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행
오세영 지음 / 예담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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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방송매체마다 사극을 소재로 한 드라마가 봇물처럼 터져나오고 있다. SBS에서는 "왕과 나"를 방영함으로써 잘 다루지 않은 내시의 삶과 애환을 조명해 주고 있다. 또한 이에 맞대응이라도 하듯 MBC에서는 같은 날 같은 시간때에 "이산" 즉, 정조대왕의 인간적인 면모를 역사적인 무대에 다룸으로써 더 큰 흥미를 이끌어내고 있다.

특히, 정조 대왕에 대해 다룬 드라마로써 모 케이블 방송에서 "정조 암살 미스테리 8일"을 주말마다 방영하고 있다. 여기서 방영되어지고 있는 드라마에서는 개혁 군주인 정조대왕을 기존에 다뤘던 시각이 아닌 다른 시각으로 본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다는 것에 흥미를 느낄 수가 있다. 일반적으로 역사는 어떤 사관에 따라 기록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해석을 돌출시킬 수 있다는 익히 들은바가 있어서 두 드라마를 아주 흥미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는 중에 케이블 방송에서 방영된 "정조 암살 미스테리 8일"의 원작은 오세영의 "원행"이라는 소설에 그 기초를 하고 있다는 정보를 얻게 되었다. 그 사실을 안 후 소설 "원행"을 구입하였고, 구입 즉시 이틀만에 "원행"을 다 읽었다.

오세영의 소설 "원행"은 정조 19년(1795년) 윤2월 9일에서 16일까지 8일간에 걸친 원행을 소재로 하고 있다. 원행의 의미는 일반적으로 왕의 행차를 행행이라고 하는데, 왕이나 왕비의 무덤으로 가는 행차를 능행, 왕의 후궁이나 세자의 무덤에 가는 행행을 능행이라고 한다. 흔히 을묘원행이라고 불리는 정조의 화성(수원)원행의 과정 속에서 정조 대왕을 암살하려는 세력과 그로부터 지키려는 세력간의 음모와 암투를 픽셕과 논픽션의 공간을 오고감으로써 스릴과 긴장감으로 사건을 한층 더 재미를 이끌어가고 있다.

개혁을 단행하는 정조의 원려를 따른 시파와 전통적인 근간을 지키려는 수구세력(벽파)들과 얽히고 섞힌 음모, 예기치 못하게 혹세무민하여 이상국(소운릉)을 세우려는 이상주의자(문인방)의 출연으로 이 소설 안에서 삼각 구도를 형성시켰다. 이 소설 속에서 정약용을 통해서 건축된 수원화성에 대한 설명과 과정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잘 서술되어지는 듯하다.

소설"원행"을 통해서 보면, 정조는 왜 도읍을 화성으로 천도하려고 했는가? 그 이유는 정조가 단행하려고 했던 개혁의 절정이 화성으로 천도함으로 인해 실행될 수 있기 때문에 위험을 안고서라도 서둘었던 것인가? 그러나 정조의 급진적 개혁으로 인해 개혁의 이보다는 실이 더 많지 않은가? 생각해 본다. 개혁은 급진과 보수과 조화로움 속에서 이루어질 때 가능되어질 수 있다고 생각되어진다. 이 소설 "원행"을 통해서 이 시점에 이루어지는 대통령 선거와 우연(?)적으로 맞아 떨어지는 듯하다. 지금 세간의 관심은 대통령 선거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을 것이다. 보수를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희망을 가지며 급진를 선택할 것인가? 이런 기로 속에서 소설 "원행"은 많은 고민을 남기고 있는 듯하다.  

또한 소설 중간중간에 박진감과 긴장감을 가미시켜 소설의 흥미를 맛깔스럽게 진행해 나가는데, 그 매료를 느꼈다. 오세영의 소설 "원행"을 통해서 계속해서 방영되어진 "정조 암살 미스테리 8일"을 보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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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의 꿈 루카스 이야기 믿음의 글들 204
정진호 지음 / 홍성사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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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누구나 상처를 가지고 있다. 인간관계 속에서 받은 상처, 사랑으로부터 받은 상처, 직장과 가정 등 여러 분야에서 부터 받은 상처들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상처들은 눈에 들어난 상처가 있는 방면 눈에 숨겨진 상처들을 모두다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상처를 가슴 속에만 묻혀만 둔다면 결국 상처로 인해 더 큰 상처를 초래할 따름이다.

이 책은 이 시대 속에 살아가고 있는 크리스천뿐만 아니라,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회복과 치유를 향한 희망의 노래를 담고 있다. 이 책을 접하게 된 동기는 다른 책을 읽는 중에 이 책을 인용하는 한 부분이 나의 가슴에 박혀 이 책을 구입하고 읽게 되었다. 그때 받았던 감동이 이 책을 읽어내려감으로 인해 그 농도가 더 짙게 나의 가슴을 물들었다.

