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인문학>


벤야민의 아우라

익숙한 것을 낯설게 읽기




사진은 아우라를 지우는가?



 사진에 대한 담론의 물꼬를 튼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에게 화두는 19세기 말, 20세기 초 자본주의가 한창 꽃피던 시절의 대중문화였다. 그를 이해하기 위해 그와 동시대에 살았던 미학자 아도르노(Thodor Adorno, 1903~1969)의 대중문화에 대한 태도를 우선 살펴보도록 하자. 아도르노는 대중문화를 “대중 기만의 도구”라고 비판했다. 그는 사람들이 대중문화를 보면서 얻는 즐거움은 대중을 노예화하는 폭력일 뿐이라고 했다. 따라서 아도르노에 의하면, 현대 사회 속에서 대중문화는 결코 진보적으로 이용될 수 없다. 벤야민은 그와 전혀 다른 태도를 보였다. 그는 아도르노와는 달리 대중문화를 문명 진보를 위한 도구로 본 것이다. 


(Walter Benjamin, 1892~1940)



 벤야민은 복제 기술이 예술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가에 주목했다. 19세기는 사진과 영화라는 기술 복제의 예술을 등장시켰다. 그런데 애초부터 복제본의 생산을 전제로 한 사진과 영화 때문에 이제 원본과 복제본을 구분하는 것이 무의미하게 돼버렸다. 이는 전통적으로 예술

작품이 갖고 있던 유일무이한 현존성과 진품성의 가치를 순식간에 매몰시켜 버린 것이다. 아우라의 상실이다. 아우라(Aura)가 무엇인가? 독특하고 신비스러운 기운, 그것은 그 대상이 원본이거나 일회적인 데서 나오는 것이다. 벤야민에게 아우라란 가까이 있으면서도 가까이 다가설 수 없는 느낌, 작품을 대하는 주체가 그 대상과의 관계에서 만들어지는 어떤 종류의 거리였다. 그는 아우라를 그 사물이 갖는 권위를 의미하고 그 때문에 그 대상에 대한 일방적인 몰입과 나아가 숭배를 자아내는 것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이제 복제를 통해 예술을 자신에게 끌어와 소유하고자 한다. 과거와는 달리 사물을 먼 곳에 두고 특별한 때와 장소에서만 바라보고 돌아오는 것이 아닌, 이제는 직접 만지고, 듣고, 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들에게 원본으로부터 격리된 사회적 위치는 더 이상의 의미가 없게 된다. 그로부터 아우라를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이를 달리 말하면, 그만큼 자신 곁에서 ‘현재화’되는 것이기도 하다, 아우라를 통한 권력으로부터 독립될 수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아우라의 상실’보다 훨씬 중요한 ‘숭배 권위로부터의 독립’을 획득하는 정치·사회적 의미가 여기에서 나온다. 이는 예술이 종교적 숭배 가치에서 벗어나 세속적 아름다움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으로 새로이 자리 잡았음을 의미한다. 이를 두고 벤야민은 아우라란 예술 작품이 원본이라는 대상적 속성과 결부되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 예술 작품을 대하는 주체의 주관적 경험에서 비롯되는 것이기도 하다고 했다. 사진의 출현이 곧 아우라의 상실로 바로 연결되는 것만은 아닌 셈임과 동시에 사진이 새로운 아우라를 만들어낼 수도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벤야민은 현대의 대중이 갖는 예술 작품에 대한 직접 경험의 욕구를 아케이드와 구경꾼의 개념에서 찾았다. 그 안에서 도시 전체는 물신주의를 실현하고 그것은 하나의 거대한 마술 환등으로 바뀐다. 천장을 유리로 덮은 아케이드는 그 안에서 몽환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그 안에 있는 상점들의 진열장에서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하는 사물들이 바로 옆에 놓여 충격적인 효과를 만들어낸다. 아케이드는 알지 못하지만 행하는 존재다. 벤야민은 바로 그 행하지만 알지 못하는 존재, 즉 한 시대의 무의식을 드러내려고 아케이드라는 물질이 된 꿈에 대해 해석을 시도한 것이다. 


 근대 도시가 만들어낸 아케이드에 진열된 그 신기한 환등기는 안트베르펜 성당에 그려진 루벤스의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 그림과 달리 매일 내 눈 앞에서 보고 즐길 수 있는 대상이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내 소유는 아니다. 그래서 그 믿음과 사실 사이에서 괴리가 발생한다. 현실은 그 괴리라는 전제 위에 서 있다. 그리하여 그는 가장 낯익은 일상을 가장 낯선 눈빛으로 바라보는 구경꾼이자 산책자가 되는 것이다. 그 구경꾼은 군중 속에서 피신처를 찾는다. 구경꾼에게 익숙한 도시는 군중이라는 베일을 통해서 보면 환상으로 비쳐진다. 결국, 아케이드는 현대인이라는 구경꾼이 마지막으로 다다르는 슬픈 곳이다. 슬픈 사람, 벤야민. 자기 스스로나 프랑스 사람들이나 모두 자신을 슬픈 사람이라 불렀던 그 벤야민이 찾은 근대의 슬픈 꿈이 그 아케이드에 있다. 그가 사진 예술에서 중요한의미를 차지하는 것은, 사진이라는 것이 아케이드 앞을 서성거리는 그 구경꾼처럼 세상을 슬프게 보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슬픈 사람 벤야민에게 역사의 진보란 파괴와 그 잔해를 더욱더 높이 쌓아올리는 폭풍일 뿐이다. 그가 보기에 역사란 그 폭풍의 힘에 밀려 어쩔 도리 없이 미래로 떠밀려가는 것이다. 그래서 미래는 파국의 종말이다. 결국 그에게 세상은 꿈이 사라진 우울한 것이다. 그가 보는 사진은 그 모호성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당시 모든 사람이 당연시하는 일반적 해석 혹은 진보의 낙관적 미래를 부정하고 거기에 저항하는 의미를 담는 것이었다. 이것이 천재 작가 벤야민의 우울증이고, 근대 사진 예술을 잉태하는 모태이자 그 뿌리다. 


