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좋은 사람
줌파 라히리 지음,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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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고 나니 언젠가 보았던 영화의 풍경이 스쳐 지나갔다. 영화 속에서 늙은 남자는 어느 날 갑자기 아내를 잃고 혼자가 된다. 아버지를 짐처럼 여기는 자식들 속에서 남자 또한 쓸쓸하게 죽음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영화를 보고 나서 한동안 마음이 서걱거렸던 것처럼, 이 소설집을 읽고 나서도 한동안 마음이 아렸다. 소설을 읽는 내내 너무 힘든 길을 걸었던 탓이다. 소설을 읽는 동안, 나는 소설 속으로 걸어 들어가 숨고 싶었다. 하지만 숨을 곳을 찾지 못한 채 계속 헤매기만 했다. 숨을 곳을 주지 않고, 예리하게 드러내 보이는 작가의 문장 앞에서 한없이 쓸쓸해졌고, 고독해졌다. 언젠가 경험했던 고독이었고, 쓸쓸함이었다. 그 익숙한 감정들이 책장을 넘기는 순간, 순간 파고들었다. 한 장, 한 장 넘기기가 참 힘들었지만, 끝까지 가지 않을 수는 없었다. 마주하는 그 고독과 쓸쓸함이 때로는 편안하게 느껴지기도 했으니까.

소설 속에 나오는 인물들은 거의 비슷하다. 자신이 태어난 곳을 떠나와 낯선 땅에서 살아가는 이민자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미국으로 떠나온 인도인들이다. 낯선 땅에 정착한 만큼 그들에게 외로움이나 고독은 더 절박한 생의 조건처럼 여겨진다. 그렇기에 가족에게 기대는 무게는 더 커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부모 세대와 자식 세대는 이질적인 문화를 나누어 가지면서, 서로 낯선 사람이 되어간다. 부모 세대는 인도 전통 문화를 고수하지만, 자식 세대는 미국식 문화가 더 익숙하다. 단편 <길들지 않은 땅>에서 딸이 우연하게 발견한 아버지의 엽서는 딸이 모르는 벵골 어로 쓰여 있다. 어머니가 죽은 뒤에 딸과 아버지 사이에 싹트는 불안한 씨앗은 딸에게는 낯선 언어로 쓰여 있는 그 엽서 때문에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이제 그들의 관계에서도 낯선 언어들이 차곡차곡 쌓여 갈 것임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작가는 각각의 단편에서, 부부, 부모와 자식, 형제 등 가족 속에서 어긋나고 삐거덕거리고 무너지는 관계를 예리하게 담아낸다. 아내를 잃은 남자는 딸네 집에 가서 일주일을 보내고 난 뒤 가족이라는 무게를 끔찍하게 여기며 도망치듯 떠난다. 결혼식에 참석한 남자는 술에 취해 아내를 혼자 결혼식에 내버려두고, 호텔로 와 잠이 든다. 누나는 알코올 중독에 빠진 동생에게 너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고, 동생은 그런 누나에게 이해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 소설을 읽다 보면,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가족을 이루는 그 평범한 풍경들 속에 도사리고 있는 고요한 어둠을 조금씩 맛본 느낌이 든다. 조금씩이지만 거의 모든 것을 다 알아버린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편안하고 때로는 말할 수 없을 만큼 행복하지만, 또 때로는 지독하게 외롭고 슬픈 느낌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는, 서로 공존할 수 없는 느낌들이 함께하는 생활. 전혀 알지 못했던 누군가를 만나서 함께 살고 또 전혀 알 수 없을지도 모를 누군가가 더 생겨나면서 커져 가는 복잡함. 가족이야말로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라고 착각하는 데서 생겨나는 외로움. 그런 여러 가지 감정들이 얽히면서 소설을 읽는 일은 점점 힘든 일이 된다. 결국 “가족을 이루는 일 자체, 이 땅에 아이들을 낳는다는 자체가 때로 만족감을 주는 만큼 애초부터 어딘가 잘못된 일”이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1부에서 가족이나 연인처럼 가까운 이들 간의 어긋나는 관계 속으로 카메라를 바짝 갖다 댔다면, 2부의 ‘헤마와 코쉭’이라는 이름으로 묶여 있는 세 편의 단편은 그보다 더 나아간 느낌이다. 작가는 고독하고 쓸쓸한 삶의 원인이 결국 우리가 삶의 끝에 언젠가는 다다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있다는 것을 들추어낸다. 잘 아는 여자가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나서 눈물을 터뜨리는 여자 아이. 시간이 흘러 또 다시 가까운 이의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더 깊고 더 자욱한 슬픔이 죽음 위로 드리운다. 엄마를 잃은 남자가 엄마의 그림자 속에서 아주 오래 외로웠던 것처럼 여자 또한 남자의 그림자 속에서 오래도록 아플 것이다.