이 책을 통해서 삭막한 나의 감정이 다시 회복되는 계기가 되었고, 나의 메마른 눈물샘도 다시 촉촉히 적셔지는 기회가 되었다.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회복과 치유의 노래가 내 자신에게부터 전해지는 듯하다. 이 책은 총 12개의 화두를 따라 열 두 화폭을 펼쳐놓은 치유를 위한 시화전이다. 각각의 화두마다 상처받은 영혼들에게 사랑과 치유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 같았다.

특히 이 책의 교두보가 되는 이야기는 첫 장에 나오는 루카스 이야기이다. 루카스 이야기는 바로 상처 받은 영혼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위대하고 영원한 사랑의 이야기이다. 이 루카스 이야기가 나에게 깊은 감동과 사랑을 전해주어서 그 이야기를 잠간 하고자 한다.

장애인 부부가 있었다. 서로 사랑하는 그 부부는 간절히 아이 갖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들의 바람은 오랜 기다림이 필요했다. 두 번에 걸치 유산은 그들의 마음을 몹시도 아프게 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어렵게 들어선 세 번째 아이들 위해 기도하던 중 또 다시 통증이 찾아왔다. 황급히 병원으로 찾아간 그들에게 의사는 아직 아이가 살아 있다고 안심시켜 주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깐,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던 그들에게 정밀 검사 결과를 가지고 돌아온 의사는 침착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이야기를 꺼냈다. "당신들의 뱃속 아이에게서 심각한 장애가 발견되었습니다. 지금 당장 인공유산을 시켜야 합니다."

아이의 뇌가 골 밖으로 나와 있는 치명적인 장애였다. 이런 경우는, 아이가 죽지 않고 세상에 나오더라도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할 뿐 아니라 호흡장애를 일으킬 것이기에 아마도 15분을 살기가 힘들 거라고 했다. 청천벽력과 같은 말을 들은 부부는 순간 아연실색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얼마나 기다리던 아이인가? 그리고 지난 몇 주 동안 얼마나 애틋하게 사랑하며 어루만지던 생명인데, 내 손으로 죽여야 하다니! 도무지 그럴 수가 없었다. 그들은 의사에게 아이를 뱃속에서 계속 키우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의사는 냉정하게 잘랐다. 그럴 수 없다. 당신들이 아이를 낳은 후 받아야 할 상처는 지금 아이를 유산시킬 때 받게 되는 상처보다 훨씬 더 클 것이기에 의사인 자신의 충고를 받아들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 부부는 생명을 죽일 수가 없었다. 의사는 버럭 화를 내었지만 결국 그들은 아이를 키우기로 결단했다. (본서 p.21)

집으로 돌아온 부부는 뱃속 아이의 이름을 루카스라고 지었다. 마침내 출산의 날이 다가 왔다. 긴장과 두려움 속에서, 그러나 감격 가운데 아이를 받았을 때, 부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기 아들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아이의 머리 뒤에는 뇌가 삐져 나온 주머니가 달려 있었다. 의사의 충고에 따라 부부는 루카스를 최대한 밀착하여 안아 주었다. 주어진 15분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30분이 지나고 1시간이 지나도록 루카스는 여전히 가쁜 숨을 몰아쉬며 살아 있었다. 두 시간, 세 시간이 지나자, 부부는 루카스를 집으로 데리고 왔다. 그들은 루카스에게 해 줄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해 주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자식을 위해 부모가 평생 동안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모아 놓은 것 같은 나날이었다. 그렇게 아름다운 나날들이 지나간 후 마침내 루카스는 17일 후에 죽게 되었다. 부부는 사랑하는 아들 루카스의 임종을 아프게, 그러나 담담하게 지켜 보았다.

루카스를 보내는 날 앞으로 걸어나와 관 앞에 선 부부는 잠시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루카스와 함께 했던 지난 9개월은 참으로 소중하고 아름답고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간동안 우리는 루카스와 얼마나 많은 사랑을 나누고 대화를 나누었는지 모릅니다. 지금도 우리는 루카스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조용히 말을 이어갔다. 마지막으로 루카스의 아버지가 말했다. "저는 루카스로 인해 비로소 아버지가 될 수 있었습니다. 나를 아버지로 만들어 준 내 아들 루카스에게 감사합니다. 루카스는, 사랑하는 아들의 고통과 죽음을 지켜보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해 주었습니다."(본서 p.23-24)

