성애를 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그렇지만 계속되는 만남들은 몸만을 탐닉하는 듯한 관계들로 이어진다. 그렇게 주인공인 ‘나’는 여성으로의 변화에 적응하는 듯 보인다. 그것이 단지 운명적으로 만난 듯한 그 사람 때문인지, 아니면 원래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고 있었던 여성성 덕분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게 소설가인 ‘나’는 완벽한 사랑의 대상을 찾는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그 대상은 남성이다.

그런데 소설은 주인공인 ‘나’의 변화가 완벽하게 정착하려는 순간에 충격적인 사건 속으로 독자를 몰아넣는다. 살인보다 더한 끔찍한 강간을 당하며 ‘나’는 나의 아기도, 미래도 무참히 짓밟히고 만다. 그 속에서 소설을 읽는다는 것이 너무나 두려운 일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안 것처럼 그저 멍하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책 속에 찍혀져 있는 단어들처럼. 두려움...두려움... 얀 마텔은 여백과 그 여백 속에 몇몇 단어들을 넣음으로써 충격적인 사건에 따른 감정들을 잘 전달하고 있다.

충격적인 사건 때문인지, 소설을 어떻게 끝까지 읽을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머리가 무거웠다. 몇 가지 정리되지 않은 질문들은 여전히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고 있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신체적 특성들을 통하지 않고서는 사랑의 대상을 찾을 수 없는 것일까. 남성과 여성이라는 전제조건은 ‘나’라는 자아보다 더 앞서 존재하는 것일까. 소설은 머릿속 질문들을 더 어렵게, 더 복잡하게 만든다. 얀 마텔이 던지고자 했던 질문도 그러한 것이 아닐는지.

소설이 던지고자 했던 질문만큼 형식도 눈여겨 볼만하다. 프랑스어와 영어를 2단으로 배열하여 그 유사성을 드러내려고 했던 소설의 형식은 작가가 드러내려고 했던 주제와도 맞닿아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성과 언어와 정체성. 그 불분명한 경계를 넘나들면서, 흐릿하여 쉽게 잡힐 것 같지 않은 느낌들을, 생각들을 소설가 자신도 정리해보려고 한 것은 아니었을지.

소설을 읽는 동안 나는 내가 누구인지 그것조차 불분명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여행가방 하나만을 들고 낯선 어딘가를 끊임없이 여행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여행의 여독을 풀려면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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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08-31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쩌면, `나'라는 창을 향해 다른 사람을 들여다보는 것이니 당연한 일일거라고도 생각이 됩니다. 무심히 지나쳤던 책인데(그래서 읽지 않았던), ALINE님의 리뷰를 보니, 솔깃, 해요.
요즈음 계속 생각나는 것이 헤겔의 `정반합의 법칙'인데, 헤겔의 고리타분함은 싫지만 이 정반합의 원칙을 거스를 수 있는 것은 없다고 생각이 되기도 해요. 그런데 이 `정'이 아예 흔들려버리는 일에 대한 이야기인 듯 하기도 합니다. 저는 얼핏 스토리라인만 듣고는 버지니아 울프의 `올란도'를 떠올렸거든요.

ALINE 2006-09-11 2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Jude님. '정'이 아예 흔들려버리는 이야기,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리뷰에도 적었지만 이 소설을 읽고 머리가 무거워졌었어요. 잘 짜여진 소설이지만 끝까지 읽어내기가 힘이 들었던 소설이기도 해요. 이 소설 읽으신다면 마음의 준비를 하고 읽으시길요.^^
 
그 산을 넘고 싶다 한젬마의 한반도 미술 창고 뒤지기 1
한젬마 지음 / 샘터사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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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문득 떠난 여행길에서 미술관을 만나면 반가운 생각이 든다. 계획하지 않았던 미술관 관람은 여유로운 일상의 감각을, 한껏 풍요로워진 감정을 만들어준다. 가끔씩 미술관을 중심으로 여행을 계획해보면 근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그래서 이 책을 만나고 무척 반갑다는 생각부터 들었는지 모르겠다. 바쁜 일상에 치이느라 떠나지 못하는 이들에게 이 책은 멋진 미술관 기행서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물론 이 책은 미술관 중심은 아니다.

<화가의 집을 찾아서>에 이어지는 이 책은 전라도와 제주도를 중심으로 화가들의 생가를 따라 그 화가가 남긴 흔적들을 만나고 있다. 그 속에 미술관이 포함되어 있다. 화가의 삶을 공간적으로 훑어보는 이 기행은 화가의 삶에서부터 작품까지 아우르고 있다. 멋진 기획이다. 언젠가 한번은 시도해보고 싶은 여행을 이렇게 책으로 먼저 만날 수 있다니, 반가운 마음이 앞선다.

“생가는 그 작가에 대한 보다 원론적이고 본질적인 사색의 시간을 제공한다.”고 한젬마가 말하는 것처럼, 화가들이 머문 집에서 우리는 미술관에서는 느낄 수 없는 감상을, 고요한 사색의 시간을 제공받는 것이다. 그들의 생각과 시간이 머문 곳에서 그들의 삶을, 작품을 떠올려본다는 것은 운치 있다는 표현만으로는 무언가 부족한, 감상의 폭을 넓혀주는 시간인 것이다.

김환기 생가에서는 그의 그림들 속에 드러난 고향의 이미지에 대해, 처연하고 스산한 느낌의 윤두서 고택에서는 쓸쓸하고 고독했던 화가의 삶에 대해 사색할 수 있고 허련이 말년에 고향땅 진도에서 정착한 곳, 운림산방에서는 완숙의 경지에 이르렀던 예술가의 예술혼에 대해, 그리고 제주의 바다에서는 추사 김정희가 느꼈을, 유배생활에 대한 막막한 절망에 대해 감정이입을 할 수 있다.

가끔씩 한젬마의 일상이 불쑥 튀어나와서 당황스럽긴 하지만, 성급한 준비로 어긋난 계획들이나 여행 중의 사소하면서도 자잘한 일들은 같이 화가의 발자취를 둘러보는 것 같은 소소한 재미를 안겨준다. 한젬마는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 서양화가들과의 비교 등 이런저런 이야기들 속에서 화가의 흔적들을, 차근차근 밟아나가고 그 속에서 그들의 삶을 바라보고 있다. 한젬마의 이런저런 이야기들은 지루할 수도 있는 여행의 분위기를 즐겁게 바꾸어주기도 하고 미처 알지 못했던 화가들을 편안하게 만날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해주기도 한다.

책을 읽으면서 화가의 집은 화가가 머물렀던 장소 이상의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시간이 담겨 있는 그 곳은 그들의 작품 속에 다양한 빛깔들로 섬세하게 스며들어 있을 것이다. 그 섬세한 흔적들을 찾아가는 여행을 한젬마의 이야기를 통해 들으면서, 내가 알고 있는 화가들 그리고 미처 알지 못했던 화가들의 삶 속으로, 그리고 그들의 작품 속으로 천천히 빠져볼 수 있었다.

화가의 집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 얼마나 고요한 사색의 시간을 제공해주는지를, 그것이 미술관에서의 그림 감상과 어떻게 다른지를, 그리하여 언젠가 무작정 그들의 자취를 따라 떠나고 싶은 충동을 느끼도록 해준 건 이 책이 주는 가장 큰 매력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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