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덟을 위한 논리 개그 캠프> 본문 내용의 일부를 정리해서 올립니다.

아무쪼록 재밌있게 읽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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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참 논리적이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서기 2222년 지구는 우리 비만인들이 지배하게 됩니다. 마른인간들은 거의 멸종하게 됩니다. 이제 우리 비만인들은 과거에 지구에 살았다는 마른인간에 대해서 연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른인간 연구소>, 「폭소클럽」(2006)


우리가 보통 ‘당신 얘기는 논리적이지 못해’라고 말할 때 논리적이지 못하다는 표현은, 말이나 글에 두서(頭緖)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두서 있게’ 말하거나 쓰면 그것이 논리적일까요?

맞습니다. 두서 있게 말하거나 쓰는 것이 논리적 사고력의 출발입니다. 두서란 어떠한 글과 말의 순서와 질서, 즉 갈피를 뜻합니다. ‘갈피를 못 잡다’라는 표현이 바로 논리적이지 못함을 이르는 말입니다.

말이나 글에 두서가 있을 때, 그것을 논리적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논리를 다루는 학문이 논리학입니다. 논리학이 다루는 것은 낱말(개념), 명제(판단), 논증(추리)입니다. 낱말과 명제 그리고 논증은 각각 개념, 판단, 추리라는 사고 과정을 언어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중에서 우리가 개그에서 웃음 코드를 발견하거나 논술에서 글쓰기를 할 때에 가장 필요한 요소는 논증입니다.

논증이란 어떤 주장을 할 때 그 주장이 타당하고 그럴듯한지, 근거를 함께 제시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때 ‘주장’을 논리적인 용어로 표현하면 ‘결론’이며, ‘근거’는 ‘전제’입니다. 같은 말입니다.

두서없이 아무렇게나 말하고 글쓰는 대신,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전제(근거)와 결론(주장)의 형식으로 질서 있게 제시하는 것이 논증입니다.


아래 예문을 볼까요?「논술 개그」 공연에도 등장하는 예문입니다.


가수 아이유는 눈이 두 개야. 왜 그러냐고? 그건 묻지 마. 아이유가 눈이 두 개라는데 왜 자꾸 따져? 그냥 그런 줄 알아. 아무튼 아이유는 눈이 두 개야.


아이유가 눈이 두 개라는 주장은 맞습니다. 하지만 전혀 논리적이지 않습니다.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제시되지 않고 막무가내로 말했으니까요. 위의 말을 논증으로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바로 전제와 결론의 형식으로 제시하면 됩니다.


전제(근거): 모든 사람은 눈이 두 개다.

전제(근거): 가수 아이유는 사람이다.

결론(주장): 그러므로 가수 아이유는 눈이 두 개다.


가수 아이유가 눈이 두 개라는 결론(주장)과 그 결론의 전제(근거)들을 함께 제시했습니다. 이러한 방식이 논리적 증명, 즉 논증에 해당합니다. 이렇게 제시하면 매우 논리적인 말이나 글이 됩니다. 다음 예문을 볼까요?


대전제(근거): 모든 사람은 눈이 세 개다.

소전제(근거): 가수 아이유는 사람이다.

결론(주장): 그러므로 가수 아이유는 눈이 세 개다.


위의 예문도 타당한 (연역) 논증입니다. 전제와 결론을 논리적으로 제시하고 있으니까요. 바로 여기에서 많은 학생들이 고개를 갸우뚱할 것입니다. ‘가수 아이유는 눈이 세 개다.’라는 결론을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그런데도 이 논증은 타당합니다. 이 논증의 문제점은 결론이 아니라 전제에 있습니다. ‘가수 아이유는 사람이다.’라는 소전제는 참이지만, ‘모든 사람은 눈이 세 개다’라는 대전제가 거짓이기 때문입니다. (이와는 달리 전제가 참인지 거짓인지 확증할 수 없을 때 그 전제는 가정이 됩니다. 위 삼단논법에서 대전제는 가정이 아니라 명백히 거짓입니다. 만약 눈이 세 개인 사람이 태어난다면 그 대전제는 가정이 아니라 거짓 전제가 됩니다.)