이렇게 루카스의 이야기를 끝을 맺고 있다. 이 이야기는 아직까지도 내 마음에 고스란히 숨을 쉬고 있는 듯한 감동과 진한 사랑을 새겨 놓았다. 사랑은 상처를 남겨 놓지만, 그 상처를 치유되게 한다.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상처는 치유되기 위해 존재한다고 보고 있다. 상처로 인해 아파하며 힘들어 하는 이들에게 이 책을 통해 진한 감동과 사랑을 통해 회복과 치유의 노래가 있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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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데기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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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님이 근간에 출간한 바리데기는 한 동안 한겨레 신문에 연재되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이 책을 읽고 난 후에 비로소 알게 된 사실이다.  그러나 이 책이 나의 호기심을 자극하게 된 동기는 책의 제목 때문이었다. 일반적으로 책의 제목을 보면, 그 책의 흐름과 내용 등을 어림짐작 할 수 있지만, 이 책은 나에게  전혀 그런 정보를 제공해 주지 못하였다. 어떻게 보면, 나에게 책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지 못한 것이 오히려 더 큰 호기심을 발동시킨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바리데기"을 읽어보면, 서사적인 부분들이 현실과 함께 어울러져 재미와 인간의 희노애락을 잘 재현해 주는 듯하다. 황석영님이 말하는 "바리데기"의 의미는 한반도에 구송되어 온 무속신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바리공주", "바리데기", "칠공주" 등의 내용을 담고 있는데, 이는 영혼을 구제하기 위해서 저승을 다녀오는 영매의 의미를 뜻하고 있다고 황석영님은 이야기 한다. 이 의미처럼 "바리데기"을 읽어보면, 주인공이 이승의 몸을 벗어나 저승에 다녀오는 이야기들이 곳곳에서 나타나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생각되어 진다.

또한 "바리데기"의 이야기가 전개되는 배경은 북한의 현실과 함께 시작되는데에 다른 책과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북한의 현실적 상황을 저자의 기술로 그때 상황을 머리속에 재현되어질 수 있을 만큼  아주 생생하게 전달되고 있다. 북한 사투리며 또한 김일성 타계 후의 북한의 정황과 현실을 적나라게 피력됨으로써 북한에 대한 문외한이라할지라도 쉽게 접할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바리의 배경이 중국과 영국에까지 이동되어질 때에도 마침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섬세하고 현실적인 긴장감을 느끼는 듯하였다.

영국에서의 생활 속에서도 문화와 인종, 종교, 전쟁, 이념, 등 현실에 대두되는 모든 현안들을 주인공 바리의 삶과 희노애락을 통해서 잘 비춰준 것 같다. 황석영님은 이 현안의 해결점 또한 바리를 통해서 투영시키고 있는데, 현실의 세계를 벗어나 이승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 해결 방안인 생명수를 찾아나서는 서사적인 기술 또한 나로 하여금 깊은 인상을 안겨다 주었다.

결국, "바리데기"에서 황석영님은 주인공 바리가 해결책인 생명수의 획득 여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단지 독자의 몫에 남겨둠으로써 "바리데기"를 끝맺고 있다. "바리데기"는  구송으로 전해 내려온 서사적인 이야기를 현실을 통해서 재현됨으로써 글 속에 함축된 재미와 현실에 대한 문제를 잘 지적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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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쁜카라얌 2007-11-30 1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완전 쵝오 잼나써용~~~^^

두나미스 2007-12-02 1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참 재미있게 읽었어요...황석영의 소설은 왠지 모르게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는 것 같아요...
 
현의 노래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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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의 "현의 노래"는 2001년에 출판된 "칼의 노래"보다 세심한 문장력과 풍부한 표현력이 한층 더 고조되 읽는 이로 하여금 생생한 역사적인 사실을 목격할 수 있도록 우리의 귓가에 들려오는 듯 하다. 또한 2007년에 출간된 "남한산성"에 비해 허구이지만, 생생한 현장감과 사실적인 표현으로 삼국사기의 역사적인 현장 속에 있는 듯 글의 흐름이 깊다.

이 소설에서 작자는 가야 왕조의 멸망에 치다른 역사적 배경과 그 속에서 주인공 우륵의 삶과 비애, 소리를 통해서 소리를 소리로서 그 가치를 승화시키고 있다. 12줄의 가야금은 가야의 12고을의 각각의 소리를 고스란히 축적된 가야 나라의 애환이 담겨져 있음을 볼 수 있다. 작자가 곳곳에서 "소리는 살아 있을 동안의 소리이다"라고 밝힘으로써 소리는 죽은 후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고, 살아있을 때에만 그 가치를 인정받음을 가르치고 있는 듯하다.

이 속에서 소리와 생명은 같은 뜻일 것이다. 죽은 자의 소리는 허무요, 허공을 치는 몸놀림이지만, 산자의 소리는 살아있음을 알리는 변주곡이요, 몸부림이기 때문이다. 소리는 하나의 울림이지만, 산 자의 귓 속에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된다.