 사진이 대중화되면서 이제 고전적 그림의 주요 대상인 인물 사진이 서서히 뒷전으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사진은 본격적으로 아우라로부터 독립하는 세속의 예술이 된다. 비로소 사진을 통해 아우라를 벗어나고, 그리하여 전시 가치가 숭배 가치를 앞지르게 된 것이다. 벤야민이 사진은 아우라를 재현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은 본질적으로 대상과 그 대상을 재현하려는 사람과의 거리 때문이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그 대상인 인물이나 풍경 혹은 정물 안으로 깊숙이 들어갈 수 없는 것과는 달리, 사진가는 대상과의 거리감을 포기하고 대상이 갖는 숨겨진 내부 요소들을 재현하려 한다. 그런데 대상 내부로 깊숙이 들어가다 보니 그동안 친숙했던 풍경이나 인물이 아닌 여러 낯선 대상들이 나타난다. 그렇게 되다 보니 이제 대상을 보는 방식이 전통적인 관조가 아닌 새로운 충격을 주는 경험으로 된다.




(외젠 앗제, 1900)



아우라로부터의 거리 두기, 앗제와 잔더



 벤야민은 이러한 경험을 20세기 초반 파리의 거리를 현장 기록하듯 찍어낸 외젠 앗제(Eugene Atget, 1856~1927)의 사진에서 확인한다. 황량한 앗제의 사진에서 우리는 그 어떠한 관조나 그것을 통한 아우라를 찾을 수 없다. 벤야민은 앗제의 사진이 공허하고 쓸쓸한 도시의 모습 속에서 인간과 세계 사이의 소외를 보여준다고 해설한다. 여기에서 소외란 낯설게 하기다. 그것은 사진이라는 장르가 택한 대상과 가까워지는 데서 오는 충격을 극복하기 위한 방편이다. 이제 사진은 그저 당연한 것으로 여겨 그냥 지나칠 수 있는 것들을 낯설게 만들어서 그것을 다시 주목하고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관계 만들기가 된다. 


 벤야민의 소외는 곧 주체가 대상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워 가는 것이다. 앗제는 그것을 어수선하고 무질서한 근대 도시 파리의 뒷골목에서 찾았다. 근대 도시 뒷골목에서 무의미한 것으로 버려지고 지워지는 온갖 기억들 속에서 새로운 예술의 가치를 찾은 것이다. 부여잡는 눈을 갖는 대신, 헤매는 눈을 가지려 했던 것이다. 그래서 앗제는 일상의 친숙한 것을 낯설게 봄으로써 거기에 예술의 생동감 내지는 생명력을 불어넣으려 한 것이다. 사실, 앗제는 사진을 기록적 차원에서 찍었을 뿐 지금 후대 사람들이 보듯 심미적 예술성을 크게 부여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의 사진 행위가 결국은 낯설게 하기 차원에서 사진의 대중 예술성을 부여해 주었던 것이다. 대상을 낯설게 보다 보면 어딘가에서 헤매게 되고, 헤매게 된다는 것은 뭔가 새로운 길을 찾는 것이 된다. 앗제는 전통적 눈으로 볼 때는 보이지 않았던 주변적이고 천대받는 군상들이 제 목소리를 내도록 기록하였다. 그것만이 그에게는 유일한 경험이고 기억인 것이다. 


 앗제의 사진이 아우라로부터 해방되었다 함은 곧 예술 작품을 대하는 기존의 태도가 전적으로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아우라를 갖는 그림과 같은 전통 예술을 대하는 사람은 그 작품 안으로 몰입해서 스스로를 작품과 일체화하여 아우라를 온몸으로 체험해야 하지만, 이제 새로운 시대에서는 복제 기술 때문에 — 혹은 덕분에 — 원하는 장소와 시간 속에서 사진과 자유롭게 부유하고, 헤매게 된다. 복제된 앗제의 사진을 접하는 관객은 재현된 이미지에 몰입을 할 수도 없고, 작품에 일체화를 할 수도 없다. 대상은 그저 대상이고, 본질을 갖지 않는 타자일 뿐이다. 그래서 이제 사진 예술은 대상에 대한 몰입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서 대상에 대한 비판과 거리 두기를 필요로 한다. 


 인물은 고전주의 그림이 가장 애용하는 대상이었다. 초상화는 원본 자체로부터 뿜어 나오는 아우라 덕분에 성스러운 기운을 가졌다. 그래서 사진 초창기 즉 그림의 재현 전통을 답습하려는 사진은 인물을 주요 대상으로 삼았다. 그러던 전통이 아우구스트 잔더(August Sander, 1876~1964)로부터 크게 바뀌었다. 아우구스트 잔더의 인물 사진은 두 가지 차원에서 전통적 초상화와 다르다. 그것은 전통적으로 해왔던, 인물에 대해 제의적 의미나 기억의 가치를 부여하는 아우라가 있는 재현이 아닌, 사회학적 차원에서 인간상을 파악하려 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엄밀하게 말하면, 그의 사진은 인물 사진이 아닌 인물을 놓고 파악한 사회적 맥락의 재구성이다. 잔더는 인물을 통해 그가 살던 시대의 사회 구조를 역사적 증언으로서 후세에 남기려 했던 것이다. 