그런데 전제가 거짓이어도 타당한 논증일까요? 

그렇습니다. (연역) 논증이란 전제나 결론의 사실관계를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논증은 우선 내용의 사실 여부가 아니라 형식을 따지는 것입니다. 즉 논증은 전제로부터 결론이 도출되는 형식을 다룹니다. 그래서 논리학은 수학처럼 형식적인 학문입니다. 그 형식에 담긴 내용을 사실적으로 검토하는 역할은 과학(인문학, 사

회과학, 자연과학)이 맡습니다. 과학적으로 그 논증의 전제들이 참일 때 그 논증은 내용적으로도 건전하다고 합니다. 다시 한 번 말하자면, 어떤 논증이 타당하다는 것은 형식이 올바르다는 것을 말하고, 건전하다는 것은 그 내용까지 참임을 의미합니다.

자 그럼, ‘논리적이다’라는 말을 정의해 볼까요?


“전제와 결론의 형식으로 제시되어야 하며, 그 전제로부터 결론이 필연적으로 나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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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nold lee 2022-01-19 0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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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에 갇힌 코미디 철학의 작은 역사

 아리스토텔레스는 드라마 비평 책이자 서양 최초의 예술철학 책인 『시학』에서 비극과 코미디(희극)를 다음과 같이 구분합니다. 그러나 이 책은 주로 비극만 다루고 있기 때문에 어떤 해석자들은 『코미디에 관한 시학』이 그 후속편으로 존재했었지만 소실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래도 비극을 다루면서도 간간히 코미디를 언급하기 때문에 코미디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비극은 ‘탁월한 사람들의 행동’을 모방하는 것인 반면에 코미디는 ‘열악한 사람들의 행동’을 모방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고대 그리스의 귀족주의적인 세계관에 비추어보면, 비극의 주인공은 신화적인 위대한 영웅이거나 도덕적 뛰어난 여주인공인 반면에 코미디의 주인공은 평범한 시민들이 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비극적 모방의 대상이 “연민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영웅의 행위나 운명인 반면에, 코미디적인 모방의 대상은 “모든 잘못이 아니라 추악(醜惡)의 종류인 우스꽝스러움”입니다. 그는 이 우스꽝스러움을 “고통스럽지도 않고 파괴적이지 않은 실수의 종류”로 정의합니다. 이런 이유로 비극은 “연민과 공포를 통해 감정의 카타르시스(정화)”를 성취하는 반면에, 어떤 해석자들에게 의하면 코미디는 동료 인간의 실수에 관해서 나쁜 의도의 선망하는 감정이나 질투심으로부터의 카타르시스를 일으킨다고 합니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은 플라톤의 코미디 비판에 대한 일종의 반박으로 볼 수 있어요. 플라톤이 『필레보스』에서 선망하는 자, 즉 ‘심술궂은 시기’를 하는 자는 “그의 이웃들의 나쁜 일들에 대해 즐거워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지요.
반면에, 헤겔은 “코믹한 것이란 자신의 행동을 모순으로 가져와 그것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주체성”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주체성(주관성)은 객체성(객관성)에 대립합니다. 객체성이란 전통적인 사회 규범과 인간관계의 윤리를 의미합니다. 주체성이란 이런 전통 규범과 윤리에 대해 회의하는 개인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주체성이란 데카르트가 제시한 코기토(cogito), 즉 생각하는 나를 말합니다. 모든 것을 의심해도 결국 의심하는 나는 확실히 존재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체성입니다. 그래서 주체성은 우선 자신을 규정할 주어진 내용이 없습니다. 근대의 주체성이란 전근대의 공동체성을 해체하고 그 토대가 되는 종교와 도덕을 의심하는 합리적 개인을 뜻하는 것이죠.
헤겔은 웃음에 관한 논의보다는 극으로 제도화된 코미디를 철학적으로 분석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예술 철학)은 주로 비극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헤겔의 예술철학으로 유명한 『미학 강의』에서 코미디는 모든 예술의 종결(완성)입니다. 