"현의 노래"는 사색적이면서도 역사적 소설이지만, 그 내용에 속에 삶의 애환과 인생의 순환을 그려 소리는 살아있을 동안의 소리이듯이 생명 또한 살아있을 때에 생명임을 넌지시 보여주는 아름다운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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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아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
도리스 레싱 지음, 정덕애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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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가을녘 아파트안 작은 나무들의 선선함이 옷깃을 스칠무렵 영국의 여류작가이며 80여세의 고령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는  도리스 레싱과의 만남은 나에게 작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녀가  출간한 여러가지 문학들중 낮익은 느낌이지만 왠지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을껏 같은 다섯째 아이에 내 눈이 멈추어지게 되었다.

"다섯째 아이"는 아주 정상적인 두 남(데이비스)녀(해리엇)가  사랑을 나누고 이상적인 가정을 설계하며 그들의 인생을 첫출발을 한다. 핵가족의 시대에 살고 있는 오늘날에 보기 드문 경우이다. 그들은 어떻게 보면, 아주 보수적이면서도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행복한 가정을 꾸려 나간다. 그들이 꿈꾸는 행복한 보금자리는 빅토리아식의 큰 저택을 구입함으로써 서막을 열고 있다. 큰 저택을 중심으로 흩어져 있는 가족들이 해마다 모여서 핏줄로 연결된 가족애를 확인한다.

또한 그때마다 두 남녀에게는 그들의 사랑의 결실인 자녀들이 태어나는 기쁨을 온 가족들과 함께 나눔으로 숨겨진 진정한 사랑을 공유해 갔다.

그런데, 이들에게 다섯 번째로 태어난 "벤"이라는 아이를 통해서 견실하고 행복하기만 했던 가족애가 조금씩 금이가기 시작하였다. 벤은 데이비스와 해리엇 사이에 태어난 다섯 번째 아이로써 다른 네 명의 아이들에 비하면 정상적이면서도 비정상적으로 태어났다. 이 비정상적으로 태어난 다섯째 아이를 발단으로 그 이상적인 가정과 그 가정의 기초가 되었던 모든 가족애들은 완전히 붕괴되어 버린다. 그들은 정신적으로 지탱시켜 주었던 가족모임도 소원해 지고 심지어는 뿔뿔이 흩어지게 되는 원인을 제공하게 되었다.

해리엇은 벤으로 인해 가정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쉽사리 벤을 포기하지 않은 모성애를 발휘하게 되는데, 그 모성애를 발휘하면 할수록 가정은 더 무너져 내렸다. 그로 인해 해리엇은 이 모든 문제를 벤에게 돌리기보다는 자신에 돌림으로써 자신의 책음의 쇠사슬을 스스로 옭아매는 심리적인 변화에까지 다다르게 된다.

결국, 이 소설의 말미에서 해리엇은 가족들과 융화될 수 없고, 자신에 방식에 익숙한 생활로 벤을 놓아줌으로써 즉, 벤이 앞으로 삶의 터전이라고 예고되어진 도시 지하 어는 곳에 풀어놓음으로써 이 소설을 끝을 맺고 있다.

저자는 이 소설 속에서 왜 다섯째 아이인 벤을 등장시켰는지에 대한 물음에 해답을 남가지 않고, 독자의 상상에 맡겨 두었다. 그러나 다섯째 아이를 통해서 전통적인 가족상을 붕괴함으로써 데이비스와 해리엇이 가지고 있는 이상적인 가족상이 얼마나 허상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도레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 작품이다.

나는 이 책을 읽음으로써 저자는 그렇게 생각한 의도로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벤의 모습을 보면서 현실에 살고 있는 물질문명을 대변해 주고 있는 듯하다. 해리엇이 벤을 포기하지 못한 모성애를 발휘하면 할수록 행복하기만 했던 가족애가 금이가고 결국에는 무너져 버리고, 또한 말미에는 벤마저 포기해야 하는 상황까지 초래되었다.

벤에 대한 포기할 줄 모르는 헤리엇의 모성애는 물질과 현세의 이기를 놓지 못하는 사람들의 욕망을 미화시킨 표현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난다. 미래의 안락한 삶을 위하여, 평안한 노후를 위하여, 자녀들의 교육 등 이러한 기치에 무너져 내리는 가족애에 스스로 외면해 버리는 것은 아닐까?

"다섯째 아이"라는 작품을 통하여 우리 속에 내재된 이상적인 가족애의 신기루를 향하여 불나방이 불을 향하여 돌진하듯이 달려가고 있지 않는가? 자문해보며 어느틈엔가 나는 데이비스와 마주하고 있다. 어느날 문득 우리에게 다가오는 예기치 않은 불행한 일들이 다가올 때 나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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