 잔더는 비단 노동자, 농민, 하인, 집시 등 사회에서 소외당한 사람들 말고도 귀부인, 공무원, 경영자, 군인 등 사회의 중간층과 상류층인 사람들도 모두 대상으로 포함하였다. 그러다 보니 그의 사진은 한 장 한 장이 별개의 독립성을 갖는 동시에 전체가 하나로 연관 되는 연작물이다. 그 안에는 예술과 역사가 공존해 있다. 군(群)사진이라는, 사진만이 갖는 특유의 장르가 개척된 것이다. 이 점이 결정적으로 잔더의 사진이 아우라로부터 해방된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림에서 뿜어나오는 전통적 의미에서의 아우라는 대상과 그 대상을 보는 주체 사이에 형성되는 교감으로부터 비롯된다. 둘 사이에는 분명한 시선의 교차가 있고, 그래서 둘 사이에 보이지 않는 대화가 오가며, 대화 속에서 그 대상이 본질적으로 갖는 삶의 희로애락을 공유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을 잔더의 인물은 부인한다. 그것이 대상의 객체화이고, 대상으로부터 거리 두기이며, 아우라로부터 해방인 것이다.




진의 맛은 아우라를 죽이는 것 



 벤야민 사진 미학의 중심 개념인 아우라로부터의 탈피 즉 대상과의 거리 두기를 가장 잘 보여주는 한국 작가는 민병헌이 아닐까. 민병헌의 대상은 극적이지 않다. 매일의 일상에서 접하는 별거 아닌흙덩어리, 나무, 작은 덤불, 풀이파리 같은 것들을 렌즈라는 눈으로 찾아, 보았다는 것은 바로 민병헌의 아우라에 오염되지 않는 시선을 보여준다. 그의 눈은 전적으로 그가 세운 주관의 삯이다. 객관적이거나 역사적이거나 담론적인 것들로부터 거리를 두고 홀로 선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누구나 볼 수는 있으나 아무도 보지 못한 것을 작품이라 내세우는 일은 사회의 지식과 앎으로부터 스스로를 소격시키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사진이란 누구나 아름답게 보는 장면을 이미지로 담는 게 아니고 세상을 자기 눈으로 아름답게 (혹은 달리) 인식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진가 민병헌의 사진에는 겉으로 보이는 특별한 의식이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작가의 어떤 의식은 분명히 존재하겠지만, 사회 언어로 형상화할 수 있거나, 형상화하고자 하는 그런 의식은 아니다. ‘나’만의 의식, 주체적 의식은 곧 사회의 지배적 위치에 서긴 하나 존재하지 않는 허상의 집합체인 다수성이나 효율성에 대한 거리 두기이기도 하다. 그것이 사회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질지 아니면 내면세계의 성찰로 이어질지, 보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 작가의 몫이다. 관여할 수 도 없고, 관여해서도 안 되는, 엄밀하게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그래서 세계를 접하는 작가는 외롭고 쓸쓸하다. 그의 사진이 흐릿하고, 중간톤이며, 밋밋한 것은 그 스스로가 세계를 그렇게 보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스스로 그랬듯이 독자들에게도 가르치려 들지 않는다. 자신의 생각을 퍼뜨리려 들지도 않는다. 다만 그가 하는 일은 사진을 바라보는 눈을 갖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한 번 경험해 볼 수 있도록 사진과 세계 사이의 문을 열어두는 것뿐이다.


 사진은 그 자체가 복제 이미지라는 차원에서 본질적으로 아우라를 벗어나는 이미지이다. 카메라를 들고 대상과 가까이 감으로써 대상과 ‘나’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를 없애고, 그러다 보니 대상에 대해 몰입하고, 신비화하며, 관조하는 태도를 깨뜨려버린다. 그래서 엄밀하게 보면 사진을 하는 태도는 예술을 하는 태도보다는 학문을 하는 태도와 더 가깝다. 물론 사진 초창기 때의 사진 성격에 관한 논리다. 이후로 사진은 많이 변했다. 사진을 가지고 대상과의 거리를 만들어 낼 수도 있고, 그런 행위를 통해 예술을 즐길 수도 있다. 그렇지만 사진의 맛은 아우라를 죽이고 누구나 즐기는 대중 예술로 가는 데 있지 않을까? 기껏 해봤자 대상을 전유할 수밖에 없는 행위, 그것이 가장 일차적인 사진 행위다. 사진에 아우라를 부여해서 미술관이나 갤러리로 데리고 가 전시 숭배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숭배 없이 살 수 없는 인간 군상이 만들어낸 문화일 뿐이다. 