헤겔이 보기에, 그리스 비극은 객체적인 인륜성의 실체와 필연성을 기초로 삼고 드라마 인물의 개성과 그 사적인 삶의 깊이를 발전시키지 않았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습니다. 반면에 코미디는 주체적 인격성을 부조리와 그 부조리의 해소를 상세하게 서술하면서 완성시킵니다. 다시 말해 코미디는 비극이 끝난 지점을 출발점으로 삼습니다. 즉 절대적으로 화해된 유쾌한 마음이 그것입니다. 
코미디는 ‘모순의 즐거운 화해’를 추구합니다. 다시 말해서 주체적인 만족이 핵심이 된다는 뜻입니다. 주인공이 추구한 행위의 결과가 좋지 않고 비극적이라도 마음의 평화를 잃지 않는다는 자기 확신이 핵심인 것이지요. 이것이 아리스토파네스가 대표하는 옛 그리스 코미디의 특징입니다.
코미디의 주인공은 우선 그 자체로 우스운 면이 있어요. 그는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 진지하지 않아요. 그래서 코미디의 주인공들은 더 고등하고 보편적인 관심을 갖지 않기에 실질적인 문제에서 이해관계의 갈등을 겪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현실과 모습에 전혀 의문도 품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이러한 코미디의 주인공들은 대개 낮은 지위의 사람들입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진지하지 않기 때문에 거꾸로 결과의 희비극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아리스토파네스는 이렇게 절대적인 자유정신과 사적인 평온함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이러한 자유정신의 분위기 속에서 아리스토파네스는 아테네 도시국가의 신성한 신들과 동료 시민들을 풍자합니다. 특히 동료 시민들의 우스꽝스러움, 다시 말하면 대중적인 어리석음, 정치가들의 정신없음과 전쟁의 부조리함 등을 폭로하는 데에 주력합니다. 빚쟁이에게 빚 갚는 법을 가르치겠다고 제의하는 철학자 소크라테스, 지하세계로 내려와 비극 작가를 육성하겠다고 결심한 디오니소스 신 등, 이들은 모두 처음부터 바보에 불과합니다. 그러기에 자기 확신을 가지고 자신이 생각한 과업을 달성하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바보인 자신과 그가 생각한 과업은 모순을 이루게 됩니다. 그렇지만 자신이 무능해서 그 과업에 실패하더라도 자기 확신이 대단해서 절대로 마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런 점을 고려해서 헤겔은 아리스토파네스가 냉담하고 악의적인 조소(嘲笑)가는 아니라고 말합니다. 반대로 그는 아리스토파네스를 동료 시민의 안녕에 관심이 있는 가장 재능이 뛰어나며 가장 좋은 시민이라고 단정합니다. 반면에 앞에서 언급했듯이 플라톤은 이러한 아리스토파네스의 코미디를 심술궂은 시기심에 의한 쾌감이라고 비판했지요.
근대 유럽의 코미디와 고대 그리스 코미디의 차이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근대 코미디는 관객들에게 사적인 이해관계와 성격들과 그와 연관된 일상적 부도덕함과 부조리함, 그리고 특이한 행동과 어리석음을 전부 제시합니다. 그래서 관객들은 그러한 음모에 담긴 온갖 모순을 보고 웃게 마련입니다. 이런 식으로 아리스토파네스적인 ‘영원한 화해로서의 솔직한 유쾌함’이 근대의 코미디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근대적인 음모의 코미디에서는 노골적인 악, 즉 교활하고 기만적인 자들의 음모, 사기, 비열함이 승리합니다. 음모에 의해 정직하지만 무기력한 어리석은 사람들이 늘 속임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근대 유럽의 코미디는 헤겔이 보기에 구토가 날 지경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 유럽은 진정으로 코믹하고 진정으로 시적인 코미디의 유형을 발전시켰습니다. 그러한 코미디의 기조(基調)는 그 모든 실패와 불운에도 불구하고 좋은 유머의 정신을 보여줍니다. 좋은 유머 정신은 무관심의 확신적인 유쾌함, 그리고 기본적으로 행복한 광기와 어리석음, 마지막으로 개성의 풍부함과 대담함입니다. 이것을 헤겔은 “깊이 있고 성찰적인 유머”라고 부릅니다. 대표적으로 「한여름 밤의 꿈」과 같은 셰익스피어의 코미디 작품들이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헤겔의 이러한 좋은 코미디의 발전과 더불어 미학의 철학적 탐구가 진정한 종결(완성)에 이른다고 봅니다. 코미디의 유머 속에서 자유로운 절대적 주체의 낭만주의 정신의 부정적인 면이 드러나기 때문이지요. 이런 점에서 코미디는 예술의 완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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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웃음과 유머에 바치는 서