소설을 이끌고 나가는 것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여 있는 이들이고, 그들과 어울려 사는 삶이지만 무엇보다도 소설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죽음의 이미지다. 결혼을 앞둔 여자는 자신이 하려는 결혼이 어딘가 죽음과 닮아 있다고 여긴다. 딸은 엄마가 언젠가 자신의 몸에 점화 용액을 붓고 성냥을 그으려고 했던 순간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바로 가까이에서 죽음의 현장을 목격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여자 아이는 눈물을 터뜨린다. 작가는 평온하게 흘러가는 일상 속에 갑자기 죽음을 끼워 넣는다. ‘끼워 넣는다’는 표현이 적절한지 모르겠다. 새로운 여행을 계획하고, 새로운 삶을 꿈꾸는 순간,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누군가 죽는다. 하지만 남은 사람들은 알고 있다. 가까운 이의 죽음 뒤로도 아득한 날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누군가는 그 죽음 속에서 가까스로 생활을 이어나간다. 그리고 누군가는 어떻게든 죽음을 견뎌낸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누군가를 죽음에서 구해내는 것은 가장 가까이 있는 가족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점화 용액을 몸에 붓고 죽음 바로 앞에 다가갔던 여자를 구해낸 건, 남편이나 자식이 아니라 이웃집 여자였다. 알코올 중독에 빠진 남자를 구해낸 건 부모와 누나가 아니라, 같이 살게 된 여자였다. 가족은 가장 가까이 있지만 가장 멀리 있고, 누군가를 이해할 수 있는 건 같이 살아온 삶의 무게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서로 많은 부분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또한 많은 부분을 함께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만큼 쓸쓸한 것이 또 있을까.

죽음이라는 직접적인 사건의 묘사보다 더 서늘하게 만드는 것은 죽음과도 같은 관계에 대한 묘사이다. 항상 가까이 있지만 언젠가부터 가장 가까운 관계라 믿었던 그 관계가 어느 순간, 예기치 않게 무너져 내린다. 그것은 죽어버린 관계나 마찬가지다. 작가는 관계가 끝나는, 바로 그 순간 속으로 독자를 데려간다. 무너져 내린 관계 앞에서 느끼는 막막한 두려움은 온전히 독자의 몫으로 남는다. 앞으로도 어떻게든 이어지겠지만 이미 죽어버린 관계, 더 이상 회복될 수 없는 관계에 대한 상실감이 책장을 덮고 나서도 끝없이 이어진다.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씁쓸함이 남아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 것은 죽어가는 관계를 예리하게 포착해내는 작가의 능력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처음엔 슬픔인 줄 알았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슬픈 게 아니었다. 소설이 주는 느낌은 슬픔이라기보다 쓸쓸함이다. 그리고 그 쓸쓸함은 낯선 것이 아니고 익숙한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소설을 다 읽고 나서 오래도록 쓸쓸함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던 이유는 그 쓸쓸함이 너무나 익숙하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나는 앞으로 생의 책갈피, 책갈피마다 이 작가가 주었던 쓸쓸함을, 두려움을, 막막함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내 가까운 사람들이 아주 멀리 있다고 느낄 때마다. 그리고 어긋나는 관계들 속에서 삶이 조금씩 무너지고 있는 것을 느낄 때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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