 아우라로부터 벗어나는 사진을 추구하는 사진가로 화덕헌이 있다. 부산에서 작품 활동을 하는 화덕헌은 주거지를 통해 인간의 사회적존재에 대해 고민하는 사진가이다. 그의 사진(전) 「흔들리는 집」은 재건축 구역에서 사라져버린 문패를 찍었다. 해와 달빛 속에서, 비바람 속에서 바래고, 갈라지고, 삭아 내린 그 모습 그대로를 찍었다. 작위적이지 않은 실제 그 모습 그대로 은은히 자아내는 이미지다. 그 이미지들은 바닷바람 거세게 몰아치는 미포 동해남부선 철둑 건너 노란 집 외벽을 휘감은 수백 장의 문패 이미지를 프린트한 것과 함께 전시된다. 사진은 드러내놓고 아우라가 없는 복제 예술임을 보여주는 행위다. 그러다 보니 그 사진 프린트들은 더 이상 시뮬라크르(simulacre)가 아니다. 노란 문패들이 펄럭이는 전시장 밖을 보고 안으로 들어가 물성을 전혀 강조하지 않은 평범한 프린트로 만들어진 그 사진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그 시절 그 집으로 돌아가 세상을 회상한다. 화덕헌의 「김밥천국」도 마찬가지다. 일회용 카메라로 찍은, 그것도 전국에 있는 아는 사람들에게 부탁하여 모은 이미지들을 흔하디 흔한 A4 용지로 프린트해 오토바이 수리 가게 이층 빈집에 걸었다. 거기에는 TV에서 설교하는 기독교 목사들의 모습을 캡처하여 아무나 하듯 보통의 용지에 프린트해 같이 걸어둔 것도 있다. 철저하게 아우라로부터 벗어나려는 노력이다. 절대적인 장소, 절대적인 맥락을 조건으로 삼는 아우라로부터 벗어나 어디로든 갈 수도 있고, 누구든 소유할 수 있으며, 어떻게든 쓰이는 그런 사진을 추구한다. 


 사진이 예술이냐 아니냐를 말하는 것은 이제 진부하다. 그렇지 않은 경우는 있겠지만, 예술을 추구하는 사진은 얼마든지 예술일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사진이 예술인가? 그 답이 여기에 있다. 회화의 인습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이미지를 만들고, 회화와 미술의 갖가지 장르를 크로스오버 하여 새로운 뭔가를 창조적으로 생성해 내는것. 화덕헌의 사진(전)이 항상 주목을 받는 것은 바로 이 사진의 본질과 행위 미술 사이의 그 엄청난 폭을 감히 전시 안으로 담아내려 시도하는 무모함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를 두고 ‘작업에서 나올 모종의 즐거움’이라 읊는다. 그것이다. 예술을 즐거움으로 보는 그 낙천성에 그의 예술 생명력이 살아 숨 쉬는 것, 해운대에서 불어오는 바닷바람과 함께. 벤야민이 말하는 아우라로부터 벗어난 복제 시대 예술이 가야 할 길 가운데 의미 있는 하나다.



<사진 인문학>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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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알렙입니다 ^^

『사진 인문학』 관련해서 언론에서 몇 가지 기사가 나왔는데요.

독자 여러분께 짤막하게 소개해드리려고 합니다.

관심이 가는 기사는 링크 타고 들어가서 읽어주세요!




한겨레

인문학자의 ‘눈 밝은’ 사진비평
"제대로 된 사진비평이 드문 마당에 눈 밝은 필자가 하나 추가됐다. 
기초부터 파고들어 풀어낸 사진입문에서 인문학에 이르는 과정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조선일보
뷰파인더 너머 철학을 마주한 사진가들
"베냐민, 칸트, 들뢰즈, 푸코 등 주요 철학자와 국내외 사진가들이 쉴 새 없이 교차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 시대 사진가들이 뷰파인더로 도려낸 세상을 통해 말하려 했던 메시지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한국일보
좋은 사진의 힘은 보이는 것보다 숨긴 것에서 나온다
"사진이 완전히 중립적일 것이라 믿었던 초기의 순진함부터 사진이 가진 무한한 권력에 경악하기까지, 저자는 사진의 의미ㆍ가치ㆍ힘의 변천사를 인문학적 관점에서 추적한다."




영남일보
사진 작품 보며 철학적 사유하기
"사진이 재현하고 전유하는 사물의 존재를 통해서 사진가들은 어떤 생각을 담고자 했는지를 탐구했다. 또한 우리 시대 사진가의 작품세계와 작가의식을 날것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




톱스타뉴스
인문학으로 사진을 논하다
"우리 시대 사진가들의 다양한 면면들을 소개하고 비평하면서, 사진 예술이 추구해야 할 자기 정체성 내지 주체적 태도를 말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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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인문학』


사진으로 어떻게 말을 할 것인가?



 진으로 말하기의 원리는 시(詩)와 유사하다. 시는 일정한 형식 안에서 리듬과 같은 음악적 요소와 이미지와 같은 회화적 요소로 독자의 감정에 호소하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을 말하기의 방식으로 삼는다.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바를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과 이성이나 논리가 아닌 감각이나 감성에 기댄다는 것이 사진과 비슷한 것이다. 시는 문자로 된 시구로, 사진은 이미지로 배열하여 독자가 감정을 자아낼 수 있도록 한다. 그런데 시는 의미가 비교적 분명한 문자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사진보다는 전달 정도가 더 분명하고 언어의 리듬이나 조화를 이루기가 더 쉽다. 이에 비해 사진은 이미지의 언어가 불분명하기 때문에 문자로 된 텍스트가 따라가 주지 않고서는 메시지를 분명하게 전달하기가 어렵고, 다만 느낌만 갖게 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사진으로 정확한 메시지를 전달하려면 이미지를 통한 리듬이나 조화를 살리되 문자로 된 텍스트가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 


 다자적 해석을 못하게 하고 축자적 해석을 통해 정본의 시 읽기를 강제해서는 안 되듯 사진 읽기도 마찬가지다. 시는 여러 행과 연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작가의 의도는 비교적 분명하게 드러나지만 자유로운 해석 또한 가능하다. 시인 박목월은 자신의 시 「나그네」에서 그 나그네는 조국을 잃고 시름에 빠져 절망감으로 정처 없이 떠도는 민족의 얼이라는 해설을 내린 적이 있다.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앞뒤 맥락상 그렇지 않다고, 시인이 나중에 변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평이 더 일반적이다. 이 경우 맥락을 통해 시인의 변을 반박할 수 있다. 시 언어는 자유롭지만 그래도 명료하기 때문이다. 