일반적인 견해에 따르면 비극은 인간의 위대한 면모나 영웅적인 모습을 그립니다. 반면에 코미디, 즉 희극은 인간의 비열한 모습이나 추악한 행태를 그립니다. 그래서 홉스와 같은 철학자는 웃음을 ‘사악한 인간 본성의 저열한 부분’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한술 더 떠, 그는 웃음이 다른 사람들의 약점에 비해 자기 자신의 우월감을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책에서는 이러한 우월한 웃음을 다루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책은 비웃음을 거부하려고 합니다. 비웃음이란 권력자의 우월감이자 가진 자의 허세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비웃음이란 한마디로 권력의 유머이며, 지배의 웃음입니다. 

이 책은 냉소(冷笑)도 마음에 두지 않으려고 합니다. 냉소란 많이 아는 자의 특권처럼 여겨집니다. 하지만 냉소의 지혜는 진리의 가짜 모습일 뿐입니다. 이런 이유로 냉소는 자신의 삶을 갉아먹습니다. 냉소로 인해 도전 정신과 변화의 시도가 위축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냉소는 권력에 도구로 이용되는 웃음이며 현실에 복종하는 유머입니다.


“웃음은 인간의 얼굴에서 겨울을 몰아내는 햇볕이다.”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가 한 유명한 말입니다. 이처럼, 이 책이 추구하는 웃음은 시민의 얼굴에서 고통과 한숨을 쫓아내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또 이 책은 값싼 위안과 천박한 힐링을 혐오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유머는 현실과 삶에 대한 예리한 통찰, 그리고 삶과 현실에 대한 집착 없는 긍정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코미디는 역설과 반어로 모순과 부조리를 드러내면서도 해학과 익살로 위대한 정신의 건강을 표현합니다. 

그래서 이 책은 반전의 아이러니를 좋아합니다. 반전은 패배를 승리로, 슬픔을 기쁨으로, 고통을 즐거움으로 바꿉니다. 반전은 현실에 저항하는 유머이며 권력에 도전하는 웃음입니다.

또한 이 책은 전복의 풍자를 추구합니다. 전복은 부당한 권위를 무너뜨리고 강자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의 허세를 웃음으로 폭로합니다. 전복은 현실을 뒤집는 웃음이며 생명력을 고양시키는 유머입니다.


우리는 이 책에서 웃음과 유머를 논리학과 철학에 결합시키는 작업에 도전했습니다. 일반적으로 형식논리학은 쉽게 무비판적인 정당화의 논리로 사용되기 쉽습니다. 귀납논리학은 수수께끼 풀이의 논리로 전락해 버리기도 합니다. 형식논리학과 귀납논리학이 개그의 반전과 코미디의 전복과 결합한다면 저항의 논리와 통찰의 논리로 바뀔 수 있습니다. 위대한 철학자들은 웃음과 유머에서 삶과 현실의 모순에 대한 통찰과 전통 가치에 대한 도전을 읽어냅니다. 

