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 박물관 1 민음사 모던 클래식 27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행복했던 순간, 언젠가 이 순간이 그리워질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기에 애틋해했던 적이 있다. 행복한 감정의 끝에 늘 슬픔이 물들어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드는 건 그 때문일까. 오르한 파묵의 첫 연애소설을 읽는 내내 느껴야 했던 감정도 그런 것이었다. “그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는 것을 몰랐다.” 라는 첫 문장을 읽을 때, 나는 이미 이 소설이 가져다 줄 슬픔을 알았다. 결국에는 슬픔으로 치달을 것을 알면서도 사랑에 빠져드는 사람처럼, ‘이제 다시는 연애를 하지 않을 거야’라고 생각하면서도 대책 없이 연애를 시작하는 사람처럼 나는 이 소설이 가져다 줄 슬픔과 고통을 알면서도, 이야기의 깊숙한 곳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이미 나는 이 소설과 사랑에 빠져버렸기 때문이다.

지독한 사랑에 빠져버린 남자의 이야기지만, 지독한 질병에 걸린 남자의 이야기를 읽는 것만 같았다. 사랑이란 치유할 수 없는, 영원한 상처를 마음에 품는 일인 걸까. “사랑은 교통사고” 그리고 “사랑은 심각한 질병”이라고 말하는 작가의 생각은 이 소설에 그대로 묻어난다. 남자는 이 심각한 질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애쓴다. 때로는 이 질병으로부터 벗어났다고 생각할 때도 있지만, 증상은 계속되고 오히려 상황은 더 나쁘게 흘러간다. 남자는 이 질병으로부터 영원히 회복될 것 같지 않다. 오직 고통을 달래줄 방법을 찾는 것밖에 다른 방법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남자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사랑의 고통을 달랜다. 사랑하는 여자와의 추억이 담긴 물건들을 만지며 추억을 떠올리는 행위는 그에게 가장 훌륭한 처방전이 된다.


“하지만 가장 행복한 순간을 생각했을 때, 그것이 이미 아주 오래전 일이며,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고, 그래서 우리에게 고통을 준다는 것도 알고 있다. 이 고통을 견딜 수 있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 황금의 순간이 남긴 물건을 소유하는 것이다. 행복한 순간들 이후에 남겨진 물건은 그 순간의 기억, 색깔, 보고 만지는 희열을, 그 행복을 느끼게 해 준 사람들보다 더 충실히 간직하고 있다.” 125-126쪽

시계, 찻잔, 머리핀, 자, 빗, 그리고 담배꽁초까지 사랑하는 여자의 향기가 묻어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그에게는 훌륭한 약이 되었다. 물건들은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순간들 속으로 잠시나마 돌아갈 수 있게 만들어주기 때문에, 행복했던 순간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고통을 잠시나마 희미하게 만들어줄 수 있었다. 어떤 기억이 스며있는 물건은 함부로 버리지 못한다. 그것이 담배꽁초라 해도, 특별한 기억이 들어있다는 이유만으로도 그 담배꽁초는 특별한 것이 된다.


남자가 자신의 약혼식 이후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지 못했을 때, 그리고 결국 약혼한 여자와 파혼하고 사랑하는 여자를 다시 만났을 때, 그녀가 이미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리고 결혼한 그녀를 계속 만나면서 자신의 사랑을 삭이려 할 때에도 그를 사랑의 고통에서 구해주었던 것은 물건들이었다. 사랑하는 여자의 향기가 배어 있는 물건들. 그 물건들 속에서 그는 사랑이 주는 고통과 처절한 싸움을 벌인다.

남자의 한 여자에 대한 사랑은 “서서히 그녀의 모든 세계, 그녀와 관련된 모든 것, 그녀의 모든 순간과 물건으로 퍼졌다.” 8년 동안이나 사랑하는 여자의 집에 가서 그녀의 가족들과 저녁 시간을 보내면서, 그리고 통행금지 시간 전에 가까스로 그 집을 빠져 나오면서 남자는 그 집에 있는 것들을 한 가지씩 훔쳐 온다. 남자는 도자기 개 인형, 담배, 라크 잔, 설탕통 등 그녀의 집에 있는 물건 하나하나를 이제 그녀의 일부로 생각한다.

잠깐 잠깐씩 소개되는 정보를 통해 사랑하는 여자의 일부로 생각했던 그 물건들이 남자가 만드는 박물관에 전시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야기의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이제 수많은 박물관을 찾아다니며 자신만의 박물관을 만들려고 애쓰는 남자를 만나게 된다. 남자는 이제 자신의 마지막 남은 생을 온 힘을 다해 자신의 삶의 전부였던 사랑을, 사랑의 역사를 아주 작은 것 하나까지 세세하게 정리하는 인류학자가 된다. 우리는 이 남자가 만든 박물관에서, 한 사람에게 사랑의 순간이 어떻게 다가왔는지를, 사랑이 어떻게 한 사람의 삶에 퍼져나갔는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사랑이 사치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사랑이 삶의 전부다. 소설 속 남자는 그의 삶에서 사랑을 빼면 어떤 것도 의미가 없다. “사랑을 영원히 잃어버린 것을 깨달은 후의 삶에는 단지 ‘저속한 소일거리’만 남아 있었다”라고 말한, 네르발이라는 시인의 말은 남자에게도 정확하게 적용된다. 사랑하는 사람이 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은 남자에게 그저 무의미하고 속될 뿐이다. 사랑의 고통 때문에 목을 맨 네르발의 운명을 남자도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언젠가는 사랑하는 여자를 만날 것이라는 믿음이, 그리고 그녀를 다시 만났을 때는 언젠가 그녀와 사랑을 나누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 남자를 살게 만들었고, 살아내게 했으니까.

삶의 모든 것은 단지 사랑하고 있느냐, 아니냐의 두 가지 문제로만 이루어져 있다는 걸 믿는다면, 이 책 속으로 빠져드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이 책 안으로 너무 깊이 빠져버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 책을 읽고 나서, 너무 오랫동안 지나간 사랑 속에서 헤매지 않으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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