 자, 그러면 박목월의 「나그네」를 사진으로 재현했다고 가정해 보자. 아무런 텍스트도 없이 이미지로만 배열을 한다면, 박목월이 스스로 내린 해설과 같은 해석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사진의 언어가 명료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경우, 작업 노트에서도 그 나그네가 누구인지 소상하게 밝히지 않았다면 작가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사진은 어떻게 사진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표현할 것인가? 이것이 사진가에게 주어진 가장 큰 숙제다. 


 사진가는 사진 이미지로 메시지를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까? 사진의 의미를 분명하게 전달하려는 가장 일반적인 방식은 포트폴리오방식이다. 한 장의 사진은 그 느낌이나 해석의 여지가 너무나 열려 있기 때문에 분명한 메시지를 주고받기가 어렵고, 그래서 여러 사진을 배열하는 것이다. 열 장으로 할 수도 있고 스무 장으로 할 수도 있고 오십 장, 백 장으로도 할 수 있다. 사진이 많으면 많을수록 메시지전달 효과는 더 확실해진다. 여러 장의 사진으로 포트폴리오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를 딱 부러지게 말을 할 수는 없다. 사진은 이미지고, 이미지는 느낌이 우선이기 때문에 그렇다. 다만, 중요한 것은 동어반복(tautology)을 피하는 것이 좋다는 것과 여러 사진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데 특정한 한두 장의 사진이 조화를 깨트린다면 그 사진이 미학적으로 아무리 뛰어나다 할지라도 그 사진은 빼야한다는 정도다. 


 이 경우 각 사진 밑에 단독의 캡션을 달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따로 다는 경우도 많다. 책의 경우는 맨 뒤, 전시의 경우는 어느 한쪽 벽면 에 따로 모아놓은 경우도 많다. 그 경우 각각의 사진은 전체 내러티브를 구성하는 한 장이 되지만 이와 동시에 단독적으로 하나의 작품이 되는 것이므로 캡션으로 인해 작품 읽기를 한정짓거나 강제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 서사가 분명한 경우 작업 노트를 좀 더 주제 중심적으로 쓸 것이고, 서사가 분명하지 않은 경우 작업 노트에서 주제를 분명히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가장 무난한 사진으로 말하기는 제목과 작업 노트가 있는 포트폴리오 방식의 다큐멘터리 작업 가운데 주제 의식이 뚜렷한 경우다. 


 따라서 작가에게 작업 노트는 매우 중요하다. 작업 노트를 어떻게 쓸 것인지는 딱히 정해진 것은 없다. 다만 길게 설명조로 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렇게 하면 독자의 자유로운 느낌과 생각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작업 노트에는 자신이 왜 이 작업을 하게 되었는지, 이 주제에 대한 작가의 생각은 어떠한지, 이 작업은 어떤 과정을 거쳐 진행되었는지, 이 작업이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와 같은 것을 자유롭게 쓰면 된다. 붓 흘러가는 대로 쓰는 것이다. 강하고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독자로 하여금 작가의 의도에 따라오도록 요구하는 것이고, 부드럽고 은밀하게 표현하면 독자가 작가의 의도와 관계없이 자유롭게 느끼거나 해석해도 괜찮다는 의미가 된다. 전자의 방향으로 작업하는 것이 후자의 방향으로 작업하는 것보다 못하다고 보지 않는다. 사진을 어떤 주장을 하기 위한 근거 자료 혹은 삽화로 삼는 것은 사진 행위를 하나의 운동 차원으로 보는 것이고, 그것이 예술을 지향하는 것보다 수준이 낮다고 보지 않는다. 사진보다 텍스트가 많고, 사진이 텍스트에 대해 삽화 자료로 취급된다고 해서 그 사진이 수준 낮은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텍스트는 짧거나 부드럽게 가고, 여러 장의 사진 이미지로 하고자 하는 말을 하는 것이 더 좋다는 평을 받는 것이 일반적이다. 


 사진으로 의미를 담기 위해서는 사진의 기호가 지시하는 체계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특정 기호가 널리 알려진 방식에 따라 사진을 재현하면 유치해지고, 창의성이 떨어져 예술적이지 못하다는 평을 듣기 일쑤다. 재개발 구역에서 쓰러진 집들과 새로 올라간 고층 아파트를 비교해서 찍는다거나 텅 빈 공간에 의자 하나를 덩그렇게 놓고 찍거나 당산나무를 치올려 찍어 뭔가 영험한 기운을 나타내고자 하는 따위를 말한다. 그 방식이 잘못되었다는 의미가 아니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런 방식으로 사진을 찍다 보니 식상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요즘은 자신이 의도하는 바를 어떻게 하면 일반화된 상징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려 하거나 반의적으로 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사진가들이 많다. 아니면 아예 의도를 없애버리거나 혼란스럽게 해버리곤 한다. 깊은 철학이나 인문학의 세계를 그 안에 담고, 누구든 쉽게 그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 또한 요즘 추세 가운데 하나다. 그러다 보면 그만큼 독자가 읽을 수 있는 여지를 넓혀주니 좋기도 하지만, 메시지가 소통이 안 돼 독자가 작가나 비평가에 종속되어 버릴 수도 있다. 