또한 우리는 이 책에서 웃음과 논리의 기괴한 결합, 유머와 철학의 낯선 융합을 시도했습니다. 우리 작업의 최대 경쟁자는 정치인들입니다. 정치인들이 만드는 블랙 유머와 섬뜩한 웃음의 실상은 우리 시민들에게는 한숨이며 불편함입니다. 이와는 다르게 우리의 의도는 논리와 철학의 추상적 고원에 개그의 구체적인 나무를 심어 반전과 전복의 웃음을 드리고자 한 것입니다. 모순과 불일치의 유머, 해방과 저항의 개그, 위대한 화해와 지혜로운 통찰의 코미디를 통해 웃음의 철학적 코드를 드러내고자 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미학과 문예비평에서는 웃음, 즉 익살은 골계미로 표현됩니다. 이 골계미라는 범주 아래에 기지나 위트, 농담과 조크는 거의 동의어로 사용되며, 해학은 유머와 동의어이고, 풍자나 희화(캐리커처), 패러디나 반어(아이러니) 등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유머는 웃음을 유발하는 말과 행동에 관한 가장 넓은 우산 개념으로 쓰입니다. 그 유머의 하위 범주로 위트, 농담(조크), 풍자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유머가 예술로 제도화된 극이 코미디(희극)입니다. 개그는 원래 농담 위주의 코미디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코미디를 대체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웃음, 유머, 농담, 코미디, 개그가 거의 동의어로 사용될 것입니다. 


이 책이 나오기까지 많은 분들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특히 이 책의 기획 배경이 된 「논술 개그」 시리즈 공연에 많은 개그 콘텐츠를 제공해 주신, 대학로 명품 코미디 연극 「당신이 주인공」의 제작진 여러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당신이 주인공」의 제작사 대표이신 가도현 님과 연출가 개그맨 김대범 님께 특히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당신이 주인공」과 「논술 개그」 시리즈에 함께 출연하며 수많은 개그 아이디어와 영감을 선물해 준 극단 ‘김대범소극장’ 소속 신인 배우 여러분들의 노고를 잊을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땅 위에서 코미디와 개그에 일생을 헌신하며 따뜻한 유머와 촌철살인의 농담과 예상을 뒤집는 풍자와 반어로 우리 시민들을 즐겁게 해준 코미디언들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


2014년 11월

김성우, 송진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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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자는 여우형과 고슴도치형이 있습니다. 고슴도치형 이론가는 경제 문제의 올바른 해결은 시장 자유화나 또는 정부 주도의 정책뿐이라고 믿는 사람들이고 여우형 이론가들은 시장의 기능을 일부 존중하지만 갖가지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교과서의 해답이 불확실하다고 보는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고슴도치형의 이론가들 중에서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이들은 노벨상을 받을 정도의 이론적 업적을 달성해도 여러 경제 문제들을 교과서적이고 판에 박힌 논리로 접근한다는 것입니다. 경제가 어디 경제만의 문제였습니까? 
 -김운회, 본문 중에서

