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다시읽기 3

 

#1. 시인. 영혼을 이야기 하다

무식하기로 이루 말할 수 없는 한 후배가 있다.

'너가 뭐라고?'라고 나를 비난할지는 모르겠으나

그녀가 어찌나 무식한지 그녀의 무식함은

우리가 깊은 우정을 나눌 수 없게 하는 방해물이 될 정도였으니

그냥 그녀가 얼마나 무식한가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하자

 

3년만에 어느 날 갑자기 그녀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녀도 나도 나이를 먹어감 때문일까?

그녀도 나도 많이 유(柔)해졌음을,

그 유함에 이제는 그녀와 나 깊은 우정을 나눌 준비가 되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몇번의 통화 중 어느 날 그녀가 내게 부탁을 한다

"언니! 언니의 목소리로 읽는 책은 어떨까 궁금해요. 저한테 매일 책 읽어줄 수 있어요? 사랑 이야기, 슬퍼도 좋고 행복해도 좋고 아무튼 사랑 이야기 읽어줘요"

무식하기가 하늘을 찌르다 못해 비행기가 날아다니는 항로까지 뻗치던 그녀가

세상에나 책을 읽어달란다.

그렇게 우리의 책읽기 의식이 시작되었다

처음엔 <냉정과 열정 사이-에쿠니 가오리편>

두번째엔 <냉정과 열정 사이-츠지 히토나리편>

그렇게 읽어주었더랬다

그리고 그렇게 끝이 날 줄 알았던 책읽기가 이제껏 넉달째 이어지게 된 것이

<사랑을 만나러 길을 나서다>덕이다

 

"언니! 이젠 아름다운 영혼들 이야기를 읽어주세요. 가슴 시리게 아름다운 영혼들 이야기..."

어라! 무식하기가 비행기 항로를 날아다니던 그녀가 이런 표현을 뱉을 수 있다니? 대견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고 이런 저런 마음에 읽어주기 시작한 <사랑을 만나러 길을 나서다>

 

깊은 밤, 혹은 가게 전면창에 쏟아지는 햇살을 받으며 한갖진 오후에 그녀에게 정성들여 책을 읽어주고 책장을 덮을 때면 그녀가 한 마디씩 한다

"언니. 오늘 언니 목소리가 꼭 포슬포슬 익은 감자 같았어요. 가을 햇살에 딱 알맞는 그런 감자..."

"언니. 오늘 책읽기에 언니 감정에서 행복한 복숭아 향이 났어요. 언젠가 언니가 복숭아 쥬스를 보며 행복한 색이야라고 했던 그 느낌. 복숭아가 왜 행복함을 느끼게 하는지 알겠어요.지금 나 복숭아빛 행복감을 느껴요"

어라! Yoon! 너 무식하기가 비행기 항로를 날아다니던 정말 그 아이 맞니?

3년의 세월동안 무얼했기에 니 속에 꽁꽁 숨어있던, 있는 줄도 몰랐던 감수성들이 마구 표출되는 거니?

 

<사랑을 만나러 길을 나서다>를 정성들여 읽어주고

또 다른 책을 읽어주어야 하나? 책 읽어주기를 그만 두어야 하나?

고민 아닌 고민하고 있을 즈음 그녀가 이 책을 다시 한 번 읽어달라 한다.

너무나 아름다운 영혼들 이야기라 책 읽어주기가 3분의 일쯤 되었을 때

서점에서 이미 책을 샀으나, 내 목소리로 읽어주는 책읽기가 더 좋다며..

그렇게 같은 책을 또다시 연달아 읽어주기를 하던 어느 날

그녀가 내게 고백한다.

 

내가 지금 그녀에게 책 읽어주는 행위는 지금 그녀의 태교를 돕는 것이라고..

조금 놀라운 이야기였다

여차저차한 사정으로 비혼모의 길을 택하고

혼자 출산을 준비하고 있는 그녀...

그 때 알았다.

그녀가 서른이 되었기에, 나이를 먹어 유해졌기에 변한 것도 있겠지만

그녀는 지금 뱃속에 시인을 품었기에 변한 것임을...

뱃속에, 가슴에 시인을 품지 않고서야 사람이 저렇게 갑자기 아름다운 영혼 운운하는, 상대방의 목소리에서 포슬포슬한 감자를, 전화기 너머 상대방의 감정에서 복숭아향을 발견할 수 없음을...

 

같은 책을 이미 네번째 읽어주고 있다.

네번째의 책읽기가 끝나면 무슨 책을 읽어주어야 할까? 고민도 된다.

낭독하기에 알맞은 책이 그리 많지가 않을 뿐더러,

이미 이 책에서 너무나 아름다운 영혼들을 만났기에..

이만큼 아름다운 영혼을 만나지 못한다면

또다른 책읽기가 의미가 없기에...

그리고 그녀가 품은 시인을 위해

시인이 이야기하는 영혼들 이야기만큼 맞춤한 것이 없을 것이기에..

 

#2 꿈을 꾸다

꿈을 잘 꾸는 편이다.

그 꿈이란 것이 어쩔 땐 섬찜할 정도로 잘 들어맞는 예지몽인 경우가 많아

절친한 이들은 중요한 일을 앞두고 꿈 좀 꾸어 달라 애교 섞인 부탁을 할 지경이다.

 

한동안 꿈을 꾸지 않았다.

걱정할 거리가, 나를 억누르는 그 무엇들이 없어서 그랬던 것일까?

이상할 정도로 꿈이란 걸 꾸지 않고 잠들고 깨어나는 시간이 길었다

 

요즘 부쩍 다시 꿈을 꾼다

꿈을 꾸는 밤들이 부쩍 늘은 것은

아마 내 마음에 들어온 그 사람 때문에 마음이 어지러워져서일 것이다.

 

어지러운 마음만큼 꿈을 자주 꾸게 되고

그 꿈 속에서 그를 자주 본다.

꿈 속 수많은 그의 모습 중,

그와 같이 있는 나의 모습 중,

잊을 수 없는 장면 하나

약간은 무더운 어느 날 그와 나 어느 풀밭에 앉아 망중한을 즐긴다.

즐기는 와인 제이콥스 샤도네이로 목을 축이며

그에게 책을 읽어주고 있다.

책 이름은 <사랑을 만나러 길을 나서다.>

 

그를 맘껏 사랑하고 싶어서일 것이다.

그도 나를 맘껏 사랑해 주기를 바래서일 것이다.

서로의 아름다운 영혼을 알아봐 주기를 바래서일 것이다.

그래서 그 꿈을 꾸면서 기도했다.

제발 이것이 내 기억과 깊은 짝사랑이 얽힌 기시현상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예지몽이기를...

 

잠에서 깨어나, 잠 속 꿈에서 깨어나

꿈을 꾼다. 바래어 본다.

그 꿈 속 장면처럼 그에게 포슬포슬하게 익은 감자 같은 목소리로

<사랑을 만나러 길을 나서다>를 읽어주는 날이 오기를...

그와 손을 맞잡고 그녀가 품었던 시인을 만나러 가는 날이 오기를..

그녀, 그녀가 품은 시인, 그, 그리고 나 우리는 <사랑을 만나러 길을 나서다>가 단단하게 묶어준 사이랍니다..라고 말하는 날이 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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