 같은 주장을 다른 양식으로 작업하는 것이 가능한 게 사진이다. 예컨대, 누군가가 인간의 소외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이 자리에서 생각나는 대로 적어보자. 소외된 현장에 직접 가서 기록을 하는 방식도 있고, 소외를 느낄 수 있는 오브제를 찍는 방식이 있을 수 있다. 이 경우 오브제로는 텅 빈 골목, 쓰레기통, 큰 건물 앞에 선 작은 사람, 재개발 구역, 아파트 복도 등이 가능할 것이다. 이보다 더 간접적인 방식도 가능하다. 거대한 비닐 안에 비치는 희미한 사람의 그림자나 허름한 창고 거미줄에 잡힌 파리일 수도 있다. 아예, 연출을 할 수도 있다. 도심 한복판 늦은 밤에 홀로 쓰러져 있는 사람으로 찍을 수도 있고, 야구장 응원석 속에 혼자 가면을 쓰고 찍을 수도 있다. 이보다 전복적으로 울창한 숲속에서 남자와 여자가 서로 의지하며 포옹하는 장면을 찍을 수도 있다. 더 심하게는 디지털로 사진을 만들 수도 있다. 사람의 얼굴을 컴퓨터로 대체한다거나, 불상의 가슴에 구멍을 뚫는다거나, 문틈 속으로 절규하는 손을 내민다거나 하는 방식도 가능하다. 이런 여러 이미지들을 섞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사진으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사회관이나 세계관의 내용을 직설적으로 제시할 수도 있고, 은유적으로 제시할 수도 있다.


 사진은 맥락이 단절되어 있기 때문에 아무래도 은유적이다. 전혀 색다른 전유를 할 수도 있다. 내용이 풍자일 수도 있고, 고발일 수도 있다. 은유나 전유의 방식을 선호하는 사진가도 있지만 직설적인 방식을 선호하는 사진가들도 있다. 그런데 후자의 방식은 사실적이고, 직설적이어서 독자로 하여금 불편함을 느끼게 하곤 한다. 포토저널 리스트들이 주로 택하는 이 방식은 사진을 삽화나 자료로 삼으면서 사회 운동의 도구로 삼는 경우가 많다. 


 20세기 초 미국에서 사회 참여를 하고자 하는 진보적 입장의 사진가들이 만들어낸 ‘다큐멘터리’ 사진은 그 후 부침을 거듭하면서 개념과 양식에서 많은 변화를 받아들였다. 그렇지만 사회 문제를 폭로하는 그 본질적 성격 때문에 세간의 주목을 받음과 동시에 그 직설적 성격 탓에 더 이상 확장되지 못하고 스스로 위축되었다. 사진가들은 직설적인 사진들을 도구로 삼아 벼랑 끝으로 내몰린 인간 소외를 구축하는 거대 구조를 신랄하게 공격하고 진실을 밝혀내기 위해 치열하게 싸웠으나, 그 사진으로 인해 대중들이 조직화되는 것은 아니었다. 차라리 그 사진들로 인해 사건의 현실이 익숙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사진은 대상을 익숙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사진을 언론의 담론이 아닌 미학의 담론으로 읽고 싶어 하는 경향이 더 강해졌다. 타인의 고통을 공유해야 한다는 당위성은 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들었다. 사회 참여 다큐멘터리 사진가의 고민이 여기에 있다. 


 사진으로 사진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주입하는 방식이 옳을지, 독자가 마음껏 해석하게 하는 것이 옳을지는 판단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사진을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지를 우선 정해야 한다. 사진으로 사회 변혁 운동을 하고자 하는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은 직설적 방식으로 메시지 주입을 선호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사진으로 예술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은밀하거나 전복적 방식을 통해 해석의 자유를 선호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사진으로 예술을 할 수 없지는 않지만, 그것만이 사진의 본질은 아니다. 사진은 다른 어떤 시각 매체보다 더 심각한 사회적 맥락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사진가의 사회적 책무도 무겁다. 그렇다고 사진 행위가 사회 변혁을 가져오는 도구가 될 수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사진은 본질적으로 모호하고, 익숙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예술이 없는 세상은 설 수가 없고, 예술만 있는 세상은 설 필요가 없다.


『사진 인문학』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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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 담긴 생각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사진 인문학』



 진 언어는 비논리적이기 때문에 사진가가 자신이 갖는 생각을 사진으로 재현하기도 어렵지만 독자가 그것을 읽어내기도 어렵다. 특히 사진 한 장만으로는 더욱 그렇다. 사진은 단독으로는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사진 언어는 그 특성상 논리의 문법을 가지고 의미를 제시한다기보다는 보는 사람만의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데 적합하다. 그 감성은 사람마다 다르고 그것도 때와 장소 혹은 분위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한 장의 사진을 볼 때 독자 개인의 생뚱맞은 느낌이 사진가의 의도와 다르다고 해서 그것이 잘못되었다거나 열등한 느낌이라고 평가할 수 없다. 그래서 좋은 사진과 나쁜 사진으로 나눌 수는 없다. 사진에 대해 큰 영향력 있는 비평을 한 롤랑 바르트에게 가장 좋은 사진은 돌아가신 어머니 유품 속에서 찾은 어머니 어렸을 적 모습이었다. 그 사진이 어떤 중요한 메시지를 담 고 있거나 미학적 면에서 뛰어나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오로지 자신만이 단독으로 갖는 찔린 아픔 때문에 그러하다. 바르트는 그래서 그 사진을 공개하지 않았다. 자기 외의 다른 사람들은 자기와 같은 느낌을 갖지 못하기 때문에 그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가치도 의미도 없는 사진이기 때문이었다. 