알렙 氏가 김운회 교수님을 처음 만난 때는 2003년 무렵이었습니다. 김 교수님은 그때 <삼국지 바로 읽기>를 통해서 한창 인기를 얻어가고 계셨죠. 당시 ㅇㅇ사 편집부에서 초베스트셀러 <삼국지>의 개정판 작업을 맡았던 저는, <삼국지>에 관한 많은 참조 자료를 뒤지기에 바빴습니다. 김 교수님께서 분석하였던 한국인들의 <삼국지>에 관한 시각과 태도는 가히 충격적이라 할 만했죠. 그래서 김 교수님의 책을 사보았고, 이내 팬이 되었습니다. 그때에는 <삼국지>에 관한 비판 의식 없는 맹종과 맹신만 지적하신 줄 알았는데, 그 내용 중에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비판도 들어 있었습니다. 
그 후에 김 교수님은 관심을 한국 고대사 영역으로 넓히셨습니다. <대쥬신을 찾아서>라는 두 권의 역작에 온 에너지를 쏟으셨죠. 알렙 氏가 편집자로서 김 교수님과 인연을 맺은 첫 작품이 이 책이었습니다. 2005년부터 김운회 교수님은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에 <대쥬신을 찾아서> 24부작을 연재하기 시작하였고, 2006년에 책으로 간행하였습니다. 재야 사학자 혹은 비제도권 사학자라고 불리던 김 교수님에 대해 쏟아졌던 비판과 격려는 가히 폭발적이었죠. 그런데, 김 교수님의 모든 관심 주제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대항 이데올로기로 모아졌었습니다. 간혹 손가락이 가리키는 달을 보지 않고, 손가락을 보면서 지적하는 이들이 많았었죠. 
얼마 전 김 교수님의 관심 주제가 경제학으로 넘어온 것을 보았습니다. 실은, 김 교수님의 전공이 경제학, 그것도 국제 경제와 ICT산업을 중심으로 한 인터넷 마케팅 분야라는 것을 그제야 상기하였죠. 그리고 김 교수님이 위기의 자본주의에 대한 성찰만이 아니라 근본적이고 거시적인 새로운 그림을 그리고 계시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간단히 홍보성으로 책 내용을 소개하자면 이렇습니다. 현재의 경제 위기에 대해 우파 경제학(근대 경제학)은 근본적으로 문제점을 해결할 수 없다고 합니다. 여기에 그 대안으로 나타난 좌파 경제학도 이론적인 모순성과 한계 때문에 대안이 되지 못한다고 주장합니다. 김 교수님은 이 책에서 좌파나 우파의 경제 논리를 모두 해체하고 새로운 형태의 경제 패러다임만이 인류의 미래를 보장할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조금 더 쉽게 풀어보자면, 우파 경제학은 머리(가치)가 없이 몸통(현상분석)만 있고, 좌파 경제학은 머리만 있고 몸통은 없다는 것이죠. 이런 취지에 공감하는지라, 알렙 氏는 책 제목을 <왜 자본주의는 고쳐 쓸 수 없는가>로 하는 건 어떠냐고 권했고, 김운회 선생님께서도 동의하셨죠. 
이 책의 3부와 4부에서 김운회 교수님은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조심스럽게 그러나 에두르지 않고 적확하게 제시합니다. 저는 이 패러다임에 이름(개념)을 붙여보는 건 어떠냐고 말씀을 드렸지만, 김 교수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패러다임이라는 것은 어느 한 (천재적) 개인의 아이디어 하나로 바뀌는 게 아닙니다. 한 시대의 패러다임이 쓸모없어지고, (많은 학자들과 지식인들이 노력하고 협력하여) 다음 시대의 패러다임이 중심으로 자리 잡았을 때에야 비로소 그것을 명명할 수 있는 거겠죠.” 이런 취지를 말씀하신 것이죠. 
세계적으로 부분적으로는 정교한 이론서들이 많았지만, 광범위한 사회과학적 이데올로기와 패러다임을 체계적으로 분석한 예는 별로 없습니다. 또 대부분의 저작들은 좌파 또는 우파에 경도되어 어느 한 시각으로만 문제 해결을 도모하는데 김 교수님의 이번 저작은 이데올로기와 패러다임에 대한 방대한 이론들을 총동원하여 현재의 이데올로기적 교착 상태를 해명하고 극복하려 한다는 점에서 세계인들이 주목해 볼 만합니다. 

약탈 본능의 시대에 자본주의 경제(학)에 대한 올바른 가치관과 태도가 필요한 요즘입니다. 김운회 교수님의 역작을 권해 드립니다. (알렙 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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