 사진은 같은 시각 이미지지만 그림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림은 그것을 만들 때 작가가 주체적으로 개입할 수 있기 때문에 화가의 생각을 재현하기가 더 쉽다. 그렇지만 사진은 본질적으로 우연의 산물이다. 사진은 그것이 발명된 지 200년 가까이 되어가고 있음에도 자체적 미학을 갖지 못한 상태에 있다. 아니면 앞으로도 본질적으로 그것을 가질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진을 두고 미학적으로 이렇네 저렇네라고 평가를 한다는 것은 엄밀히 말하면 어불성설일 가능성이 크다. 기준이 없으니 모순인 것이다. 그래서 엄밀한 의미에서 누군가가 잘 찍은 사진 한 장이라고 규정한다는 것은 그림의 미학 인습을 기준으로 삼아 평가한 것일 뿐이다. 이 경우 구도가 잘 짜여 있고, 색상과 톤이 안정돼 있으며, 초점이 잘 맞춰진 그런 사진을 말하는 게 대부분이다. 그렇지만 사진가가 일부러 구도를 불안하게 만들거나 초점이 맞지 않게 찍거나 그런 사진을 고르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문제는 안정된 사진을 고를 때의 작가 생각과 그렇지 않은 경우의 작가 생각을 독자가 어떻게 읽어낼 것인가이다. 사진도 말을 하지 않고, 사진가도 그런 말을 해주지 않는 상황이라 그 생각을 읽어낸다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사진 안에 담긴 생각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우리는 사진을 봄과 동시에 그 이미지 안에 은닉되어 있는 어떤 관계 속으로 들어간다. 그 관계는 두 가지 측면에서 만들어진다. 우선 그 관계는 이미지 안에 담겨 있는 여러 기호들을 통해 형성된다. 대상이 사람이라면 그가 입고 있는 옷, 서 있는 자세, 얼굴 표정, 배경 등이 주요 기호다. 그 기호들은 이미지 문자 그대로 의미를 갖는 외연과 그 장면이 한 단계 더 만드는 의미인 내포를 갖는다. 외연은 대상을 통해 누구나 볼 수 있는 단순한 인지를 말하는 것인데, 한 고등학교 여학생이 교복을 입고 있으면 학생이라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이다. 그런데 단순한 외연이 이루어짐과 동시에 사람들은 그 교복이라는 기호가 문화적으로 또 다른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을 인식한다. 고등학생 교복을 보면서 세월호 참사를 느끼고, 이민 가고 싶다는 것을 느낀다면 그는 교복 이미지를 텍스트로서 기호적으로 읽은 것이다. 그런데 이런 외연과 내포는 전형적이거나 일반적이지 않다. 누구나 다 다르다. 어느 것이 옳고 그르다고 할 수 없다. 사진가가 여학생 교복을 통해 세월호 참사로 가난한 이의 가족이 해체되는 비극의 대한민국을 그리고자 하였다고 할지라도 그 이미지 단독으로는 그 생각을 읽어내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래서 한 장의 사진으로 생각을 담아내기는 매우 어렵고, 보는 이가 그것을 찾아내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런데 사진으로 뭔가 생각을 담아내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사진으로 뭔가 생각을 담아내고자 할 때 반드시 필요한 것은 텍스트다. 사진의 텍스트는 크게 제목, 캡션, 그리고 작업 노트로 구성된다. 제목은 사진가의 생각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것이다. 국화꽃을 찍어놓고 ‘국화’라 제목을 달면 그 안에는 특별한 생각이 없을 가능성이 크다. 사진의 이미지성을 높게 치는 이른바 살롱 사진일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누군가가 제목을 ‘세월호’라고 달아놓으면, 그는 2014년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일어난, 도저히 상상할 수도 납득할 수도 없는 그 죽음들을 슬퍼한다는 생각을 읽을 수 있다. 그렇지만 이 또한 분명하지는 않다. 이 경우 그 사진 밑에 ‘2014년 여름 팽목항에서’라는 캡션을 달아놓으면 의미는 더욱 확실해진다. 그런데 사진가가 독자로 하여금 이런 감성을 자아내도록 하는 데 만족하지 않는다면, 그는 작업 노트를 써야 한다. 그 안에서 국가라는 것, 리더십이라는 것, 신자유주의라는 것 등을 말할 수 있다. 이 경우 사진가는 그 사진을 보는 사람이 사진에 대해 홀로 자유롭게 느낌을 갖도록 하지 않는 것이다. 다큐멘터리 사진 작업의 경우 대개 그렇다. 이런 경우에 사진은 단순한 이미지가 되는 것이자 생각을 담아 전달하는 도구가

될 뿐이다. 

 이 경우 사진은 사진으로만 말해야 한다는 통념은 옳지 않다. 많은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은 자신의 사진을 보는 사람이 자신의 메시지와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해버리는 것을 싫어한다. 그 좋은 예를 사진가 임종진이 인도의 어느 농촌에서 찍은 사진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아름다운 노을을 쳐다보는 어머니와 두 자녀가 서 있는 모습을 찍었다. 그리고 그 밑에 긴 캡션을 달아두었고 사진을 보는 독자들에게 상황 설명을 해주었다. 그 이유는 이 사진을 통해 독자가 자유롭게 어떤 느낌 즉 노을이 주는 아름다움 같은 것을 갖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 사진은 신자유주의 때문에 목화 농사가 실패하여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결국 낫으로 목을 베고 자살을 한 남편과아버지를 둔 가족이 허망하게 노을을 쳐다보는 분노와 슬픔으로 가득 찬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사진가는 찍고자 하는 대상에 대해 몰입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자신에게 다가오는 그 대상의 느낌이 그 사진을 보거나 읽는 이의 감성과 똑같지 않을 때가 많다. 사진가 한금선이 우즈베키스탄 고려인의 삶을 재현하고자 찍은 사진집에는 큰 가지들이 잘려나간 뽕나무 사진이 있다. 이 뽕나무는 그곳에서는 흔하디흔한 나무다. 작가는 큰 가지가 잘려 나가고 몸통만 남은 이 나무에서 그들이 이주하면서 죽은 자식과 부모를 허공에 버린 아픈 역사를 읽었다. 그런데 작가에게 이입된 감정을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가질 수 있을까? 가질 수 있다면 오로지 작가가 남긴 텍스트 혹은 작가와의 인터뷰를 통해 얻은 명료한 언어를 통해서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사진가가 작업 노트나 인터뷰를 통해 자신이 가졌던 생각을 일일이 설명하거나 밝힐 수는 없다. 사진은 설명이나 논증이 허용되지 않는 감성의 이미지 공간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텍스트를 통해 설명을 하는 만큼 독자는 자신만이 가질 수 있는 감성의 독해를 저해받게 된다. 결국 사진에 담긴 생각은 큰 부분에서는 사진가의 의도와 일치해야 하지만 세세한 감성은 독자 본인의 창작일 수 있다. 사진 비평이 어려운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다. 비평가가 누구나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사진이 나오게 된 데에 대한 배경이나 맥락에 대해서일 뿐이다. 이미지가 주는 느낌은 비평가 개인의 느낌일 뿐이다. 독자가 그 느낌을 따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사진에 담긴 생각을 읽어내기가 어려운 것은 시간이 가면서 사진의 재현 양식이 갈수록 탈(脫)맥락적이 되어가기 때문이다. 특히 포스트모던 담론이 인문학과 예술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면서 더욱 그렇다. 예술이란 ‘무엇을’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진으로 작품을 만들고자 하는 사진가들은 —그들이 다큐멘터리 사진가이든 그렇지 않든 — 널리 알려진 익숙함을 거부하는 경우가 많다. 대상을 연출한다거나, 인화하는 과정에서 개입을 해버린다거나, 사진이 가진 우연의 요소를 최대한 봉쇄해 버린다거나, 내러티브를 파괴해 버린다거나, 이미지를 전혀 맥락에 닿지 않게 만들어버린다거나 하는 등의 행위를 하는 경우다. 실험 정신의 추구이자 일상의 전복이다. 그 실험 정도가 심할수록 독자는 그 의미를 읽기가 어렵다. 사진가가 텍스트를 통해 주제나 맥락을 밝혀주지 않는 불친절의 예술을 추구할수록 더욱 그렇다. 예술을 추구할수록 사진가는 불친절하고, 독자는 이해하거나 느끼기가 어렵다.

 사진에 담긴 생각이 깊고 심각하다고 해서, 그 사진이 좋은 것은 절대 아니다. 하지만 사진에 담긴 생각이 얕고 가벼운 경우, 그 사진은 특별한 가치를 부여받기는 어렵다. 그런 사진은 단순한 기념을 하기 위한다거나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한다거나 사회적 위치를 높이는 것과 같은 문화적 의미만 가질 뿐이다. 사진으로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재현하고자 한다면 그 안에 자신의 생각이 담겨 있어야 한다. 삶은 고통이라는 붓다의 생각에 동의하든, 아름다움은 있는 그대로 두는 데서 나온다는 노자의 생각에 동의하든지, 노동하는 자가 주인이 되는 세상을 만들자는 마르크스의 생각에 동의하든지, 확실한 것은 그 어떠한 것도 없다는 데리다의 생각에 동의하든지 관계없다. 사진으로 그 생각을 담을 수도 있고, 그 생각을 읽을 수 도 있다. 그 생각이 작가와 독자 사이에서 공유되기 위해서는 제목과 작업 노트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전제다.

 사진으로 작가의 생각을 읽는 방식이란 정해진 것이 있을 수 없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작가의 큰 의도 속에서 자신만의 창작 독해를 하는 정도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경우 좋은 작가는 독자의 해석을 유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독자가 사진의 메시지를 퍼즐처럼 풀면서 자신만의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가졌으면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좋은 사진가일 것으로 생각한다. 독자는 작가의 의도에는 맞춰 가되 그만의 해석에 끌려 다녀서는 안 된다. 독자가 끌려 다니지 않아야 하는 존재로 작가만 있는 게 아니다. 비평가도 있고, 기획자도 있으며, 큐레이터도 있다. 그들이 해줄 수 있는 것은 고작 기호학적 해석이나 맥락에 따른 해석뿐이다. 그들이 가진 느낌이 교본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 사진으로 생각 읽기의 첫 걸음이다.


『사진 인문학』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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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알렙입니다^^

『사진 인문학』의 북 슬라이드 사진, 인문학을 만나다의 내용을 편집하여

유튜브 동영상으로 새로운 북 트레일러를 만들어보았습니다.

2분 30초의 간단한 영상입니다만, 재밌게 봐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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